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난 여자가 있는데 (3)2016.04.28.
“자, 이제 말해 봐.”
“…….”
“네 주인 이름이 진짜 강설이야?”
병원으로 돌아온 민준은 제일 먼저 무릎 위에 곰인형을 앉혀놓고 취조를 하기 시작했다.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애가 강설이라면 그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던 상황들이 얼추 정리가 되었다.
믿기 어렵지만 내가 이 곰돌이를 영애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것도, 영애를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난입했다는 사실도 말이다.
“너 진짜 아무런 기능도 없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순수하게 곰인형을 선물로 주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웠다.
그래도 뭐가 있겠거니 했는데, 진짜 누울 때나 몸을 지탱할 때 빼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눈앞의 하얀 덩어리는 정말 그냥 순수한 인형일 뿐이었다.
베거나 안는, 본연의 충실한 기능만을 가진 인형.
“미친놈. 이젠 인형이랑 말도 하냐?”
민준이 고개를 돌려 박 팀장을 바라보았다.
본인이 드시고 싶은 걸 포장해 와 드시는 취미가 있으신 건지, 오늘은 하얀 비닐봉지 겉에 두리두리 왕 족발, 이라고 써진 족발이었다.
“뭐하러 또 오셨어요?”
박 팀장은 민준에게 하룻밤 새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 따위는 묻지 않고 곧장 소파로 가 앉았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풀어 잘 포장된 족발과 나무젓가락 두 개를 꺼냈다.
“이리 와, 같이 먹게. 뼈 붙는 데 좋을 거야.”
“족발이 뼈 붙는 데 좋다고요? 누가 그럽니까?”
족발이 뼈 붙는 데 좋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뭐든 잘 먹어야 빨리 나을 것 아냐, 어제 보니까 환자식이 형편없던데.”
환자식이 다 그렇듯, 병원에서 주는 밥은 품질은 좋아도 맛은 심심해서 강렬한 맛을 기억하는 혀와 위를 만족하게 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박 팀장님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그건 아주 몹쓸 맛일 것이다.
민준이 소파에 앉은 후 박 팀장이 건넨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그는 박 팀장에게 영업 시작 전이라 아직 문도 열지 않았을 텐데, 이 족발을 어떻게 사온 거냐고 묻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따끈따끈한 족발을 들고 온 걸 보니 아마 미리 부탁해놓았던 것 같았다.
말로 감정을 다 전할 수 없을 때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더 나았다.
“퇴원은 언제 하는 거야?”
“이제 외래 진료만 받아도 될 것 같은데 의사가 아직 말이 없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있으라는 대로 있어. 일찍 나와 봤자 뭐가 좋다고.”
“어차피 한 달 뒤에 나가야 한다면서요, 그전에 빨리 퇴원해야죠.”
한 달 뒤, 민준에게 외국 주재 한국 대사관 파견 근무가 내정되어 있다고 했다.
기간은 2년, 위험한 일도 아니고 한국에 두고 갈 사람도 없는 민준에겐 분명 휴식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민준이 흘끔, 곰인형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유럽이니 얼마나 좋아. 가서 잘 쉬다 와, 금발 머리 아가씨랑 연애도 하고.”
연애?
“참, 팀장님께서 저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박 팀장에게 이미 결혼했다는 말을 했을까, 궁금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박 팀장의 젓가락질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아. 나 어제, 하마터면 사표 쓸 뻔했다.”
“팀장님이 사표를 왜 씁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저, 아직 환자입니다, 팀장님.”
젓가락을 집어 던지려는 박 팀장에게 민준은 자신이 환자임을 분명히 상기시켰다.
“하여튼, 으휴.”
그가 민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두 눈을 부라렸다.
박 팀장은 왜 민준이 결혼하는 걸 알려주지 않았느냐며 김 국장에게 거칠게 항의(?)하다 하마터면 인생 사표를 쓸 뻔했다.
험악했던(?) 순간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박 팀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게 다 저 자식 헛소리 때문이었는데.
박 팀장이 휴우, 한숨을 내쉬더니 젓가락을 다시 야무지게 움켜쥐었다.
민준은 젓가락으로 족발을 집어 먹으면서도 이따금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우습게도 방금 보고 온 영애가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손목이 괜찮은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민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영애인 강설이 민준의 병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저녁 7시경이었다.
