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지나간 기차2016.02.18.
지하 1층 구내식당으로 내려온 세 사람은 각자 식판 위에 음식을 담아 비어 있는 테이블로 가 앉았다. 설 옆에 안 주임이 앉았고, 민준은 두 사람을 마주 보며 앉았다.
“안 주임은 강 주임하고 입사 동기인가?”
민준이 숟가락을 들며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죠. 특채는 동기가 따로 없으니 굳이 따지자면 강 주임과 제가 입사 동기가 되겠네요.”
“그럼 둘이 많이 친하겠네?”
사실 안 주임과 강 주임이 그렇게 친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요즘 부쩍 안 주임이 강 주임에게 살갑게 구는 게 느껴졌다.
“네, 친해요. 대리님이 요즘 너무 강 주임 옆에 붙어 있어서 같이 다닐 시간이 없었지만요.”
설은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안 주임을 쳐다보며 입가에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낯선 곳에 입사했을 때 그래도 안 주임이 있어 많이 외롭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낯설지 않게 느껴졌고, 생각해 보면 주위에 무심한 설을 유난히 많이 챙겨줬던 고마운 사람이다.
으응?
설이 안 주임의 식판을 쳐다보았다 다시 안 주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임님. 토마토 안 먹지 않아요?”
안 주임은 알레르기가 있어 토마토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구내식당에서 음식을 받을 때면 늘 메뉴를 꼼꼼히 살펴보고 반찬을 식판에 담곤 했다.
무심코 샐러드 안에 들어 있는 토마토를 집어 들던 안 주임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얼른 젓가락을 나물 반찬으로 옮겨갔다.
“아, ……내가 딴생각 좀 하다가. 고마워, 강 주임.”
안 주임은 다시 침착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며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이 반찬을 입에 넣고 천천히 오물거리며 앞에 앉은 안 주임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 주임.”
민준이 안 주임을 부르자 안 주임이 시선을 들어 민준을 쳐다보았다.
“네.”
“혹시 나 좋아해?”
담담한 민준의 말에 안 주임이 잠시 시선을 내렸다 다시 민준을 바라보았고, 당황한 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요.”
“안타깝네.”
차라리 그 편이 나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민준이 느릿하게 아랫입술을 혀로 훑어내며 안 주임을 쳐다보았다.
“뭐가 안타까워요?”
“나는 혹시나 했지.”
“…….”
“아, 목 말라. 물 갖다 줄까?”
밥 먹다 말고 민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수기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손가락 사이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세 개의 스테인리스 컵을 끼고 자리로 돌아왔다.
“안 주임, 여기.”
“네, 감사합…….”
민준이 안 주임에게 물 컵을 건네려는 순간 민준의 손에서 컵 하나가 안 주임의 허벅지를 향해 툭 떨어져 내렸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안 주임의 두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안 주임이 반사적으로 물 컵을 정확하게 손으로 잡아챘다.
다행히 뜨거운 물 한 방울 겉으로 흘리지 않았다. 안 주임은 물 컵을 손에 쥐고 민준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네.”
민준은 친절하지 않은 눈빛으로 안 주임을 바라보며 웃었고, 안 주임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민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앞으로는 셋이 놀자, 안 주임.”
너, 누구야.
“네?”
안 주임의 두 눈이 의아하게 떠졌다.
민준은 안 주임을 보며 웃고 있었고, 친절한 미소 같았는데 이상하게 안 주임의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제 강 주임하고 둘이서만 노는 건 안 돼. 알았지?”
안 주임 가까이 상체를 기울이며 나지막이 말하는 민준의 음성이 급격히 낮아졌다.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다 본 민준의 눈빛이 서늘했다.
안 주임은 얼른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럼 둘이 놀든가요. 전 다 먹었으니 이만 올라갈게요.”
설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식판을 들고 일어나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안 주임과 같이 밥 먹는 게 싫다고 한 게 몇 분이나 지났다고.
자기가 언제부터 그렇게 여자들한테 친절했다고 물도 떠다 주고 말이다.
“왜 이래.”
잰걸음으로 황급히 설을 따라붙은 민준이 설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가요.”
“왜 화가 난 거야?”
“내가 왜 화가 나요? 밥도 잘 먹었는데.”
개수대에 식판을 탁 소리 나게 올려놓은 후 설이 다시 홱 뒤를 돌아 출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출입구 유리문을 지나 밖으로 나온 설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지 않고 곧장 옆으로 방향을 틀어 1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커피 마시게?”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서 있는 설의 등 바로 뒤에서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 주임, 같이 가!”
그리고 저만치 뒤, 안 주임의 목소리도.
