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돌고래2016.04.12.
-돌고래.
이른 새벽, 민준의 핸드폰이 짧은 메시지를 수신했다.
여름이 코앞이지만, 아직 아침 해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사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메시지를 곁눈질로 살펴본 민준은 옷을 빠르게 갈아입고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부웅-
자동차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어둠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민준의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메시지를 받고 난 후 정확히 30분 뒤, NIS 본부 회의실에서 비상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가 반갑다는 듯 민준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 자리에 앉았다.
타원형의 회의 테이블 앞, 하얀 스크린 화면에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L 쇼핑몰. 하루에도 수만 명이 오가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 크기의 복합 쇼핑몰이었다.
“이슬람 무장 단체 세력이 L 쇼핑몰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 폭발물 감지 팀, 해체 팀이 현장으로 출발했고 경찰 병력도 배치된 상태이다. 그들이 정한 디데이는 3일 뒤다. 인간 폭발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이 요구하는 사항이 있나.”
어두운 한쪽 구석에서 김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브리핑을 하고 있던 기획조정실장이 잠시 숨을 고른 후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밝히고 있지 않아 현재까진 알 수 없습니다. 폭발물 설치 협박이 거짓일 가능성도 배제하고 있진 않습니다만, 연락을 해 온 전화기는 추적할 수 없는 대포폰이었고, 발신지는 중국으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단순 장난 전화일 가능성은 적게 보고 있습니다.”
“전면 봉쇄는.”
“100%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면 봉쇄는 어렵습니다.”
“……48시간 이내 폭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영상판독팀 밖에 대기시키고 테러 진압 1, 2팀은 진입 대기한다. 안 실장은 통역, 협상 전문가 대기시키고, 경찰력 배치도 확인해 봐.”
“네, 국장님.”
테러 진압 1, 2팀이 함께 움직인다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두 팀이 같이 움직인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이슬람 무장 단체 세력이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른 요즘, 대한민국도 안심 지역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자국민이 국제 분쟁 지역에서 인질로 잡혀 구출되거나 사살되는 일들이 이제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따라서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전력을 다해 맞서야 했다.
살거나 죽거나, 경우의 수는 언제나 이 두 가지뿐이기 때문이었다.
“2시간 준다.”
현재 시각은 오전 7시였다.
김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요원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빙 둘러보았다.
“다녀와라.”
위험한 전투에 들어가기 전, 요원들은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을 가진다.
가족에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그들이 모르도록 마지막이 될지 모를 인사를 남기고, 그들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요원들은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기 전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올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이 전통이 언제, 왜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둔 마음은 그 이유를 한가로이 찾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고, 언제나 이 순간이 되면 후회를 남기지 말라는 그 암묵적인 의미만이 가슴을 묵직하게 울렸다.
그러니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혹시라도 못다 한 말이 있다면 저승에서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그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3일 뒤 전원 회식이다.”
“네!”
“열외는 없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한다, 이상.”
늘 같은 말을 하지만, 실제 전투가 벌어진 뒤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회식에 참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크게 다쳤고, 간혹 누군가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회의실 불이 켜지고, 요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이제 부모님에게로, 혹은 사랑하는 연인에게로 한걸음에 달려갈 것이다.
“넌 어디 가?”
갑자기 김 국장이 민준을 불러 세웠다.
민준 역시 다른 요원들처럼 회의실을 막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김 국장에게 아주 낯설고 생소한 광경이었다.
민준은 언제나 갈 곳이 없다며 국정원 내부 사격장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그도 아니면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오늘 민준은 어디론가 바삐 갈 곳이 있어 보였다. 김 국장은 그 모습이 낯설어 그를 불렀다.
어딘가 달려갈 곳이 생긴 아들이 신기하고 기쁜 마음은 잠시뿐, 마음은 금세 무거운 납덩어리를 달고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요.”
아버지가 계시기에 민준은 그동안 어머니께 따로 인사를 드리러 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어머니께서 알게 되시면 그 마음이 어떠할지 짐작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준에겐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었고, 언제나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강설.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그리고 혹시라도 운이 좋다면 웃는 얼굴을 보고 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자식 키워도 소용없다더니, 쯧. 다음 주에 엄마 생신인 건 알아?”
“알죠, 그럼.”
김 국장은 아버지의 부정을, 애타는 마음을 이렇게 퉁명스럽게 돌려 표현했다.
그러니, 돌아오라고.
