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21화 (21/94)

21화. 퍼즐 맞추기2016.03.15.

따르르르.

민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운전대 위에 두 손을 얹고 설의 아파트 출입구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던 민준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네.”

-우리 민준이, 밤새 잘 잤어?

“…….”

민준은 발신인을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시선을 돌려 다시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여보세요?

“……밤새, 미치셨습니까?”

-역시 우리 같이 애정 없는 사람들이 주고받을 인사는 아니야, 그렇지?

끄끄끄끄, 전화기 너머에서 박 팀장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뭡니까, 아침부터.”

민준은 그 웃음소리를 듣자 온몸에 잔 소름이 돋았다.

-안기영이 진짜 백건우랑 뭐가 있나? 넌 어떻게 생각하냐, 둘이 지금 그렇고 그런 사이야?

“글쎄요. 백건우는 안기영하고 별로 엮이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던데요.”

-안기영이 Pakin 회장실 말고 백 회장 개인 전화로도 여러 번 전화를 걸었어. ‘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문자도 보냈던데, 누가 보면 아침 문안 인사드리는 며느리인 줄 알겠어.

“전화 통화를 한 날짜하고 시각은요.”

-가장 가까운 건 그제 밤 9시, 이건 백 회장이 걸었고 통화 시간은 3분 30초. 그러고 보니 그 전날 밤에도 통화를 했네? 이건 안기영이 걸었고 2분 20초 정도. 가만있자, 두 사람이 잦은 전화 통화를 하기 시작한 날이…… 네가 회사 들어가고 난 며칠 뒤야. 이땐 꽤 오래 통화를 했네, 20분이 넘어.

“하지만 그땐 백건우가 한국에 없었을 때죠.”

-그랬지 아마?

저만치 앞에서 아파트 출입문이 열렸고 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민준은 자동차를 향해 걸어오는 설을 바라보았다.

“끊습니다.”

민준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난 뒤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설은 민준이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자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찬물로 얼굴을 여러 번 헹구어 냈지만 밤새 울어 부은 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눈을 민준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잘 잤어?”

민준은 미소를 띠며 설을 바라보았다.

설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다행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요.”

그녀는 민준의 시선을 피하며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자신이 민준 때문에 울었다는 걸 그가 모르길 바랐다.

어젯밤, 정교하게 새겨진 펜던트를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눈물에는 서러움이 더해졌다.

민준에게 다가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마음은 지옥 같았다.

“잠깐 차에 있어 봐.”

민준은 리모컨 키 버튼을 눌러 조수석 문을 열었고, 설이 차에 오르자 다시 잠금 버튼을 눌렀다.

설은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 내 편의점을 향하는 민준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고는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준이 다시 자동차로 돌아왔을 때, 설은 시트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거 대고 있으면 좀 나을 거야.”

갑자기 왼뺨 근처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설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민준이 내밀고 있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시원한 캔 음료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재빨리 시선을 내렸기에 부은 눈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잠깐의 시간도 민준이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기에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마셔도 좋고.”

설은 캔 음료를 담담히 받아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트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고, 눈꺼풀 위에 캔 음료를 올려놓았다.

금속의 차가운 기운이 쓰라린 눈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요?”

설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몸과 마음이 엉망으로 지쳐 있었다.

아빠의 침묵이, 설에게만 보여주는 민준의 다정함이,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설이 언제까지나 민준을, 아빠를, 모른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숨고 싶어도 어차피 숨을 곳이 없었다. 아니, 숨을 수가 없었다.

“일 끝나면 어차피 헤어질 사람인데요.”

순식간에 설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감은 두 눈이 다시 쓰라려 왔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민준이 너무 미워 자꾸만 모난 말로 그를 괴롭힌다.

내가 이렇게 나쁘게 굴어도 나를 사랑할 거냐고.

흔들리지 않는 그가 미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정말이지 복잡한 마음이었다.

“일이 정리가 되면 난 당신이랑 연애를 하고 싶은데.”

