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비밀을 벗기다2016.03.29.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아버지께서 설에게 하셨던 많은 말씀 중 파일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설의 특별한 능력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어떤 언질이라도 해주셨을 것 같은데, 설의 머릿속에는 힌트가 될 만한 작은 단서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
멍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던 설 옆에서 안 주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우스에 올린 오른손이 순간 움찔거렸지만, 설은 침착하게 고개를 돌려 안 주임을 바라보았다.
“……벌써, 여름이 오나 싶어서요.”
봄인가 싶었는데 오후에 부는 바람이 지금 설을 빤히 쳐다보는 기영의 눈에 담긴 뜨거운 감정처럼, 제법 더운 열기를 담고 있었다.
단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설이 보아왔던 기영의 눈빛은 자신감이 아니라 적대감에 가까웠다.
“날도 좋은데 김 대리님이랑 주말에 데이트 같은 건 안 해? 두 사람 사귀는 거 맞지?”
“아니에요!”
“아니라고?”
“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설은 기영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설의 확고한 말투에 기영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기영의 두 눈에 언뜻 분노 비슷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강 주임 그렇게 안 봤는데,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타입인가 봐? 김 대리님이랑 그렇게 붙어 다니는데 정말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잘 지내는 건 맞지만, 주임님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
“그럼, 아닌 사람한테는 확실하게 선을 그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쓸데없이 오해하잖아.”
기영은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기영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 사내 연애는 안 해요. 아무나 만나고 싶지도 않고요.”
설에 대한 적대감이 건우 때문이라면 그 마음을 일부러 자극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민준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설은 민준도 건우도 아니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했다.
설이 영애인 걸 알고 있을 테니 그녀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기영은 알아들었을 것이다.
내가 영애인데, 이런 회사원을 만날 리가 있겠냐는 말뜻을.
“사실 나 강 주임한테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갑자기 기영이 설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뭔데요?”
“나 사실 백 팀장님하고 아주 가까운 사이야. 백 팀장님이랑 꽤 진지하게 사귀었거든.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하지는 말아줘.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서 말이야.”
“……그럴게요.”
끄덕.
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와 기영이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이 좀 의외이긴 했지만, 만약 그랬다면 건우가 지금 설에게 하는 행동이 기영의 눈에는 많이 거슬렸을 것이다.
“그런데 김 대리님이랑 사귀는 것도 아니면서 둘이 너무 붙어 다닌다. 희망고문하는 거 별로 좋은 거 아니야, 왜 어장 관리하는 여자 재수 없다고들 하잖아. 강 주임 뒤에서 여직원들이 많이 수군거리더라고, 김 대리님이랑 붙어 다니면서 백 팀장님한테도 웃음 흘린다고. 백 팀장님이 친절하게 대해주니까 팔자 고치고 싶은 거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야.”
“팔자를 어떻게 고치는데요?”
묵묵히 기영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설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응?”
“타고난 팔자를 바꿀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그러면 나도,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될 텐데.
예쁘게 옷을 입고 데이트를 하고, 전화기를 들고 침대에 누워 소곤소곤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주말이면 풍경 좋은 곳으로 함께 드라이브를 가고, 나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처럼…….
“그게 무슨 뜻이야?”
설의 말이 비웃는 것처럼 들렸는지 되묻는 기영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날이 섰다.
“……뜻 같은 거 없어요, 주임님.”
설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경계하고 있는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았다. 설은 아무 의미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만약 민준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나도 저렇게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로 온 마음을 다 드러내게 될까.
질투가 사람을 어디까지 초라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 밑바닥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강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설은 아까부터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민준은 핸들을 왼쪽으로 천천히 돌리며 설의 이름을 불렀다.
“나 불렀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사람이 불러도 모르고.”
“그냥, 이런저런 생각 좀 하고 있었어요.”
“아까 보니까 백건우랑 많이 친해졌던데.”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기분도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민준의 말투가 담담했기에 설은 민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친해졌다기보다…… 편하게 지내고 싶어졌을 뿐이에요.”
“편하게 지내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아직 모르잖아, 별로 좋은 생각 같지가 않아.”
