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임무 종료2016.03.31.
-영애한테 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 건 기영 씨였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가까이 있던 게 별로 소용이 없나 봅니다.
탐탁지 않아 하는 백 회장의 목소리에 기영이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요즘 들어 백 회장은 기영에게 서서히 거리를 두고 있었다.
건우만 귀국하면 금방이라도 며느리 삼을 것처럼 굴더니, 백 회장은 기영을 갑자기 시큰둥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별로 소용이 없다는 말이 분명 아무 뜻 없이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요즘 청와대 출입이 잦은 게 이상합니다. 강설이 퇴근 후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회장님.”
기영은 마음의 동요를 감춘 채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쓸모가 없어지면 기영이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들이 너무 허무해진다.
이제야 겨우 건우가 돌아왔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기영 씨는 기영 씨의 일을 하세요.
“……연락 주세요, 회장님.”
기영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백 회장은 지금 기영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도대체 왜, 누구 맘대로.
기영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려다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뭐 해?”
건우가 팔짱을 낀 채 기영을 빤히 쳐다보며 서 있었다.
분명 아까 옥상에 올라왔을 땐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여길 언제 올라온 거지?
“그냥 바람 쐬러 잠깐 올라온 거예요. 이제 내려가려고 그랬어요.”
“내가 여기에서 뭘 들었는지는 안 물어보네?”
“선배가 뭘 들었는데요?”
“처음부터 다.”
“…….”
“그럼 이제 회장님이 누구인지 말해볼까?”
건우가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하!
기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안기영. 내가 분명히 말했지, 허튼짓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알려줄 순 있지만 정말 괜찮겠어요? 듣고 나면 분명 후회할 텐데.”
“…….”
좋지 않은 예감에 건우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을 보니 눈치챈 것 같네요.”
기영이 자조적인 미소를 띤 채 건우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강설이 너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건우가 언성을 높이며 기영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녀의 팔을 붙든 건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몰라서 물어요?”
“…….”
“난 걔가 끔찍하게 싫었어요. 선배가 침대에서 걔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기영이 이를 아득 갈며 차가운 눈빛으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기영을 붙든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설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취했던 그날, 건우에게 뜨거운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설이 아니었고, 그런 자신이 지독히도 혐오스러웠던 건우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었다.
하지만 모른 척하고 있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던 일로 되지는 않는다.
눈앞의 기영이 건우에게 그러했듯, 보고 싶지 않아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설은 그냥 둬. 네가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가만있지 않아.”
“날 건드리면 회장님이 무사하지 않으실 텐데도 그럴 수 있어요?”
“…….”
“이미 늦었어요.”
건우를 사랑했던 것만큼 미움도 커졌기에 이제 이 마음이 사랑인지 증오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백건우가 이제 강설의 것이 아닌 내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내 것, 원래부터 내 것이었다.
**
“랑, 랑, 랑…….”
민준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자존심이 상해 국어사전을 들춰보지 않았다.
민준은 샤워를 하면서도, 면도를 하면서도, 셔츠를 몸에 꿰어 입으면서도 끊임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배려심이 없어도 너무 없네, 강설. 랑이 뭐야, 랑이.”
민준이 넥타이를 조여 매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녀 덕분에 말 잇기를 할 때에는 선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준은 다시 한 번 하게 된다면 이번엔 반드시 선빵을 날리리라 다짐하며 차 키를 챙겨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띠리리-
핸드폰이 울렸다. 민준은 재킷에서 핸드폰을 꺼내 받으며 구두에 발을 집어넣었다.
박 팀장이었다.
“네.”
-어디야?
“제가 이 시간에 어디겠습니까, 출근 준비 중입니다.”
랑, 랑…….
-국장님이 지금 NIS로 들어오라신다.
“저 말입니까?”
민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나겠냐?
“팀장님, 무슨 일입니까?”
-그건 네가 들어와서 직접 여쭈어보세요.
출근 시간 다 되었는데.