“일이 마무리되면 청와대로 들어갈 거예요. 회사도 그만둘 거고.”

“……그런데, 왜 울어.”

설은 민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싫었고, 그녀의 뾰족한 말에 상처받았을 민준의 눈빛도 볼 자신이 없었다.

“……날 좀 모른 척해주면 안 돼요?”

떨리는 설의 목소리에, 민준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

내 마음만으로는 그녀를 잡을 수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설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준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아침 먹을래?”

“생각 없어요.”

“그래도 먹자. 밥 먹고 힘내서 일하러 가야지.”

민준은 씩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자동차 시동을 켜고 시선을 반대편 창밖으로 돌렸다.

그가 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이 이렇게 매일 하나둘씩 늘어났다.

민준은 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설이 흘리는 눈물의 끝이 어디인지,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회사 앞 패스트푸드점에서 민준은 모닝세트를 주문하여 먹었고, 설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민준은 입안의 음식물을 천천히 씹었고, 가끔 주변을 돌아보았으며, 이따금씩 설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민준이 눈웃음을 지을 때마다 설의 가슴이 아프게 욱신거렸다.

아버지가 국정원 국장일 정도면 민준도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자랐을 것이다.

그런 배경을 차치하더라도 동생 서연의 해맑은 얼굴만 봐도 그 정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준이 웃을 때면 이상하게 가슴속으로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민준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 눈웃음의 여운은 이상하게 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설이 과민 반응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민준의 웃음 끝은 항상 시리고 아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에 도착한 설은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팀원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강 주임, 얼굴이 안 좋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먼저 출근한 안 주임이 설의 얼굴을 살피더니 걱정이 된다는 듯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설은 의자를 당겨 앉은 후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오늘 저녁에 새로 오신 백 팀장님 환영회를 한다고 하던데 올 수 있겠어?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저는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서 어차피 참석 못 할 것 같아요.”

설은 사실 저녁 약속보다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잠을 좀 자고 싶었지만, 아빠에게 오늘 간다고 말씀을 드려 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닥쳐야 할 일이었다.

“무슨 약속이기에 팀장님 환영회에도 참석 못 한다는 거야?”

“오늘 부모님과 저녁 식사 약속이 있어요.”

“……아,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안 주임은 서류꽂이에서 하늘색 파일을 꺼내며 쾌활하게 말했다.

아쉽다고 말은 했지만 안 주임은 조금도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오늘 저녁에 못 와?”

건우가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차분하게 깔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설에 대한 애정이 함께 묻어나왔다.

설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서 있는 건우를 쳐다보았다. 건우는 웃고 있었지만, 많이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과 눈이 마주치자 건우의 입가에 걸려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건우의 시선이 설의 부은 눈에 머물렀다.

“오늘 저녁에 선약이 있어서요.”

“……얼굴이 왜 그래?”

“홍보물 시안이 오후 다섯 시경 나온다고 하니, 업체 들렀다 그곳에서 퇴근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설은 곧장 시선을 내렸고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설은 건우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건우를 처음 봤을 땐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설은 이제 건우를 봐도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설의 마음이 지난 옛사랑의 등장에 오랫동안 혼란스러워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나 좀 봐. 강 주임.”

건우가 설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넨 후 등을 돌려 직원 휴게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아.

설은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건우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설은 건우에게 듣고 싶은 말도, 들어야 할 말도 없지만 건우는 분명 설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건우가 설을 만나기 위해 이 회사로 돌아왔다고 말을 한 이상,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일이었다.

안 주임이 바들바들 떨리는 아랫입술을 안으로 꽉 깨물며 설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직원 휴게실은 한산했다.

설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오자, 건우는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설은 곧장 커피 머신기 앞으로 다가가 일회용 커피 컵을 올려놓은 후 버튼을 눌렀다.

“커피 드실래요?”

“눈이 부어서 날 안 보는 거야, 아니면 내가 미워서 보고 싶지 않은 거야?”

