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사랑도 미움도2016.03.17.
점심시간이어서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민준은 곧장 책상으로 가 서류 파일 중 아무거나 하나를 집어 들고,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케팅팀 안 주임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민준은 안 주임의 책상 왼쪽 칸막이 안에 들어 있던 작은 가방을 꺼낸 후 가방 안쪽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는 곧 재킷 안쪽 포켓에서 작고 동그란 금속판과 주머니칼을 꺼냈다.
그리고 가방 바깥쪽에 있는 잠금장치 안쪽으로 조그마한 틈을 내어 금속판을 그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후 가방은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왔고 민준은 기영의 가방을 있던 자리에 올려놓고 뒤돌아섰다.
**
민준이 화장실에 간 지 10여 분이 지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건우와 설은 식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김 대리랑 많이 친한가 봐?”
건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설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전 민준이 설의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쓰다듬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별다른 내색 없이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설은 아까부터 가끔씩 고개를 돌려 식당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많이 친해요. 매일 밥도 같이 먹고 출퇴근도 같이하고.”
안 주임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대답했다.
강 주임이, 아니 강설이 민준을 좋아한다는 걸 기영은 알고 있었다.
매사에 무심했던 강설이 민준에게는 웃으면서 장난을 치는 모습을 여러 번 봐왔기 때문이었다.
설은 고개를 돌려 안 주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이 출퇴근을 같이하는 걸 안 주임이 알고 있다니, 의외였다.
“……동네가 가까워서 카풀하는 거예요.”
설이 모르는 사이에 안 주임이 두 사람의 모습을 봤던 걸까. 그렇게 생각한 설은 고개를 숙이며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식판 위의 음식이 거의 사라지고 있는데, 민준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설이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는 속도가 조금 더 느려졌다.
“어디 사는데? 가까우면 내가 카풀 해줄 수도 있어.”
설이 예전에 살았던 그 오피스텔일 리는 없었다.
찾으려면 못 찾을 것은 없었지만 건우는 더 이상 설이 살고 있는 곳을 그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설이 알려주지 않았던 그녀의 오피스텔에 건우가 들어가 있던 그날, 설이 상처받았던 것만큼 건우도 상처를 받았다.
사사로운 마음에 흔들렸고, 흔들렸기에 조급했다. 설에게 미안한 마음과 별도로 일에 대해 강한 회의가 들었고, 그랬기에 건우는 미련 없이 NIS를 등지고 나왔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강 주임 집은 팀장님 집에서 멀어요.”
설은 다시 한 번 안 주임을 흘끔 쳐다보았다.
사내 기록에 남아있는 건 다른 집 주소인데, 안 주임은 무슨 뜻으로 저렇게 말하는 건지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건우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설에게 묻는 건우의 질문에 대신 대답하는 것도 그렇고, 오늘의 안 주임은 여러모로 많이 이상했다.
“난 안 주임한테 묻지 않았는데.”
그리고 이렇게 안 주임에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건우도 자연스럽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건우는 유독 안 주임에게 차갑게 구는 것처럼 보였다.
“다 먹었으면 올라갈까?”
“아니요, 아직…….”
말은 아직이라고 했지만 설의 식판은 이미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설은 물컵을 들어 마른 입술을 축인 후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밥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걸 보면 몸 상태가 많이 나쁜 것 같았다.
“아직 안 갔네?”
그때, 민준이 설의 눈앞에 불쑥 나타나더니 서둘러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다행히 민준의 컨디션은 괜찮아 보였다.
“우린 먼저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건우가 담담한 목소리로 민준에게 말했다.
설에게 스스럼없이 구는 민준도, 출입구를 흘끔거리던 설도 건우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건우는 민준과 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건우가 식판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기영도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올라가?”
건우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던 설에게 물었고, 잠시 머뭇거리던 설은 마지못해 천천히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지 마, 나 금방 먹을게.”
민준이 흘끔 설을 바라보며 숟가락으로 밥을 한가득 퍼 입안에 가득 넣고 오물거렸다.
“……먼저 올라가세요. 전 조금 있다 올라갈게요.”
설이 건우를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이건 전부 다 부모님을 따라 봉사 활동을 너무 많이 다닌 탓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 외롭거나 불행한 사람, 설은 그런 사람들이 유독 눈에 잘 들어왔다. 그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눈빛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유복한 가정에서 잘 자랐을 민준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일 때마다 설은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럼 같이 올라가.”
건우는 다시 의자를 당겨 설을 마주 보고 앉았다.
