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너를 두고 내가 여기에2016.04.14.
D-1일.
늦은 밤, A1 호텔 스위트룸 불이 꺼지지 않았다.
설의 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던 건우가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어제도 오늘도, 설은 호텔로 한번 들어오면 밖으로 바깥출입 한 번 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누구세요?”
“나야.”
딸깍-
문이 열리고, 좁은 문틈 사이로 설의 하얀 얼굴이 보였다.
건우가 보기에 설은 어쩐지 긴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늦었는데 아직도 안 자고 뭐 해?”
“책 좀 읽고 있었어요.”
그가 문틈 사이로 안을 슬쩍 들여다보려 하자, 설이 자연스럽게 가로막고 섰다.
무언가, 건우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게 있는 거였다.
안에서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설의 굳은 얼굴을 보니 왠지 건우가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괜찮은 거지?”
“그럼요.”
설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건우는 차나 한잔하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민준이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와봤는데, 설은 얼른 건우가 가주기만을 바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늦게 자지 마, 오늘 아침에도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알았어요. 팀장님도 가서 주무세요.”
“……잘 자.”
“팀장님도요.”
딸깍-
건우 앞에서 다시 문이 닫혔다.
이제 와 새삼스럽게 무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건우가 굳게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렸다.
**
“조국 양, 이걸 어떻게 다 기억하고 있는 거죠?”
연구원들은 설이 지난밤 흐트러진 파일을 원래의 상태 그대로 복구해 놓은 걸 보고 혀를 내둘렀다.
두 사람은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는지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연신 들여다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들도 완전한 전체 파일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내용을 살펴보니 잘못된 오류라든지 배열의 문제 같은, 논리적으로 잘못 맞추어진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가 기억력이 좀 좋아요.”
설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설은 머릿속에 있던 할아버지의 생전 자료를 그대로 복기했고, 검토 및 나머지 필요한 마무리는 두 박사님이 힘써 주고 계셨다.
“완성된 파일은 두 분이 김 국장님께 전해 드리세요. 청와대로 가지고 갈지 국정원에서 보관할지는 아버지가 따로 언질을 주실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좀, 움직이기가 그래서요.”
안 주임이 오늘 회사를 결근했다. 몸이 아프다고는 했다지만,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김 국장님이 요원들을 붙여 두 분을 은밀히 엄호해 주고 계시니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왜 연구를 하지 않는 거죠? 많이 아깝습니다, 조국 양.”
단순히 기억력만으로 이렇게 정확한 복기를 할 수는 없었다.
황 박사가 보기에 조국은 이 연구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두 눈으로 직접 보았어도 그건 정말 믿기 힘든 일이었다.
강조국 양은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인재인 것이다.
황 박사는 조국 양을 선뜻 세상에 내어놓기 두려웠던 이인호 박사님의 심정이 이해가 되면서도, 학자로서의 그녀가 너무 아깝고 또 아까웠다.
“우리도 우리 뒤에 뛰어난 후배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쉬워하는 민 박사의 말에 설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 어깨의 짐을 많이 내려놓은 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혼자가 아니므로 부담감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회사는 조만간 정리할 생각이었다.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는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생각해볼 것이었다.
“박사님께서 많이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무거운 짐을 함께 져 주시는 두 분께 벅찬 마음을 대신할 말은 그저 고맙다는 말뿐이다.
민준이 이런 나를 본다면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줄까. 민준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너무 촉박한 시간이라 어딜 가냐고 묻지 못했다. 언제 오는 건지도 묻지 못했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설의 눈동자에 말간 눈물로 맺혔다.
**
“자정이 지나면 L몰로 이동, 대기한다.”
까만 전투복을 입고 차 안에 대기 중인 요원들의 얼굴은 묵직한 전투모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무거운 침묵 사이로 숨이 막히도록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다시 한 번 위치 확인한다. 724번, 725번, 811번은 출입구 안쪽에 대기.”
귀에 꽂은 인이어 이어폰을 통해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724번의 다른 이름은 김민준이었다.
