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여전히 그 자리에 (1)2016.05.24.
집에 돌아온 민준은 샤워를 한 후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지독한 피로감이 밀려왔지만, 그는 자신이 편하게 잠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불길한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몸을 타고 점점 위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악몽을 꾸게 될 징조였다.
민준은 꿈속에서 항상 강설을 구하지 못하고 결국 그녀를 잃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매번 그의 심장은 딱딱하게 굳었고, 그는 꿈과 현실의 경계선을 구분하지 못하고 매번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거렸다.
그녀의 손을 놓치는 순간 그가 느끼는 공포는 거대한 해일이 되어 민준을 덮쳤다.
이 꿈을 꿀 때마다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가슴속에서 피어났다.
그 불안함이 마음속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민준의 그림자처럼 끈질기게 그를 따라붙었다.
그를 대테러 팀에서 제외시킨 걸 보면, 아버지인 김 국장도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 밤은 평소보다도 더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민준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비타민 음료를 한 병 꺼냈다.
얼마나 많이 사다 놓은 건지, 아직도 남은 병들이 여러 개였다.
그는 뚜껑을 따 음료를 들이켜며 어제 청소 업체 직원과의 통화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민준은 청소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걸었던 전화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업체 직원은 민준의 냉장고에 생수와 음료수를 넣어놓은 건 자신들이 맞지만, 그들이 사놓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날 어떤 아가씨가 찾아와 자신들에게 주고 간 것인데, 너무 많아서 나머진 그냥 냉장고에 넣어 두고 왔다는 얘기였다.
어떤 아가씨라니,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그 사람이 동생 서연일 리는 없었다. 서연은 민준이 살고 있는 곳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민준이 귀국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박 단장과 아버지인 김 국장뿐이었다.
아마 누군가,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 같은데.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민준은 괜히 기분이 찜찜해졌다.
그는 마시던 음료수병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은 후 지갑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병원의 처방전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약국이라도 다녀올 생각이었다.
**
잠시 후 아파트 1층에 내려온 민준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눈앞의 물체를 응시했다. 분명 그의 눈에 익은 실루엣이었다.
민준은 그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미간을 급격히 좁혔다.
“저건 또 뭐야?”
인정이 아파트 출입구 현관의 계단에 등을 보인 채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민준이 아까 분명히 NIS 앞에 떨어트려 줬는데, 그새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인정이 텔레포트를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차가운 대리석 계단에 앉아 있던 인정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인정은 고개를 돌려 민준을 확인하고서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민준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인정의 고개는 그와 비례해 점점 더 아래로 떨어졌다.
마침내 그녀는 잔뜩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
인정은 눈을 질끈 감고 씩씩하게 외쳤다.
지금 심정으로서는 그가 때려도 맞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몇 초의 시간이 흘러도 사방이 고요하기만 했다.
그녀가 눈을 떠 보니 눈앞에 민준이 보이지 않았다.
인정이 놀라서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민준은 그냥 그녀를 지나쳐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인정은 종종걸음으로 민준의 뒤를 쫓아갔다.
민준의 걸음이 빨라지면 인정의 발걸음도 빨라졌고, 그의 걸음이 느려지면 그녀의 발걸음도 느려졌다.
민준이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인정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민준이 빙글 몸을 돌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는 아무나 붙잡고 복싱 스파링을 하고 싶을 정도로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정말 죄송해요.”
인정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아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민준에게 진짜로 맞는 한이 있더라도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용기를 내 박 단장에게 민준의 집 주소를 물었다.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박 단장은 그녀에게 민준의 집 주소를 순순히 알려줬다.
그는 민준이 갈 곳이 별로 없는 놈이라 집에 있을 가능성이 99.9%라는 말을 하며 눈을 반짝였지만, 무작정 찾아가면 무척 싫어할 것이라는 경고를 말끝에 살짝 덧붙였다.
인정은 민준의 집 앞까지 가긴 했지만, 벨을 누를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그녀는 ‘무척 싫어할 것’이라는 박 단장의 경고를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래서 그가 밖으로 나올 때까지 1층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다.
