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13화 (13/94)

13화. 그래도 같이 먹자2016.02.16.

반원 모양으로 휘어진 웅장한 NIS 건물 근처 곳곳에 까만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이곳에 대통령께서 도착해 있다는 뜻이다.

민준은 가볍게 2층 계단을 뛰어 올라가 하얀 복도를 따라 걸음을 빨리하며 걸었다.

‘벌컥’ 국장실 문을 열자 열린 문 틈 사이로 김 국장과 원자력연구원장 서충식 박사, 그리고 강현석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다.

민준이 제 자리에 허리를 곧게 펴고 서 대통령을 향해 거수 경계를 했다.

“이리 와 앉아요.”

대통령이 민준을 향해 오른 손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민준은 다시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소파에 다가가 왼쪽 대각선으로는 대통령을 그리고 정면으로는 서 박사를 마주 보고 앉았다.

“자, 본론만 다시 얘기해 봅시다. 파일에 아무리 까다로운 암호가 걸려 있다고 해도, 국정원에서는 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게 조금 복잡합니다. 일반적인 패턴이라면 저희 직원들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 그것도 아닐뿐더러,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된 패스워드로 일정 횟수 이상 접근을 시도하면 파일이 영구적으로 잠기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겁니다.”

“일정 횟수라는 게 무슨 뜻이지요.”

“파일을 열 수 있는 기회는 다섯 번이고, 이미 저희가 두 번의 기회를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대통령 각하.”

“남은 세 번의 시도 안에 파일을 열 수 있을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

“죄송합니다.”

“연구원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요, 서 박사님.”

잠시 침묵을 지키던 대통령이 김 국장에게서 시선을 돌려 연구원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재 연구원장은 당시 이인호 박사의 훌륭한 동료이자 후배이기도 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통령이 기대하는 눈초리로 서 박사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아시다시피 연구만 하는 사람들이라…….”

“…….”

“그것보다는 파일의 출처를 캐보는 쪽이 오히려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서 박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통령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럴까요.”

하지만 파일의 출처는 아직 서 박사에게도 비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재 김 국장과 대통령만 알고 있는 사실.

“돌아가신 이 박사님께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게 해놓으신 게 아닐 겁니다. 제아무리 유능한 전문가라도 제한된 시간 안에 풀 수 없는 거라면, 그것은 역으로 그 시간 안에도 풀 수 있는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그 파일에 암호 처리를 해두신 게 아니겠습니까.”

“…….”

서 박사의 말이 맞다. 장인어른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셨다.

이미 옛날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셨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경우를 충분히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날 사고 후에 일어날 일까지 미리 계산을 해두셨을 것이다.

본인이 살아 파일을 다시 손에 넣든지 그도 아니면 믿을 만한 누군가가 갖든지, 만약 둘 다 아니라면 그 파일을 적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없어지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설에게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지금 하나밖에 없는 딸 설이, 자꾸만 위험한 일에 연루되는 것이 아비로서 두렵다.

파일을 찾아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설을 생각하면 부모로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걸 설에게 직접적으로 물을 수 있는 사람 역시 이제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보안은 믿을 수 있습니까?”

대통령이 다시 고개를 돌려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현재 국정원에 이 파일이 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시끄러운 일이 생길 수가 있다.

“지금 이 파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님과 저, 그리고 여기 있는 서 박사님과 김민준 요원이 전부입니다.”

김민준 요원이라.

대통령의 시선이 힐끗 민준을 향했다.

파일을 찾아온 요원이 김 국장의 아들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김 국장에겐 어린 딸만 하나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같이 고민해 봅시다.”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김 국장과 서 박사, 그리고 민준이 자리에서 함께 일어섰다.

“서 박사님.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바쁜데 불러내 미안합니다. 가서 일 보세요.”

고개 숙인 서 박사를 향해 대통령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고, 서 박사는 다시 한 번 대통령을 향해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려 국장실을 빠져나갔다.

“……파일은 청와대로 가지고 갑니다.”

대통령이 목소리를 낮추어 곁에 선 김 국장에게 은밀하게 말을 건넸다.

고개를 숙이는 김 국장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비서실장과 함께 국장실을 나가려던 대통령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뒤를 돌아 민준을 바라보았다.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김민준 요원은 이제 다시 NIS로 복귀합니까.”

대통령은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지만, 민준이 대답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당분간은 그대로 현장에 둘 생각입니다.”

민준의 곁에 서 있던 김 국장이 민준 대신 대답을 했고, 대통령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저렇게 내버려 둘 수 없는데 하루라도 빨리 일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군요.”

