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31화 (31/94)

31화. 나의 나침반, 강설2016.04.19.

“이제 좀 정신이 좀 들어?”

설이 어지러운 기운을 이겨내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호텔에서 무슨 약 냄새를 맡은 것 같았는데 그 후로 기억이 없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컨테이너 안,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설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방이 캄캄하고 고요할 뿐이었다.

구석의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기영이 고개를 들어 설과 눈을 마주쳤고, 즐거운 듯 생긋 웃었다.

아직 약 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흐릿한 시야 안에 기영의 모습이 어지럽게 휘어져 보였다.

“……왜?”

설이 마른 입술을 힘겹게 달싹거렸다.

극도의 두려움도, 그 끝을 넘어서니 오히려 담담해졌다.

“왜…… 이런 일을.”

대한민국 안에서 나를 납치하고 무사할 리가 없을 텐데. 안 주임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어리석게도…….

“너, 나 못 알아보더라? 난 너 한눈에 알아봤는데.”

설이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추며 기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기영은 설에게 다가와 입가에 조소를 띤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노란 원피스를 입고 반짝거리는 까만 구두를 신고 다녔잖아. 머리에는 긴 나비 모양 리본을 묶고 말이야. 기억 안 나?”

노란 원피스에 까만 구두. 이건 나의 기억이다, 내 어릴 적 기억.

그런데 이걸 어떻게 안기영이 알고 있는 거지?

“행복 보육원. 네가 엄마 아빠 손잡고 와서 옷도 주고 가고 먹을 것도 주고 가고 그랬잖아. 내가 가엾다고 신고 있던 까만 구두도 벗어줘 놓고 잊어버렸나 보네? 하긴, 네가 그런 것까지 기억할 리는 없겠지. 너한테는 별거 아닌 아주 사소한 동정이었을 테니까 말이야.”

“…….”

행복 보육원, 기억이 났다. 주말이면 설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가끔 갔던 곳. 그래, 까만 구두를 벗어준 일이 있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설을 흘끔거리며 쳐다보던 여자아이.

그 아이의 시선이 설의 구두에 자꾸 와 머물자, 설은 신고 있던 까만 구두를 그 아이에게 벗어주었다.

“그때 너는 나한테 구두를 벗어줬고, 네 아버지는 너를 소중하게 안고 커다란 자동차까지 걸어갔지. 그때 내가 얼마나 너를 부러워했게? 하루만 너처럼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밤마다 기도했어.”

기영이 손에 들고 있던 랜턴으로 설의 얼굴을 비추자, 눈이 부신 설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항상 다른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백건우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아무도 부럽지 않았어. 그 사람만 있다면 숨만 쉬고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야. 그런데 백건우가 강설을 좋아한대. 나한테 구두를 벗어줬던 그 공주님을 말이야. 강설이 버려서 이제 내가 가져도 될 줄 알았는데, 기어이 또 강설을 찾아갔지 뭐야. 내가 그렇게 기다렸는데.”

“…….”

“그래서 나는, 네가 이 세상에 없었으면 좋겠어.”

기영은 낮게 읊조리듯 말했고, 설은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어쩐지 서글퍼졌다.

“그동안 그 정도 대접받으며 살아왔으면 남은 인생이 어찌 되든지 간에 꽤 괜찮은 인생이었잖아? 하긴 나도 돈만 받으면 이제 너 같은 공주가 아니라 여왕도 될 수 있겠지. 그럼 이번엔 내가 너한테 내 구두를 줄게. 그러니까 너도 내 친구가 이라크까지 무사히 도착하길 빌어줘. 이제, 15분 남았네?”

기영이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웃었고, 설은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호흡을 안으로 다시 삼켰다.

기영은 민준이 파일을 가져오든지 말든지, 설을 풀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파일은 가질 수 없을 거야.”

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약 기운이 다 가시지 않아 지금 이러고 있는 자신이 진짜인지, 아니면 설의 공포가 만들어 낸 허상인지도 구별이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차가운 컨테이너 바닥의 냉기도, 기영의 경멸스런 눈빛도 꿈이 아니었다.

그 순간 설은 제일 먼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아마, 아픈 결정을 내리게 되실 것이다. 그리고 민준, 내가 사라진 걸 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지만 나조차도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그 사람인들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내 위치!