민준이 왼손의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시간이 조금 촉박하긴 하지만 강설을 회사에 얼른 데려다주고 가면 될 것이다.
뭐, 늦어도 어쩔 수 없고.
민준은 서둘러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갔다.
아파트 출입구를 나서니 설의 아파트 앞에 낯익은 번호판을 단 자동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지난밤, 설을 집으로 데려다줬던 청와대 경호실 직원의 차량이었다.
민준이 저 차가 왜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 와 있는지 잠깐 생각하는 사이, 설이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군기가 바짝 든 경호관이 얼른 차에서 내리더니 차렷 자세로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고 섰다.
민준이 의아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고, 설은 자동차 옆에 멈춰 서서 민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출근 안 해?”
설이 민준 앞에 다가와 서자, 민준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야죠. 아버지께서 차량을 보내주셨어요, 앞으로 절 도와주실 분이에요.”
“강설.”
“걱정 말아요. 저 차 타고 얌전히 다닐 거니까요.”
“…….”
“먼저 갈게요, 나중에 봐요.”
설이 뒤돌아 자동차 뒷좌석에 올랐고, 경호관은 뒷문을 닫은 후 서둘러 운전석에 앉았다.
민준은 설을 태운 자동차가 눈앞에서 멀어져가는 모습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
민준이 국장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김 국장은 블라인드가 쳐진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국장님.”
김 국장이 뒤를 돌아 민준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건 국장의 마음이었고,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 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왜 갑자기 영애한테 경호관이 붙었습니까?”
“영애 경호 임무는 오늘로 끝났다. 청와대 경호실로 책임을 넘겼으니까 너도 회사 정리하고 대기해.”
촥-
김 국장이 블라인드 줄을 세게 잡아당긴 후 민준을 마주 보고 섰다.
“국장님.”
“대통령께서 결정하신 일이야. 내가 번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직 일이 마무리된 게 아닙니다, 영애가!”
“애초 목적대로 파일을 찾았고 우리 손에 안전하게 들어왔어. 일은 그걸로 마무리되었다, 더 이상은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지금은 안 됩니다.”
“그런 결정을 네가 할 수는 없다, 김민준.”
“…….”
이 결정을 내린 건 대통령이 아니다.
“일주일 줄 테니 정리하고 돌아와.”
“…….”
바로 강설이다.
**
“강 주임, 가을 신제품 프로모션 기획안 다 됐습니까?”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PPT 작업 중이던 설은 고개를 돌려 건우를 쳐다보았다.
건우는 여느 때와 달리 웃음기가 없는 얼굴로 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30분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팀장님.”
“기획안 출력해서 회의실로 가지고 오세요.”
“네.”
평소 때와 달리 건우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안 주임, 신제품 PT 준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후 1시에 제품 개발실에서 임원진 PT 예정입니다.”
“신제품 PT에 저도 들어갑니다. 사장님께서도 참석 예정이니 12시까지 준비해주세요. 생산팀 이 과장한테 다시 한 번 확인 부탁합니다.”
“네, 팀장님.”
기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건우는 눈을 감았다 뜨며 생각에 잠겼다.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자판을 두드리던 설은 고개를 돌려 해외사업부 쪽을 바라보았다.
민준은 아직까지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는 했지만 민준이 없는 사무실은 어쩐지 쓸쓸했다.
그가 언제라도 설 앞에 불쑥 나타나 그녀의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았다.
복작복작한 사무실이 설의 눈에는 텅 비어 보였다.
**
건우는 설보다 먼저 회의실에 들어가, 오후에 있을 임원진 경영 회의 자료를 넘겨보고 있었다.
설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서자 건우가 고개를 들어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기 앉아.”
회의실에서 설을 기다린 건 백 팀장이 아니라 건우였다. 한층 부드러워진 건우의 표정과 말투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 광고 포스터 최종 컨펌을 받지 못해서 앞으로 수정할 여지는 남아 있어요.”
설이 건우에게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건우는 설에게서 자료를 받아들고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기 시작했다.