“식당 예약은 네가 해, 난 바쁘다.”
“4명 예약하면 되죠?”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민준은 이렇게 걱정 마시라고, 돌아오겠다는 대답을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시계를 들여다보며 몸을 돌려 바삐 나가는 민준을 김 국장이 붉어진 두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야 달려갈 곳이 생긴 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와야 할 아들이 아비로서 가슴 아팠다.
**
“출근 시간 다 되었는데, 애매하네.”
민준은 자동차 핸들을 빠르게 돌리며 혼잣말을 했다. 늦으면 회사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민준은 얼른 시계 화면을 터치해 설의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끼이이익-
설의 위치를 확인한 민준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주변에서 자동차들이 일제히 클랙슨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현재 설의 위치가, A1 호텔?
민준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재빨리 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의 위치 표시가 움직이질 않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젯밤 이후부터 계속 같은 자리인데, A1 호텔이라면 Pakin 계열사 호텔이었다.
백인회 회장이 가지고 있는 호텔.
급격히 오그라들었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민준이 서둘러서 A1 호텔을 향해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설에게 연결되지 않는 몇십 초가 몇십 년처럼 느껴졌다.
딸깍.
민준은 다행히도 설에게 닿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괜찮아?”
민준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도 냉철한 이성을 잃지 말아야 하는데, 설을 생각할 때마다 민준은 극과 극을 오가는 감정의 널을 뛰게 된다.
-괜찮으니까 이렇게 전화를 받죠. 아침 일찍 웬일이에요?
다행히 설의 목소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난 또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했지. 그런데 지금 어디야?”
무사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고 나서야, 설이 왜 지금 이 시각에 A1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 지금 출근 준비해야 해요, 중요한 일 아니면 다음에 얘기해요.
-설아! 아직 안 끝났어?
“…….”
-끊어요.
“……어.”
민준의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잘못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황한 듯한 설의 목소리도 그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해도, 어차피 갈 곳은 한 곳뿐이었다.
부우웅-
민준이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
‘오해했을까?’
설이 걱정스런 얼굴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설은 이곳으로 왔고 스위트룸이 있는 꼭대기 층에는 건우 말대로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건우는 멀찍이 떨어진 옆 룸을 사용했고, 오늘 아침 함께 출근을 하자며 설의 룸 벨을 눌렀다.
“안 나가?”
“……나가요.”
설은 가방을 챙겨 들고 건우와 함께 룸 밖을 나섰다.
꼭대기 층에는 VIP를 위한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VIP 전용 주차장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건우는 설이 신경을 쓸까 봐 운전기사를 물리고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조수석에 앉은 설을 보자 건우는 옛날 생각이 났다.
건우에게는 그립고 따듯한 기억인데, 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까부터 표정이 밝지 않았다.
건우의 자동차가 호텔 지하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와 지상 출입구를 통과했다.
“저건 뭐…….”
끼이익-
설의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렸다가 반동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앞을 바라보니 자동차 한 대가 급하게 끼어들어 건우의 자동차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자동차였다.
자동차 운전석이 벌컥 열리더니 그 안에서 민준이 내렸다. 놀란 설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똑똑.
민준이 건우의 자동차 조수석 유리창을 노크했다.
지이잉-
조수석 창문이 절반쯤 아래로 내려갔다. 설은 당황한 얼굴로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건우가 고개를 옆으로 틀어 올리며 민준에게 물었다.
하지만 민준은 운전석 창문을 두 손으로 짚고 서서 설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이윽고 민준이 입술을 움직였다.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많은데,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당신은 지금 괜찮은가, 아닌가.
생각해보니 민준이 설에게 물을 수 있는 말도, 사실은 이것뿐이었다.
“응, 괜찮아요.”
설은 민준에게 최대한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라도 민준이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길 바랐다.
지금 이 시각에 건우와 호텔에서 나오는 그녀가 조금 이상해 보이겠지만 그래도 설을 믿어주길 바랐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그의 눈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으니 떨리는 입가에 애써 미소를 짓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럼 지금 나랑 짜장면 먹으러 갈래?”
민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설이 백건우와 함께 호텔을 나서는 이유가 궁금한 것보다, 아버지처럼 설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민준은 혹시라도 설에게 후회가 남을까 봐 무서웠다.
“나 지금 출근하잖아요. 그리고 이 시각에 지금 거기 안 열어요, 나중에 가요.”
“……응, 출근.”