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설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지.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고민은 좀 되실 거야, 그렇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선뜻 파일을 내줄 수도 없고 말이야. 그럼 너라도 데리고 가야지, 뭐. 파일 대신 영애 몸값이라도 받아야 하지 않겠어? 너무 걱정하진 마. 넌 거기서도 남자들한테 인기가 아주, 많을 테니까.”

기영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설이 이렇게 된 걸 알게 된 건우의 얼굴과 몇 년 동안 충실한 수족 노릇을 해준 자신을 버리고 강설에게 눈독을 들인, 그 교활한 늙은이가 절망하는 얼굴을 봐야 하는 건데 그게 아쉬울 뿐이었다.

“기억이 나. 그래, 내가 당신한테 신고 있던 까만 구두를 벗어줬어.”

설은 왼쪽 손목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었다. 이대로 민준을 못 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무서운 공포가 숨구멍을 짓눌러왔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앞으로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그녀는 이제 민준과 함께 있을 것이다.

“당신도 나처럼 이름이 달라져서 못 알아봤어. 나는 그때 강조국이었고 안기영 당신은, 안설이었으니까.”

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기영이 숨을 멈추고 설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안설.

조국은 그 여자아이의 이름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다.

남자 이름도 아니고 강조국이 뭐냐고 아빠와 할아버지께 투정부렸던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만난 여자아이는 조국에게 자기 이름은 안설이라고 말했다.

하얀 눈처럼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예쁜 이름, 설이라고.

창밖으로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던 그 날 무심하게 ‘설’이라는 이름을 개명 신청서에 적어 넣었는데, 그 이름이 가진 기억의 시작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게, 기억이…… 나?”

기영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안설.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보육원을 나오면서 기영이 제일 먼저 버렸던 이름이었다.

기영은 그 누구한테도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건우, 그 남자가 사랑하게 된 여자의 이름이 설이라고 했다. 강설.

잊고 싶어서 버렸던 그 이름을 건우가 사랑스럽게 부를 때마다 누군가가 가슴을 날카로운 칼로 그어대는 것만 같았다.

건우가 ‘설아’라고 강설을 부를 때마다 가슴속으로 피눈물이 흘렀다.

건우의 설은 원래, 내 것이었는데.

“그래! 원래 내 것이었어, 그러니까 이제 돌려줘. 백건우도, 내 이름도.”

아득, 이를 가는 기영의 두 눈이 분노로 가득 찼다.

약속 시간 10분 전, 배에 오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끼이이익-

민준의 자동차가 복잡한 연안 부두에 멈춰 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항구에 거대한 물류 창고가 길게 꼬리를 물고 늘어져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민준은 시계 화면에 보이는 점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 수많은 컨테이너들 중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까만 전투복 바지에 방탄조끼를 입고 달리는 민준을, 사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영화 촬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사람들은 곧 흥미를 잃고 그에게서 눈을 돌렸다.

강설.

설을 생각하자 민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달리는 속도가 더디게만 느껴져 민준은 입고 있던 무거운 방탄조끼를 벗어 던졌다.

시계 화면의 빨간 점과 민준의 위치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는 점점 더 항구에 가까워졌다.

항구에는 곧 출항을 앞둔 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선체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를 따라 수면 위에서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출항. 기영이 설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민준은 대형 컨테이너 상단의 숫자들을 빠르게 훑어 읽으며 달렸다.

211, 212, 213…….

213.

민준은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숨을 헐떡거리며 213이라고 써진 컨테이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 상단에 노란 글씨로 커다랗게 213이라는 숫자가 써진 컨테이너는 다른 컨테이너와 달랐다.

한국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건장한 동양인들이 컨테이너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항구의 다른 사람들과 분명히 달랐다.

민준은 그 사람들 중 한 명을 알아보았다.

예전 대통령의 취임식 날 본 적이 있는,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였다.

민준은 그들의 눈을 피해 214라고 써진 컨테이너 측면에 몸을 바짝 붙이고 섰다.

그는 왼쪽 옆구리에서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꺼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천천히 방아쇠를 걸며, 민준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들이 밖을 지키고 서 있는 걸 보니 컨테이너 안에 설이 있는 게 확실해 보였다.

나의 강설이.