계속 기다리면 그래도 한 번은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일이 되기 전에 민준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민준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손끝까지 한 번에 쭉 미끄러져 그녀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
바깥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는지 그녀의 손등이 추위에 파랗게 질려 있었다.
민준은 다시 시선을 들어 잠시 인정을 응시했다.
민준의 얼굴에 서슬 퍼렇던, 냉랭한 기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씁쓸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어. 그러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있으면, 어떻게 하면 다음번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지 고민을 더 해.”
인정이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거친 말이 쏟아질 것이라는 인정의 예상과 다르게 민준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녀를 배려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는 민준이 너무 낯설었다.
“그래도 제가 하마터면…….”
“괜찮아, 나도 처음에 그랬으니까.”
“…….”
“춥다. 그만 돌아가.”
할 말을 끝낸 민준이 뒤돌아섰다.
추위에 파랗게 질린 인정의 손등을 보니 강설 생각이 났다. 춥고 허전해 보이던 설의 하얀 목덜미가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설을 생각하자 그녀의 차가운 목덜미를 어루만진 듯 손끝이 시려 왔고, 시린 손끝에서 마음으로 한기가 옮겨왔다.
“저기, 선배님!”
인정이 그의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민준이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혹시…… 저녁 드셨어요? 아직 안 드셨으면 저랑 같이 드실래요?”
“먹었어.”
“……네.”
인정은 수줍은 소녀 같은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다, 그의 무뚝뚝한 대답에 금세 실망스런 낯빛을 했다.
그녀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눈앞에서 점점 멀어지는 민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꼭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
민준은 애초에 가려고 했던 아파트 단지 내 편의점을 그냥 지나쳤다.
편의점에서 대충 사서 저녁을 때우려고 했는데 박인정 때문에 상당히 귀찮게 되었다.
대신 민준은 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상가를 향해 걸었다.
설과 함께 갔을 때에는 이렇게까지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 걸어보니 꽤 먼 거리였다.
한참을 걸어가자 마침내 그의 눈에 익숙한 건물이 나왔다. 민준이 고개를 돌려 건물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동네는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뀐 것도 있었고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가 설과 함께 치킨을 먹었던 가게는 그대로였지만, 가끔 곁눈질로 흘끔거렸던 꽃집은 어디로 갔는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렇게 흔적 없이 사라질 줄 알았더라면 한 번 들어가 보기라도 할 걸 그랬나, 라는 후회가 들었다.
설과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 꽃 한 번 선물하지 못했다.
민준은 카페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픽업대에서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들고 창가로 다가가 하이체어 위에 앉았다.
그는 유산지를 둘둘 벗겨 커다랗게 한입 베어 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 많네.”
민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그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으니 밖으로만 내보내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어둠이 바닥까지 내려앉자 거리에 가로등이 켜졌다.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의 눈앞을 끊임없이 스쳐 지나갔다.
민준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
그가 약국을 들렀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몇 개 사 들고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이었다.
민준이 성큼성큼 걷던 걸음이 점차 느려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민준은 눈앞의 광경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아 눈을 재차 깜빡거렸다.
“친구야, 안녕?”
아직 밤이 오지 않았는데 벌써 꿈속으로 들어와 버렸나?
“난 강조국이야, 강설 말고 강조국. 그런데 넌 이름이 뭐야?”
아니, 꿈이 아니다.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한 그의 심장이 그녀를 먼저 알아보았다.
설은 거리에서 가로수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경호관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저기, 영애 님.”
경호관은 울상을 지으며 영애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경호관인 그녀가 영애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사항 중 주사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하지만 영애는 돌아오는 내내 눈에 띄는 나무마다 달려가 인사를 했고, 또 슬픈 작별을 했다.
영애는 아무 대답이 없는 나무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고, 잘 지내라는 인사와 함께 다른 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이 정도의 주사쯤이야 귀엽다고 생각했다.