“그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진작 나를 찾아왔을 거예요. 안 주임이 날 그렇게 미워하는 걸 보면 적어도 지금 그 사람의 마음은 진짜라는 거겠죠.”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없어.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인데 백 회장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젠 나한테서 가져갈 것도 없는데요. 뭘, 더 이상 아는 것도 없으니 괜찮을 거예요.”
“…….”
백건우가 갖고 싶은 건, 설의 마음일 것이다. 그걸 설도 모르진 않을 텐데.
설은 오늘 아침 건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고, 익숙하고 편안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민준에게 뾰족한 가시 같았다.
건우는 알고 민준은 모르고 있었던 에스프레소 마키아토처럼.
“……강설은 또 뭘 좋아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뭘 좋아하냐니요?”
“좋아하는 커피는 이제 알았고, 또 뭘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아…….”
설은 작게 벌리고 있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건우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민준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불편하면 대답 안 해도 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어요.”
설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남들과 특별히 다르게 좋아하는 건 없었다.
그래서 설이 특별한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설이 좋아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특별한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아직도 설의 취향을 기억하고 있는 건우의 기억력에 놀랐을 뿐, 그 기억과 함께 보여 준 건우의 마음까진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설은 ‘남들과 다르다’라는 것과 ‘특별하다’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이런 대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어? 난 있는데.”
“당신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는데요, 뭘. 그리고…… 좋아하는 음악도.”
민준은 모르겠지만, 설은 여전히 잠들기 전에 민준이 USB에 담아 준 음악을 듣는다.
USB를 꽂아 음악을 재생시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이젠 귀에 익숙해진 멜로디들이 설의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민준이 준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들기 시작한 이후로 설은 더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민준이 설에게 준 USB.
마치 설의 목걸이 안에 들어 있던 메모리칩처럼.
!!
갑자기 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 힌트.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면, 애초에 기억해야 할 게 없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내가 왜 메모리 칩 안에 당연히 파일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쿵쿵쿵.
설의 심장 박동 수가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나…….”
“응?”
“지금 나를 좀 청와대로 데려다줘요!”
설이 민준을 향해 몸을 홱 돌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청와대는 갑자기 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오늘 부모님이랑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는데, 잊고 있었어요.”
설은 초점 없는 눈빛으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셨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다.
어쩌면 메모리칩은 진짜 문서를 여는 열쇠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열쇠가 있다면, 어딘가에 분명 자물쇠도 있을 터였다.
“근처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전화해.”
자물쇠라면,
“강설.”
“…….”
할아버지의 연구실 컴퓨터.
**
“이인호 박사님의 컴퓨터 하드는 아마 증거물 보관실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건 직후 저희가 살펴본 바로는 박사님의 컴퓨터는 아주 깨끗했습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어요.”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NIS에서 곧장 청와대로 들어온 김 국장은 대통령 집무실 안에서 영애인 강설을 만났다.
영애의 실물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3년 전 장례식장에서 본 후 오늘이 처음이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선이 고운 단아한 얼굴에 또랑또랑한 눈빛과 다소 고집 있어 보이는 눈매가 외조부인 박사님을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제가 그걸 좀 볼 수 있을까요, 국장님? 다른 사람들 모르게 확인해 볼 게 있어요.”
“언제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만약 파일을 확인하게 되면 곧바로 서 박사님께 연락을 드려야 합니다. 아무래도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구원들이 필요할 테니까요.”
“서 박사님……이라뇨?”
“현재 원자력연구원장이신 서 박사님 말입니다.”
“…….”
“왜 그러느냐.”
김 국장의 말에 설의 얼굴에 갑자기 당황스런 기색이 짙어졌다.
대통령이 설의 안색을 살피며 그녀에게 물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설이 김 국장을 바라보며 말을 다시 이었다.
“우선 제 생각이 맞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아요. 서 박사님께 알리는 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도 될 것 같고요.”
설이 기억하기에 외할아버지께서는 서 박사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3년 전 연구를 진행할 당시 그 연구팀에 서 박사님은 계시지도 않았고, 당시 서 박사님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그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
대통령은 잠시 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이 저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분명 그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국 말대로 합시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가 관건이군요. 딸아이가 NIS로 직접 가면 좋겠지만 그럴 명분이 없고, 그렇다고 김 국장이 증거물을 가지고 이곳으로 온다면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요즘 이 박사님 사망 사건에 대해 재조사를 하고 있는 걸 직원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어차피 참고인 자격으로 불러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영애께서 그곳을 방문한다고 해도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조국은 언제 부를 생각입니까.”
