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가족, 그리고 동생 서연이2016.03.03.
어린 시절, 민준은 집에 있을 때면 언제나 깜깜하고 좁은 방구석에서 무릎을 세워 안은 채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새아빠에게서 술 냄새가 나면 민준은 얼른 방문을 닫고 조그만 방으로 들어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래도 방문은 어김없이 열렸고, 머릿속으로 아무리 다른 생각을 해봐도 아물지 않은 상처 위로 또다시 온몸이 떨리는 고통이 더해졌다.
까만 자동차를 타고 갔던 아빠는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았고, 항상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는 아빠를 보러 간 날에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민준의 곁을 떠났다.
민준은 깜깜한 방 안에서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던 엄마가 혹시라도 다시 돌아온다면 이제 말을 더 잘 듣는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아빠가 보고 싶다 울지 않겠다고 엄마의 품에 안겨 약속하는 상상을 하면서.
육체적인 고통에는 금방 익숙해졌다. 아무리 아파도 민준은 울지 않았고, 새아빠는 울지 않는 그를 보면 더 화가 난다며 매서운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날도, 전날과 같던 그날도 어김없이 민준의 방문이 열렸고, 민준은 습관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며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곧 민준의 어깨 위로 날아들 날카로운 매질을 생각하자 몸이 작게 떨렸다. 하지만 방문이 열렸는데도 민준의 어깨에서는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성이 들렸지만, 민준의 입에서 나는 것은 아니었다.
‘민준아.’
그때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민준의 이름을 불렀다. 낯선 아저씨의 숨죽인 울음소리 사이로 새아빠의 신음이 섞여 들렸다.
민준은 고개를 조금 들며 감았던 눈을 떴다. 아저씨의 덜덜 떨리는 손에는 빨간 피가 묻어 있었고, 새아빠는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방바닥에 누운 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저씨는 민준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은 채 아이처럼 소리 내 울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아저씨, 아니 아버지인 김 국장의 눈물.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피 묻은 손을 옷으로 닦아낸 아저씨가 공포에 질린 민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괜찮아.’
아저씨는 해외 근무를 마치고 2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민준이 이렇게 살고 있는 줄 몰랐다고 어깨를 떨며 또다시 서럽게 우셨다.
‘아저씨랑 같이 가자, 민준아.’
아저씨는 노랗고 퍼런 멍이 들어 있던 민준의 손목을 잡았고, 그날로 그는 아저씨의 아들이 되었다.
**
민준은 커피 머신기에서 커피를 내렸고, 식탁 위에 놓인 노트북의 전원을 눌렀다.
띠리리리-
핸드폰 벨 소리가 들리자, 민준은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설이 아닐 것임을 알면서도 민준의 얼굴에는 얼핏 실망의 기색이 스쳤다.
“안 주무세요?”
-대통령께서 영애를 부르셨다.
“알고 있습니다.”
-안기영이 거기 있다던데.
“공무원보다 월급이 많더라고요, 여기가.”
-실없는 놈, 쯧.
민준은 못마땅해하는 김 국장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옅게 미소를 지으며 머그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안기영 뒷조사는 왜 하는 거냐.
“영애와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어요. 그리고 영애와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게 왜.
“자연스럽지가 않아서요.”
안기영이 백건우를 많이 좋아했다고 했다. 백건우가 설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잘 알면서도 설에게 살갑게 대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조심해. 다치지 말고.
김 국장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근심스러운 아비의 정이 실렸다.
“압니다.”
민준이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말투는 퉁명스러워도 민준을 아끼고 걱정하고 계시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 내서 엄마한테 전화도 좀 하고. 네가 요즘 눈에 안 보이니까 너를 어디다 팔아먹었냐고 날 들들 볶잖아!
“주말에 잠깐 들를게요.”
-와서 저녁 먹고 가. 덕분에 나도 몸보신 좀 하게.
며칠 뒤가 친부모님의 기일이다.
올해도 민준은 부모님이 계신 곳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동생 서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집으로 갈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그날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또 늦으시겠지만.