“김 대리 아직 출근 안 했네? 항상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팔랑, 건우가 페이지 한 장을 넘겼다.
“……일이 있나 보죠.”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옆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해. 그게 그 사람 주 업무잖아.”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민준이 그런 얘기를 했을 리가 없는데.
“정색할 필요 없어. 일부러 알려고 한 건 아니니까. 그보다, 혹시 안 주임하고 친해?”
“안기영 주임이요?”
“응.”
나를 굳이 회의실로 부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건우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설은 건우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그는 왜 갑자기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예요?”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왜요? 혹시 내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는 다른 이유라도 있어요?”
눈빛을 보니 건우는 설을 걱정하고 있었다.
설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몰랐지만, 안 주임과는 다른 입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어.”
지금 그가 말을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건우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백 회장의 얘기를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기나 할까.
건우는 설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속으로는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잘, 생각해 볼게요. 그나저나 점심시간 지나고 반차를 좀 쓰고 싶은데요.”
“반차? 반차는 왜, 무슨 일이 있어?”
“NIS에서 3년 전 일로 참고인 조사를 하나 봐요. 방문 요청이 들어왔어요.”
“…….”
3년 전 일. 건우에겐 여전히 목구멍에 걸린 가시 같은 기억이다.
그 일을 이제 와서 왜 다시 조사하는 거지.
“……나는 안 주임과 같이 연구실 PT 참석했다 늦게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점심 먹고 바로 출발해도 돼. 직원들한테는 내가 외부 미팅 보냈다고 말할 테니까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고.”
“그럴게요.”
“김 대리랑 같이 가는 거야?”
“아니요, 혼자 갈 거예요.”
혼자 간다고?
건우가 의아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따로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
“네.”
설에게 경호실 경호관이 따로 붙었을까? 하지만 회사 앞에서 만난다면 직원들 눈에 띌 텐데.
“이 주임이 점심 먹고 외근 나간다고 하니까 그 차 타고 같이 나가. 가다가 디자인실 앞에 내려달라고 하면 될 거야, 거기서 만나서 가.”
“……그럴게요. 고마워요.”
설이 조용히 말했다.
건우는 지금, 설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도와주려는 것이었다.
“뭐가 고마워?”
“날 걱정해주는 거잖아요.”
“…….”
어쩌면 설은 앞으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건우를 미워하고 멀리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를 다시 만났을 때 우린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두 사람은 내가 바랐던 운명과는 다른 의미의 운명이었을까?
건우는 애써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고마우면 커피나 한 잔 사줘.”
“나중에 기회가 되면요.”
“지금은 안 돼?”
“네, 안 돼요. 이미 여직원들한테 충분히 미움 받고 있거든요.”
“강설이 그런 눈치도 보네.”
쯧쯧 혀를 차는 건우를 바라보며 설이 픽 웃었다.
건우가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설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회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
“여기 있다길래.”
설은 얼굴의 웃음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문 앞에 서 있던 민준과 마주쳤다.
그녀가 잘못한 건 없었지만, 설은 굳은 얼굴의 민준을 보니 웃고 있던 게 괜히 미안해졌다.
“팀장님께 기획안 제출하느라고요, 늦었네요.”
“당신이 부탁했어? 당신 옆에서 나 치워달라고.”
민준의 담담한 목소리에 설은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요, 내가 그랬어요. 이제 당신이 내 옆에 있을 필요가 없거든요.”
“……이제, 내가 있을 필요가 없다.”
“…….”
말없이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등 뒤로 회의실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건우가 손에 서류를 들고 회의실 밖으로 나오다 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아, 이제 왔어요? 설은 이따가 내가 잘 보내줄 테니 걱정 말아요.”
“……어딜, 가?”
민준이 시선을 내려 설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백건우는 알고 나는 모르는 곳에, 강설이 간다고?
“개인적인 일이에요.”
“이제 내가 모르는 시간은 안 된다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어제까진 그랬죠. 하지만 오늘부터는 아니에요.”