고성방가도 아니고 욕설이나 폭력도 아니니, 당장 위에 보고를 하거나 혹은 무덤에 갈 때까지 비밀을 엄수해야 할 정도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동네에 나무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영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아니 열두 그루의 나무가 남아 있었다.
경호관은 지금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도 날 모른 척할 거야? 너도 나를 잊어버렸어?”
설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눈가의 물기를 손으로 닦아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나무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준의 눈가가 그리움으로 붉게 물들었다.
강설이 청와대가 아니라 왜 이곳에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하면 나무와 친구가 되는 강설이 거짓말처럼 과거에서 튀어나와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영애 님, 여기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물이라도, 아니 우유라도 사올 테니 꼼짝 말고 여기 계세요, 아셨죠?”
경호관은 나무를 껴안고 서 있는 설에게 신신당부를 하더니 가까운 편의점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난 아무것도 몰라.”
설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설이 휘청거렸지만, 자비심 없는 나무는 그녀를 모르는 척했다.
민준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달려가 얼른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잡아 등 뒤에서 감싸 안았다.
놀란 설이 뒤돌아 민준을 바라보았다.
몇 초 동안 눈앞의 대상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꺼풀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넌 누구야?”
민준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허리엔 여전히 민준의 팔이 단단히 둘러져 있었다.
“……동네 주민.”
민준은 설의 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까이 선 그녀에게서 그리운 향기가 났다.
설이 웃고 울던 얼굴, 바람에 부드럽게 날리던 그녀의 머리카락, 민준의 손을 잡아주던 따듯한 온기……, 설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기억들은 그녀의 향기가 되었다.
그리운 향기가 민준의 가슴을 그윽하게 채우며 스며들었다.
민준을 바라보던 설의 눈동자에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내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어.”
설이 떨리는 손길로 민준의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민준은 복잡한 얼굴로 설의 눈을 바라보았다. 설은 취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당신 뭡니까!”
그때 갑자기 설의 경호관이 두 사람 곁으로 다급히 뛰어왔다.
민준이 설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자 설이 한쪽 손으로 나무를 붙잡고 섰다.
황급히 달려온 경호관은 두 팔을 벌리며 민준 앞을 가로막았다.
민준의 서늘한 눈빛이 경호관을 향하자, 경호관 역시 만만치 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뭡니까, 당신. 여기 이분 알아요?”
“경호를 하려면 똑바로 해. 술 취한 사람을 길거리에 혼자 두고 자리를 비워?”
“저는 당신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민준은 대답 대신 경호관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았고, 잠깐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던 경호관이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까 청와대에서, 영애와 대화를 나눴던 그 남자였다.
“당신, 아까 청와대…….”
말을 이어가려던 경호관은 민준의 서늘한 기세에 눌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민준은 경호관을 질책하듯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다 설에게 고개를 돌렸다.
“걸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민준이 경호관을 무시한 채 살벌한 말투로 설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이렇게 몸도 못 가눌 만큼 술에 취해 돌아다니다니, 그녀에게 자신이 영애라는 자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경호관은, 강설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가.
“없어. 그러니까 니가 날 업어.”
“…….”
설이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어 검지로 민준을 가리켰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설을 바라보던 민준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설의 손가락은 여전히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영애 님, 제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당황한 경호관은 설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설이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두 팔로 나무를 감싸 안았다.
민준은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경호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얼떨결에 그가 내민 비닐봉지를 받아 들었다.
“업히세요.”
민준이 설 앞에 등을 내밀고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설의 술주정은 못 본 사이에 상당히 진화되어 있었다.
아무 놈한테나 업어달라고 하다니, 내가 봤기에 망정이지 다른 놈이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녀가 민준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자 그는 설의 엉덩이를 두 팔로 받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 어디 있습니까.”
민준이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경호관에게 물었다.
“집 앞에 있습니다.”
“집 앞이요? 어느 집을 말하는 겁니까?”
“…….”
아차, 싶었던 경호관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는 영애가 살고 있는 곳을 괜히 알려주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청와대에서 잠깐 얼굴을 본 것 말고는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도 하나 없는데 말이었다.
