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24화 (24/94)

24화.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 마키아토2016.03.24.

“파일을 찾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열 수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그 파일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NIS에 있거나 아니면 청와대에 있을 겁니다. 김 국장도 입을 다물고 있고 대통령께서도 그날 이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니 이거야 원 답답해서.

“영애한테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뭘까요,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만 끌고 있을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서재의 열린 문틈 사이로 쯧쯧 혀를 차는 백인회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재 문에 막 노크를 하려던 건우는 순간 행동을 멈추고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좀 전에 들린 영애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왜 아버지가 설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문 앞에 멈춰 서 있던 건우는 아버지 백 회장의 통화가 끝나자 그제야 노크를 했다.

그리고 문을 안으로 밀며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바쁘세요?”

“아니다. 어쩐 일이냐.”

백 회장은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건우에게 가까이 다가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건우가 소파에 앉자 백 회장은 묵직한 의자 팔걸이에 손을 얹고 느긋하게 건우를 바라보았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아버지.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아버지께 원래 이 이야기를 꺼내려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건우는 조금 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지 아닌지 확인이 필요했다.

“음.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강설이라고, 같은 부서에 있는 아가씨예요.”

“……아, 그래? 안 그래도 적적하니 새 식구가 들어오면 좋겠다 싶었는데 잘됐구나.”

“어떤 아가씨인지 안 물어보세요?”

“어떤 아가씨인지가 뭐가 중요해. 네가 좋다면 난 아무 상관 없으니까 가까운 시일에 집으로 한 번 데리고 와 봐. 나이가 있으니 너도 이제 결혼해야지.”

건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버지처럼 사람, 집안 따지시는 분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이렇게 순순히 설을 데려오라고 하실 리가 없다.

아버지는 분명 설을 알고 있는데, 왜 굳이 나한테 모른 척하고 계시는 걸까.

‘영애한테 뭔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뭘까요.’

방금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와 저런 대화를 나누신 거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라. 돈이든 인맥이든, 대한민국에 이 아비의 힘이 미치지 못할 곳이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아버지.”

표정을 감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건우는 마음속에 피어난 작은 의심의 불씨를 외면한 채 백 회장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이 틀어지면 돈 대신 권력을 가지면 되는 것을. 백 회장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아주 흡족한 얼굴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

“안 주임 말이야.”

“안기영 주임 말이에요?”

“응. 안기영.”

민준과 설이 자동차로 같이 출근하는 길, 회사가 가까워질 즈음 민준은 설에게 기영의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안 주임이 왜요?”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당신한테 다른 꿍꿍이가 있어.”

“안 주임이 나한테 다른 꿍꿍이를 가질 게 뭐가 있어요? 우리가 가깝게 지낸 게 벌써 몇 년째인데요.”

설이 가깝게 지냈다는 건 분명 안기영의 가까운 관계와는 다른 의미일 터였다.

더 이상 사람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고 싶진 않지만, 안 주임이 설과 호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게 분명한 이상 설에게 알려줘야만 했다.

“안 주임은 당신 싫어해.”

이렇게 분명하게 말이다.

“뭐라고요?”

“안 주임이 그 파일과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안 주임이 늘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야. 당신을 지켜본다는 건 보고할 사람이 있다는 거고, 실제로 누군가와 통화도 꾸준히 하고 있어.”

백 회장의 이야기까지 꺼낼까 말까 민준은 잠시 고민했다.

백건우가 백 회장의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직 백건우가 어느 쪽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섣불리 설의 옛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예상했던 것처럼 설은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람이라 민준의 말이 더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놀란 표정도 잠시, 설은 금세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다.

“안 주임이 왜 나를 싫어해요?”

설이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목적이 있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다르다.

설에게 접근한 목적이 어떤 대가를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설을 싫어한다는 데에는 분명 다른 감정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 주임이 예전부터 백건우를 좋아했나 봐. 그리고 아마 지금도 그런 것 같고.”

“안 주임이 건우 씨…… 아니, 백 팀장님을 원래 알고 있었다고요?”

“응.”

그렇다면 두 사람은 회사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닌데, 왜 건우 씨와 안 주임은 서로를 모른 척했을까?

그렇다면 안 주임은 지금 누구를 위해 나를 감시하고 있는 거지?

“안 주임과 관련 있는 사람이 누군데요?”

“아직 확실한 게 아니야.”

“내 일이에요. 누구보다 내가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백인회 회장.”

백인회 회장……?

“백건우 아버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은 입술을 꾹 다물고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안 주임이 왜 백인회 회장과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건우는 안 주임과 백 회장의 사이를 알고 있는 걸까?