기영은 얼굴을 굳히고 건우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식당을 빠져나갔다.
“반찬은 안 먹어요?”
민준이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설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이 촉박한 탓에 민준은 차게 식은 밥과 국만 서둘러 먹고 있었다.
“기다리기 지루하잖아.”
“괜찮아요. 그러니까 천천히 먹어요.”
“설아.”
“네.”
건우가 설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설이 건우를 바라보았다.
건우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이 건우를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건우를 의식해서 일부러 바라보지 않는 게 아니라 설의 관심이 건우에게 미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건우를 미워하고 외면하는 게 더 나았다.
건우는 설이 아직 민준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저렇게 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두 사람 사이의 방해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눈 이제 괜찮네, 계속 부어 있으면 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팀장님이 왜요?”
“둘이 있을 땐 예전처럼 이름 불러. 이름 불렀었잖아, 너.”
“회사잖아요. 그러니까 팀장님도 절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백건우, 이 사람에게 기대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무서운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었을 때, 건우는 설에게 따듯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하면 오히려 설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건우로 인해 설은 더 단단해질 수 있었으니까.
설은 시선을 잠시 내렸다 다시 민준의 식판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반찬은 손을 대지 않아 식판 위의 밥만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설이 인상을 찌푸렸다.
“반찬도 먹으라니까요!”
“눈이 도대체 몇 개야?”
설이 언성을 조금 높이자, 민준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젓가락을 쥐었다.
설이 걱정해주는 게 좋아서, 밥을 먹으면서도 벌린 입 사이로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두 사람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던 건우는 절로 벌어졌던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두 사람만 함께 있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올라갈 걸 그랬다.
외면당한 마음은 뾰족해졌고, 또 비겁해졌다.
“아직도 주말에 봉사 활동 나가?”
“아니요. 요즘은 못 나갔어요.”
“넌 불쌍한 사람들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잖아. 밥 못 먹는 사람들 보면 꼭 밥 먹이고 그러는 거, 여전하네.”
건우의 부드러운 음성에 민준의 젓가락질이 그대로 멈췄다.
목구멍이 갑자기 깔깔해진 민준은 음식물을 천천히 씹어 목으로 밀어 넘겼다.
얘, 나 싫어하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은 민준이 물컵을 입가로 가져가며 피식 웃었다.
이유야 어쨌든 설은 민준을 기다려줬고 민준의 식사 시간을 함께 보내줬다. 중요한 건 설이 건우와 올라가 버리지 않고 민준 앞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다.
민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얼굴이 붉어진 설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불쌍해, 강 주임?”
민준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설의 얼굴이 좀 더 붉어졌다.
“시끄러워요.”
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정리하더니 민준과 건우의 뒤로 빠르게 사라졌다.
“두 사람, 너무 스스럼없이 지내는 거 아닌가요?”
설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건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설이 같은 상처를 두 번 받길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강설이 상처받길 원하지 않는다라…… 그 말이 진심이었으면 좋겠네요.”
적어도 백건우 당신만큼은 말이지.
“그게 무슨 뜻이죠?”
“글쎄요.”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건우가 재빨리 민준의 팔을 붙들었다.
“무슨 뜻이냐고 물었어.”
건우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나도 알고 싶어, 그게 무슨 뜻인지.”
백건우 당신이 아군과 적군 중 어느 쪽인지 아직 판단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당신 아버지인 백인회 회장은 적군인 것 같아서 말이야.
“올라갑니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건우를 뒤로 한 채 민준이 발걸음을 성큼 옮겼다.
**
“디자인실 갔다가 거기서 퇴근할 거야? 내가 이따 거기로 가면 되나?”
“오늘 부모님 뵈러 갈 거예요. 아버지께서 그곳으로 차 보내주실 거고요.”
오후 4시경, 가방을 챙겨 복도로 나온 설의 뒤를 민준이 따라 걸었다.
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누른 후 민준을 쳐다보았다.
“오늘 동생 생일이잖아요. 집에 안 가요?”
어제 생일 파티를 하긴 했지만 서연의 진짜 생일은 오늘이라고 했다.
설은 형제가 없어 잘 모르지만, 오늘 같은 날은 집에 들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갈 거야. 잠깐 어디 들렀다가.”
“어디를요?”
“어디.”
“…….”
비밀이라는 듯 민준이 한쪽 눈썹을 슬쩍 위로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설은 또 이렇게, 그 미소 끝에 걸린 외로움을 본다.