영애에게 이 남자가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경호관은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녀의 묵비권 행사는 몇 초를 넘기지 못했다.
“혹시, 한빛 아파트입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경호관은 입을 떡 벌리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집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그는 영애와 보통 사이가 아닌 게 분명했다.
민준은 시선을 내려 복잡한 눈빛을 감추었다.
설이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막연히, 그녀가 대전에 있다 주말이면 청와대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민준이 말없이 설을 고쳐 업은 후 아파트를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경호관이 그의 몇 발자국 뒤에서 머쓱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민준의 뒤를 따라갔다.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민준은 설에게 근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추워?”
그러자 설이 민준의 등에 얼굴을 기대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나무야.”
“빨리 갈게.”
“싫어, 천천히 가.”
설이 완강하게 고개를 내젓자 민준은 걷던 속도를 조금 더 늦추었다.
“그런데 있잖아.”
설이 민준의 등에 뺨을 기대고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너는 누구야……?”
“동네 주민이라고 했잖아.”
민준은 설을 다시 고쳐 업고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설은 검지를 세워 민준의 등에 글씨인지 그림인지 모를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는 누구야?”
“……강설.”
“아니야.”
“강조국.”
“아니야.”
“당신 취했어.”
“아니야.”
민준은 등 뒤에서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주정을 부리는 설이 귀여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설에게 찬바람이 닿을까 봐 허리를 좀 더 곧게 펴고 걸었다.
올 때는 꽤 먼 거리처럼 느껴졌는데 그것은 민준의 착각이었다.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민준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보였고, 민준은 금세 그녀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
강설은 버스도 하나만 탈 정도로 융통성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고, 민준은 그걸 알고 있었다.
설의 아파트 출입구 앞에 선 민준이 ‘1111’ 네 개의 숫자를 누르자 유리문이 스르르 열렸다.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올라가는 민준을 경호관이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영애 님이 언제 비밀번호를 바꾸어 놓으신 거지?’
그녀는 갑자기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바꾼 영애도, 그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 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남자도 너무 이상했다.
술은 영애가 마셨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취한 것 같았다.
띠띠띠띠-
설의 집 앞에 선 민준이 숫자 2를 네 번 누르자 띠딕- 하는 전자음과 함께 아파트 잠금장치가 풀렸다.
민준은 설의 집 안으로 들어서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설의 아파트 비밀번호도, 그녀의 아파트 내부도 모든 게 예전과 같았다.
마치 어제 헤어지고 오늘 만난 것처럼, 설은 민준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살고 있었다.
“이 이상은 곤란합니다.”
그래도 집 안까지 들어가는 건 아니다 싶었던 경호관이 민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설이 고개를 들어 민준의 어깨너머로 경호관을 바라보았다.
설과 눈이 마주친 경호관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영애는 방금 그녀에게 눈빛으로, 비키라는 무언의 말을 건넸다.
민준이 침실 안으로 들어가자 경호관은 방문과 문틀 사이에 약간의 틈만 남긴 채 밖에서 문을 닫았다.
방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영애의 눈빛을 생각하면 문을 꼭꼭 닫아야 할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그녀는 약간의 여지를 남겨둔 채 방문 밖을 지켰다.
침실로 들어간 민준이 침대 위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설이 민준을 올려다보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의 시선이 침대 구석에 놓여 있던 하얀 곰에 가 닿자, 그의 눈빛이 한층 어둡게 짙어졌다.
민준이 다시 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민준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려 할 때 즈음, 설이 입술을 움직였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민준은 짙은 눈빛을 감추며 설에게서 등을 돌리고 뒤돌아섰다.
“……돌고래 씨.”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민준이 움찔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민준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설은 어느새 벽을 보고 누워,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던 민준은 침실 문을 조용히 닫고 밖으로 나왔다.
“술을 도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민준이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경호관에게 질책하듯 물었다.
경호관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맥주 두 잔밖에 안 드셨는데, 오늘은 왜 저렇게 취하셨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맥주 두 잔……이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 민준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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