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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42화 (42/94)

42화. 여전히 그 자리에 (2)2016.05.26.

강설은 왜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는 걸까.

한 번 표적이 되었던 장소에 계속 살고 있는 건 현명한 생각이 아니었다.

게다가 강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현관 비밀번호도 바꾸지 않은 채 살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를 더 먹었어도 융통성 없고 조심성 없는 설의 성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나마 여자 경호관이 설과 같은 동에 거주하고 있다니 다행이었지만, 그녀가 바깥세상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살고 있는 것 같아 민준의 마음이 착잡했다.

‘돌고래 씨.’

“…….”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늘 이 지점에 오면 생각의 화살표가 멈춰 섰다.

어젯밤, 설은 나를 알아보았을까.

**

아침이 밝았다.

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거리다 보니, 어느새 밖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평일이었다면 어제 설은 곧장 대전으로 내려가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주말이 아니었다고 해도 설은 어떻게 해서든 대전에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젯밤 설은 민준을 만났고, 이제 그는 그녀가 여전히 이곳에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추워?’

그것은 분명히 걱정스런 음색이었다.

어젯밤의 민준은 예전처럼 애틋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았다.

설은 한숨을 푹 내쉬며 반대로 돌아누웠다.

그러자 그녀의 시야에 하얀 곰인형이 들어왔다. 설은 손을 뻗어 곰인형의 복슬복슬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너 말이야. 왜 날 모른 척해?”

민준을 다시 만나게 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가 정말 그녀를 잊은 건지, 왜 귀국을 하고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은 건지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녹지원에서 민준을 맞닥뜨린 순간 오랫동안 고민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그저 눈물만 났다.

잊고 산 순간들도 많았는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시간이 무색하게 그리움이라는 감정만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그의 냉랭한 모습을 보면서 민준이 그녀를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젯밤 설이 만난 민준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설은 곰인형을 끌어안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서 미래라는 게 무한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 이렇게 고민만 하며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할 거라면, 하고 후회하는 편이 나았다.

설은 침대 이불을 옆으로 젖히며 결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은 민준이 왜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에게는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

NIS 수사단장실..

똑똑-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말간 얼굴 하나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박인정이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단장과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응? 아이고, 우리 인정이 왔네? 아침부터 내 방엔 어쩐 일이야?”

박 단장이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 단장이 원래 둥글둥글 사람 좋은 성격이긴 했지만, 누구에게나 다 그러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김민준만 만나면 잃어버리는 위엄과 권위를 다른 곳에서 되찾고자, 다른 요원들에게는 일부러 더 엄격하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박인정은 예외였다. 엄하게 굴고 싶어도 인정만 보면 절로 얼굴근육이 무장해제가 되었다.

그도 이처럼 예쁘게 생긴 요원은 NIS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물기가 말라 땅이 쩍쩍 갈라지는 가뭄 같은, 남자 요원들의 메마른 삶에 참으로 단비 같은 인정이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녀는 박 단장에게 뭔가 어려운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여기 앉아. 커피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단장님.”

인정이 황공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박 단장이 그녀에게 살갑게 잘 대해주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하늘같은 단장님이었다.

인정은 게걸음으로 조금씩 옆으로 움직여 마침내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래, 아침부터 내 사무실엔 어쩐 일이야? 혹시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요!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요.”

박 단장이 소파에 마주 앉으며 그녀를 쳐다보자 인정이 얼굴을 붉혔다.

어쩌면 오늘 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이불킥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모든 민망함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민준처럼 그녀를 설레게 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어제…… 김민준 선배 덕분에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왔는데 감사하다는 인사를 제대로 못 했어요. 그래서 혹시 선배가 오늘 사무실에 들어오는지 단장님께 좀 여쭈어 보고 싶어서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나한테 묻지 말고 민준이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박 단장이 느긋하게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며 오른뺨을 괴었다.

아주 재미있는 전개였다.

그는 사랑에 빠진 인정의 얼굴을 보자, 민준의 당황한 얼굴이 몹시 보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다른 녀석들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뒷덜미 잡고 쓰러지겠네.

그렇게 얘한테 공을 들이면 뭘 하나, 한 방은 이렇게 따로 있는데.

“안 그래도 제가 전화를 해 봤는데요, 안 받더라고요.”

인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이미 민준에게 전화도 걸고 문자도 보내봤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 텐데도 아무런 답이 없다는 것은 그가 일부러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박 단장은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인정은 평소와 다르게 매우 의기소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NIS 안에서의 그녀의 위상에 비하면 참으로 놀라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박인정.”

“네, 단장님.”

“여자들은 말이야, 도대체 왜 자신을 막 대하는 놈들한테 끌리는 거야? 뭐니 뭐니 해도 머니보단 역시 얼굴인 거야? 그렇게 막 대하는 놈들 좋아하다 나중에 막 맞고 살 확률이 높아요.”

“아니에요, 단장님! 선배는 그렇지 않아요!”

나이스.

그는 그냥 한번 툭 던져보았을 뿐인데 인정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뭐가 그렇지 않아?”

“민준 선배는 되게 다정하고!”

“다정?”