“서연이가 올해도 똑같은 선물을 사 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던데요.”
언젠가 생일 선물로 향수를 사달라고 한 적이 있어 매년 생일이면 똑같은 향수를 꼬박꼬박 선물로 사다 줬는데, 올해는 서연이 미리 연락을 해왔다.
올해도 C사 향수를 사오면 죽여 버리겠다고. 그렇다고 B사 혹은 D사 제품을 사 올 생각일랑 하지도 말라는 말과 함께.
-계집애가 아주 말하는 본새하고는, 쯧.
김 국장 부부의 속을 한 번도 썩이지 않았던 민준과, 민준에 대한 부모님의 사랑에 한 번도 불평 어린 말을 하지 않았던 딸 서연.
민준이나 서연이나 김 국장에게는 모두 아픈 손가락이다. 그런 자신을 이해하고 아들 민준을 가슴으로 키워 준 고마운 아내까지도.
“주무세요, 아버지.”
민준이 낮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리모컨을 들어 음악을 재생시킨 후, 소파로 다가가 길게 누워 눈을 감았다.
민준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왼쪽 손목의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계 화면을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리자 빨간 점 하나가 제자리에서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설의 위치.
민준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설은 지금 너무 멀리 있다.
“…….”
민준은 천천히 손을 내려 바지 주머니에서 네모난 케이스를 꺼냈다.
딸깍-
벨벳 뚜껑을 위로 당기자 금색의 동그라미 안에 잎이 무성한 나무가 정교하게 새겨진 목걸이가 보였다.
어제, 주문하셨던 목걸이 제작이 끝났으니 찾아가시라는 전화를 받고 쥬얼리 숍에서 찾아온 거였다.
조금만 더 일찍 만들어졌더라면 설에게 건네줄 수 있었을, 울창한 나무 모양이 앙증맞게 새겨진 펜던트.
술에 취하면 나무들과 친구가 되는 강설을 생각하며 민준이 주문한 것이다.
‘그래, 당신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
“…….”
딸깍-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목걸이를 바라보던 민준은 케이스의 뚜껑을 닫았다.
**
다음 날 아침, 민준은 설의 아파트 앞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설이 아파트 출입구로 걸어 나오자 민준은 운전석 문을 열고 자동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설은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한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설은 민준을 무표정한 얼굴로 한 번 쳐다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자동차를 향해 오른쪽 손에 쥔 리모컨 키 버튼을 눌렀다.
삑.
소리와 함께 자동차 잠금장치가 풀렸다.
운전석 문을 열려던 설의 앞을 민준이 가로막고 섰다.
“비켜요. 나 출근해야 되니까.”
“불편해도 이제 혼자는 안 돼. 돌발 상황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
“생기면. 문책을 당하나요? 아니면, 아직도 나한테 얻을 게 남아 있는데 이용하지도 못한 내가 없어질까 봐 겁이 나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설의 날카로운 말투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박사님께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신 거야.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을.”
누구도 이 길을 가라며 억지로 등을 떠밀지 않았다.
민준의 친아버지가 어린 민준을 남기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인호 박사가 애틋한 외손녀에게 위험한 파일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했고 누군가는 그 뜻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김 국장을 민준이 존경하는 이유기도 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지키고 싶은 것도 없는 사람이에요.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요? 웃기지 말라고 그래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런 대한민국의 수장이 지금 당신의 아버지지. 그리고 이 일은 지금 대통령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일 중 하나이고.”
“당신들의 애국심을 나한테 강요하지 말아요! 난 당신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되고 싶은 생각 같은 거 조금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
“누가 당신을 희생시킨다고 그래, 당신을 왜!”
“솔직히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내 경호만 생각했다면 애초에 당신 정도의 요원이 내게 붙었을 리가 없었겠죠. 당신이 아직도 내 옆에 있는 건 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를 파일의 열쇠를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봐 그런 거잖아요.”
“…….”
“……그런 거잖아.”
설의 목소리가 여리게 떨렸다.