“시간은 제가 김민준 요원에게 따로 일러두겠습니다.”
“국장님.”
대통령과 김 국장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설이 갑자기 김 국장을 불렀다.
김 국장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돌려 의아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국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부드럽게 휘어지는 김 국장의 눈에 언뜻 애틋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유난히 두 눈이 초롱초롱해 보이던 예쁜 꼬마 아가씨가 언제 이렇게 자라 어른이 되었는지.
아마도 영애는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
부는 바람이 제법 차가운 기운을 담고 있는 가을, 아파트 인근 공원 벤치.
김 국장이 이인호 박사와 나란히 앉아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 국장이 민준을 집에 데리고 온 지도 어느덧 일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아빠를 많이 닮은 것 같군요.”
저만치 민준을 바라보던 이인호 박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북한에서 이 박사를 납치하려 한다는 제보를 받고 이 박사의 근접 경호를 맡았던 요원은 웃는 모습이 시원스럽게 보이던 청년이었다.
그는 총각인 줄 알았는데 아들이 있다고 말했고, 아들과 짜장면을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아들이 화가 많이 났다며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꼭 오누이 같네요.”
김 국장은 두 아이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민준과 조국은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아이들이라 그런지 곧잘 어울려 사이좋게 놀고 있었다.
“오빠 우리 가운데 말 잇기 게임할까?”
“가운데 말 잇기 게임이 뭐야?”
“세 글자 단어 중에 가운데 말로 연결하는 거야, 내가 쉬운 걸로 낼게.”
두 발로 그네 위에 올라선 조국은 앞뒤로 몸을 흔들며 힘껏 반동을 주어 그네를 허공에 더 높이 밀어 올렸다.
“너 그러다 떨어진다.”
가운데 말 잇기보다 점점 아슬아슬하게 위로 올라가는 조국의 그네가 더 신경 쓰여, 옆 그네에 앉아 조국을 올려다보던 민준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강조국!”
민준의 타박에도 조국은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허공에 대고 씩씩하게 세 글자를 외쳤다.
“세상에 그런 말은 없거든?”
“있어.”
부웅-
조국이 두 발로 딛고 선 그네가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조…….”
민준은 자신이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속으로 열심히 생각해 봤다.
“3!”
“조…….”
이걸 왜 해야 하는지도…… 그래도 최선을 다해 머리를 굴렸다.
“2!”
“…….”
“1. 땡!”
그랬지만, ‘조’로 시작하는 세 글자는 민준에게 너무 어려웠다.
“야, 쉬운 거로 낸다며?”
자존심이 상해 성질이 났다. 민준은 앉아 있던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 조국의 그네 한쪽을 붙잡으며 버럭 화를 냈다.
“어어어어???”
그 바람에 조국의 그네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놀란 조국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심을 잡고 서 있던 몸이 균형을 잃으면서 조국은 그네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곧 자신에게 닥칠 무서운 상황을 예감하며 조국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너 괜찮아?”
“……?”
놀이터 바닥은 꽤 말랑말랑했다.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뜨자 민준의 걱정스런 얼굴이 바로 코앞에 보였다.
민준의 크고 짙은 눈동자와 함께.
조국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심장이 쿵쾅쿵쾅 했다.
“……조랑말, 조미료, 조리사.”
조국은 민준의 두 눈을 바라보며 생각나는 단어들을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야, 무거워.”
민준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조국의 눈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이 어린 조국의 잘난 척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조국한테서 나는, 그의 코에 옅게 느껴지는 향기가 민준의 심장을 간질거렸다.
비누 냄새도 아니고 샴푸 냄새도 아닌, 처음 맡아보는 이상한 향이었다.
“나 하나도 안 무거워, 오빠. 이십 킬로도 안 돼. 우리 아빠는 나한테 나비 같다고 했어.”
“무겁다고!”
민준이 고개를 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여자아이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오빠가 졌어.”
“…….”
여자아이가 조그맣게 속삭였고, 홀린 듯 잠시 멍해 있던 민준은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자아이가 민준의 몸 위로 떨어지는 걸 보았는지 저만치 벤치에 앉아있던 어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던 쓰라린 패배감.