이따금, 민준을 알 수가 없다.
“늦어지면 알려줘.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알려주지 않아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잖아요.”
어떤 얼굴이 진짜 민준의 모습인지.
“……응, 알아.”
“갈게요.”
“응.”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한 마음을 미소로 감추는 민준이 정말 진짜인지.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양옆으로 열렸고 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설의 모습이 민준의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지자 민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
**
“네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할아버지께서 무엇을 왜 저한테 남기셨는지 알아야 될 것 같아서요.”
설이 대통령 집무실 안에 들어와 있는 건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비서실장은 경호관들을 최대한 멀리 물렸고, 문밖의 경호관들은 설이 대통령과 함께 담소를 나누다 사택으로 건너갈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김 국장도 부르려 했는데 아직은 성급한 것 같아 관뒀다. 마침 그 친구도 들를 곳이 있다 했고.”
딸의 생일에 김 국장님도 민준도 따로 들를 곳이 있다니, 이상했다.
‘설마 같은 곳은 아니겠지.’
“잠깐 부르지 그러셨어요. 부탁드릴 것도 있는데.”
“오늘이 국정원 동기 기일이라고 하더구나. 비서실장 말로는 옛날에 임무 수행 중 사망했다는데 워낙 각별한 사이라 김 국장이 그 자식까지 거두어 키운 모양이야. 어쩐지 예전에 딸만 하나 있다 들었는데 그 위로 아들이 또 있다고 하길래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다.”
“……아들을, 거두어 키웠다고요……?”
그 사람이, 김 국장님의 친아들이 아니었어?
“아는 척할 필요는 없다. 김 국장도 왠지 그 얘길 꺼내는 걸 꺼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입양 가 있던 애를 김 국장이 도로 찾아왔다고 하더구나.”
설의 가슴속에서 심장이, 삐걱 쇳소리를 냈다.
“장기 휴가까지 내고 애를 치료할 정도로 지극정성이었다고 하던데. 대단한 사람이야, 남의 자식까지 제 자식으로 거두어 키우다니.”
“……아이가 많이, 다쳤었대요?”
설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그 아이는 분명 민준이었을 것이다.
“글쎄. 아동 상습 폭행으로 김 국장이 양아버지를 고소하고 애는 몇 개월 동안 무슨 치료를 받았다던데. 그래도 그랬던 것에 비하면 그 아들은 잘 자란 것 같더구나.”
“…….”
“그나저나 김 국장한테 부탁할 게 있다니,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이리로 오라고 하마.”
“……아니에요, 나중에요.”
설이 고개를 재빨리 가로저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모르게 눈물을 재빨리 닦아낸 후 서둘러 컴퓨터 앞에 다가가 앉았다.
설의 머릿속에 문득 그의 몸에 남아 있던 오래된 흉터 자국들이 떠올랐다.
지금도 손을 대면 움찔거릴 만큼, 아직도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 상처들이.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아니에요, 아무것도.”
초점 없이 멍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설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우스를 클릭하자 청와대 로고가 빙그르르 회전하며 까만 배경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
256비트의 암호일까.
그렇다면 경우의 수가 수십억 개에 달하기에 아무리 최신 슈퍼컴퓨터를 돌린다 해도 다섯 번 안에 암호를 풀어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설은 해내야 했다.
‘기억해 내, 강조국.’
슬픔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눈물이 설의 두 눈에 가득 차올랐다.
그녀의 어깨가 두려움으로 떨렸고, 심장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아팠다.
“김 국장 말로는 세 번의 기회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그녀는 대통령의 말에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어디라도 달려가 토악질을 해대며 소리 내서 울고 싶었지만, 설은 그렇게 하는 대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강조국…….”
설의 오른손이 떨리는 걸 바라본 대통령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무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러니까 괜찮아.’
눈물도, 슬픔도, 그리움도, 그 감정들의 끝에는 항상 민준이 있었다.
설이 지금 당장 달려가 숨고 싶은 곳도 민준 뿐이었다.
지금 설은 민준이, 너무 보고 싶었다.
**
늦은 밤.
민준은 아파트 뒤 베란다 창문으로 설의 아파트를 내려다보았다.
한 시간쯤 전에 설이 아파트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는데, 커튼이 쳐진 거실 유리창 밖으로 희미한 빛만이 새어 나올 뿐 안에서는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
민준은 잠깐 망설이다 설에게 문자를 보냈다.
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답답함이 배가되었다.
-나 지금 친구랑 놀아요.
“…….”
깜빡깜빡.
