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난 여자가 있는데 (1)2016.04.21.
한국병원 VIP 병실.
삐-
침대 옆 가습기에서 하얀 수증기가 공중으로 뿜어져 나왔다.
스르륵-
병실 문이 부드럽게 옆으로 밀리며 열렸고, 설이 환하게 웃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잘 잤어요? 밖의 날씨가 너무 더워요. 차라리 비라도 좀 왔으면 좋겠는데.”
설이 투덜거리며 민준의 침대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그는 2주가 지났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산소호흡기를 낀 채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민준이 힘을 내고 있기에 설도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만 좀 자고 일어나요.”
설은 민준의 몸 위에 가만히 고개를 얹으며 민준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아줘야 민준이 다시 돌아올 것 같았다.
“넘어지지 말고, 얼른 나한테 와요.”
설이 조그맣게 속삭이며 그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여기 봐요, 지금 당신이 있는 곳이랑 내가 있는 곳이랑 똑같죠?”
그녀가 민준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 화면을 톡톡 두드리자 빨간 점이 나타나 깜박였다.
민준의 얼굴, 손, 손목시계. 설은 매일매일 민준에 대해 더 많이 알아 갔다.
이렇게 화면을 톡톡 두드리면 민준이 설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도 민준의 손을 어루만지다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설의 위치는 어차피 청와대가 아니면 한국병원뿐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민준의 병실 문을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설이 병실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김 국장을 발견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오셨어요?”
“이제 그만 오셔도 된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민준이가 깨어나면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은 김 국장의 나무라는 말투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두 눈을 차분히 내리깔았다.
설이 병원에 매일 찾아오는 걸 국장님이 불편해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께서 걱정하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짓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기어이 국장님에게 한마디 하신 모양이었다.
대통령은 설이 매일 병원으로 출근한다는 걸 알고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설의 마음이 단지 죄책감 때문으로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단한 사위를 딸의 짝으로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굴곡 많았던 딸의 인생에, 이제 평탄한 시간만이 남아 있길 바라는 아버지로서의 마음 때문이었다.
김 국장님의 난처한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설은 그날 이후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민준 옆에 있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김 국장은 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부쩍 야위어 있었다.
설이 매일 병원으로 출근한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편치 않은 건 김 국장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민준이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사람이 영애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시작된 가슴의 통증은 시간이 흘러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김 국장도 부모인지라, 설의 핏기 없는 얼굴보다는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을 민준의 심정이 곱절은 더 아팠다.
김 국장은 민준이 이렇게 된 게 꼭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이 박사님은 이런 아이들의 미래를 내다보시기라도 한 건지…… 그래서 그런 부탁을 하셨나.
김 국장이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설을 바라보았다.
“아침은 먹었습니까?”
설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잘 먹어야 기운도 나고 병문안도 올 수 있어요.”
“네, 그럴게요.”
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지만 요즘 그녀는 무얼 먹어도 맛이 없어서 음식에 손을 거의 대지 않고 있었다.
“혹시 중국 음식 좋아합니까?”
“네……?”
“내가 아는 집이 있는데, 식사 안 했으면 같이 갑시다.”
김 국장이 먼저 등을 돌려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설은 잠시 머뭇거리다 김 국장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다.
김 국장이 그곳에 발길을 끊은 지는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다.
옛날 이인호 박사님과 함께 간 이후로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던 곳이다.
재권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발길을 끊었던 곳인데, 이렇게 아들 민준도 아닌 이 박사님의 손녀를 데리고 다시 그곳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
김 국장과 설을 태운 자동차가 어느 낡은 중국집 앞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은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고 내렸고, 김 국장은 잠시 문 앞에 서서 가게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는데도 겉모습이 기억 속 모습과 다르지 않아 그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불편하면 말해요. 다른 곳으로 가도 되니까요.”
그래도 선뜻 안으로 발을 디딜 용기가 나지 않아 그는 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조금 전부터 설이 계속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국장은 만약 설이 내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핑계로 다른 곳을 갈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라.”
설이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여기 알아요. 옛날에 할아버지랑 자주 왔었고 또, 민준 씨랑도 와 봤어요.”
“민준이랑 같이 여길 왔었다고요……?”
“네, 짜장면 좋아한다고 해서 제가 데리고 왔어요.”
“민준이가 짜장면을 좋아한다고 했습니까?”
줄곧 표정 없던 김 국장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네. 맛있다고, 저한테 나중에 다시 오자고 했어요.”
김 국장의 눈꺼풀에 경련이 일었고,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울컥하는 마음에 얼른 등을 돌리며 눈가의 물기를 재빨리 훔쳐냈다.
설은 의아한 얼굴로 김 국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병원이야?
민준의 병실, 침대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설의 핸드폰이 지이잉 울렸다. 건우였다.
설이 픽 웃으며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병원이에요.”
-나 거의 다 왔는데, 괜찮으면 잠깐 들러도 될까?
“전 괜찮은데 병실 주인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누가, 김민준이?
“네.”
-하하.
전화기 너머 건우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설이 건우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일부러 이런다는 걸 건우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에 대한 건우의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내가 커피 사다 줄까?