‘강설, 이건 나를 위하는 게 아니야.’
‘나를 위해서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그래?”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가슴이 납득하지 않았다.
내가 필요하지 않으면, 나는 강설 옆에 있을 수가 없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김 대리가 못 움직인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내가 아니라도 이렇게, 나를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을 하는 것 같아서.
민준이 힐끗 건우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설의 두 눈을 마주했다.
“……혼자 가도 되는 곳이야?”
“네.”
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
“걱정 말아요.”
“…….”
보이는 내가 불안하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면 되겠지.
민준이 잠시 설을 바라보다 홱 뒤돌아섰다.
성큼성큼 옮기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어디 갑니까?”
민준의 등 뒤에서 백건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표 내러 갑니다.”
민준이 목에 걸었던 사원증을 거칠게 빼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정이라도 들었는지 가슴 한구석이 헛헛했다.
이제 김민준 대리는 더 이상 강설 주임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강설과 티격태격하며 함께 먹던 점심 식사도, 아침 출근 시간마다 그녀의 집 앞을 지키는 일도 이제 더 이상 민준의 몫이 아니다.
그러나 영애의 경호는 끝이 났어도, 강설을 지키는 일은 끝나지 않았다.
김 국장은 민준에게 영애의 경호 임무를 종료하고 대기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대기 중 민준이 어디서 뭘 하든 국익에 반하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강설 뒤에서 그녀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면 된다.
강설을 지키는 것은, 강설을 위험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이날 오후 2시경.
설이 NIS 건물 2층 복도 끝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연구원들은 한 명씩 차례로 안으로 들어가 일정 시간 면담을 하고 난 뒤 밖으로 나왔고, 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녀 앞을 지나갔다.
“아니 이게 누굽니까, 강조국 양! 아니, 이제 영애라고 불러드려야지요?”
하얀 대리석 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설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서 박사님, 현 원자력연구원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설은 서 박사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왠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조국 양도 참고인 조사하러 왔어요?”
서 박사가 다가와 설 옆에 나란히 앉았다.
“네.”
서 박사의 질문에 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 국장도 참, 아니 영애까지 부를 일이 뭐가 있다고. 쯧쯧.”
“그냥 형식적인 조사라고 들었어요, 괜찮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다고 그동안 못 찾은 걸 새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서 박사가 슬쩍 설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파일을 찾아낸 곳은 분명 영애와 관련이 있을 텐데, 김 국장과 대통령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재조사가 시작되고 난 후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서 박사가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했다.
서 박사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필요하다면 협조해 드려야죠, 저한테는 할아버지 일이잖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참, 조국 양은 무슨 회사를 다닌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왜 전공을 살려 일하지 않습니까. 그땐 연구원에도 자주 놀러 왔잖아요.”
“전공은 했어도 그쪽으론 별로 흥미가 없어서요, 그땐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자주 놀러 갔던 것뿐이에요.”
“언제 한번 연구원으로 놀러 와요, 내가 점심 사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고맙게도 그때 누군가 서 박사를 불러서 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서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후, 설은 가만가만 들이마시고 내쉬던 숨을 한숨처럼 길게 내뱉었다.
긴장하고 있던 마음을 들킬까 봐 꽉 쥐고 있던 주먹이 그제야 스르르 풀어졌다.
설의 시선이 왼쪽 손목에 가 닿았다.
손목에 감긴 GPS 목걸이가 소매 밑으로 언뜻 보이자 눈에 띄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도 민준이 곁에 없는 시간에 익숙해지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서 박사가 돌아가고 난 후, 설은 마지막으로 손잡이를 열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두 명의 직원이 설에게 거수경례를 하더니 곧장 뒤돌아, 언뜻 보기에는 하얀 벽의 일부로만 보이는 묵직한 문을 옆으로 열고 양옆을 지키고 섰다.
“어서 와요.”
그 안에 김 국장이 있었고, 책상 위에 할아버지의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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