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가을의 설2016.05.19.
“그런데 말이에요, 대민건설 이대철 사장이 마약 밀매 조직이랑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또 한연건설 디디유통 사장하고도 자주 만난단 말이에요. 일하기도 바쁜 사람들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서로 만나는 게 정말 수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오늘 모두 청와대 오찬에 참석한다는 거 있죠. 그래서 제가 그걸 알고…… 으아악!”
끼이이이익-
운전하던 민준이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민준과 인정의 몸은 앞으로 크게 휘청거렸다가 반동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리고 한쪽 팔을 핸들 위에 올린 채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은 인정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 내가 입 다물라고 했어, 안 했어.”
민준은 가뜩이나 골치가 아파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만난 순간부터 단 1초도 입을 다물지 않는 그녀가 너무 거슬렸다.
그는 시끄럽게 윙윙거리는 소리에 딱 돌아버릴 것 같아 기어이 인상을 썼다.
박 단장이 짜증 나도 애는 때리지 말라는 말만 안 했어도, 진짜.
“……했습니다, 선배님.”
인정이 얼른 무릎 위로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민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저번에 안면도 텄고 해서 오늘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오늘 박 단장님 사무실에서 만난 김민준 선배는 대뜸 ‘골 아프니까 나한테 말 시키지 마.’라는 말을 한 뒤로 오는 동안 그녀에게 단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그래서 인정은 말을 걸지는 않고 그냥 의견만 말했을 뿐인데도 선배는 화를 냈다.
그는 다른 선배나 동기들과 달리 유일하게, 그녀에게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소리 내면 두고 간다.”
“네!”
인정은 민준의 위협적인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민준이 고개를 홱 돌리며 다시 자동차를 출발시켰고, 그녀는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천장에 붙은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꽉 붙들었다.
한참을 달리던 민준의 자동차가 청와대 흰색 정문 앞에 멈췄다.
그곳에서 신원 조회를 거친 두 사람은 경비대를 통과하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사랑채 뒤쪽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난 뒤 민준이 자동차 시동을 끄고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렸다. 그때까지 인정은 입을 꾹 다문 채 얼음처럼 앉아 있었다.
“여긴 어떻게 뚫은 거야?”
민준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던 인정과는 달리, 민준은 오찬에 갑자기 합류하게 되었다.
청와대 경호실에서는 민준이 합류하게 되면서 미리 배치되어 있던 경호관 자리 하나를 빼는 수고를 했다고 했다.
아무리 NIS 국장이 협조 요청을 했다고 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NIS와 청와대 경호실이 그렇게까지 돈독한 관계도 아닌데 말이다.
“내 말 안 들려?”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인정에게 민준이 인상을 구기며 재차 물었다.
“선배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녀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민준의 눈치를 보다가 쭈뼛거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냐고.”
“아, 아빠가 청와대 경호실장이시거든요. 그래서 제가 부탁을 드렸더니 우리 아빠가…….”
“알았다.”
어쩐지 너무 순조롭게 협조가 되었다 했더니, 청와대 안에서 껄끄러운 일이 일어나는 걸 질색할 경호실에서 그렇게까지 나온 이유가 다 있었다.
민준이 차 키를 뽑아 들고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리자, 인정도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려 이미 걷기 시작한 그의 뒤를 서둘러 따라갔다.
“저 잘할 수 있겠죠, 선배님?”
“너한테 조금도 기대 안 하니까 걱정 마.”
“하지만 단장님께서 저한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셨는데요?”
“난 처음부터 잘했어.”
인정은 왠지 섭섭한 마음에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런데도 민준이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자 그녀는 다시 종종걸음으로 민준에게 따라붙었다.
“선배님은 저한테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그래요?”
“하아…….”
민준이 갑자기 큰 한숨 소리와 함께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고개를 돌려 인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오싹한 기분이 든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왜, 왜요?”
“단장님이 하신 말씀을 지킬지 말지 생각 중이야.”
“단장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요?”
“나한테 아무리 짜증이 나도 절대 너 때리지 말라고 하셨거든.”
“……네.”
인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민준은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입 다물고 정신 차려, 박인정.”
“…….”
그가 다시 성큼 걸음을 옮겼고, 인정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 뒤를 따라 걸었다.
**
오찬이 열리는 장소는 청와대의 정원인 녹지원이었다.
