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난 여자가 있는데 (2)2016.04.26.
“병실 되게 좋다, 민준아.”
후르릅-
박 팀장은 자신이 사온 복숭아 통조림을 딴 뒤 흡입하듯 통째로 들이마셨다.
민준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박 팀장을 바라보며 왼쪽 어깨를 천천히 돌렸다.
그가 병문안을 온 것 같긴 한데 아까부터 계속 식사(?)를 하고 있어서 물어보고 싶은 말을 다 묻지 못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제가 영애 경호 임무를 맡았고, 임무가 변경되었는데에도 불구하고 영애를 구하러 혈혈단신으로 그곳에 난입했다, 이 말씀이십니까? 작전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민준은 도무지 믿겨지지 않아 박 팀장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응. 미친 거지.”
후르릅-
박 팀장은 통조림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톡톡 털어 마신 후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제가 왜요?”
“나도 너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네가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하냐? 참, 그건 그렇고.”
박 팀장이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민준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를 바라보는 박 팀장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또 뭡니까.”
“내가 너한테 진짜 서운하다, 김민준.”
“에?”
“아무리 우리가 이런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 청첩장도 안 주고. 솔직히 많이 섭섭하더라.”
지가 요원이라고 결혼도 몰래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민준은 나쁜 놈이었다.
“무슨 청첩장이요?”
“너 결혼했다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직장 선배이고 동료인데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국장님도 그래, 어떻게 우리한테까지 비밀로 할 수가 있어? 어?”
“제가, 결혼을, 했다고요?”
민준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기억을 잠깐 잃었다고 지금 사람들이 단체로 나를 놀리는 건가?
“그만하세요, 재미없습니다. 왜, 애도 있다고 하지 그러십니까?”
민준이 잔뜩 인상을 구기며 성질을 냈다.
도대체 병문안을 하러 온 건지 병을 주러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 니가 나한테 연애도 했고 결혼도 했다고 말했잖아! 지금 제일 황당한 사람이 누군데 이래?”
“제가, 팀장님께, 그렇게 말씀드렸다고요?”
“죽을래?”
“…….”
다른 건 다 우수한데 거짓말 탐지기 훈련만 유일하게 통과하지 못했다는, 슬픈 꼬리표를 가진 박 팀장님이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진짜 내 입으로 저 말을 지껄였다는 건데. 가만, 내 차트에 정신과 전문의 소견이 있었나?
“그럼, 팀장님은 그 여자가 누군지도 아세요?”
제 입으로 묻고도 우습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연애도 했고 결혼도 했다는 헛소리를 지껄인 걸 보니 상상으로라도 내가 누군가를 그려낸 것 같은데, 어쨌든 그 대상이 있었다는 게 아닌가.
“몰라. 그러니까 네가 엉큼한 놈이지.”
그런데 만약 나한테 여자가 있었다면, 그 여자는 왜 병문안도 안 오는 거지? 누군지 알아야 전화라도 해보…….
핸드폰! 아버지가 내 차 바닥에 떨어져 있던 걸 분명히 주워서 가져다 놓았다고 했는데.
“제게 전화 좀 걸어주세요, 팀장님.”
단서를 찾았다는 기쁨에 민준이 입가에 씩 미소를 지었다.
**
잠시 후, 민준이 손에 핸드폰을 쥐고 최근 통화목록을 쳐다봤다.
강설, 강설, 강설, 강설, 박 팀장, 강설, 강설…….
나한테 진짜 여자가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 이후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강설이라는 여자는 아마 내가 다친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내 걱정을 많이 했을까?
“……이름 예쁘네, 강설.”
입으로 강설이라는 단어를 내뱉자 갑자기 눈가가 뜨끈해지며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강설.”
다시 한 번 입 밖으로 이름을 부르자 가슴이 아프게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나 김민준에게 진짜 여자가 있었다.
그것도, 사랑하는 여자가.
**
다음 날.
민준은 아침 일찍부터 물리치료실을 찾았다. 병원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민준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 현업에 복귀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다친 것도 모르고 민준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그 여자의 얼굴을 봐야 했다.
민준은 그 여자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 원인을 알 수 없는 가슴의 고통을 줄여야 할 것 같았다.
두 시간 넘게 물리치료실에 있던 민준이 마침내 병실로 돌아왔다.