“미워하지 않아요. 제가 왜 팀장님을 미워하겠어요.”

설은 진한 커피 향이 물씬 풍겨 나오는 종이컵을 건우에게 내밀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있었다 해도 팀장님과는 상관없는 일이고요.”

“그냥 청와대로 들어가는 건 어때? 밖에서 이렇게 혼자 사는 것도 걱정되는데.”

“이제 스스럼없이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거예요?”

설이 흘끔 건우를 쳐다보더니 다시 한 번 머신기의 버튼을 꾹 눌렀다.

“알고 있는 걸 모르는 척할 수는 없잖아. 그리고 난 이제 너한테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

“이제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니, 이상하게 들리네요.”

“믿어 줘. 널 또다시 울게 하진 않을 거야.”

“……이미 오래전에 끝난 얘기예요.”

설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고 몸을 돌려 건우를 마주 보고 섰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고, 마침내 이렇게 아무런 고통 없이 건우를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왔다.

언젠가는 민준도 이렇게 담담하게 마주 볼 수 있을까.

민준을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아프게 조여 왔다.

“아니,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시 시작했어, 나는.”

“…….”

설은 아무런 대답 없이 들고 있던 종이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는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건우를 앞에 두고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건우가 시선을 내려 실망스런 눈빛을 감추었다.

**

“밥 먹으러 갑시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민준은 여느 때처럼 설의 파티션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민준은 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안 주임을 흘끔 쳐다보았다가 다시 설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오전에 비해 눈의 붓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민준은 파티션 위에 팔짱 낀 팔을 얹고 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점심 먹으러 가자, 강 주임.”

“…….”

“안 주임도.”

민준의 말에 기영이 고개를 들어 민준을 쳐다보았다가 모니터로 무심한 시선을 가져갔다.

“강 주임이랑 먼저 내려가세요. 전 일이 좀 남아 있어서요.”

“그래? 그래, 그럼. 강 주임, 밥 먹으러 가자.”

“……가요.”

설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준은 그대로인데 달라진 건 설의 마음뿐이었다.

아니, 사실은 설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아서 괴로운 거였다.

“저도 같이 가도 됩니까?”

민준 옆으로 건우가 다가와 서자, 민준은 고개를 돌려 건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시죠.”

민준은 파티션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우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

세 사람이 모두 사무실 밖으로 사라지고 난 후 기영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 명 다 나간 것을 확인한 기영은 손에 핸드폰을 쥔 채 조용히 의자를 밀고 일어나서 밖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유리문을 통해 슬쩍 밖을 바라보니 벌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는지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영은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향해 곧장 걸었다. 그리고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길게 누른 후 서둘러 귀에 대고 비상구의 문을 열었다.

“저예요, 회장님.”

철컹.

그녀의 등 뒤로 무거운 철문이 닫혔다.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지금은 점심시간 아닌가요?

“오늘 강 주임이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던데요, 회장님.”

-흐음. 평일인데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니 이상하군요. 그나저나 다른 이야기는 없습니까? 왜, 전에 영애가 좀 이상하다고 얘기한 그 뒤로는 통 잠잠하군요.

강설이 흩어진 퍼즐 조각을 순식간에 맞추던 날, 안기영은 곧바로 백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백 회장은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여 강설의 뒤를 밟게 했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좀 더 깊숙이 캐내면 무언가 분명히 나올 것도 같은데, 영애 뒤를 따라다니는 경호관들이 아무래도 신경 쓰여 잠시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데 말이지요.

오랜 경험으로 볼 때 지금은 확실히 움직여야 하는 타이밍이다.

지나치게 조용한 청와대가 분명 이상한데, 그렇다고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어 이래저래 진퇴양난이었다.

이러다 꼬리라도 잡히면 잘라내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시끄러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좋은 소식 들려주세요, 기영 씨.

**

백 회장은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아들 건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가 처음 건우에게서 영애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골치가 아프다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그런 보험을 하나 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애를 며느리로 삼는다면 혹여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현 정권 안에서는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 말이다.