3000평이 넘는 넓은 잔디 위에 둥근 테이블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놓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민트색 테이블보가 곱게 덮여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투명 글라스와 음료, 나이프와 포크 등이 하얀 냅킨에 싸여 단정히 세팅되어 있었다.
민준은 까만 정장을 입고 귀에는 인이어 이어폰을 꽂은 채 하얀 천막 아래 꼿꼿한 자세로 서서 둘러보았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경호관들 틈에 섞여 있는 그와는 다르게, 만찬 준비 요원으로 위장한 인정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직원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까만 치마 정장을 입은 인정은 쟁반을 들고 분주하게 테이블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흘끔흘끔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의 서투른 행동이 눈에 거슬린 민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후 경호관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초대받은 기업 총수들과 과학자들이 한 명, 한 명씩 노랗게 물든 잔디밭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악수를 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반가움을 표현한 뒤 자신의 명패가 놓인 자리를 찾아 착석했다.
굳은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던 민준의 눈에, 연한 아이보리 투피스 정장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묶은 여자의 실루엣이 느린 비디오 화면처럼 잡혔다.
여자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명패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여자를 바라보는 민준의 입가가 경련하듯 미세하게 떨렸다.
강설, 민준의 눈앞에 가을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있었다.
“강조국 연구원님?”
한 젊은 남성이 설에게 알은체를 하며,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다가왔다.
“대민건설 이대철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남자는 설에게 악수를 청하며 손을 내밀었고 그녀는 남자의 손을 손끝으로 살짝 잡으며 웃었다.
일부러 자리 배치를 그리했는지 젊은 남성들은 녹지원에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설은 쏟아지는 남자들의 질문에 차분하게, 조곤조곤 대답했고 이따금씩 입가에 미소를 지어 가며 웃었다.
“저도 회사 그만두고 원자력연구원에 취직이나 할까 봐요. 그럼 강조국 씨 자주 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거기 있는 분들도 조국 씨처럼 그렇게 다 미인입니까?”
개중엔 설의 눈에 들고 싶은 듯, 호기 있게 노골적인 관심을 표현하는 남자도 있었다.
설은 쏟아지는 불편한 질문에는 친절한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주변에 앉아 있는 남자들이 설이 촉망받는 연구원이라서가 아니라 영애이기 때문에 관심을 보인다는 건 설도 잘 알고 있었다.
황 원장님은 설에게 이왕 간 김에 좋은 남편감도 한번 찾아보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다음엔 이런 자리에 절대 참석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만 굳혔다.
**
인정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대민건설 이대철 사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인정이 고개를 돌려 저만치 서 있는 민준을 바라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이대철 사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있었다.
역시 선배는 달라도 뭐가 달라.
이미 목표물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민준의 모습에 인정은 침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이대철 사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로 둥근 접시를 내려놓는 인정의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고 다리도 후들거렸다.
“앗, 차거!”
이대철이 갑자기 잔뜩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정이 그의 앞에 놓인 와인 잔을 건드렸고, 그 안에 들어 있던 화이트 와인이 그대로 테이블 위에 쏟아졌다.
쏟아진 와인은 금세 테이블보를 적시며 아래로 흘러내렸고, 인정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민준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정을 먼발치서 지켜보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괜찮으세요?”
“아, 괜찮습니다.”
설이 이대철 사장에게 근심스런 표정으로 묻자, 붉으락푸르락하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던 이대철 사장이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설의 눈을 피해 인정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설이 다른 직원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녀의 등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설은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주변의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설은 얼른 손을 테이블 밑으로 내려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민준이 분명 자신을 보았을 텐데, 그녀는 고개를 차마 옆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테이블에 흥건한 물기를 냅킨으로 재빨리 닦고,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민준은 테이블보를 정리하며 자연스럽게 테이블 안쪽에 조그만 금속을 부착했다.
“다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정돈을 마친 민준이 덜덜 떨고 있는 인정을 뒤로 돌려세우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바로 옆에 설이 앉아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민준은 잘게 떨리는 입가에 단단히 힘을 주고 이대철을 바라보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조국 양이 아니라 제가 물벼락을 맞아서 정말 다행이네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준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대철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냉랭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인정이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멍한 눈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민준을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녀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민준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설은 자신이 그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민준이 보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이제 완벽한 타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결코 알고 싶지 않았다.
“혹시 아는 사람입니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설을 바라보며 이대철 사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설은 입술을 깨물며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
녹지원 구석으로 돌아온 민준의 얼굴은 이보다 더 험악할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있었다.