상관의 말에 집중해야 하는데, 조금 전부터 자꾸만 민준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아주 사소한 실수가 동료를 잃게 하고 시민을 다치게 할 수 있다.
그러니 1분 1초도 정신력을 흐트러트려서는 안 되는데, 아까부터 계속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다.
이틀 동안 내부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L몰에서 폭발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내일은 그들이 정한 디데이였다.
L몰에서 자폭 테러라도 일어나게 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용의자들을 찾아내 먼저 제압해야 했다.
그들이 몸에 화약을 두르고 와 이곳에 뛰어들든 폭탄 가방을 들고 와 던지든 간에, 시민들의 안전을 지켜야 했고 담보는 요원들의 목숨이었다.
민준은 특수 경찰 몇몇과 함께 출입구 가까운 안쪽, 임시로 만든 벽 공간 안에 배치되었다.
수상한 움직임에 가장 먼저 접근할 수 있는 거리, 위험도 명예도 가장 높은 공간 안에.
째깍-
초침 소리와 함께 자정이 지났다.
**
초여름이라 날씨가 제법 무더웠다.
얼굴을 완전히 가린 전투모 사이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민준은 좁은 공간에서 작은 구멍 사이로 총구를 겨눈 채 벌써 몇 시간째 과녁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화롭고 활기찬 오후였다.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많은 사람이 가족 혹은 연인과 함께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민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같은 지붕 아래였지만 벽 밖 세상과 극명하게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내내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이 서산 너머로 사라지고 난 뒤 끊임없이 이어지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서서히 뜸해지기 시작했다.
이동 상황실 차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영상판독팀 요원들이 조금씩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잘못된 제보였던 것 같지만, 잘못된 제보여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은 일보다 더 좋은 결과는 없기 때문이었다.
-폐장 30분 전.
귀에 꽂은 인이어 이어폰을 통해 상황실 상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줄곧 같은 자세로 총을 들고 있던 팔의 감각은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제 30분만 지나면 민준은 제일 먼저 설의 얼굴을 보러 갈 것이었다.
강설!!
갑자기 민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순간 눈앞이 하얘지면서 식은땀이 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니, 아닐 것이다.
민준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단단히 붙잡았다.
-폐장 20분 전.
시간이 가던 걸음을 멈추었는지 몇 시간째 잘도 흐르던 시간이 갑자기 더디게 흘러갔다. 누가 숨통을 조이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아득.
민준은 있는 힘껏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폐장 10분 전.
입안에서 땀방울이 섞인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붉은 핏기가 눈가로 옮겨가 민준의 두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5분 전.
강설. 내가 너를 두고 여기에.
-해제.
쾅!
큰 소리와 함께 민준이 갇혀 있던 공간의 한쪽 벽이 무너졌다.
민준이 무거운 전투모와 전투복을 바닥에 벗어 던지며 앞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724번! 지금 뭐하는 거야.
일이 끝나면 제일 먼저 설에게 가기 위해 민준은 L몰 주차장에 미리 차를 세워 놓았다.
-야 이 새끼야! 내 말 안 들려?
귀에 꽂혀 있던 인이어 이어폰을 차 바닥에 집어 던지며 민준은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손목시계에 연결된 블루투스로 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말도 안 되는 혼자만의 상상이길 바랐다.
따르르르-
몇 번의 신호음 끝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하아.
민준이 안도감에 짧게 숨을 토해냈다.
“강설! 괜찮아?”
-안녕, 김민준 요원?
“…….”
-지금 강설이 통화하기가 좀 곤란한데, 나중에 통화하면 안 될까? 아 참, 이제 나중이 없으려나?
“……안기영.”
민준이 중얼거리며 아득 이를 깨물었다.
-잘 들어, 지금부터 1시간 안에 인천공항으로 파일 원본 가지고 오라고 전해. 내 친구가 파일을 가지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면 그때 강설이 있는 곳을 알려줄 테니까. 1시간이야, 그 안에 도착하지 못하거나 혹시 내 친구한테 허튼짓하기라도 하면 영애는 이 세상에 없을 줄 알아.”
“…….”