어깨와 등 근육의 통증이 상당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어 고통도 느낄 수 있으니, 욱신거리는 가슴의 통증마저도 고맙게 느껴졌다.
병실 문을 열고 무심코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민준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아, 이런.
병실 문이 열리자 창문 밖을 바라보고 서 있던 영애가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민준이 병실 문을 닫고 침대를 향해 한 발 한 발, 더딘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도와줄까요?”
영애가 얼른 그의 곁에 다가와 한쪽 팔짱을 끼며 그를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아! 아픕니다.”
민준은 짧은 신음과 함께 인상을 찡그리며 제게서 팔을 빼라는 말을 돌려 말했다.
영애가 천천히 팔을 빼내며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준은 그녀의 시무룩한 표정이 신경 쓰였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며 천천히 침대로 몸을 옮겼다.
“아침부터 또 웬일이십니까?”
무슨 영애가 저렇게 친근(?)하게 구는지, 두 번 구해줬다가는 짐 싸들고 들어와 살 기세네.
“당신은 몰랐겠지만 여기에 매일 왔었어요.”
“전 이제 괜찮으니 더 이상 마음 쓰지 마십시오.”
“당신 진짜, 내가 기억이 안 나요?”
울 것 같은 영애의 얼굴을 보자 민준은 가슴이 또 뻐근해졌다.
힘들게 물리치료를 하고 와서 근육에 무리가 간 것인지, 아니면 기억을 잃기 전에 연애를 했다는 내가 그새 감성이 풍부해지기라도 한 건지 모르겠다.
“……당신이 나한테, 돌고래라고 그랬잖아요.”
영애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고래는 안 닮았는데. 동물 중 굳이 고르자면 하얀 토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울고 있는 하얀 토…….
“…….”
영애가 고개를 숙이며 뺨에 흐르는 눈물을 재빨리 닦아냈다.
당황스럽게도 그 순간 민준은, 영애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안으면 품 안에서 작게 꼬물거릴 것만 같았다.
그러다 민준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변태새끼.
총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맞은 게 분명했다.
영애는 그냥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일시적인 호감을 겪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니 충분히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빨리 마음을 깨닫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죄송합니다만 저에게는 여자가 있습니다, 영애 님.”
역시 효과가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아니, 효과가 없었다. 영애는 오히려 무서운 눈으로 민준을 노려보았다.
“정말입니다. 강설이라고, 여자가 있습니다.”
민준은 진지하게 말했는데,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민준에게 달려와 그의 목을 두 팔로 와락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으윽.
숨쉬기 힘들 만큼 짜릿한 고통이 척추 뼈를 타고 아래로 흘렀다.
“엉엉, 미워할 거야, 엉엉…….”
“…….”
민준은 본능적으로 영애의 몸을 밀어내려다 그만두었다. 그는 몸에 누가 닿는 걸 싫어하는데, 영애는 왠지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아주 복잡하게 되었다.
오늘부로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지조 없는 바람둥이라는, 객관적인 사실 하나가 추가되었다.
어이없게도 심장이 쿵쿵, 요란한 북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얼른 나아요.”
영애가 작은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민준의 귓가에, 그녀의 눈물이 스며들었다.
“울지 마.”
민준은 제 입으로 말을 뱉어내고도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순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영애가 울음을 그쳐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설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두 눈을 크게 뜨고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아. 반말해서 화났나.
“아닙니다, 아무것도.”
“좀 전에 나한테 반말했잖아요.”
“잘못 들으셨습니다.”
귀도 밝네.
민준이 결백하다는 얼굴로 두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가에 아직 눈물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민준의 기억이 돌아오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신도 나한테는 돌고래예요.”
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
다음 날 아침.
민준이 침대에 팔짱을 끼고 앉아 못마땅한 얼굴로 병실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영애가 아침에 온다고 해서 재활 운동도 가지 않은 채 병실에서 벌써 몇 시간째 대기 중이었다.
“참나, 아니 온다고 했으면 오던가.”
물론 그가 영애를 기다리고 있는 건 절, 대, 아니었다.
그저 병실에 민준이 없으면 또 쓸데없이 운다거나 돌고래를 찾는다며 병원을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영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염려했을 뿐이었다.
민준이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자 등에 싸한 통증이 밀려왔다.
“진짜 신경 쓰이게 하네.”