“저기, 선배님…….”
“입 다물어.”
민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인정을 쳐다보자, 인정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밑에 도청 장치를 붙이는 간단한 작업이었는데 그거 하나 제대로 못했다.
작업은 고사하고, 만약 작업 도중에 들키기라도 했다면 징계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민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얼마나 실망한 건지, 그는 지금 너무도 처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민준이 고개를 들어 설을 바라보았다. 설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기에 민준은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설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녀에게서 그리운 향기가 났다.
민준이 품에 안으면 청초한 꽃처럼 은은한 향을 뿜어내던 그녀의 향기가 그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2년 동안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던 심장은 민준의 발걸음보다 더 먼저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설에게 달려간 심장은 내가 그동안 너를 보지 못해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긴 잠을 자고 있었다고, 발을 쿵쿵 구르며 인사를 했다.
그가 귀에 착용한 인이어 이어폰을 통해 설의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가 들렸다.
민준은 떨리는 눈을 감았다 뜨며 귀에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
“조국 씨께서는 연구원 생활이 따분하지 않으세요? 매일 연구원에만 있으면 너무 갑갑할 것 같은데요.”
“생각하시는 것만큼 갑갑하지 않아요. 제가 일주일 내내 그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요.”
설은 이대철 사장의 말에 성의껏 대답하면서도 민준이 이곳에 왜 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민준이 여기 있는 게 자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연구 말고도 재밌는 일을 해보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조국 씨. 저희가 즐겁게 해드릴 테니까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심심할 틈이 별로 없어요. 제가 많이 바쁘거든요.”
설이 떨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무슨 유통 사장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던 것 같은데 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남자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설의 머릿속은 온통 민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민준은 정말 예전과 같은 이유로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걸까.
“조국 씨?”
“…….”
나는 그런 비참한 이유로라도 그를 만나고 싶은 걸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설은 물 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럼 제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제 재킷 세탁을 좀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나중에 조국 씨께서 돌려주시면 좋겠어요.”
이대철 사장이 웃음 띤 얼굴로 설에게 자신의 양복 재킷을 내밀었다.
설은 양복 재킷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요?”
“엄밀히 말하면 저는 조국 씨 아버님 초청을 받고 온 손님이니, 조국 씨가 이 정도 무례는 눈감아 주실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남자는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며 입가에 여유 있는 웃음을 지었다.
“……제가 부탁은 해 놓겠습니다.”
설이 이대철 사장에게서 재킷을 받아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녹지원에 들어서고 있었다.
설은 이곳에서 오랜만에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원자력연구원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아버지의 얼굴을 잘 뵙지 못했다.
좌우로 테이블을 쭉 둘러보던 대통령과 그를 바라보던 설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다.
대통령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입가에 슬쩍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
두 시간 남짓 이어지던 대통령과의 오찬이 마침내 끝났고, 오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타고 온 차량을 타고 하나둘씩 청와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여전히 테이블 앞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영애 님.”
경호관이 조심스럽게 설에게 말을 건넸다. 테이블 정리를 해야 하는데 설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서, 직원들이 머뭇거리며 주변에 서 있었다.
그러자 설이 용기를 내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만치 민준이 멀어져 가는 모습이 보이자, 설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준은 인정이 도청 감지 장치를 수거하러 간 사이 뒤를 돌아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가 없어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는 설을 보는 건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었다.
민준은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저기.”
정면만 바라보며 걸어가던 민준이 갑자기 멈췄다. 그의 등 뒤에서 그리운 향기가 났다.
민준이 천천히 뒤를 돌아 설을 마주 보고 섰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설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민준을 만나게 되면 할 말이 너무 많았는데, 막상 민준을 보자 할 말은 생각나지 않고 자꾸 눈물만 나왔다.
“……아까, 고마워서…….”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민준의 얼굴이 낯설어 설은 서러운 울음을 안으로 삼켰다.
설의 떨리는 음성에 민준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그가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며 힘껏 주먹을 쥐었다.
“……날씨가, 춥습니다. 옷깃을 더 단단히 여미셔야겠습니다.”
민준은 추위에 파래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영애 님.”
경호관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등 뒤에서 설을 불렀다. 주변 사람들이 작게 소곤거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설이 옷깃을 여미며 뒤돌아섰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일까 봐 얼른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등 뒤에서 민준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설은 움직이지 않고 멈춰 있는데, 사랑이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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