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마음을 감추고.2016.03.22.
“……울어?”
밤하늘을 향했던 민준의 시선이, 어느새 눈물이 번진 설의 눈가에 가닿았다.
그녀의 눈가에 남아 있는 물기가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고,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가 있던 민준의 입꼬리가 급속히 제자리를 찾았다.
“안 울어요.”
설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캔에 남아 있던 맥주를 홀짝거렸다.
그리고 벤치 아래로 두 다리를 흔들거리며 고개를 들고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톡톡 털어 마셨다.
청와대에서 보낸 오늘 저녁은 설을 지치고 힘들게 했다.
두려움과 함께 가슴속에 생겨난 서글픔은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까지 번져나갔다.
외할아버지가 그녀의 이름을 조국이라 지어주었을 때부터 이미 설의 삶은 결정이 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것도, 할아버지가 설에게 파일을 남긴 것도 모두 설의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하지 않더라도 설은 어떻게든 할아버지가 남긴 뜻을 찾아야 하고 민준은 그런 설을 지켜야 한다.
민준을 생각하자 그녀의 서글픔은 배가되었다.
“……울지 마. 당신이 울면 기분이 너무 이상해.”
민준은 손안에 든 차가운 금속 캔의 표면을 두 개의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설의 눈물은 민준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어 심장을 아프게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민준은 지금 설이 왜 울고 있는지 물을 수 없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설 앞에 다시 나타난 백건우가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을 바에야 차라리 아예 묻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안 운다고 했잖아요.”
설은 납작하게 접은 맥주 캔을 비닐봉지 안으로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더 마시다가는 눈물샘을 제어하지 못할 것 같아 세 번째 캔은 따지 않았다.
몸 안으로 수분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인지, 누군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한꺼번에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가요.”
영차, 설이 기합을 넣으며 힘을 내 벤치에서 일어섰고, 민준은 고개를 들어 잠시 설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제 날 용서해 주는 거야?”
민준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예전처럼 당신이 나를 보며 웃어주고, 우리가 두 손을 맞잡고 함께 걸을 수 있는 건지.
지금처럼 당신이 울고 있으면 내가 품에 안고 등을 어루만져 줘도 되는 건지.
“당신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아직도 나한테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제 털어버려도 괜찮아요.”
눈빛을 보니 설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설은 민준을 더 이상 미워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설은 예전처럼 민준을 좋아해 주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파일을 찾았으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이제 끝난 거 아닌가요? 그럼 당신은 이제 내 옆에 그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요.”
차분한 설의 목소리에 민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그의 가슴속에서 쿵쿵 무거운 북소리가 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솔직히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게 불편해요.”
“강설.”
점점 커지는 심장 박동 소리에 묻혀 더 이상 주변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당신 임무는 이제 끝났다는 얘기예요.”
설은 확고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은 어쩌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설의 운명이지 민준의 운명이 아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이게 위험한 일이라면 더더욱 민준이 설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된다.
설과 다르게 민준은 지켜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안 불편하게 할 테니까.”
“…….”
“……이러지 마.”
민준은 들이마셨던 숨을 찬찬히 밖으로 뱉어냈다.
불안함에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 심장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고, 거칠어진 호흡을 따라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설이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 나는 더 이상 설 곁에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아직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약속할게. 그러니까 이러지 마, 강설.”
민준의 목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머금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불규칙한 호흡만큼 불안하게 흔들리던 눈빛도 어두워졌다. 설은 민준의 두 눈을 바라보며 힘겹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러지 않고서는 민준은 절대 설의 곁을 떠나지 않을 터였다.
그렇지만 옛날 누군가는 할아버지를 지키려다 운명을 달리했고, 3년 전엔 할아버지마저 생을 마감하셨다. 이제 더 이상 그녀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경호관을 다시 붙여 달라고 할 거예요.”
“안 돼, 국장님께서 승인하지 않으실 거야.”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지금 상황에서 민준을 철수시킬 수는 없다. 아니, 민준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 부탁드리면 돼요.”
“…….”
영애가 경호관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면 거절할 수는 없다.
파일은 이미 손에 들어왔고, 영애 주변이 신경 쓰인다는 이유로는 굳이 NIS 요원이 붙어 있을 필요가 없었다.
청와대 경호실의 근접 경호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싫어하는 설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불가피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민준이 벤치에서 벌떡 일어서서 굳은 얼굴로 설을 내려다보았다.
설은 민준을 똑바로 쳐다보았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준에게 표정을 들킬까 봐 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민준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설의 단단한 눈빛 뒤로 불안함이 언뜻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무섭게 쿵쾅거리던 그의 심장이 잠잠해지고 사방은 고요해졌다.
설이 지금 민준을 밀어내는 것은 민준이 불편해서가 아니었다.
설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그 두려움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했잖아요. 당신을 옆에서 계속 보는 게 불편하다…….”
“강설.”
민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군가가 네 현실 속에 있는 강설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신기루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네 욕심이, 언젠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강설을 붙들고 있다고.
“지금 당신한테는 내가 최선이야. 그렇기 때문에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로 당신 곁을 비울 수는 없어. 이건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야.”