그 시간, 민준은 팔짱을 끼고 앉아 곰돌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저녁 먹었어요?”
병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고, 이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민준은 일부러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설을 바라보았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최대한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강설에 대한 마음의 깊이를 확신할 수 없는 지금, 민준에게 확신을 주는 건, 강설의 표정과 목소리에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심장뿐이었다.
뇌보다 나은, 정말 기특한 심장이었다.
“김민준 씨. 몸은 좀 괜찮아요?”
하지만 설은 혼자가 아니었다. 설 바로 뒤에서 이름뿐 아니라 얼굴도 별로 정감이 가지 않던 남자가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
민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꽤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이 민준의 신경을 거슬렸다.
“과일 사 왔는데, 내가 참외 깎아 줄까요?”
“네.”
설이 민준에게 큼지막한 노란 참외를 들어 보이며 물었고, 민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전이었다면 거절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민준에게는 강설이라는 소중한 여자가 있었고, 그건 바로 영애였으니까.
“설아, 내가 도와줄까?”
“됐습니다.”
건우는 설에게 물었는데, 민준이 냉큼 거절을 했다.
민준은 영애 옆에서 얼쩡거리는 남자가 영 마뜩잖았다.
두 사람이 가고 나면 민준은 제일 먼저 박 팀장님께 백건우라는 인물을 조사해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김민준 씨, 기억도 안 난다면서 나한테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 거죠?”
건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억을 잃었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경계하고 싫어하는 민준이 어이없었다.
“……기분 탓이겠죠.”
민준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곰인형과 두 눈을 마주했다.
베거나 깔고 자는 줄로만 알았던 곰인형에게 다른 임무가 하나 더 있었다.
둘 곳 없는 머쓱한 시선이 머무는 곳.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건우 씨도 앉아요.”
설이 침대 옆에 다가와 참외가 담긴 쟁반을 올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멀쩡한 거 봤으니까 나 잠깐 주치의 좀 만나보고 올게.”
건우는 둘의 사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손을 내저으며 병실 문을 나섰다.
노란 참외 껍질이 쓱쓱 벗겨지며 곧 하얀 속살을 드러냈다.
설은 하얀 참외를 균등하게 조각냈고 그중 하나에 포크를 꽂아 민준에게 내밀었다.
“자요, 아.”
민준은 손을 움직일 순 있었지만, 아직 포크를 자연스럽게 쥘 단계는 아니었다.
설은 민준 앞으로 참외를 내밀었고, 그와 동시에 민준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여자 친구 강설이 곧 영애라는 사실이 민준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그래서 민준은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입안으로 들어온 참외는 다디달았고, 아삭아삭 씹는 소리도 청량했다.
“맛있어요?”
잘 먹는 민준이 보기 좋았는지 설이 빙긋 눈웃음을 지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영애는 꽤 예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온화한 분위기가 나는 것이, 확실히 곱게 자란 티가 났다.
“다른 과일도 줄까요?”
설이 웃으며 그에게 다시 한 번 참외 조각을 내밀었다.
그러자 설의 얇은 셔츠 소매 단 아래로 보이는 손목에 옅은 붉은 자국이 보였고, 민준은 눈썹을 움찔거렸다.
“잠깐만.”
민준이 갑자기 침대 밖으로 발을 뻗더니 서둘러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설은 손에 포크를 쥔 채 고개를 돌려 민준이 나간 병실 문을 바라보았다.
어딜 가는 거지?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설 앞에 민준이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포크 내려놓고, 손목 좀 봅시다.”
민준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설의 한쪽 손목을 붙들고 부어오른 손목에 하얀 연고를 꼼꼼히 바르기 시작했다.
“…….”
설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머리는 설을 기억하지 못해도 민준의 마음이 여전히 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툭, 눈물 한 방울이 주책없이 손목 위로 떨어졌다.
그가 행동을 멈추고 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민준은 조용한 속삭임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가로저었다.
“정말 미안해요.”
내 심장도 기억하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 강설.
민준이 설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설의 머리에 차가운 금속이 겨누어져 있었고, 그 순간 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그녀를 두고 가야 할지 모른다는 고통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민준을 뒤덮었다.
그리고 깜깜한 어둠이었다.
“하아하아.”
식은땀을 흘리며 괴롭게 고개를 가로젓던 민준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심장은 여전히 팔딱팔딱, 제멋대로 불안하게 날뛰고 있었다.