민준은 두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설이 보낸 문자에서 진한 알코올 향이 느껴졌다.
민준이 얼른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며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
“어디야.”
설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집이 아닌 것이다.
민준의 심장 박동 수가 급격히 빨라졌다. 그는 차 키와 지갑을 서둘러 챙겨 들고 현관을 향했다.
-내가 말 안 해도 알잖아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
“…….”
목소리 톤이 높은 걸 보니 설의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틱틱-
왼쪽 손목에 찬 시계 화면을 빠르게 두드리자, 빨간 점 하나가 깜빡거리며 제 위치를 알려왔다.
종로구 평창동이었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계단 손잡이를 타고 내려와 1층 현관 앞에 착지하는 데 15초, 자동차 시동을 켜고 출발하는데 30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지금.”
설 앞에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나타나기까지 채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와, 헬리콥터 타고 온 거예요? 이상하다, 근처에서 헬기장은 못 봤는데.”
설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저택들이 내려다보이는 작고 아담한 공원 벤치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설이 능청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배시시 웃었다.
설을 보자 안심이 된 민준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산하고 조용한 고급 주택가였다.
“저기 저 집이에요. 우리 할아버지 집.”
설이 손끝으로 가리킨 곳은 어둠뿐이었지만,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웅장한 저택의 윤곽이 얼핏 드러나 보였다.
“근데 사람이 안 사나 봐, 불이 계속 꺼져 있어요.”
그 집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설의 눈에 말간 눈물이 차올랐다.
“……할아버지하고도 저 집하고도,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어요.”
설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고, 민준은 설의 옆에 앉아 어둠 속에 잠긴 집을 함께 바라보았다.
“이별한 게 아니야. 당신이 지금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잖아.”
“한 번 지나가 버린 건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
민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소한 말 하나까지 전부 기억하고 산다면 그건 축복일까, 지옥일까.
때로는 잊고 싶은 기억까지 전부 다 기억해야 한다면, 그건 분명 고통일 것이다.
“내가 기억력이 좋다고 말했잖아요.”
설은 후후 웃으며 맥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많이도 샀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민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까만 비닐봉지 안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냈다.
치익-
소리와 함께 곧바로 민준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더니 금세 한 캔이 민준의 손안에서 납작하게 접혀 사라졌다.
“당신은 운전해야 하잖아요.”
“난 안 취한다고 했잖아. 그리고 걸려도 상관없어, 집으로 딱지 날아올 일 없으니까.”
“왜요?”
“그런 혜택이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
민준이 설을 바라보며 웃었다.
단속에 걸려도 그 기록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삭제된다.
조금 험한 일을 하는 공무원 몇몇에게 주어지는 작은 선물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사기를 치는 거군요?”
“아니지. 긴급 공무 수행 중이라 어쩔 수가 없었던 거지.”
민준이 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끄덕끄덕.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공무 수행 중이었다고 사기를 치는 거군요.”
“…….”
하지만 세뇌가 잘 안 되는 걸 보니, 아직 설의 체내 알코올 함유량이 낮은가 보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에요?”
급하게 뛰어왔는지 민준은 얇은 반팔 티 차림에 트레이닝 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아가씨가 행동반경이 너무 넓어. 예상 범위 안에서만 움직여주면 좋겠어.”
민준이 설을 슬쩍 쳐다보며 웃었다.
“……당신은, 지금 하는 일이 무섭지 않아요?”
‘3년 전 장인어른이 다른 연구원들도 아닌 네게 이걸 남겨야 했던 이유가 있을 거다. 네가 위험해지길 바라지는 않으셨을 텐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분명 있겠지.’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생각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국장이 자기 아들을 네게 붙인 이유가 있듯이 말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에 아들을 보낸 김 국장의 마음도 편하진 않을 거다. 그들이 영애인 널 쉽게 어찌할 순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만일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까.’
‘만일의 경우…… 라니요?’
‘예전에 장인어른을 엄호하다 사망한 요원이 있었다고 들었다. 남북한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험악했던 시절이었고, 장인어른은 탐나는 과학자였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왜, 무서워? 괜찮아. 내가 당신 다치게 안 해.”
두려움이 가득 번진 설의 두 눈을 바라보며 민준이 웃었다.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민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고,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설은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민준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무섭고 두려워졌다.
사랑이란 건, 그리고 미움이란 건, 삶과 죽음 앞에 얼마나 사치스러운 감정이었을까.
설의 눈에 차오른 눈물이 뺨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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