“화내지 마. 나 무서워.”
설의 등 뒤에 바짝 선 민준이 설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설이 올라탄 까만 에스컬레이터가 지상에 다다르자 설은 또각또각 힘차게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안 주임이랑 셋이 놀자고 해서 그래? 당신이 안 주임이랑 둘이 노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리고 나한테 회사에서는 친한 척하지 말라며?”
생각해보니 억울했는지 설의 왼쪽 곁을 따라 걷는 민준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흥! 강설이 고개를 민준의 반대 방향으로 홱 돌렸다.
너무 친한 척하지 말했지, 내가 언제 다른 여직원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했나?
“강설!”
민준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멈춰 서며 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아니, 오히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설아.”
설아.
세상에서 설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야.”
백건우.
남자의 입술이 고요하게 움직였다.
**
부드럽게 바람에 날리는 갈색 곱슬머리도,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따듯하게 설을 바라보는 눈빛도 3년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3년이라는 시간은 두 사람을 비껴 흘렀는지, 두 눈을 들어 고요한 눈빛으로 건우를 바라보는 설도 건우가 알고 있는 3년 전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웃고 있네, 강설.”
설이 웃고 있었다.
3년 전 건우를 바라보며 싱그럽게 미소 짓던 그때처럼.
하지만 설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리움을 담고 있던 건우의 눈빛이 어느새 쓸쓸한 기운을 머금었다.
그녀가 웃고 있기를 바라왔지만, 건우가 없어도 활짝 웃고 있는 설의 모습이 생각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
설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앞에 다가와 선 건우를 바라보았다.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다시 만난다는 것은, 설사 지금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마치 마음속에 거대한 폭풍우가 몰려오는 것만 같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추억이, 기억이, 그때의 감정이, 한꺼번에 뒤엉켜 설의 가슴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건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설의 심장이 제멋대로 팔딱거리며 뛰기 시작했지만,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마음도 잠시, 설은 지금 곁에 민준이 서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고 복잡하고 놀란 표정을 얼른 감추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작게 숨을 들이마신 후 애써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망도 미움도 그리움도, 이젠 다 지난 일이다.
그건 백건우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이제 나는 괜찮아졌으니 더 이상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 여전히 무언가 남아 있는 것처럼,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았으면.
“누군데?”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민준이 물었다.
“……예전에 조금 알던 사람이요.”
하지만 설은 감추었는데, 민준은 표정을 감추질 않았다.
민준은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그제야 건우의 시선이 민준을 향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민준의 눈빛이 가늘어졌고, 건우의 두 눈이 의아한 듯 조금 커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건우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NIS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 눈앞의 남자는 설의 남자가 아니었다.
“고생이 많네요.”
건우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고, 건우의 말에 민준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기억이 났다, 이 남자가.
민준이 NIS에서 만났었고, 설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남자.
“직장 생활이 다 그렇죠.”
마침내 민준이 남자의 두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무엇에 대한 안심인지 남자는 민준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제가 일을 하다 와서요. 이만 들어가 봐야 해요.”
헝클어진 마음을 다잡으며 설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며 건우에게서 뒤돌아섰다.
“……설아, 다시 보자.”
“…….”
뒤돌아선 설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건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우의 목소리에 설이 잠시 멈추어 서더니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 걸어온 방향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정한 건우의 목소리가 많은 위로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건우가 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상처받은 마음과 배신감이 건우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아프게 잃고도 살아졌던 세월이,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졌다고 해서 살아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다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설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온 마음을 주었던 설 자신까지.
그래서 그동안 건우의 얼굴을 보지 않고 살아왔던 건, 건우에게 주는 형벌이면서 또한 설이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기도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바로 설의 뒤를 따라 걸었을 민준이 지금은 웬일로 그 남자와 마주 본 채 그대로 멈춰 서 있다.
“백건우라고 합니다. 직장 동료이신가 본데, 설이 잘 부탁합니다.”
건우가 민준에게 악수를 청하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강설은 그쪽이랑 별로 친해 보이지 않는데, 되게 친근하게 부르네.”
하지만 민준은 코트 주머니에 꽂아 넣은 두 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건우를 쳐다보며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웃었고,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온화하게 웃고 있던 건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건우가 내밀었던 오른손을 다시 천천히 거두었다.
“……그러게요. 설이 아직도 나한테 화가 많이 나 있나 봐요.”
이 남자는 예전의 나처럼 설에게 헛된 감정을 품고 있는 건가, 어리석게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걸 보니.”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에 민준이 올라가 있던 한쪽 입꼬리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럼 내가 잘 달래줘야겠네, 다 지난 옛날 일에 마음 쓰지 말라고.”