민준이 눈가에 스며든 물기를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침대 이불을 거칠게 옆으로 젖히고 바닥에 발을 딛고 내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이 고통스런 기억은 아마도 그날의 기억일 것이다.
‘강설.’
마음속으로 생각만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민준이 손목시계 화면을 두드려 설의 위치를 확인했다.
강설의 현재 위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 청와대.
그가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게 현실인지 아니면 아직도 타들어 가는 심장이 현실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
다음 날 오후.
“운동 갔다 오는 거예요?”
민준이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앉아 있던 설이 반색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고, 민준은 무심하게 설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온다던 설은 별다른 말도 없이 오전 내내 Boni에 있었고, 해가 서쪽을 향해 기울어질 무렵에야 민준의 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밤새 기다리며 수백 번 시계 화면을 들여다보던 민준의 마음을 설이 알 리가 없었다.
“날도 더운데 계속 시원한 사무실에 있지 그랬습니까.”
민준이 설의 시선을 피하며 창가로 다가갔다.
기억 속 마지막 계절은 한겨울이었는데, 창밖 풍경은 온통 무성한 초록빛이었다.
“일 마무리하느라 좀 늦어졌어요. 이제 더 이상 안 가도 돼요.”
촤르륵-
블라인드를 걷어내자 강렬한 햇빛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민준이 창문틀에 등을 기대고 섰다.
“회복이 빨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곧 퇴원도 할 수 있고.”
설이 민준 앞에 다가와 섰다.
오전에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 알고 있는 걸 보니 민준이 설을 기다렸던 것 같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나 많이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뜨끔.
민준은 부러 정색하는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여전히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퇴원하면 어디 가고 싶어요? 가고 싶은 곳 생각해봐요.”
민준의 등 뒤로 오후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설은 햇살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
설의 하얀 두 뺨에 붉은빛이 옅게 스며들었다.
설은 작고 도톰한 입술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말을 하고 또 웃었다.
촉촉해 보이는 입술이, 닿으면 쉽게 물러지는 과일처럼 부드러울 것 같았다.
내가 닿은 적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우리 예전에 갔던 공원 있잖아요.”
닿으면 안 되나.
“나 거기 또 가고 싶어요.”
안 되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사람 말도 안 듣고.”
짐짓 토라진 목소리에 민준은 그제야 홀린 듯 바라보던 붉은 입술에서 시선을 올려 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햇빛을 머금어 반짝이고 있었다.
“……당신이, 강설이야?”
민준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절로 묻어나오는 한숨은 속으로 깊숙이 감추었다.
눈앞의 여자가 정말 강설인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이 여자는 이제 그냥 강설이어야 했다.
민준의 심장을 이렇게 아프게 쥐고 흔드는 영애가 강설이 아니라고 해도, 민준은 그녀를 강설이라고 부를 것이다.
어젯밤 악몽의 잔상이 민준의 머릿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 순간에 느낀 감정이 총탄이 살을 뚫고 들어오는 고통보다 더 괴롭고 끔찍해, 어젯밤 꿈이 기억이 아니라 그저 공포심이 만들어 낸 망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민준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한참 동안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 혹시 기억이 났어요?”
설이 다급하게 민준의 환자복을 붙들었다.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민준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아니.”
환자복을 붙든 설의 손이 느슨해졌다.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설은 이내 표정을 감추었다.
민준의 시선이 설의 뺨을 지나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가 닿았다.
“이거, 내가 준 건가?”
펜던트에 그려진 나무 모양이 꽤 독특했다.
“네, 나한테 당신이 선물로 준 거예요.”
설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왜 하필 나무야?”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금세 당혹스럽게 변했다. 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당신이……, 당신이 나한테 내가 쉴 수 있는 나무가 되어 준다고 했어요.”
“…….”
사랑에 빠진 김민준은 정말 놀라웠다. 저 말이 정말 내 입을 통해 나왔단 말인가.
“그늘도 만들어주고, 등도 기댈 수 있는 나무 말이에요.”
설은 얼굴이 빨개진 채 민준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거짓말인데.”
민준이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목걸이를 선물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설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뭔가 다른 뜻이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이에요. 당신 여동생도 알고 있는 목걸이라고요.”
“당신이 서연이도 봤다고?”