**

민준은 213번 컨테이너 쪽으로 접근하여 가까이 있던 남자의 목을 돌렸다.

남자는 갑자기 목 뒤에서 가해지는 고통에 신음 한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민준은 몸이 축 늘어진 그를 어두운 바닥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컨테이너 틈 사이로 무장한 남자들의 위치를 빠르게 확인했다.

밖에 보이는 남자는 모두 셋. 컨테이너 위에 한 명, 좌, 우에 각각 한 명씩 있었다.

구도상 한 명이 더 있을 것 같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슈욱.

213번 컨테이너 지붕 위에 서 있던 남자가 민준의 총을 맞고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에 컨테이너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남자 둘이 민준을 찾아 양쪽에서 컨테이너를 돌아 나왔다.

슈욱, 철컥, 슉.

작은 소음과 함께 총탄이 어둠을 가르며 연달아 목표물을 향했다.

하아하아.

민준이 가쁜 숨을 내쉬며 컨테이너 앞에 섰다. 그리고 컨테이너의 무거운 철문을 있는 힘껏 좌우로 열어젖혔다.

캄캄한 컨테이너 안으로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갔다.

“강설!”

민준이 컨테이너 안으로 다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저만치 안쪽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설이 보였다.

“거기까지.”

설을 향해 달려가려던 민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기영이, 얼굴이 파랗게 질린 설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서 있었다.

찰나의 순간 민준과 설의 눈이 스치듯 허공에서 마주쳤다.

‘괜찮아?’

짧은 순간이었지만 설은 민준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이며 멈추고 있던 숨을 힘겹게 뱉어냈다.

민준이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기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민준이 붙여놓았던 GPS를 호텔에 버리고 왔다.

설의 핸드폰과 짐도 중간에 다 버리고 왔는데, 민준이 여길 어떻게 알고 왔는지 기영은 기가 막혔다.

민준이 이곳에 왔으니 곧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 도착할 것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지금 혼자였고, 그건 아직 주변에 민준의 아군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놀랐던 가슴을 그제야 진정시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통령이야. 이깟 딸의 목숨보다는 그 파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거군. 하지만 그쪽이 제안을 거절했으니 나도 영애를 곱게 돌려보낼 수가 없는데, 어떡하지?”

기영은 총구를 설의 머리에 대고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순간 설이 두 눈을 질끈 감았고, 기영을 향해 총을 겨눈 민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첫 발은 비워놓았지만 두 번째는 아니야, 총 버려.”

민준이 공포에 질린 설을 바라보며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강설.”

어깨를 가늘게 떨고 있던 설이, 젖은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민준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툭!

민준이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기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 주임, 강 주임 데리고 어딜 가려고? 좋은 데 가려면 나도 데리고 가지그래?”

“누가 안 주임이야! 이 상황에 아직도 회사원 놀이가 하고 싶어? 왜, 대리님이라고 불러줄까?”

기영이 격양된 듯 목에 핏대를 세우며 민준에게 소리를 질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세 사람은 같은 회사를 다니며,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던 사이였다.

민준이 기영의 감정을 자극하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인 이상 기영도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백 회장의 심부름을 하던 일을 제외하면, 기영도 직장 동료들과 함께하는 회사 생활이 나쁘진 않았다.

건우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대로 잊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안기영.”

“수작 부리지 마, 김민준. 내가 그딴 도발에 넘어갈 것 같아?”

“강설은 두고 가.”

“하! 눈물겨운 사랑이네. 그런데 어쩌지? 더 놀아주고 싶어도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야, 아무래도 먼저 가야 할 것 같은데 길 좀 비켜줘.”

기영이 설을 일으켜 세워 머리에 총구를 대고 천천히 민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민준은 점점 가까워지는 기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민준은 기영을 잡을 타이밍을 찾고 있었고, 기영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습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둘 모두에게 어려운 싸움이었다.

갑자기 기영이 민준의 등 뒤를 슬쩍 바라보며 눈짓을 했고, 기영의 시선을 쫓아간 설이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저만치 앞에서 민준의 등 뒤로 기다란 총구가 서서히 겨누어지는 게 보였다.

“안…….”

설의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하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민준이 바닥에 떨어진 총을 재빨리 집어 들고 뒤로 돌며 방아쇠를 당겼다.

슈우욱.