괜히 부아가 나 왼쪽으로 몸을 홱 돌려 눕다가 괜히 어깨와 척추 뼈를 관통하는 쓰라린 고통만 겪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노크했고, 곧 문이 옆으로 스르르 열렸다.
그는 자신이 영애를 기다렸다고 그녀가 오해할까 봐 일부러 돌아눕지 않았다.
“자요?”
영애다!
민준이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지으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천천히 몸을 돌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제가 그만 오셔도 된다고 분명…….”
그가 입을 다물었다.
영애는 자기 몸통만 한, 하얀 곰인형을 안고 있었다.
“이거 가져오느라고 늦었어요.”
“전 그런 선물 안 받습니다.”
민준이 정색을 했다.
“누가 이거 당신한테 준다고 했어요? 이거 내 거예요. 되게 크죠? 이렇게, 인사도 해요.”
설이 곰인형 한쪽 팔을 붙들고 민준에게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
지금, 나한테 곰인형 자랑하려고…….
“기억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내가 가져왔어요.”
“그게 저랑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이 나한테 선물로 준 거예요.”
설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곰인형을 안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하다하다 영애한테 곰인형 선물까지(?) 미쳤네, 김민준.
“내가 빌려줄 테니까 퇴원할 때까지 여기에 둬도 돼요.”
“아니요, 괜찮습니…….”
설이 곰인형을 민준에게 풀썩 안겼고 그는 얼떨결에 곰인형을 받아들었다.
“폭신폭신해서 잘 때 안고 자면 되게 따듯해요.”
설은 갈 곳이 있는 것처럼 다시 일어났고, 민준은 그녀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내가 올 때까지 잘 데리고 있어요, 알았죠?”
“……어디, 갑니까?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민준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 후임자한테 인수인계 해줘야 해요. 시즌 마무리를 못 하고 그냥 나와서 마무리도 도와줘야 하고요. 이따 일 끝내고 백건우 씨랑 같이 올게요. 당신 깨어났다는 이야기 듣고 보고 싶어 해요. 괜찮죠?”
백건우, 얜 또 누구지?
분명 남자 이름이었다. 그러나 민준에게 썩 정감 가는 이름은 아니었다.
“안 오셔도 됩니다.”
기분이 묘하게 나빠졌다. 민준이 곰인형을 침대 옆에 내려놓으며 쌀쌀맞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곰인형을 찾으러 최소한 한 번은 더 오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와도 점심은 지나야 하니까 점심 먹고 운동도 하고 있어요, 갑갑한데 병실에만 있지 말고요. 나 어디 있는지 궁금하면 그거 봐요.”
설이 웃으며 눈짓으로 민준의 손목시계를 가리켰고, 민준은 자신의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아, GPS. 이게 있는 줄 알았다면 병실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됐었는데.
잠깐, 기다려? 누가 누굴, 내가 영애를? 내가 왜?
“그런데 어깨는 이제 좀 괜찮아요? 팔도 이제 움직일 수 있…….”
설이 민준의 어깨를 향해 무심코 팔을 뻗었다.
“아얏!”
하지만 민준의 어깨에 손이 닿질 않았다. 민준이 설의 손목을 낚아채 아프게 쥐었다.
“만지지 마십시오.”
민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설을 응시했다.
그는 누가 어깨에 손대는 걸 진저리칠 만큼 싫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영애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파요.”
설은 민준을 바라보며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붙잡힌 손목이 욱신거리며 싸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파요.’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 영애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다시 한 번 반복 재생되었다.
민준이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영애의 손목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몸에 손대는 거 싫어합니다.”
많이 아플까, 아플 텐데.
민준의 가슴속에 작은 폭풍우가 일었다.
“팔에 힘이 돌아왔나 봐, 금방 낫겠어요.”
설은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 채 빨갛게 부어오른 손목을 매만졌다. 아픈 손목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가 눈앞에 있는데도 설은 민준이 보고 싶었다. 설을 다정하게 안아주며 부은 두 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던 민준이 너무도 그리웠다.
“다녀올게요.”
영애는 바닥을 향한 시선을 들지 않았고, 까만 속눈썹 끝은 물기로 젖어 있었다.
영애의 눈물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는지, 민준의 가슴이 습기를 머금고 눅눅해졌다.
“미안합니다.”
내가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울지 않을까.
‘미안해.’