민준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설이 설마 서연이까지 만났을 줄은 몰랐다.
“동생 생일 축하도 같이 해줬잖아요, 내가 당신 동생 선물도 골라주고.”
“……별일이네.”
정말 별일이었다. 내 안에 또 하나의 인격체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진짜예요! 당신이 나한테.”
“…….”
“첫눈에 반했다고…….”
설의 눈동자가 자신감 없게 옆으로 빙그르르 돌자, 민준이 입가에 슬쩍 미소를 띠었다.
“진짜라고요!”
설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뾰로통한 표정을 보자 민준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내가 쫓아다녔다는 건 솔직히 잘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 여자를 사랑했다는 건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여자를 두고 떠날 걸 알면서도 이 여자를 만났던 걸까?
그리고 이 여자는 한 달 뒤에 내가 떠난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 이렇게 태연한 걸까?
“내가 혹시 당신한테 기다려 달라고 했나?”
궁금하면 물어보면 된다. 내 기억이 답을 주지 않으니 이 여자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누가 누굴 기다려요?”
“……아냐, 아무것도.”
난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강설이라는 여자한테 이야기하지 않고 떠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회사도 그만둔 것 같은데, 이제 당신은 뭘 할 거야?”
민준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이 문제는 설이 아니라 그가 풀어야 할 숙제였다.
“이제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설이 가만히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민준도 깨어났으니 앞으로 무얼 할지 천천히 생각해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이제 설의 미래엔 언제나 민준도 함께할 것이었다.
“밤에 잠은 잘 자?”
민준이 꾸고 있는 악몽을 설이라고 꾸고 있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그의 차분한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잘, 자려고 노력해요.”
사실, 설은 여전히 어두워지는 밤이 두려웠다.
그녀는 꿈을 꿀 때마다 민준을 잃고 오열했다.
깨어나면 꿈인 줄 알면서도, 설은 매번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리다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민준이 가만히 손을 뻗어 설의 뺨을 감쌌다.
원래부터 이렇게 핏기가 없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창백한 설의 얼굴이 계속 신경 쓰였다.
“이렇게 말라 있으면, 내가 많이 속상해할 것 같은데.”
아직 온전히 돌아온 마음이 아니라서 그는 이렇게밖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마음이 이렇게 불편한 걸 보니, 설을 사랑하는 민준은 분명 그러할 것이었다.
“당신이 누워 있는 동안 많이 후회했어요.”
민준의 오른손 위로 설이 살며시 손을 겹쳐 얹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당신이 내 마음을 이대로 영영 모르고 가버리면 어쩌나.”
설은 생각만으로 슬픔이 북받쳐 올라 목소리가 떨렸다.
“그럼 나는 어쩌나. 사랑한다는 말도 못…….”
민준이 눈을 감으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만히 가져다 댔다.
그의 상상대로 설의 입술은 부드러운 스펀지처럼 말랑거렸고, 아득한 그리움마저 느껴졌다.
민준이 설의 허리에 한 손을 감아 두르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당겼다. 가슴의 통증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약에 취한 듯한 몽롱함에 통증은 가라앉고 대신 심장이 일정하게 쿵쿵 소리를 내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나지막한 언덕, 사방으로 꽃잎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에 설과 민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울지 마.”
뺨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습기에 민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민준이 얼굴을 조금 들더니 설의 눈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그가 엄지로 설의 눈물을 천천히 닦아냈다.
“사랑해요.”
설이 작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민준이 누워 있는 동안 이 말을 전하지 못해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두 사람에게 미래가 없을지도 몰랐는데, 이 말을 그동안 그녀의 가슴속에만 묻어 두었던 게 내내 몸서리치게 괴로웠다.
“내가 계속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 기억력이 아주 좋아요. 그래서 당신이 나한테 했던 말, 행동, 어느 것도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네.”
나는 강설이란 여자한테 다시 반할 것 같으니까.
이미 가슴은 강설로 채워져 있으니 머릿속 기억은 앞으로 채워나가면 될 것이다.
민준이 빙긋 웃으며 설의 입술을 입안 가득 베어 물었다.
설이 민준의 목 뒤로 팔을 둘렀고 민준이 두 팔로 힘껏 설을 당겨 안았다.
http://novel.naver.com/webnovel/list.nhn?novelId=505101&page=6 [carbo]영애의 경호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