윽!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컨테이너 밖에 서 있던 남자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탕!

그리고 거의 동시에 컨테이너 안에는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기영이 쥐고 있던 까만 총구에서 희뿌연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올랐고, 그 순간 민준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민준은 총을 쥐고 있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의식은 흐릿해졌다.

붉은 선혈이 순식간에 그가 입고 있던 셔츠를 빨갛게 물들였다.

“이번엔 머리?”

기영이 민준의 머리를 향해 다시 한 번 총구를 겨누었다.

“아아아, 안 돼, 안 돼!!”

설이 울부짖으며 달려가 휘청거리는 민준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민준을 감싸 안은 설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민준의 등을 꽉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본 기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둘 다 죽든가, 그럼.”

설의 등 뒤에서 기영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슈욱!

탕!

간발의 차이로 컨테이너 안에서 작고 큰 총성이 연달아 두 번 울렸다.

기영이 두 눈을 크게 뜬 채 털썩 무릎을 꿇었고, 몸을 돌려 설을 두 팔로 감싸 안은 민준의 몸이 그제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설이, 민준의 품 안에서 숨을 멈추었다.

쿵.

기영이 권총을 떨어뜨리며 쓰러졌다. 기영의 어깨에서 시작된 붉은 핏물이 그녀의 머리카락 옆으로 진득하게 번져나갔다.

마침내 민준이 쥐고 있던 권총이 툭 떨어졌다.

아아.

민준이 괴롭게 숨을 헐떡이며 컨테이너 바닥 위에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이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지 않았다.

절로 감기는 눈을 뜨려고 해도 눈앞이 자꾸 흐려졌고, 설의 고통스런 울음소리만이 먼 곳에서 환청처럼 들려왔다.

“……강설, 눈 감아.”

민준이 희미하게 중얼거리며 마침내 설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 아…….”

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그녀가 울고 있는데도 민준은 감고 있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 떠, 눈 떠요.”

설은 민준의 귀에 대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데, 나를 보고 웃어야 하는데.

민준의 팔을 타고 흐른 붉은 핏물이 바닥에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설아!”

그때 누군가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컨테이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설아! 김민준!”

두두두두-

헬리콥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다. 설을 꽉 끌어안고 미동도 없던 민준의 두 팔이 그제야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비슷한 시각, 인천국제공항에서 항공권을 발권하고 대기 중이던 서 박사가 긴급 체포되었다.

살인, 살인미수 및 납치, 납치 공모, 산업스파이 등 무거운 죄목들이 백 회장과 안기영, 그리고 서 박사에게 차례로 붙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사건은 언론에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몇몇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있었지만, 영화 촬영이거나 혹은 특수부대 모의 훈련 정도로 의견이 분분히 나뉘다 그 반응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시들해졌다.

그리고 얼마 뒤, 모 대기업 회장이 중요한 산업 기밀을 해외로 빼돌리려다 긴급체포 되었다는 소식이 짤막한 뉴스로 전해졌을 뿐이었다.

백 회장은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안기영이 가엾어 살갑게 대해준 것이 전부라며 안기영과 서 박사에게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런 백 회장의 구속이 결정된 것은 건우가 핸드폰 녹음 파일을 서 박사의 살인 증거물로 검찰에 넘긴 후였다.

녹음된 음성 파일 안에는 서 박사와 공모한 백 회장의 지난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백 회장은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건우는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고, 참고인 조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었지만, 갑작스런 백 회장의 구속에 그룹 계열사 전체가 크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수만 명의 직원과 그 가족들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건우에겐 자기 연민과 괴로움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민준은 몇 시간을 거쳐 어깨와 가슴에서 두 개의 총알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주요 장기를 피해 총알이 박혔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워낙 가까이에서 총을 맞았기 때문에 내상이 심했다.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로 수술 중 큰 위기도 여러 번 넘겨야 했다.

그의 주치의는 피를 그렇게 많이 흘리고도 민준이 살아 있는 건 기적이라고 말했다.

공포스러웠던 그날 이후 설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고 부모님의 뜻에 따라 청와대 사택으로 들어갔다.

정말 다행인 것은 그날을 머릿속에 계속 떠올릴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설은 깨어 있는 내내 민준을 생각했고, 그의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소리 내서 울 수 없는 추운 여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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