“너무 많이 달래주지는 마요. 오해하니까. 애인도 아닌데.”
“강설한테 너무 신경 쓰지 마. 오해하니까. 애인도 아닌데 말이야.”
“…….”
“그럼, 잘 가시고.”
민준이 건우에게서 뒤돌아섰다. 그리고 회사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짐짓 여유 있는 표정을 짓고 서 있던 민준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건우가 빨라진 호흡을 지그시 누르며 민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두 눈을 옆으로 돌려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서 있는 안 주임을 쳐다보았다.
“넌 여기서 뭐 해.”
눈빛만큼이나 날카로운 건우의 목소리가 차갑게 흘러나왔다.
“안기영. 네가 왜 여기 있어.”
건우의 차가운 말에 아까부터 얼음처럼 굳어 있던 안 주임의 눈빛이 크게 출렁거렸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흔들림인지, 건우는 그것까지 알고 싶지가 않다.
“내가 왜요?”
안 주임이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안으로 꽉 깨물었다.
“네가 왜 강설 옆에 있냐고.”
“강 주임이 왜요. 난 그냥 이 회사에 입사를…….”
“안기영.”
“…….”
“허튼짓하면. 가만두지 않아.”
건우가 안 주임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안 주임의 눈동자가 다시 한 번 크게 출렁거렸다.
“나한테는, 할 말이 겨우 그것뿐이에요?”
입술을 꽉 깨물고 묻는 안 주임의 두 눈에 어느새 축축한 물기가 스며들었다.
3년 전에 헤어진 강설은 여전히 그렇게 애틋하게 바라보면서.
강설, 강설, 강설이 뭐라고.
그러자 차갑게 빛나던 건우의 눈빛이 갈색 눈동자 안에서 다시 온화하게 풀어져 내렸다.
“또 보자, 기영아.”
그리고 설핏 웃으며 안 주임에게서 뒤돌아섰다.
“…….”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던 안 주임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
‘선배! 이번엔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 얼굴을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그걸 알려줄 것 같아?’
부드럽게 웃던 건우의 미소는 햇살 같았다.
‘재미있는 거면 나도 같이해요. 매일 사무실에 있으니 좀이 쑤신다고요.’
‘미안하지만 안 돼.’
‘왜 안 돼요?’
‘이번 일만 끝나면 고백할 거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있어, 그런 게.’
곱게 자란 도련님답게 수려한 외모에, 다정하고 부드러운 건우가 좋았다.
건우는 왕자님답게 예쁜 공주를 사랑했고, 공주에게 외면당하자 슬퍼하며 자신이 살던 성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왕자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그의 성 앞을 서성거리는 초라한 자신만이 남았다.
안 주임이 두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낸 후 뒤돌아 굳은 표정으로 회사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
“그렇다고 먼저 가냐.”
“…….”
자리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설의 머리 위에서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 지금 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대답도 안 하네.”
“…….”
그 사람을 이렇게 우연이라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시간이, 감정들이 한꺼번에 복잡하게 뒤엉켜 설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제 그리움도 아픔도 아니었지만, 한번 내려앉은 마음은 쉽게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얼굴을 더더욱 민준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혹시 지금. 슬픈 거야?”
평소와 달리 민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내가 왜요?”
그제야 설은 두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의 짙은 눈동자에 복잡한 설의 표정이 거울처럼 비춰 보였다.
표정을 감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다만 당황한 것뿐이었고, 하필이면 그게 민준의 앞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뿐이다.
설의 두 눈을 잠시 바라보던 민준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배우는 못 하겠네. 연기를 못해서.”
설을 바라보며 웃는 민준의 눈빛이 쓸쓸해 보여 가슴 한쪽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대리…….”
민준이 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건너편 해외사업부 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민준을 부르려던 설이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
슬프지 않았는데, 슬퍼졌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마음에 민준의 뒷모습까지,
설의 눈앞이 눈물로 뿌옇게 흐려졌다.
옆 자리로 돌아온 안 주임이 조용히 바퀴 의자를 안으로 굴리며 앉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설은 안 주임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설에게 무언가를 물어볼 것이라 걱정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안 주임은 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
잠시 후 회사 건물 옥상.
민준이 귀에 핸드폰을 대고 주위를 힐끗힐끗 살펴보며 박 팀장과 통화를 하고 있다.
안기영.
분명히 훈련을 받은 솜씨인데 문제는 어디에서 훈련을 받았나이다.
-안기영?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그리고 그 후 기록 좀 찾아봐주세요. 최근 통화기록까지 전부 다.”
-혹시 쌍까풀 없이 눈 크고 입 옆에 조그만 점 있는 안기영?