이건, 설의 이야기이다.

“과년한 딸이라 아비로서 걱정이 됩니다. 이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해야 하는데.”

“…….”

대통령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대통령도 알고 있다.

3년 전 NIS에서 붙인 요원이 설에게 마음을 두면서 일이 틀어졌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일이, 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굳이 민준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그 속내를 가늠해 보며, 민준의 시선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심각하게 생각하며 시작했던 일은 아니었기에 잊고 있었다.

설이 대통령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라는 사실을.

이런 임무를 가지고 만나지 않았더라면 민준이 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놀러 가는 일은 애초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 딸이 물놀이를 좋아하던가요.”

“…….”

눈에 보이는 경호관들을 치워 버렸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경호관들까지 치워 버렸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 딸아이 잘 부탁합니다, 김민준 요원.”

“…….”

대통령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민준이 두 눈을 들어 입술을 굳게 다문 대통령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

밖으로 나오니 해가 이미 저물어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민준은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설에게서 문자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많이 늦어요?

“…….”

민준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

건물 정면 원훈석에 새겨진 글귀를 바라보며 민준이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

‘딩동’ 설의 아파트 현관 벨이 울렸다.

한참 후에 현관문이 열렸고, 설은 문을 열고 선 채로 민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민준이 알아주길 바랐다, 설이 민준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설에게 전화나 문자 한 통 없었던 민준에게.

민준에게 나는 고작 그 정도의 사람인 건지.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져도 되는 그저 그런 사람.

“……저녁은. 먹었어?”

두 사람 중 먼저 입술을 움직인 건 민준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이었다.

민준에 대해 생각하느라 설은 벌써 시간이 이만큼 흘러 버린 줄도 몰랐다.

“네.”

설이 민준의 두 눈을 바라보며 짧게 대답을 했다.

“내가 먹을 것도 아직 남아 있어?”

“……별로, 주고 싶지가 않아요. 이제.”

이제 당신을 위한 음식 같은 건 없다고 말을 하고 싶지만, 민준을 이대로 돌려보내고 싶지가 않다.

자신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변명을 해주길 바라며, 설은 민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급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전화를 할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아니, 상처받은 설의 마음이 위로가 될 수 있도록.

“……당신한테 오는 길이, 아주 힘들었어.”

정말 힘들었는지 설핏 웃는 민준의 눈빛이 쓸쓸했다.

이제 이런 식으로 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민준의 이런 행동들이 나중에 설에게 더 큰 상처가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민준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이 저절로 이곳을 향했다.

“많이 안 좋은 일이에요?”

어느새 민준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고 설의 눈에 근심이 담겼다.

“그런가 봐.”

“내가 혹시 도와줄 게 있…….”

민준이 가만히 설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설의 한쪽 어깨 위에 고개를 깊숙이 묻고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대리님?”

“…….”

강설.

그 어떤 시작점으로 다시 되돌아가야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왜 그래요?”

잠시 망설이던 설이 민준의 등 위로 가만히 두 손을 올려 마주 안았다.

어쩐지 지금은 민준을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았다.

“……24.”

??

민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람 불면 부러지겠네.”

이씨.

큭 웃으며 고개를 든 민준을 설이 무섭게(?) 노려보았다.

“주고 싶지 않아도 밥 좀 줘. 나 진짜 배고프니까.”

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설을 보며 픽 웃었다. 그리고 설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흩뜨려 놓더니 이내 주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딜 들어가요!”

“밥 안 주면 안 나갈 거야.”

“여기가 식당인 줄 알아요? 누구 맘대로 밥을 달래?”

“…….”

주방 식탁 앞에 우뚝 멈춰 선 민준이 말없이 식탁을 바라보았다.

아까와 똑같이 남아 있는 음식들을.

상할까 봐 걱정되어 설이 냉장고에 넣어둔 고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점심도 안 먹은 거야?”

민망한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리고 서 있는 설에게 민준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랬어요. 정말이에요.”

설은 진심이라는 듯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도 같이 먹자.”

민준은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참나. 식당 영업은 아까로 끝났거든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식탁 앞에 앉는 민준을 설이 팔짱을 낀 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래도 같이 먹자.”

민준이 두 눈을 들어 가만히 설의 눈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이런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과 함께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는 그런 소소한 일상의 날들이.

강설, 당신 말대로 우리가 같이 밥 먹을 팔자가 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래도 나는 오늘 당신과 저녁을 먹고, 내일 아침엔 집 앞에서 당신을 기다릴 거야.