“돌고래인가?”
건우의 묵직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건우도 요원이었기 때문에 그는 민준이 지금 설을 찾아온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민준은 위험한 전투를 앞두고 있고, 건우는 눈앞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보고 있는 거였다.
“돌고래가 뭐예요?”
설이 의아한 얼굴로 건우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민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헛소리하는 거야.”
민준은 흘러가는 1분 1초가 아까워 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강설.”
나는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할까.
“말해요.”
설이 왼쪽 손목시계를 잠깐 쳐다보았다 다시 민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다녀올게.”
“응? 당신 어디 가요?”
설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민준에게 물었다.
빵빵-
뒤에서 어서 길을 비키라며 요란한 클랙슨이 울렸다.
“그리고 백건우, 강설한테 무슨 일 생기면 다녀와서 내가 가만 안 둬.”
민준이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그래도 민준이 없는 동안 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백건우뿐이다.
요원이었고 강설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와도 설을 위험하게 하진 않을 것이었다.
“날 믿어?”
어이가 없다. 나를 믿어, 지금?
건우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강설 옆에서 떨어지지 마, 그나마 당신밖에 없어서 그러니까.”
“……미친놈.”
강설 얼굴 보려고 왔을 텐데 하고 가는 말이 고작 이것뿐이냐. 내가 그 괴로운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건우는 더 이상 민준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빵빠앙-
“가.”
민준이 웃으며 창문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설은 불안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이 웃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건우의 자동차가 출발했고 설은 고개를 내밀어 멀어지는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이 오른손을 높이 흔들며 활짝 웃었다.
흔들리던 오른손이 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무렵 천천히 오른쪽 이마 옆으로 붙어 거수경례로 바뀌었다.
“말해요.”
“뭘.”
건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돌고래, 그게 뭔데요?”
“……그냥 장난친 거야.”
미친놈.
사랑하는 여자가 호텔에서 다른 남자하고 밤을 새고 나왔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강설을 부탁한다는 말뿐이라니.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설을 위협하는 사람이 아버지임을 알면서도 비겁하게 외면하고 있는 나에게.
건우는 백미러로 보았다.
건우의 자동차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서 있는 민준을.
상대방이 모르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민준을, 그 마음을 봐 버렸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다.
저 빌어먹을 마음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설아.”
“왜요.”
“김민준 좋아해?”
“…….”
“괜찮아, 알고 있었어.”
“……아니요.”
설이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이드미러로 뒤를 바라보았지만 민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는 한참 되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
“사랑해요, 그 사람을.”
“…….”
“아주 많이.”
사랑이라 말하고 나니 벅차오는 마음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금 전 설을 내려다보던 민준의 눈빛이 머릿속에 박혀 사라지질 않았다.
설은 며칠만 지나고 나면 민준을 만날 수 있으니 괜찮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너무하네, 강설.”
“……미안해요.”
건우의 얼굴이 진지해 설은 얼른 사과했다.
건우를 잊고 있었다. 제 마음만 생각하느라 미처 옆에 있는 그를 생각하지 못했다.
피식, 건우가 허탈하게 웃었다.
돌아오는 게 아니었다.
모르고 살아가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모른 척할 수도, 그렇다고 아는 척할 수도 없는 현실은 잔인하고 고통스럽다.
“……돌고래 말이야.”
건우가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민준은 비록 전하고 가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 뜻이야.”
설을 두고 가야 하는 그 무거운 마음을, 내색할 수 없는 고통을 알기에 그 마음을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비참하네, 백건우.
“…….”
설이 얼른 두 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물기를 닦아냈다.
설이 닦아낸 물기가 건우의 눈가로 스며들었다.
**
-3일 안에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래요?”
몇 번이 걸려 와도 받지 않던 전화였다. 백 회장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요즘 계산기를 두드려 보느라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꼬리를 너무 길게 붙이고 있었다.
백 회장은 이제 끊어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한테 사람 몇 명만 붙여주세요, 회장님.
“사람이라, 어떤 사람을 말입니까.”
-회장님이 구해주실 수 있는 사람들이요.
“흐음.”
용병을 말하는 거였다. 돈만 주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일을 처리해주는, 음지의 사람들.
그들을 데리고 무얼 하려나.
“위험하지 않습니까?”
-일이 잘못돼도 회장님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물론 나와는 전혀 상관없지요.”