“아메리카노요. 이왕이면 샌드위치도 같이요.”
-진짜 김민준한테 미움 받겠네. 그래도 나한텐 강설이 더 중요하니까, 뭐. 열 받으면 일어나서 욕을 하든가.
설이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설이 마음에 상처를 입은 만큼 건우도 많이 아팠다.
백 회장은 현재 구속 수사 중이고, 아마 건우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못할 터였다.
두 사람 모두 지금 누구를 위로해줄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은 각자의 방법대로 상처를 치유하며 겉으로 내색할 수 없는 고통을 견뎌낼 뿐이었다.
“건우 씨가 나한테 커피 사다 준대요, 그리고 샌드위치도.”
설이 장난스런 말투로 민준에게 말을 걸었다.
평소의 민준이라면 분명 퉁명스럽게 대꾸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요. 안 그럼 나 매일매일 다른 남자랑 커피 마실지도 몰라요.”
설이 민준의 몸 위로 가만히 고개를 기대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해가 졌는데, 민준은 오늘도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민준에 기대 깜빡 잠이 들었던 설이 병실 문 열리는 소리에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렸다.
“피곤하면 그만 들어가지그래.”
건우가 커피와 샌드위치가 들어 있는 하얀 봉지를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들어가 봐야 해요.”
“내가 데려다줄까?”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아, 경호관.”
설이 웃으며 건우가 건넨 커피를 받아 들었다.
“참, 오늘 회사로 김민준 여동생이 찾아왔던데.”
응? 아, 김서연 씨.
“데스크에서 김민준 대리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퇴사했다니까 많이 놀랐나 봐. 오빠가 출장 간 줄 알고 있더라고.”
“만났어요?”
“어, 아침에 출근하는데 누가 안내 데스크에 동동 매달려 있어서.”
건우가 오늘 아침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웃었다.
“언제는 식당 밥이 맛있다고 제일 좋은 회사라고 하더니, 오늘은 악덕 기업이라며 나보고 빨리 이 회사 그만두고 나오라 하더라고.”
씩씩거리고 있었을 서연의 화난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자 설이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남매가 다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하는 행동이 참 많이 닮았다.
“기다리는 가족들은 많이 힘들 것 같아요.”
“힘들겠지.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리는 사람을 두고 온 사람도. 김민준도 지금 많이 힘들 거야. 아마 다시 돌아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겠지.”
“…….”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그래도 괜찮겠어?”
“그건…… 이 사람이 깨어나면 대답해 줄게요.”
요즘 민준의 곁에서 설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같았다.
설이 매일 마음 졸이며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민준이 돌아와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언제나 그녀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봐, 김민준. 빨리 안 일어나면 강설은 그냥 내가 가진다?”
“뭐라고요?”
설이 건우를 흘겨보았고, 건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었다.
까딱-
민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깜깜한 새벽, 민준이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여긴 어디일까, 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두 번째였고, 또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어둠 속에서 아버지의 숨죽인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민준아!”
눈을 떴는데 입술이 생각처럼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민준은 말없이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에게도 서연이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병실을 지키고 있었을, 아버지 김 국장의 얼굴을.
“정신이 들어?”
민준과 눈이 마주치자 김 국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병원의 연락을 받고 새벽에 달려오긴 했지만, 정신이 돌아왔다던 민준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정신이 돌아왔다는 게 착각이었나 싶어 가슴속에서 뜨거운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민준이 눈을 뜬 건 그때였다.
민준이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웬만해서는 침착함을 잃지 않는 분인데,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꽤 크게 다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오른손과 왼손 끝에 힘을 주어 보았다. 오른쪽 발가락과 왼쪽 발가락도.
까닥거리는 손끝 발끝을 보며 다행히 총은 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민준은 입안이 말라 있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왜, 어쩌다 지금 여기에 누워 있는 거지?
“김민준…….”
충격으로 얼굴이 굳어진 김 국장이 벌어졌던 입술을 서서히 다물었다.
민준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파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래도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과 팔의 통증을 제외하고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김민준, 죽다 살았나 보네.
**
몇 시간 뒤.
병실 문이 옆으로 좌르륵 열리고, 급하게 왔는지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여자가 헉헉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도 안 계신데, 난처하게.
“흐흑.”
“…….”
여자는 민준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서서 두 손으로 신음이 터져 나오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간호사도 아니고 NIS에는 저런 동료도 없는데, 도대체 저 여자는 누구지?
민준은 머리가 또 지끈거려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많이 아파요?”
여자가 다급하게 침대 옆으로 뛰어오더니 민준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아무리 몸에 힘이 없어도 여자의 손을 뿌리칠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다.
민준이 그녀의 손을 탁 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또 아파요?”
“…….”
여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아, 우는 여자 딱 질색인데.
“오셨습니까.”
때마침 김 국장이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김 국장은 조금 전 민준의 주치의와 면담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민준이 눈짓으로 설을 가리키며 김 국장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이건 뭡니까?’
“영애시다, 네가 이번에 구출해낸 분.”
김 국장이 설의 눈치를 살피더니 체념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설이 고개를 돌려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민준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설마.