안기영은 지금 잃을 게 없었다. 그리고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민준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안기영한테 목숨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 참, 네가 붙여놓은 추적 장치 있잖아? A1 호텔에 두고 왔으니 분리수거 부탁해.
강설은, 무서움을 많이 타는데.
**
1시간 전.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오늘은 박사님들이 오시지 않는 날인데.
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문 앞에 다가갔다.
“누구세요?”
“룸서비스입니다. 백건우 님께서 지금 가져다 드리라고 하셔서요.”
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 분명히 괜찮다고 말했는데, 또 이렇게 사람을 보냈다.
혼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지내는데, 아무래도 밖에 있으니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딸깍-
설이 현관 손잡이를 열고 안으로 가볍게 잡아당겼다.
현관문을 열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호텔 직원의 모습이 보였고,
“우와, 강 주임 여기 있었네?”
호텔 직원의 머리에 총을 겨눈 안기영의 모습이 보였다.
설은 본능적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공포심으로 하얗게 질렸다.
“바쁘지 않으면 지금 나랑 어디 좀 갈까? 강 주임 심심할까 봐 내가 친구들도 데려왔어.”
기영이 한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안기영 옆으로 까만 복면을 쓴 낯선 남자들이 서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어? 혹시 지금 백건우가 아니라서 실망한 거야? 어쩌나, 백건우는 지금 아버지랑 같이 있을 텐데.”
기영은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아주 유쾌했다.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결국 이렇게 바들바들 떨 거면서.
그 여우 같은 늙은이는 A1 지배인에게 16층에 귀한 손님이 묵을 예정이니 서비스에 각별히 신경 쓰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했다.
3년 전 이 방에서 나온 자신을 조용히 불러 건우와 어떤 사이냐고 꼬치꼬치 캐묻고, 건우와 있었던 일은 깨끗하게 잊으라고 말했던 사람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우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을 좀 도와줄 수 있겠냐며 기영의 손을 잡고 친절하게 눈웃음을 짓던 그 교활한 늙은이가.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설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그건 나중에 말해주면 안 될까? 우리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야.”
흐흡-
갑자기 누군가가 설의 입을 가로막았고, 그녀의 눈앞이 하얘졌다.
**
NIS 본부에 긴급 상황실이 꾸려졌다.
김 국장에게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긴 침묵 끝에 억양이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인질은 반드시 구출하되 협상은 없으며, 만에 하나 인질을 구할 수 없다고 해도 협상은 없다.
대통령은 이 두 가지 답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던 가쁜 숨소리와 평소와 다르게 미세하게 떨리던 낮은 목소리가 김 국장의 귓가에 무겁게 남았다.
“영애의 현재 위치는.”
김 국장이 컴퓨터 좌표 화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테러 진압 1, 2팀은 조금 전 전투 복장 그대로 현재 비상 대기 상태였다.
“김민준 요원이 보내온 위치를 분석 중입니다. 현재 인천항 방향으로 이동 중입니다.”
인천 부두라면 컨테이너 물류 창고가 산적해 있는 곳이다. 게다가 지금 시각이면 항구는 드나드는 배들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즉 숨기는 쉽고, 찾기는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김 국장의 미간이 안으로 잔뜩 좁혀졌다.
도망치거나 숨을 때는 복작거리는 거리,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숨는 게 가장 좋다는 걸 기영은 알고 있는 것이다.
쫓아야 할 상대가 전직 요원이기 때문에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안기영에 대한 정보는.”
“잘 아시겠지만 보육원 출신이라 가족은 없습니다. 3년 전 NIS를 그만두고 나간 이후로 계속 Boni에 근무했고, Pakin 그룹 백인회 회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이 백인회 회장과 관련이 있는지는 별도로 더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백건우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게, 아무래도 백건우도 용의 선상에 함께 올려놓아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섣불리 연락을 하기가…….”
“백건우한테 지금 당장 전화 넣어.”
김 국장은 건우가 영애를 도와주었다는 걸 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김 국장의 손에 파일이 안전하게 들어와 있는 걸 보면 건우는 지금 영애의 실종에 대해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더 컸다.