또다시 환청이 들렸다. 그런데 이건 민준의 목소리였다.
애틋하고 뭉클한 마음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나는 강설이라는 여자한테 이런 말을 했을까.
“미안합니다, 영애 님.”
괜찮냐고 손을 잡아줄 순 없지만, 영애가 그만 눈물을 멈춰 주었으면 좋겠다.
“괜찮아요.”
영애는 여전히 시선을 들지 않은 채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지 않아 보였다.
민준의 가슴속으로 물기가 번져나갔다.
“나 갈게요.”
영애는 조금 전과 달리, 민준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영애가 민준에게 등을 돌리고 쫓기듯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
이젠 영애가 오지 않으려나.
민준이 고개를 돌려 옆에 놓인 하얀 곰인형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민준의 담당 간호사는 조금도 친절하지 않았다.
잠깐만 나갔다 와도 되냐는 민준의 정중한 질문에, 간호사는 못 들은 걸로 하겠다며 그의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하지만 민준이 셀프로 판단하기에는 가슴과 어깨가 여전히 뻐근하긴 했지만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두 다리는 매우 멀쩡했고, 기억장치에 작은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일상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또한, 퇴원을 하게 되면 입고 나갈 바지와 셔츠가 있었고, 아버지께서 민준의 자동차에서 찾아 가져다 놓은 차 키와 지갑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겠다는 의지가 있으니 더 이상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의 운동은 야외 활동을 하는 걸로 결론을 내린 민준은 천천히 환자복 단추를 풀었다.
그저 잠깐, 영애가 지금도 울고 있는지 아닌지만 보고 올 거였다.
민준은 아무래도 운전은 아직 무리일 것 같아 택시를 탔다.
영애의 위치를 알려주는 GPS의 빨간 점은 아까 전부터 계속 한곳에 머물러 있었고, 그곳은 Boni라는 곳이었다.
**
잠시 후, 택시에서 내린 민준은 회사 앞에 서서 고개를 들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회사 좋네. 그런데 어디로 침투해야 하나.
민준은 1층 로비 회전문을 열고 좌우를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로비는 비교적 한산했고, 왼쪽에 있는 카페에선 기분 좋은 커피 향이 풍겨 나왔다.
민준이 갑자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디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이 문제가 아주 깔끔히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1층 카페 유리창 가까운 테이블에 영애가 앉아 있었다.
영애 앞에 말쑥한 양복 차림의 남자가 마주 앉아 있었고, 영애는 머그잔을 두 손에 쥐고 웃고 있었다.
남자의 표정으로 추측해 보건대 두 사람은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괜히 왔나.
민준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영애가 울고 있지 않고, 웃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쩐지 조금 침울해졌지만 그건 무시하기로 했다.
영애가 괜찮은지 확인했기 때문에 이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왠지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이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준은 두 사람이 카페 유리문을 열고 나오는 걸 보며 얼른 뒤돌아섰다.
젠장.
두 사람은 민준에게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래서, 아직이야?”
“곧 좋아지겠죠, 뭐.”
영애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다행히도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아? 많이 속상하지?”
“그러는 건우 씨는 괜찮아요?”
이 남자가 백건우인가, 어쩐지 이름에서 정감이 느껴지질 않더라니.
그나저나 영애는 애인도 있으면서 왜 쓸데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을 오해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역시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다.
민준이 씁쓸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내가 강설만 하겠어?”
민준의 발걸음이 얼어붙은 듯 그대로 멈춰 섰다.
강설?
민준이 천천히 뒤를 돌아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 김민준 빨리 정신 안 차리면 진짜 강설 데리고 도망이나 가야겠다.”
“치, 그럼 그 사람이 아마 당신 죽일지도 몰라요.”
지금 누가 강설이라는 거지?
“애써 웃지 않아도 돼. 얼굴이 이게 뭐야, 천하의 강설이.”
“이제 강설 말고 강조국이라고 불러 줘요, 진짜 내 이름으로.”
남자는 곁눈질로 힐끗 영애를 쳐다보며 웃었고, 영애는 남자에게 곱게 눈을 흘기며 웃었다.
강설.
‘강설, 눈이 많이 내려서 강설인가. 부모님이 로맨틱하시네.’
강설.
‘자꾸 그렇게 인상 쓰면 얼굴 못생겨진다.’
민준은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깨질 듯 아파와 두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