“강설.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말해요.”

“그 파일에 막대한 화폐 가치가 있다는 것 말고 다른 게 있을까? 혹시 아는 게 있다면 나한테 얘기해줬으면 좋겠는데.”

설에게 크게 기대를 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당시 설은 학부생이었고 아무리 외손녀라고 해도 이 박사님이 그 연구에 대해 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설의 기억력이 꽤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가볍게 물어본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서 마지막까지 연구하셨던 건 초소형 원자로 개발에 관한 거였어요.”

하지만 설에게는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는지 설은 의외로 술술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그게 왜? 그게 그렇게까지 값어치 있는 건가?”

“초소형 원자로 개발의 목적은 막대한 에너지 비용 절약이지만 사람들이 탐내는 이유는 그것 말고 아마 다른 곳에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연구하셨던 원자로는 에너지로 사용하고 남은 연료에서 농축 과정을 거쳐 one-stop으로 바로 플루토늄 추출까지 할 수 있거든요.”

“플루토늄을 추출한다고? 우리나라에서 그게 가능해?”

“아니요. 알고 있겠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핵폐기물을 재처리할 수는 없어요.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허락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만약 그게 가능해진다면…….”

정부가 계속해서 미국과 협의를 하고 있는 건 알고 있다. 잊을 만하면 이어지는 북한의 도발이 좋은 구실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걸 우방국인 미국은 여전히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가능해진다면?”

“원자로 핵폐기물을 이용해 누구보다도 빨리 핵무기를 만들 수가 있어요. 할아버지가 하셨던 연구는 무기화시키는 시간을 많이 단축시킨 거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론뿐이지, 그게 정말 가능한 건지는 나도 몰라요.”

“……갖고 싶겠네.”

“전쟁국가나 핵무기 미보유 국에서는 확실히 갖고 싶을 거예요. 할아버지께 개인이 가질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던 나라도 있었다고 들었으니까요.”

그럼 그들은 지금, 팔지 않으니 빼앗겠다는 건가.

“Pakin 그룹이 가지고 있는 계열사 중 DX라고 방위산업체가 하나 있어. 국방을 위한 무기를 만들고 해외로 수출도 하지. 백 회장이 만약 관련이 있다면 그것과 상관이 있을 거야.”

사람들은 Pakin 그룹을 대부분 건설, 호텔, 식음료 회사 등으로만 인지하고 있지만 국방에 쓰이는 각종 총기류, 포탄, 화약 중 상당량을 이곳에서 생산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백 회장이 국제 무기상과 친분이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거야?”

민준이 고개를 돌려 설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인호 박사의 연구와 설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들었다.

학부 졸업생이었던 설은 그저 외할아버지인 이인호 박사의 연구소에 자주 놀러 갔을 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오면가면 주워들었어요. 내가 기억력이 좋잖아요.”

설은 자연스럽게 민준의 눈을 피하며 무릎 위에 올려놓은 가방에 시선을 가져갔다.

“그럼 그 파일만 찾으면 누구나 만들 수가 있는 거야?”

“아마 그건 아닐 거예요.”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를 설계도를 그렇게 쉽게, 손에 넣게 하셨을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당신한테 그걸 남겨 놓으셨을까, 같이 연구한 연구원들도 있는데 말이야.”

정말 이상한 일이다. 단순히 설이 소중한 손녀이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정도 세월을 같이 연구했다면 가족보다 더 끈끈한 정과 믿음이 있었을 텐데,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설이었을까.

“……나밖에 생각이 나지 않으셨나 봐요.”

할아버지는 설과 할아버지만 알고 있는 설의 비밀 때문에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신 그냥 청와대로 들어가는 게 어때, 회사는 핑계 대고 이참에 좀 쉬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청와대로 들어가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또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 지낼 수도 없고요. 아무리 그래도 안 주임이 회사에서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안기영도 요원 출신이야.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어.”

“…….”

“수신기 잘 가지고 다니는 거 잊지 마.”

설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잠깐 바라보았다. 소매에 가려 보이진 않지만 GPS 목걸이는 설의 팔목에 두어 번 감겨 안쪽에 숨겨져 있었다.

민준은 두고 간 나무 목걸이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건 대답할 말이 없는 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꺼낼 수 없는 이야기라면 그대로 묻어두는 편이 더 나았다.

**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설과 민준이 인사를 하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두 사람의 인사가 들리지 않는지 직원들은 한 사람을 빙 둘러싸고 서서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지금 뭐합니까?”