안기영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그의 아들이 마음에 없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잘만 하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덤으로 권력까지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대통령과 사돈이라…… 하하하하.”

백 회장이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며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

핸드폰을 들고 비상구 철문을 열고 나오던 기영은 출입구 앞에 서 있는 민준을 보고 깜짝 놀라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 멈춰 섰다.

민준은 기영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기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일 다 끝났어? 강 주임이랑 백 팀장님은 먼저 내려갔는데.”

“……네, 끝났어요. 그런데 대리님은 여기에서 뭐하고 계세요?”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기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민준을 응시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안 주임을 기다렸는데, 안 주임이 거기서 나오더라고.”

민준이 무심한 고갯짓으로 비상구 쪽을 가리키자 안 주임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화 내용을 들었을까 생각하던 기영은 곧 그 생각을 부정했다.

저렇게 두꺼운 철문인데, 바깥쪽의 소리가 안쪽까지 들릴 리 없었던 것이다.

“내려가요, 우리.”

기영이 민준의 곁을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안 주임,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니야? 나중에 토사구팽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민준이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며 느긋하게 기영을 따라 걸었다.

“직장인들이야 어차피 다 똑같은 거 아닌가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 대리님도 마찬가지인데요, 뭐.”

기영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누른 후 민준을 흘끔 쳐다보며 대꾸했다.

“안 주임은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거야?”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에요? 뭘 위해 살다니?”

“누구한테나 삶의 지향점 하나 정도는 있잖아.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걸 보니 안 주임은 남다른 목표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훗. 지향점이요?”

삶의 지향점이든 목표든, 기영이 생각하는 건 오직 한 가지였다.

힘들고 외롭고 무서울 때 언제나 따듯한 빛이 되어 줬던 사람. 예전이나 지금이나, 오직 백건우 그 사람뿐.

“그러는 대리님의 지향점은 뭔데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은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나? 글쎄…… 아마도, 성실한 개미가 되는 것?”

“개미요?”

기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보았지만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추운 겨울날 따듯한 오두막 안에서 베짱이를 기다리는 거야. 베짱이가 찾아오면 둘이 함께 손을 잡고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거지.”

심지어 민준은 정말 진지하게 개미가 되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베짱이가 다른 개미를 찾아가면요? 그럼 어떡하실 건데요?”

“글쎄, 거기까진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만약 안 주임이 그 개미라면 어쩔 것 같아?”

“저 같으면 그 베짱이가 다른 개미를 찾아가지 못하게 만들겠어요.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개미를 찾아오지 않겠어요?”

찾아가지 못하거나, 찾아가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 기영이 민준을 쳐다보며 쌩긋 웃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아주 진취적인 개미야.”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띵-

지하 1층에 도달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좌우로 열렸다.

민준과 기영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구내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왼쪽 끝에 설과 건우가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기영은 설 옆에 하얀 식판을 내려놓았고, 민준은 건우의 옆자리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아침을 잘못 먹었나, 속이 안 좋네.”

갑자기 민준이 오른손을 배에 가져다 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많이 안 좋아요?”

설이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민준에게 물었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다시 정색을 하는 게 더 우스운 꼴이 될 것 같았다.

아침 먹을 때는 괜찮은 것 같더니, 왜 이제 와서 사람 신경 쓰이게 그러는 건지.

“괜찮아.”

민준이 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설은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지만 민준은 개의치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개의치 않은 게 아니라 무척이나 좋았다.

민준에게 인상을 쓰는 설도, 근심스런 표정을 짓는 설도. 설이 민준에게 신경을 써 준다는 게 좋았다.

“식사들 하고 계세요.”

민준은 테이블 위에 식판을 그대로 둔 채 구내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재빨리 9층 버튼을 누른 후 문을 닫았다.

상단의 숫자가 바뀌는 것을 바라보며 민준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목표가 파일이든 백건우든 간에 안기영은 설에게 위험하다.

민준은 오늘 그 생각에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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