성 밖으로 나온 공주는 언제라도 마음을 바꾸어 성안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고,
그러면 나는 다시 그녀의 궁전을 호위하는 수많은 기사 중 하나가 된다.
“안 불편하게 할게.”
그러니 설을 좀 더 오래, 내 눈 안에 담을 수 있도록.
“이건 믿어도 돼.”
민준과 같다고 생각했던 설의 마음은 이제 달라졌을 수도 있다.
오늘 저녁 청와대를 다녀오고 난 후 자신이 영애라는 현실을 자각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다시 나타난 옛사랑에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파일을 찾고도 설의 곁에 남아 있는 민준이 진심으로 불편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제 다신 이렇게 말도 없이 혼자 나오면 안 돼.”
하지만 민준은 아직 설의 곁에 있어야 했다.
설에겐 지금 그가 필요했고, 그게 설의 곁에 남아 있을 이유가 되었다.
“……당신이, 피곤할 것 같아서 그랬어요.”
설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뜻하지 않게 오늘이 민준의 친부모님 기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는 척을 해야 할 때가 있고 안 해야 할 때가 있다면, 지금은 오늘 들었던 이야기를 모르는 척하는 게 맞다.
입 밖으로 꺼내 상대방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다면 그건 위로가 아니라 호기심일 뿐이고 그 사람을 위로해줬다는 자기만족일 뿐이다.
‘박사님께서 참 예뻐하셨는데, 안됐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아직도 꺼내는 사람들이, 설에게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일인데 뭘.”
민준이 설을 바라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설이 알고 있는, 가슴에 습기가 차오르는 미소였다.
**
“…….”
어두운 방 안이 밝은 빛으로 채워지며 또 한 번의 아침이 밝았다.
하지만 민준은 두 눈을 뜨고도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제는 친부모님의 기일이었다.
이제는 그분들에 대한 기억도 가물가물해졌다.
돌아가신 친아버지가 NIS 요원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이 일은 그저 운명처럼 민준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을 하고, 여자 친구와의 사랑과 이별에 술잔을 기울이고, 취업을 걱정하며 이런저런 스펙을 쌓기에 열심이었던 친구들과는 달랐다.
민준은 처음부터 갈 곳이 정해져 있었고 NIS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살거나 죽거나 두 가지 경우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일찍이 평범의 범주를 벗어난 인생이었기에 남들처럼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특별히 들지 않았다.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민준을 길러주신 어머니는 아직도 매일 아침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빳빳하게 다리고 넥타이를 손수 매어주시며 현관에서 애틋한 배웅을 하신다.
매일 저녁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과 찌개를 요리하고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지면 아버지의 모습이 보일 때까지 베란다 밖을 서성거리신다.
조마조마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감정의 널을 뛰며 살아오신 어머니였다.
현장에서 물러선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제는 국장이라는 묵직한 직함도 달고 있는 아버지지만 어머니에겐 여전히 오늘 밤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면 감사한 남편일 뿐이었다.
설에게 품었던 마음이 욕심이라는 건 단지 그녀가 영애라서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목걸이에 마음을 의지하며 살아왔고, 그 목걸이가 잠깐 사라졌을 때 하루 종일 눈물만 흘리던 설이다.
앞으로도 혹시 당신도 우리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아줄 수 있겠냐고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제 설의 두 눈에 비친 두려움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건 민준이 오랜 시간 보아왔던 어머니의 눈빛과 같았다.
따르르르-
한없이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마음을 붙잡듯, 때마침 고맙게도 전화벨이 울렸고 민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네.”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던 슬리퍼를 신고 침실을 나와 뒤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 낮 12시경에 안기영이 백 회장한테 전화를 걸었어. 통화 시간은 3분 정도.
“어제도요?”
기영이 백 회장에게 전화를 거는 날은 설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을 때였다.
설이 결근했던 날, 그리고 설이 청와대에 다녀왔던 날.
어제저녁, 설은 청와대에 다녀왔다.
“팀장님. 백인회 회장하고 저번 그 조선족 사람들 사이에 무슨 연결 고리가 있을까요?”
-국제 무기상 끄나풀과 백인회 회장이라…… 흐음, 너무 막연한데. Pakin 그룹이 방위산업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연결 고릴 찾는 게 그렇게 쉽진 않을 거야. 백인회 회장이 스스로 불면 몰라도. 그나저나, 수사 1팀이 요즘 이인호 박사 사망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시작했어, 알고 있었어?
“아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다는 거겠지. 재조사를 검찰이 아닌 우리 쪽에 맡긴다는 건 밖으로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다는 것일 테고. 당시 이인호 박사와 함께 근무했던 연구원들에 대해서도 재조사가 들어가나 봐. 그래서 영애도 참고인 자격으로 부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어쨌든 뭐, 이것 말고 내가 따로 또 알아봐 줄 것 있어?
이제 와서 연구원들을 왜 다시 조사하는 거지?
세세한 사실이 외부로 알려질까 봐 사건 당시 조용히 덮고 지나갔다고 들었는데.