민준이 호기심에 사람들 어깨너머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고개를 내민 민준과 의자에 앉아 있던 여직원의 두 눈이 허공에서 딱 마주쳤다.

“앗, 김 대리님 어서 오세요! 우리 지금 사다리타기 할 건데 대리님도 하실 거죠?”

“무슨 사다리타기?”

그 여직원은 비장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하얀 종이를 올려놓고 펜을 들었다.

“커피랑 샌드위치 내기예요. 5만 원이 제일 비싸고요, 빵 원도 있어요.”

“자, 이제 그만! 김 대리님까지 포함해서 이제 사다리 그립시다!”

“아니 난……”

됐다고 거절을 하려 했는데, 거절을 거절당했다.

민준의 강제 참여(?)까지 이루어지자 여직원은 종이 위에 복잡한 사다리를 쓱싹쓱싹 그리기 시작했다.

사다리 아랫부분에 각각의 금액을 적어놓고 종이를 덮어 가린 후 여직원은 주위를 빙 둘러보며 웃었다.

“이제 다들 번호 고르세요!”

“그럼 나는 1…….”

다들 몇 번을 고를까 신중하게 고심하는 사이 민준이 대뜸 선수를 쳤다.

남자는 1번, 아니 사실은 귀찮아서 그냥 1번을 고른 민준이었다.

그때 설이 갑자기 민준의 와이셔츠 소매를 잡아당겼고, 민준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3번.’

응?

‘3번 해요.’

설은 누가 들을세라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조그맣게 입술만 움직였다. 설의 진지한 표정이 귀여워 민준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난 3번 합니다!”

민준이 여직원을 향해 씩씩하게 외쳤고, 그제야 설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김 대리님은 3번…… 우와! 빵 원이야!! 박 대리님은…… 1번! 5만 원 되시겠습니다!!”

설의 등 뒤에서 즐거운 웃음소리와 탄식이 왁자지껄하게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이 다른 번호를 골랐으면 그냥 두려고 했는데, 1번을 고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만 원도 아니고 5만 원인데.

자리로 돌아온 설은 가방을 선반 위에 올려놓고, 얇은 재킷을 벗어 의자 뒤에 걸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의미 없이 다니기 시작한 회사였지만, 어느새 동료 직원들과 정이 들었고, 이들과 함께 보내는 회사 생활이 설에게 많은 위안이 되었다.

자리에 앉아 책상 위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설 앞에 민준이 불쑥 나타났다.

“나 빵 원이야.”

“알아요.”

“안 걸린 사람이 가서 샌드위치랑 커피 사오래. 이런 건 원래 짬밥 순서대로 갔다 와야 하는 거 아냐? 아까 그냥 1번을 고르는 건데 귀찮게 진짜.”

불만이 가득한 민준의 오른손엔 5만 원 권과 만 원짜리 지폐들이 여러 장 들려 있었다.

“그건 원래 안 걸린 사람이 갔다 오는 거예요.”

설이 민준을 흘끔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같이 가자.”

“난 사다리 게임도 안 했는데요?”

“강 주임이 3번 고르랬잖아, 그럼 책임도 같이 져야지.”

“그거야 1번이……!”

“1번이 뭐.”

“…….”

이씨. 도와준 은혜도 모르고.

“결자해지.”

민준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승자박이겠죠.”

설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 혼자 다 들고 올 수는 없잖아.”

민준이 설을 힐끗 쳐다보며 웃었다.

“뭘 다 들고 올 수 없습니까?”

때마침 출근을 하던 건우가 두 사람 앞에 걸음을 멈춰 섰다.

건우가 민준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설을 바라보았다.

“직원들 심부름이요. 사다리타기 했거든요.”

설의 친절한 모습이 의외였는지 건우가 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내가 도와줄까?”

“그러실래요?”

설은 순순히 건우에게 대답했고, 건우는 오던 방향을 틀어 설과 함께 다시 바깥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세 사람은 카페 문을 열고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건우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설은 계속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민준은 그런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제 뭐 했어? 늦게 잤나 봐. 피곤해 보이네.”

“팀장님은 어제 뭐 했는데요?”

“나? 난 그냥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아버지랑 얘기 좀 하다 잤는데?”

“팀장님은 아버지랑 사이가 좋은가 봐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그냥 그래. 내가 그동안 아버지 말씀 안 듣고 이리저리 밖으로 돌았거든. 이제는 효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세 사람의 주문 차례가 되자 건우가 카운터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설에게 물었다.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그걸 아직도 기억해요?”

“그럼.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두 잔 주십시오.”