“나예요.”
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라고요.”
“……아.”
무언가 깨달은 민준이 짧게 탄성을 질렀다.
“영광입니다, 영애 님.”
그리고 영애에게 가장 적당해 보이는 인사말을 골라 말했다. 그런데 영애는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있던 영애가 또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걱정되어 한걸음에 달려온 사람이었다. 이 지경이 됐으니 많이 놀라기도 했겠지. 고맙기는 한데, 그래도 귀찮아.
“전 괜찮습니다.”
민준은 마음의 소리를 꾹 눌러둔 채,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대답했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그러니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김 국장이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설을 다독거렸다.
의사 말로는 일시적인 단기 기억상실증이라고 했다.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한 경우 가끔 이런 경우가 발생한다고도 말했다.
김 국장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그 어떤 순간에도 절대 냉철함을 잃지 않았던 민준이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워버린 걸 알고, 민준에게 영애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게 되었다.
“저 언제 퇴원합니까?”
민준이 금세 설에게 흥미를 잃고 김 국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아.
김 국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설을 바라보았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하지만 김 국장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영애는 민준의 얼굴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몸 뚫어지겠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준은 남은 인내를 모두 끌어모아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그래도 영애가 움직이질 않자 김 국장은 영애의 어깨를 다독이며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민준이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영애를 구출했다, 라. 영애가 어디 해외 순방이라도 나갔다 납치라도 당했었나?
“윽.”
영애가 다녀가고 나서 갑자기 가슴의 통증이 더 심해졌다.
민준이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
“의사가 일시적인 거라고 했으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병실 복도로 나온 김 국장은 다시 한 번 더 설을 안심시켰다.
사고 당시의 정신적인 충격으로 이렇게 되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언제쯤이면 괜찮아진다고 했어요?”
이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설이 간절한 눈빛으로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 국장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금방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도 깨어났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다행이었다. 너무 다행인데, 그래도 설은 그녀를 다정하게 바라보지 않는 민준이 가슴 아팠다.
툴툴거리고 퉁명스럽게 말을 해도 항상 두 눈에 애정이 가득했던 민준이 설을 타인처럼 바라보는 눈빛은 낯설고 또 슬펐다.
“내일 아침에 올게요.”
“당분간 오시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김 국장의 머릿속에, 조금 전 어서 설을 치워달라며 눈짓으로 항의하던 민준이 떠올랐다.
바보 같은 놈. 자기 속이 어떤지도 모르고, 나중에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그래도 올래요.”
설은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속으로 으쌰, 기합을 넣었다.
민준은 설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눈을 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중에 민준의 기억이 돌아오면 그때 가만두지 않으면 된다.
설은 그가 기억해내면 두고두고 몇 배로 괴롭힐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럼, 오늘은 잘 부탁드릴게요.”
설이 김 국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뒤돌아 멀어져갔다.
설의 뒤에 경호관 두 명이 따라붙는 걸 확인하고 난 뒤, 김 국장은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갔습니까?”
민준이 천천히 왼팔을 굽혔다 펴며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민준은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지, 오직 그것만이 궁금할 뿐이었다.
“김민준.”
“네.”
이번엔 오른팔을 굽혔다 폈다.
윽.
민준이 날카롭고 짜릿한 통증에 인상을 팍 구겼다.
제대로 고장 났네, 진짜.
“영애 말이다.”
“말씀하세요.”
“네 걱정을 많이 했어.”
“그것참 별일이네요.”
“…….”
아무래도 오른팔 운동을 더 많이 해야 할 듯싶은데.
“그런데 무슨 임무였습니까? 총격전까지 벌어진 걸 보면 견적이 꽤 나오는 일이었을 텐데요.”
“임무가 아니었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럼, 내가 아니고 다른 요원의 임무였나?
“네가 영애를 구하겠다고 제멋대로 혼자 뛰어 들어갔지.”
“제가요?”
이 김민준이가요?
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며 검지로 자신의 몸을 가리켰다.
“김민준.”
“네.”
‘그렇게 힘들었냐.’
김 국장은 목구멍까지 눈물이 차오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일을 허락하는 게 아니었다. 절대 안 된다고, 다른 일을 하라고 등을 떠밀었어야 했다.
지 애비와 같은 일을 하면서부터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 같아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불안한 삶이 으레 제 삶인 줄 알고 있는 녀석이어서 그랬다는 걸 몰랐다.
다른 세상도 있다고, 따듯하고 평온한 다른 세상도 있으니 이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말라고 했어야 했다.
재권이라면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김 국장은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너, 이 일 그만두고 다른 일 알아보는 게 어때?”
“참나, 아버지. 지금 제정신이세요?”
민준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아픈 건 민준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것 같은데, 진지한 눈빛을 보니 농담을 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도대체 그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민준이 얼굴을 잔뜩 구기며 오른팔을 서서히 굽혔다 폈다.
갑자기 조금 전 병실을 나간 박애주의자 영애의 얼굴이 민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이 많은 사람인가.”
민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내 심장. 빌어먹을, 심장에 총을 맞은 것도 아닌데.
민준이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