“혹시 모르니 백인회 회장과 무슨 연관이 없는지도 좀 알아봐 주세요.”
-네네~ 김민준 경호관님~ 건우나 기영이나 너나 나나, 인생이 참 지랄 맞고 괜찮아요~ 그렇지?
한때는 동료였고 후배였던 사람이 이제는 경계 대상이자 조사 대상이 되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전 거기서 빼주세요.”
그중 가장 거지 같은 건 백건우가 설이 과거에 사랑했던 남자라는 사실이다.
-노노~ 니가 메인이야, 김민준.
박 팀장이 지금 농담을 하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오늘은 팀장님께 신이라도 내렸는지 무당이 따로 없다.
-아주 그냥 센터야 센터. 가운데란 뜻이지, 암.
“안기영 움직임도 체크 좀 해주시고요.”
-야, 뭐라도 있어야 내가 체크를 할 것 아니야! 하다못해 수신기라도!
“안기영한테 하나 붙여놨어요.”
-……역시 우리 민준이. 얼른 그쪽 일 끝내고 이리 건너와야 하는데, 공주님 경호관 놀이는 빨리 끝내고 말이야. 아주 지루해 죽겠지? 응응?? 구해주세요, 해봐. 그럼 내가 국장님께 잘 말씀드려서…….
“연락주세요, 팀장님.”
뚝.
박 팀장과의 전화를 끊고 난 후 민준은 베란다 창문을 옆으로 활짝 열었다.
이제 완연한 봄이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설렘 가득한 생기가 넘쳐흘렀다.
민준이 무심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중, 설의 아파트 거실 유리창이 옆으로 드르륵 열렸다.
봄볕이 좋아서 그랬는지 설이 오랜만에 커튼을 옆으로 젖힌 후 통유리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베란다 유리문을 열고 나온 설은 한 손을 앞으로 길게 뻗었고, 환한 아침 햇살이 설의 손바닥 위로 하얗게 내려앉았다.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설은 봄 햇살과 꽤 잘 어울렸다.
갑자기 설이 위로 고개를 들었고, 설을 바라보던 민준과 그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
민준이 인사를 하며 설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거기서 뭐 해요?”
아침이라 주변은 비교적 조용했다.
눈앞에 잘 보이는 설의 얼굴만큼 그녀의 목소리도 선명하게 잘 들렸다.
“광합성 중이야.”
“거긴 북쪽이잖아요.”
픽.
설은 어이가 없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설의 아파트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그 말인즉슨 민준은 지금 북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는 말이다.
햇볕도 없는데 광합성이라니, 농담도 참 진짜처럼 진지하게 한다.
“그래도 볼 수는 있잖아.”
민준이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쭉 뻗어 올렸다.
이곳은 비록 볕이 잘 들지 않는 그늘일지라도, 건너편 너머 설을 볼 수는 있다.
설과 같이 갔던 어둡고 조그만 공터에서 빛으로 가득 찬 건너편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진짜로 눈으로 광합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설을 바라보며 민준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날씨가 좋네.”
“봄이니까요.”
‘봄이 오면 한강에 가서 같이 자전거도 타야지.’
“……그래. 봄이네.”
“곧 더워지겠죠, 뭐.”
이렇게 좋은 봄날에, 우리는 마음을 감추고 이렇게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눈다.
“아침 먹었어?”
“이제 먹어야죠.”
“사과 먹을래?”
“네? 아니 무슨 사과를……”
민준이 갑자기 설의 눈앞에서 휙 사라졌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시 베란다 창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로, 빨간 사과를 손에 들고.
“두 손 이렇게 해봐.”
민준이 물건을 받는 자세처럼 두 팔을 앞으로 쭉 뻗어 설에게 두 손을 모으는 시범을 보였다.
“왜요?”
설은 ‘왜요’라고 물으면서도 민준이 시키는 대로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빨간 사과 하나가 긴 포물선을 그리며 설의 손안으로 정확하게 착지했다.
설은 손안에 들어온 사과를 멍하니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민준을 쳐다보았다.
“씻은 거야. 먹어도 돼.”
민준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껍질째 깨물어 먹으며 웃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같이 먹으면 좋잖아, 심심하지도 않고.”
마음을 감추고.
“난 밥 먹을 건데요?”
“아침밥을 매일 해 먹어? 부지런하네.”
“항상 해 먹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준 거니까 잘 먹을게요.”
민준처럼 감춘 설의 마음을 모른 척하고.
“요리도 잘하고, 좋겠네.”
그렇게 웃어 보인 민준이 하늘을 쳐다보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티 하나 없이 깨끗하고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도 지나가지 않았다.
“좋을 것도 없어요, 귀찮기만 하지. 나중에 먹는 사람이나 좋겠죠, 뭐.”
아삭.
설이 사과를 작게 한 입 깨물었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제, 할아버지께서 건네주신 배턴을 들고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향해 달려야 한다.
그리고 설은 이제 더 이상 이 배턴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아하. 그렇네.”
그래서 지금 아플 민준의 마음을 모른 척하고.
“…….”
“…….”
그녀의 마음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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