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내가 당신 옆에 있는 건 두 가지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난 당신 옆에 있을 거야.”
“당신이 왜요? 당신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난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
“내 마음은 진짜라고 했잖아.”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운 마음이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는데, 앞으로 더한 그리움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설의 눈빛이 작게 일렁였다.
“……거기에서는 거짓말하는 훈련도 한다던데요.”
당신의 눈빛이 진짜 같아서.
“당신이 능력 있는 사람은 맞는가 보네요. 이렇게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당신이 나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등을 어루만져 주는 상상을 해.
내 감은 두 눈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위로해주던 당신의 모습이 진짜 같아, 지금도 그런 당신 품에 안겨 울고 싶은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설은 민준에게 차 열쇠를 내민 뒤 반대편으로 돌아가 조수석 문을 열고 자동차에 올랐다.
잠시 설의 모습을 바라보던 민준이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켜고 핸들을 돌렸다. 설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우웅-
그때, 컵 홀더에 세워놓은 민준의 핸드폰이 무거운 진동음을 냈다.
민준이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수신을 거부하고 있던 자리에 놓았다.
잠시 후 핸드폰이 다시 한 번 더 제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민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지금 바빠…….”
-오빠!
핸드폰 밖으로 발랄한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설이 민준을 슬쩍 쳐다보더니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아니, 오…….
뚝.
민준이 핸드폰의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후 흘끔거리며 설의 눈치를 살폈다.
“여동생이야.”
“…….”
그리고 묻지 않은 말을 했다. 설은 민준의 말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딩동.
-나 오빠네 회사 1층에서 기다린다!
핸드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들리며 화면이 깜박거렸지만, 민준은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
회사 사옥 1층 로비.
1층 회전 유리문 안쪽 정면에 안내 데스크가 보이고 그 옆에 양복을 입고 서 있는 건장한 경비 팀 직원의 얼굴이 보인다.
자연스러운 까만 머리에 얼룩말 같은 가로줄 무늬가 들어간 원피스를 입고 캔버스화를 신은 아가씨는 사선으로 가방을 메고 서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인지 핸드폰을 들어 이따금씩 시간을 확인했다.
나이 스물넷, 김서연.
대학을 1년 재수하고 현재 4학년에 재학 중인 민준의 여동생이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분명히 이 회사가 맞는데.”
며칠 전의 통화로 어렵게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오빠는 강남에 있는 식음료, 외식 전문 프랜차이즈 회사를 다니고 있고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종종 커피를 사 마신다고 했다.
오빠는 종류별로 이것저것 다 마셔 봤는데 그래도 그중 제일 먹을 만한 커피 이름이 무엇이더라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서연은 마지막 정보에서 오빠가 다니는 회사가 Boni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있잖아요, 이 회사에 김민준이라는 사람 다니는 거 맞죠? 그 사람 혹시 여기 지나갔어요?”
서연은 두 눈을 깜빡이며 데스크 위에 두 팔을 겹쳐 얹었고, 인형같이 예쁘장하게 생긴 언니를 향해 친근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까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린 데스크 여직원은 그런 건 알려줄 수 없다며 서연에게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키도 크고 잘생겨서 딱 보면 알 텐데, 정말 김민준 몰라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서연이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굴렀고 무심하게 데스크 앞을 지나가던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데스크 앞에 한 여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김민준.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건우가 데스크 가까이 다가서며 여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는 데스크에 매달린 여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분께서 찾으시는 분이 있다고 하시는데 아시다시피 회사 방침상…….”
여직원이 말끝을 흐리며 서연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누구 찾아요?”
건우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김민준이요. 스물여덟 살 김민준. 이 회사 다니는데요, 아니 아마 다닐 텐데요, 오빠한테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어서요. 내가 여기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아직 못 봤나 봐요.”
“…….”
“키가 185 정도이고 되게 잘생겼고 또……, 아! 눈썹을 이렇게 잘 찌푸려요.”
“…….”
서연이 양손의 검지로 잔뜩 찌푸린 눈썹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아저씨도 몰라요?”