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건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건우는 여전히 설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고, 그런 건우의 마음을 이젠 무작정 배척하고 밀어낼 필요가 없었다.

“잘 마실게요.”

설은 건우와 눈이 마주치자 고맙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메리카노 7잔, 클럽 샌드위치 7개 포장해 주십시오.”

건우가 진동벨을 건네받고 옆으로 물러서자 민준이 카운터 앞 직원에게 지폐를 내밀며 주문했다.

사다리는 6개였지만 설의 몫까지 7명에 맞는 돈을 가지고 내려왔기 때문에 민준은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 그냥 7인분의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강설이 좋아하는 커피.

“6명인데 왜 7개씩 사요?”

설이 두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민준은 직원에게서 진동벨을 건네받으며 설을 힐끗 쳐다보았다.

“돈을 맞춰 가지고 내려왔어. 다시 계산하기 귀찮아서.”

드르르르-

진동벨이 부르르 몸을 떨었고, 건우가 작은 테이크아웃 컵에 담긴 커피를 받아 와 설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설이 커피 컵을 받아들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우유 거품 아래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코끝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달곰쌉쌀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설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면 가끔 우유 거품 대신 생크림이 올라간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마시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따듯한 봄날엔 부드러운 우유 거품이 들어간 에스프레소가 참 좋았다.

“맛있어?”

무표정한 얼굴로 진동벨을 빙그르르 돌리며 민준이 설에게 물었다.

“네, 맛있어요.”

“양이 너무 적은 거 아니야? 한 번에 다 삼키겠는데.”

진동벨이 공중에 붕 떠올랐다 민준의 손안으로 다시 가볍게 착지했다.

“난 이만큼이 딱 좋은데요?”

후후, 설이 웃으며 다시 음미하듯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

드르르르-

민준의 진동벨이 울렸다.

두 군데로 나뉘어 담긴 캐리어 두 개와 샌드위치가 들어 있는 하얀 비닐봉지가 나왔다.

“내가 들게.”

설이 하얀 비닐봉지의 손잡이를 잡으려 하자 건우가 먼저 샌드위치가 담긴 봉투를 오른손에 들었다.

건우가 봉지를 벌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침 안 먹고 오는 직원들이 많네. 그런데 아침 안 먹었어? 샌드위치 별로 안 좋아하잖아.”

건우가 의아한 눈으로 설을 쳐다보자 설이 고개를 옆으로 가로저었다.

“아침은 먹었고 샌드위치는 내가 먹을 게 아니에요. 사다리 탄 직원들은 따로 있거든요.”

“그럼 사다리도 안 탄 사람이 지금 심부름을 하는 거야?”

“김 대리님 혼자서는 다 못 들 것 같아서요.”

“하여튼, 박애주의자.”

건우는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았고, 민준은 무심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세 사람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고, 민준을 기다리고 있던 직원들은 쪼르르 달려와 따듯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그들은 아침부터 큰 기쁨을 주신 1번 박 대리에게 고개를 까딱 숙인 후 발걸음도 가볍게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으응? 김 대리님, 샌드위치랑 커피가 하나씩 남는데요?”

마지막으로 남은 여직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민준을 쳐다보았다.

“내가 두 개씩 먹을 거야.”

“진짜요?”

여직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지자 민준은 샌드위치 두 개와 커피 두 잔을 회의용 둥근 테이블에 올려놓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리고 반이 잘린 샌드위치의 종이 포장을 둘둘 벗겨내고 큼지막하게 한입 물어 입안 가득 넣고 오물거렸다.

“왜.”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아가씨가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민준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 커피를 입가로 가져가며 물었다.

“두 개나 먹게요?”

“세 개도 먹을 수 있어.”

민준이 샌드위치 조각 하나를 더 집어 들어 입안에 가득 물었다.

“한번 먹어보라는 소리도 안 해요? 내가 3번 고르라는 말도 해 줬는데.”

“안 좋아한다며.”

“…….”

물론 좋아하진 않는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것만 먹고 살아도 돼.”

강설이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마키아토처럼.

민준이 쓰디쓴 커피를 입안 가득 머금었다.

“……좋아하는 거예요. 식성이 바뀌었거든요.”

설은 뽀로통한 표정으로 의자를 당겨 민준을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민준 앞에 놓인 클럽 샌드위치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앙, 작게 한입 깨물어 먹던 설과 민준의 두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요!”

설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입에 샌드위치를 가져가는 설의 표정이 환했다.

민준이 부드럽고 달콤한 커피를 입안 가득 머금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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