“연결되었습니다.”
통화 연결음이 사라지자 곧바로 스피커를 통해 건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백건우.
건우는 아버지 백인회 회장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백인회 회장이 오늘 저녁은 집에서 함께 먹자며 건우를 집으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자 건우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국장님.”
-영애가 사라졌다.
건우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설이, 사라졌다고?
-납치 용의자는 안기영, 현재 인천 방향으로 이동 중이다. 혹시 짚이는 곳이 있나?
“……알아보겠습니다, 국장님.”
안기영.
건우가 비틀거리다 힘없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내 탓이다.
비겁하게 모른 척 외면하고 있던 탓에, 설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미리 털어놓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아버지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백 회장이 건우의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두 손에 머리를 묻고 괴로워하는 건우를 보자 백 회장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강설이, 아니 영애가 납치됐습니다.”
백 회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안기영이 영애를 납치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저, 오늘 저녁 건우를 불러 저녁 식사나 하고 계시면 될 거라고 해서 그리 한 것뿐이었다.
건우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백 회장을 쏘아보았다.
“모르셨어요?”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백 회장이 고개를 홱 옆으로 돌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영은 파일을 찾아낸 뒤 잠잠해질 때까지 해외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만 말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니 일이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 회장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짙어졌다.
“모르셔야 해요, 아버지. 안 그럼 제가 살 수 없어요.”
“건, 건우야!”
“지금 강설 어디 있냐고요!”
“난, 난, 그냥 배 하나만 구해줬을 뿐이다! 그 이상은 정말 몰라! 정말이다, 건우야!”
백 회장이 건우의 팔을 간절하게 붙들며 애원하듯 말했다.
기영이 해외 수출용 선적에 몸을 숨겨 조용히 나갈 수 있도록 조금 손을 봐주었을 뿐이다.
정말 그뿐이다.
아니, 그뿐이어야 한다.
“거기가 어딥니까.”
건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낮아졌다.
“거, 건우야.”
“거기가 어디냐고요!!”
“그, 그게, 인천 부두에 배가 한 척 있는데…… 건우야!”
건우가 방문을 거칠게 열고 밖으로 나가자 백 회장이 다급하게 건우의 뒤를 쫓았다.
건우가 백 회장의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들어 있던 권총 한 자루를 꺼냈다.
“건우야!”
백 회장의 두 눈이 공포로 크게 떠졌다.
얘가 총을 들고 지금 어딜 가려고!
“안기영은 제가 압니다, 제가 가야 해요.”
“안 돼! 안 된다, 건우야! 거기에 안기영만 있는 게 아니야!”
백 회장이 부들부들 떨며 건우의 앞을 두 팔로 가로막고 섰다.
“……모르신다면서요.”
건우가 허탈한 표정으로 백 회장을 바라보았다.
“비키세요, 아버지.”
“안 된다! 거기 가면 안 돼, 건우야!”
건우는 백 회장을 거칠게 밀치고 현관문을 열어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백 회장이 가슴을 움켜쥐며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
잠시 후.
“위치 확인되었습니다! 김민준 요원이 현재 목표물 가까이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민준이 보낸 신호가 아까부터 한 곳에 멈춰 제자리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위성에서 최종 위치를 확인한 요원이 고개를 돌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좌표 확인, 이동한다.”
김 국장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요원들을 태우고 인근 건물 옥상에 대기 중이던 헬리콥터가 어둠을 가르며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김민준 요원은 인근에서 대기하고 있다 요원들과 합류한다.”
“저기, 국장님…….”
“뭔가.”
“송신이 이미, 끊겼습니다.”
“…….”
민준과 연락을 주고받던 요원이 귀에서 헤드폰을 내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 국장이 절로 벌어진 입술을 다시 힘주어 굳게 닫았다.
약속 시각이 채 20분도 남지 않았다. 헬기가 아무리 빨리 날아간다고 해도 기영이 말한 시간을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걸 잘 알기에 아마도 민준은.
‘상현아, 다녀올게!’
갑자기,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재권의 목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들렸다.
김 국장이 고개를 돌리며 떨리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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