건우가 아무런 말이 없자 서연은 바로 실망스런 표정을 했다.
“압니다.”
“알아요?”
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바로 두 손을 맞잡으며 반색했다.
“네…… 그런데 김민준 대리하고는 무슨 사이죠?”
“아, 우리 오…….”
아차! 민준은 서연에게 밖에서는 절대 동생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물론 서연을 걱정하는 말이었지만, 서연은 그런 민준의 뜻까지는 알지 못한다.
“……친한 오빤데요, 제가 꼭 만나야 하는 일이 있거든요.”
“기다려 봐요, 혹시 사무실에 와 있거든 1층으로 내려가 보라고 할 테니. 그런데 이름을 뭐라고 전해주면 될까요?”
“서연이요, 김서연!”
서연이 건우를 향해 희망으로 가득 찬 두 눈을 기쁘게 반짝였다. 건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엘리베이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고맙습니다!”
건우의 등 뒤에서 서연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
비슷한 시각, 민준과 설이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나 잠깐 1층에 들러야 하는데, 커피 사다 줄까?”
민준이 설을 쳐다보며 물었다.
동생 서연이 1층 로비에 와 있다고 했다. 천방지축 여동생 김서연이 말이다.
“괜찮아요. 제가 사서 마실게요.”
“…….”
그리고 이어진 침묵 속에 민준과 설은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잠시 후 엘리베이터는 1층 로비를 향해 활짝 열렸다.
사방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서 있던 서연은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민준의 얼굴이 보이자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빠!!”
민준은 이게 무슨 민폐냐고 말하려 했지만, 오랜만에 보는 서연의 얼굴이 반가워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연이 로비를 가로질러 쌩하게 달려오더니 민준을 두 팔로 덥석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보고 싶었어, 오빠.”
서연이 울상을 지으며 민준을 올려다보았고, 민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틋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찾아오면 어떻게 해?”
“오빠가 어디 있는지 안 가르쳐 주니까 내가 찾아왔잖아. 요새 연락도 뜸하고. 오빠 혹시 나 말고 다른 여자 생겼어?”
“김서연.”
민준이 설핏 인상을 구기며 서연을 바라보았고, 그와 동시에 설이 민준과 서연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오빠가 이번 주 주말에 집에 들른다고 했잖아. 아버지께서 말씀 안 하셨어?”
민준의 목소리가 앞을 향해 걸어가는 설이 충분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커졌다.
“오빠, 왜 그래?”
서연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민준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재빨리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뭘.”
“밖에서는 동생이라고 하지 말라며.”
민준이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설의 뒷모습을 흘끔 쳐다보았다가 다시 서연을 바라보았다.
“오빠 바빠. 중요한 거 아니면 나중에 얘기하자.”
“나는 오늘 완전 한가한데. 오빠랑 점심도 먹을 수 있어!”
“김서연.”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서연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아.
민준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양복 재킷 안쪽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서 신용카드 한 장을 뽑아 서연에게 내밀었다.
“근처에서 놀다가 12시까지 여기로 와. 멀리 가지 말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다른 데 안 가고 저기 카페에서 얌전히 기다릴게, 오빠. 그리고 나 카드 있어!”
“네가 무슨 카드가 있어?”
“아빠가 곧 내 생일이니까 사고 싶은 거 아무거나 사라고 카드 줬어.”
서연이 민준의 눈앞에 승리의 V자를 그려 보이며 후후 웃었다.
“…….”
매번 바쁘다는 이유로 생일을 함께 축하해 주지 않는 아버지가 서운할 법도 한데, 서연은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건 놔두고 이거 써. 그래야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오빠가 알 것 아니야.”
신용카드가 결제될 때마다 금액과 위치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문자 서비스는 꽤나 쓸모 있는 수단이었다.
“내가 뭘 살 줄 알고 이렇게 순순히 카드를 맡기는 거야?”
서연이 후후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민준이 내민 카드를 받아들었다.
“오빠가 올 때까지 말썽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민준이 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고, 설은 그 모습을 카페 유리창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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