민준은 그 괘씸한 여자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굴욕을 되갚아 주리라 맹세하며 그 날부터 열심히 국어사전을 외우기 시작했다.
민준은 여자아이의 하얀 얼굴과 은은한 향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그 애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은 오직 복수심(?) 때문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후로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다.
**
설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그녀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설은 청와대 경호실 직원의 차를 타고 돌아왔고, 민준은 아파트 출입구 계단 난간에 기대 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설을 바라보았다.
그냥 단순히 가족을 만나러 간 것은 아닐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설이 말을 꺼내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왜냐고 묻진 않았다.
“늦었네.”
“여기서 뭐해요?”
“바람 쐬고 있었어. 집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안 피곤해요? 난 피곤한데.”
설은 웬일로 순순히 대답하며 민준 옆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섰다.
“커피 사줄까? 아직 카페 문 안 닫았을 거야.”
“집에도 커피 있어요. 그리고 다 늦은 밤에 커피는 무슨.”
설은 한 손으로 반대쪽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녀는 피곤했지만,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민준이 힐끗 설을 쳐다보았다.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을 연장하기 위해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은 할 수가 없고 듣고 싶은 말은 물을 수가 없었다.
민준은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카시오페이아. 북극성.”
갑자기 민준이 오른손을 하늘로 쭉 뻗어 북쪽 하늘의 별자리를 가리켰고, 설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가 보여요? 난 잘 안 보이는데.”
“케페우스.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착한 사람한테만 보이는 거야.”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설을 바라보며 민준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 알고 보니 별을 사랑하는 남자였군요?”
설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민준을 쳐다보았다.
불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데, 민준은 귀신같이 별자리를 찾아냈다.
“왜,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된다고 하잖아. 그래서 내가 어렸을 때 한번 세어 봤거든? 그런데 늘어나지가 않더라고.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별이 있을 뿐이지.”
엄마 아빠가 별이 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알게 되었다.
“강설도 모르는 게 있다니 기분이 좋군.”
민준이 슬쩍 설을 쳐다보며 웃었다.
“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 지금 불빛 때문에 잘 안 보이는 거잖아요!”
설이 발끈하며 여유롭게 웃고 있는 민준을 째려보았다.
“괜찮아. 모르는 건 죄가 아니야. 강설이라고 뭐 다 알겠어?”
아, 오랜만에 승부근성 돋는구나.
“그럼 당신 나랑 끝말잇기 할래요?”
설이 누구던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끝말잇기의 여왕이다.
“끝말잇기라니 유치하게.”
“그게 유치해요?”
“가운데 말 잇기 정도는 되어야지.”
민준이 씩 웃으며 기대 서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이날을 위해 연습을 한 건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국어사전을 외우던 취미가 드디어 빛을 발할 때가 온 것이다.
이게 다 그 옛날 민준에게 1패라는 굴욕을 안겨주었던 그 놀이터 계집아이 덕분이다.
그런데, 그때 그 애가 무슨 말을 했길래 내가 대답을 못했던 거지? ‘조’ 뭐였던 것 같은데…….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해요? 조랑말!”
민준이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설이 먼저 선수를 쳤다.
“뭐?”
조랑…….
“3!”
“이봐 강설!”
“2!”
“나 안 해.”
“1 땡! 내가 이겼어요!”
“난 안 한 거라니까?”
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민준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안 한 것이기 때문에, 진 게 아닌 것이다.
“졌으니까 당신이 커피 사요.”
설이 빙긋 웃더니 기대 서 있던 난간에서 몸을 일으켜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당분간 민준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고, 아쉬운 마음에 이런 시시껄렁한 말장난으로 민준을 붙든다.
“커피는 사겠는데, 졌다는 걸 인정해서 사주는 건 아니야.”
“그러든가요, 그럼.”
설은 눅눅해지는 가슴을 애써 누르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준이 곁에 다가오자 그에게서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민준은 얼마나 오랜 시간 내가 오길 기다리며 이곳을 서성이고 있었을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쯤 오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렇게.
민준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나 역시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정해진 그 길은 나 혼자 걸을 것이다.
두 사람은 아주 느린 걸음으로 고요한 밤거리를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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