민준이 말없이 인덕션의 불을 켰고, 차갑게 식은 채소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었다.

“……차가운 거 먹지 마요. 금방 따듯해질 거니까.”

민준 앞에 마주앉으며 설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냄비로 향하는 민준의 젓가락을 저지하며 설은 냄비 위로 손을 펴 올렸다.

“배탈 나면 어떡해.”

“…….”

시선을 내려 눈빛을 감추며 민준이 입가에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

“아버지랑 많이 친해요?”

“친하다기보다……, 고맙고, 애틋하고. 뭐 그런 거?”

함께 저녁을 먹고 나온 민준과 설이 아파트 단지 사이로 길게 이어진 산책로 길을 따라 느리게 걷고 있다.

붉은 아스팔트 길 위에 저녁을 먹고 나온 가족들이, 연인들이 느리게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는 강설은. 아버지랑 많이 친하나?”

민준이 고개를 돌려 설을 바라보았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가져가며 웃었다.

“친하다기보다……, 존경해요. 자랑스럽기도 하고.”

“엄마 닮았나?”

“응? 나 말이에요?”

“응.”

“어떻게 알았어요? 나 엄마 닮은 거?”

“어머니가 미인이시겠네.”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 설을 힐끗 바라보며 민준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취임식 이후로 거의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영부인은 우아하고 기품 있는 미모가 꼭 중견 여배우 같아 취임 전부터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었다.

오늘 가까이에서 대통령의 얼굴을 마주 보고 나니 설이 확실히 영부인 쪽을 많이 닮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맞아요. 우리 엄마 되게 예뻐요. 우리 엄마가 학교 다닐 때 인기가 아주 많았는데 말이에요, 유일하게 우리 엄마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던 유명한 법대생이 한 명 있었대요. 어느 날 엄마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엄마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그 법대생이 엄마한테 뚜벅뚜벅 걸어와서 뭐라고 그랬게요.”

“뭐라고 그랬는데?”

“미안하지만 집에 가서 공부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요.”

설은 제가 말을 하고도 우스운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푸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가 도서관에 오면 남학생들이 주변에 바글바글하니까 시끄러워서 공부에 방해된다고요. 그러니까, 엄마보고 집에 가서 공부하라고 그런 거래요.”

“그래서 집에 가셨대?”

“응.”

“그게 뭐야. 싱겁게.”

픽 민준이 웃었다.

설의 입가에 시종일관 미소가 가득 지어져 있어 민준의 입가에서도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 엄마가, 그럼 나는 지금 집에 갈 테니 당신이 나를 집에까지 좀 바래다 달라고 했대요. 남자친구가 있는 줄 알면 다음부터는 이렇게 시끄럽게 내 주변에 안 모여들 거라고요.”

“그럼 그때부터 두 분이 사귀신 거야?”

“네. 단과대학 도서실도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중앙도서관 한복판에 앉아 보란 듯이 공부를 했던 아빠와 늘 책상 위에 같은 페이지를 펴고 앉아 있던 엄마와의 만남이 시작된 날이래요. 그때가.”

대학 시절 공부만 했던 노력형 수재인 줄 알았는데, 대통령에게 이런 러브스토리가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부터 매일 도서관 데이트만 했는데도 엄마는 한 번도 아빠한테 심심하다고 투정을 부린 적이 없었대요. 그렇게 예쁜 여대생이 매일 도서관에 앉아 사계절을 보내야 했는데도 말이에요.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목표를 이룬 날 아빠가 엄마한테 달려가 프러포즈를 했대요. 내가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괜찮겠냐고. 그렇다면 나와 결혼을 해달라고.”

대통령은 유능한 인권 변호사 출신이다.

학부 시절 고시 3관왕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대통령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기꺼이 험난한 길을 선택해 걸었었다.

당시 영부인은 이미 꽤 유명한 부친을 두고 있는 풍족한 집안의 외동딸이라 어려운 생활에는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가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두 분이 결혼하신 거겠지. 그래서.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

“아니요. 엄마가 고생하면서 아빠 뒷바라지도 좀 하고 그래야 그림이 멋있는데, 외할아버지가 부자라서 그럴 일이 없었대요. 웃기죠.”

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웃더니 다시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어냈다.

설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바라보는 설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에 우리 할아버지 집이 있었어요. 마당이 되게 넓고 커다란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예쁜 집. 나는 유치원을 다녀오면 늘 우리 집이 아니라 할아버지 집으로 먼저 달려갔어요.”