백 회장이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안기영을 오래 곁에 두고 있었던 건 기영의 충성스런 마음 때문이었다.
감히 제 아들인 건우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던 건, 기영이 계집치곤 꽤 영민하고 우직한 의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동안 쌓은 정이 있는데, 필요하다니 넉넉하게 보내주겠습니다. 그것도 최상급으로 말이죠. 일 끝나고 건우랑 같이 식사나 합시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백건우.
오늘 아침 강설과 함께 호텔에서 나왔던 그 남자.
기영은 전화를 끊고 난 뒤, 작고 동그란 GPS를 가방 손잡이 버클 안쪽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GPS를 재킷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김민준.”
회사 생활도 이제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
D-2.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깜깜한 밤, 설은 퇴근을 하고 바로 호텔로 돌아왔다.
설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창문 밖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딩동- 하며 룸의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누군지는 알고 있었지만, 설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철호입니다.”
딸깍, 설이 문을 열자 그녀와 마찬가지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중년의 남자 두 명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황철호, 민혁철 박사님.
“오랜만입니다, 강조국 양.”
할아버지와 함께 초소형원자로 개발 연구를 함께하셨던 분들이다.
두 사람은 이인호 박사의 손녀 강조국 양이 두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은밀하게 찾아왔다.
“두 분 다 여전하시네요.”
설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분의 얼굴을 보자마자 옛 생각이 났다. 연구원에서 할아버지와 오랜 시간 함께 연구하셨던 분들이다.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분들.
“김 국장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황 박사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3년 전 연구를 끝으로 사라졌던 결과물에 대해 그들 역시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의문을 가진다고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요즘 그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안 그래도 뒤숭숭한 마당에, 은밀하게 김 국장님의 연락을 받고 이인호 박사님의 외손녀까지 만나게 되다니.
두 사람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얼떨떨하기만 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노트북과 종이 파일들을 본 두 사람은 의아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두 분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 제가 부탁을 드렸어요.”
“……그게, 정말 사실입니까.”
황 박사는 주변에 다른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파일을 도대체 어떻게 찾은 것이며, 또 어떻게 강조국 양이 가지고 있었던 건지.
“사실이에요. 사본이긴 하지만 제가 지금 가지고 있어요.”
설의 담담한 말에 연구원들은 당황스런 얼굴로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래서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저희를 어떻게 믿고 그러십니까.”
그 파일의 가치를 모르지 않았다. 그 파일 때문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예전에 몇 번 얼굴 본 게 다인 자신들을 어떻게 믿고 이걸 털어놓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혼자서 할 수가 없어요. 도움이 필요한데, 제가 부탁을 드릴 수 있는 분이 두 분밖에 없어서요. 그래서 나중에 두 분이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하셔도 어쩔 수가 없어요.”
설이 기억하기로는, 두 박사님은 훌륭한 연구원들이셨다.
그 사건 이후로 다른 연구원들은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니 서 박사가 원자력원장으로 취임하면서 한직으로 밀려났으면서도, 더 좋은 조건을 마다하고 그곳을 지키고 계셨던 두 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두 분께서 제게 유리하게 진술해 주셨던 것도 알고 있어요.”
강조국 양이 이인호 박사님의 연구실에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 그때 당시 연구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냐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두 분만은 한결같이 강조국 양은 이 연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주셨다.
“저희도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이니까요.”
“지키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걸 가질 자격이 없는 거겠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
“저도 두 분을 위험하게 하고 싶진 않은데, 죄송합니다.”
그때 당시 강조국 양이 해보았자 무얼 얼마나 했겠느냐, 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나.
세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지만, 설은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안으로 말아 꽉 움켜쥐면서도 두 사람을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대답 없는 두 사람을 보며 힘이 빠졌지만, 그래도 원망할 수는 없었다.
두 박사님께도 분명 가족이 있을 테고, 할아버지의 경우처럼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이 장성해, 이제 다들 제 앞가림을 합니다.”
목이 메어 황 박사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렇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가늘게 떨고 있는 아가씨가, 우리의 무엇을 믿고 이러는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조국 양.”
탄식 같은 한숨이 낮게 뱉어 나왔다.
두 사람은 붉어진 눈으로 설을 바라보며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설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할아버지의 장례 기간 내내 자리를 지키셨던 두 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기일마다 찾아오셨던 두 분을 도저히 의심할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설이 고개를 숙여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우리, 우리가 아니더라도 또 누군가 그 길을 이어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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