“…….”
아니, 아직 인상착의는 말하지 않았는데.
-3년 전에 여기 그만두고 취직한다더니, 걔 지금 거기 가 있어?? 아니 거기가 무슨 국정원 직원 집합소야?
“압니까?”
-당연히 알지, 나랑도 같이 일했던 앤데.
“…….”
안기영이 요원 출신이라…….
NIS 요원 출신이 왜 여기에 들어와 있는 거지.
-건우 그만두고 나서 걔도 바로 그만뒀는데. 하긴 넌 백건우 모르겠구나? 출신 성분이 좋아서 그런지 애가 아주 젠틀하고 멋있어. 누구랑 다르게 예의도 참 바르고, 암.
백건우.
오늘 그 남자의 이름을 또 이렇게 듣는다.
“자료는 언제 주실 겁니까. 오늘 가면 줍니까?”
-야, 내가 네 시다바리냐? 이게 툭하면 상관을 부려먹으려 들어?
“알았어요, 그럼 내일 찾으러 갈게요.”
-이게 누구 맘대로 내일이래? 야, 김민…….
민준이 핸드폰 화면의 빨간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박 팀장의 고함이 사라지자, 건물 옥상에 다시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어차피 해줄 거면서 꼭 이렇게 생색을 내요.”
뚝. 가차 없이 전화를 끊은 민준이 와이셔츠 주머니를 더듬거려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찾았는데 라이터가 손에 잡히지 않자 민준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하얀 담배를 다시 와이셔츠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백건우.
조금 전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민준이 두 눈을 차분히 내리깔았다.
**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자 설은 고개를 돌려 흘끔흘끔 해외사업부 팀 쪽을 바라보았다.
30분이면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오뚝이 인형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민준이 오늘은 웬일인지 35분이 지나도록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설이 속으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방을 챙겨 들고 얇은 코트를 걸쳐 입고 의자를 안으로 밀어 넣었는데도 민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왠지 기운이 빠져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가는 설의 발걸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9층 사무실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이르자 설은 핸드폰을 꺼내 민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퇴근 안 해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준은 오른쪽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지이잉 진동음을 내자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다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오후 6시 40분.
민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방을 손에 들고 곧장 9층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몇몇 직원들이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며 서 있었고, 그 속에는 설도 있었다.
사무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설과 눈이 마주치자, 민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기다린 거야?”
민준이 설에게 다가가 귓가에 대고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민준의 두 눈이 따듯하게 휘어져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이 민준의 자동차에 올랐다.
“일이 많았어요?”
설은 안전벨트를 채우며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항상 먼저 기다리던 민준이 눈에 보이지 않자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건우를 만난 날이었고, 당황한 표정을 민준에게 보이고 말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잠깐 졸았어.”
민준이 힐끗 설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핸들을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우리…… 동네에서 맥주 마시고 들어갈까요?”
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시는 건 좋은데, 나무가 없는 곳에서 마시자.”
“뭐라구요?”
“우리 동네엔 나무가 너무 많잖아.”
설이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짓자 민준이 픽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민준은 평소와 달라 보이지 않았고, 변함없는 그 모습에 설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안해요.”
설이 조그맣게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오늘의 상황이 유쾌하지 않았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 주는 민준이 고마웠고, 또 고마운 마음만큼 미안해졌다.
“뭐가 미안해?”
“그냥요…….”
“미안할 일도 많네.”
고작 이런 일 따위에.
민준이 담담하게 말을 뱉으며 핸들을 반 바퀴 옆으로 돌렸다.
민준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설이 조심스럽게 왼손을 뻗어 민준의 오른손을 잡았다.
하지만 손을 잡아도 민준이 아무 말이 없자 설은 쓸쓸한 표정으로 뻗었던 손을 거두어냈다.
그러자 멀어지는 설의 손을 민준이 다시 힘주어 꽉 붙잡았다.
“어디 갈까.”
“네?”
“데이트해야지. 어디 가고 싶어.”
“지금이요?”
“응 지금.”
“…….”
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데이트라니, 어딜 가고 싶다고 말을 하지?
“강설.”
민준이 왼쪽 사이드미러를 흘끔 쳐다보며 설의 이름을 불렀다. 하얀색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조용히 민준의 자동차를 멀찍이서 따라오고 있었다.
“말해요.”
“벨트 맸지?”
“그럼요.”
“혹시 레이싱 좋아해?”
“네에??”
의아한 얼굴로 설이 민준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부우우웅- 민준의 자동차가 자동차 사이를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http://novel.naver.com/webnovel/list.nhn?novelId=505101&page=8 [carbo]영애의 경호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