설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집 생각이 나 알아보니, 언제 파셨는지 이미 할아버지 소유가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서울에 계실 때는 그 집에서 지내셨기 때문에 당연히 할아버지 집일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 집을 사고 싶다고 주변 부동산에 얘기는 해두었으니 언젠가 집주인이 연락을 해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어요. 나한테 준다고 약속해 놓고, 할아버지가 잊어버리셨나 봐요.”

어린 설은 그 집을 참 좋아했었다.

서울 한복판 조용한 동네에 전통 기와를 올려 지은 그 집은, 마당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로 만들어진 넓은 대청마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서재의 둥근 창을 통해 멀리 보이는 푸른 산도, 비 오는 아침 창문을 열면 폐부를 깊이 찌르며 들어오는 짙은 소나무 향도 참 좋았다.

따듯한 기억이 많이 있는 그리운 곳이다.

“평범한 직장인이 그런 집을 살 수 있겠어? 서울에 있는 주택이라면 꽤 비쌀 텐데.”

민준이 슬쩍 설을 쳐다보며 놀리듯 물었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지 꼭 살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분명히 그 집은 나한테 주신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그리움에, 설은 지금도 이따금 그 집 주변을 서성거린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 대통령인 아버지께 누가 될 순 없지만, 임기가 끝나고 나면 정식으로 부동산에 의뢰하여 시세대로 제값을 주고 사면 될 것이다.

엄마도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그 집을 다시 찾자는 데 동의하셨고, 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유산을 정리하면 얼추 그 집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집주인 찾아줘?”

“아니요, 지금은 안 돼요. 지금 말고 나중에.”

“찾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찾아줄 테니까.”

“말뿐이라도 고맙네요.”

귀엽게 투덜거리는 설을 힐끗 내려다보며 민준은 입술 사이로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어두운 하늘 구름 사이로, 둥근 보름달이 은은한 빛을 내는 포근한 밤이다.

**

다음 날 오후 12시경.

“강 주임. 식사하러 안 가?”

“…….”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이 고개를 홱 쳐들더니 민준을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회사에서 너무 친한 척하지 말아 달라고 아침 출근길 내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어쩜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파티션 위에 두 팔을 겹쳐 올린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여 설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민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강설, 밥 먹으러 가자!’라고 말하려다 그래도 아침에 한 말이 생각나 정중하게 호칭까지 써가며 이름을 불러주었는데, 왜 저렇게 도끼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는 건지.

“대리님. 저는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서요. 먼저 내려가서 식사하세요.”

설은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민준에게 대답을 한 후 다시 시선을 내려 노트북 화면에 눈을 가져갔다.

“그래, 그럼 끝나면 얘기해, 강 주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씨 진짜. 친한 척하지 말라는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한 거야?

설이 의자 바퀴를 뒤로 굴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벌써 끝났어? 신기하네. 일 끝내는데 10초도 안 걸렸어, 강 주임.”

이씨. 꼭 저렇게 얄밉게 말한다.

의자를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설이 민준을 곱게 흘겨보았다.

“대리님. 저도 같이 먹어도 되죠?”

??

의미심장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으며 결국 민준의 눈웃음에 지고 만 설이 설핏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예전에 분명히 민준이 홀수로는 안 논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오늘도 기어이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은지 안 주임이 생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

민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안 주임을 쳐다보았다.

“네, 없어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안 주임의 말이 사실이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같이 먹겠다는데 야박하게 넌 빠지라고 말을 할 수는 없다.

구내식당이 민준 개인의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같은 회사 사람끼리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난 강 주임이랑 둘이서만 먹고 싶은데.”

난 홀수는 싫어한다고.

“대리님!”

당황한 설이 빨개진 얼굴로 민준을 불렀다.

사람을 면전에 대놓고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대리님한테 밥을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셋이서 밥 먹자는 건데 너무하시네요. 진짜.”

보통 이쯤이면 자존심이 상해 먼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할 텐데, 인내심이 많은 건지 그도 아니면 정말 함께 식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건지 안 주임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심지어 평온한 표정으로.

“……그래 그럼. 같이 내려가지.”

잠시 안 주임을 바라보던 민준이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일까?

“강 주임. 어제 뭐 했어?”

안 주임이 씽긋 웃으며 설의 팔짱을 꼈다.

그런 안 주임이 어색한 듯 설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다시 미소 지으며 안 주임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면 강설일까.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던 민준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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