“되게…… 자상하고…….”

“자상? 김민준이 자상? 으하하하하!”

박 단장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김민준이 다정과 자상이라니!

다정과 자상은 결코 민준과 양립할 수 없는 단어였다.

민준이 그런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도 NIS에서 여자들이 섣불리 달라붙지 못했던 것은, 잘생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막강한 까칠함 때문이었다.

사랑에 빠진, 다정하고 자상한 민준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주 웃기고 즐거운 상상이었다.

“인정아, 내가 민준이한테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말할까?”

박 단장이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제야 그에게 속내를 다 들킨 걸 깨달은 인정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그녀는 박 단장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사실상 긍정이었다.

국장님! 국장님 댁에 며느리 한 명 놓아드려야겠어요.

“박인정, 가서 민준이한테 내가 사무실로 들어오랬다고 전해!”

“제가 어떻게 전해요, 단장님?”

인정이 고개를 번쩍 들고 불안한 얼굴로 박 단장을 바라보았다.

“그 자식이 전화 안 받는다며, 그럼 가정방문밖에 더 있나.”

박 단장이 속으로 즐거운 웃음을 감추며 말했다.

수서동 사는 김민준, 너에게 일원동 사는 박인정을 보낸다.

**

하아하아.

또다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그녀를 잡을 수 있었는데, 그는 설의 손을 놓쳤고 그녀는 깜깜한 어둠 속으로 추락해 버렸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민준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한껏 수축된 심장은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의 가슴을 아프게 옥죄고 있었다.

식은땀이 민준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딩동딩동.

초인종 소리가 멀리서 환청처럼 들렸다.

민준은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켜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오늘따라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무시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설이 민준을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던 설이 휴화산처럼 고요하던 그의 가슴을 들끓게 하였다.

현관문을 열고 상대방을 확인한 민준은 한 손을 벽에 짚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박인정이었다.

“니가 여긴 왜 왔어.”

민준이 인정을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줄곧 붙들고 있던 팽팽한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며 기분이 급격히 다운되었다.

이제 와서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고 있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어젯밤 그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했고, 피로와 불면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태였다.

다시 누워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민준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선배님!”

인정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민준을 부축하기 위해 얼른 손을 뻗었다. 민준은 금방이라도 바닥에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손대지 마!”

“…….”

잠시 비틀거렸던 민준이 벽에 한 손을 짚고 차가운 눈빛으로 인정을 바라보았다.

인정은 어색한 표정으로, 민준을 향해 뻗었던 손을 도로 거뒀다.

“여긴 왜 왔냐고 물었어.”

“박 단장님께서…… 선배님 오늘 사무실로 들어오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단장님이?”

“네.”

민준이 낮게 신음하듯 욕설을 내뱉었다.

박 단장이 무슨 생각으로 박인정을 자신한테 보냈는지 그 불순한 의도를 생각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보내는 박 단장이나, 보낸다고 오는 박인정이나, 박씨는 민준의 정신건강에 해로운 존재였다.

“……알았어. 가 봐.”

민준이 현관문을 닫기 위해 오른손을 뻗어 금속 손잡이를 잡았다.

“저기 근데, 선배님 정말 괜찮으세요? 지금 선배님 얼굴이 너무 안 좋아 보여요. 병원 안 가보셔도 괜찮겠어요? 제가 병원에 같이 가드릴까요?”

인정은 닫히려는 현관문을 다급하게 손으로 붙들었다. 민준의 몸 상태가 정말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그를 이대로 혼자 두고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민준은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크게 새기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인내심을 빡빡 긁어모은 후 다시 인정을 바라보았다.

“너, 나한테 관심 있어?”

“……있으면…… 안 돼요?”

민준의 눈치를 보며 대답한 인정은 그의 반응에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가 마치 그녀에게 불쾌한 협박을 받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민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NIS에 들어가면 결코 박 단장님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띵-

정말 드물게도 민준의 층에서 또 한 번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한 여자가 민준의 집을 향해 조심스럽게 몸을 틀었다.

“아…….”

두 사람을 발견한 설이 눈을 크게 뜨며 발걸음을 멈췄다.

민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설은 시선을 돌리며 황급히 뒤돌아섰다.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왜 난 당연히 민준에게 여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에게 기어이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에 설의 눈앞이 절망으로 깜깜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자 설은 걸음을 서둘렀다.

인정이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민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 감아, 박인정!”

인정은 무슨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있는 힘껏 눈을 감았다.

쿵쿵쿵.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인정은 잔뜩 긴장을 하며 양 주먹을 안으로 꽉 말아 쥐었다.

민준은 재빨리 달려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려는 설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설이 힘을 주어서 잡힌 팔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민준은 설의 손목을 잡고 와 현관 안으로 그녀를 밀어 넣은 뒤, 등 뒤로 문을 세게 닫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제 눈 뜨고 넌 그만 가 봐.”

“…….”

인정은 힘껏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분명 찰나의 순간, 여자의 은은한 비누향이 그녀의 코끝을 스치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 여자는 아마 방금 전 문이 닫힌 민준의 아파트 안에 있을 터였다.

“선배님…… 애인 있었어요?”

“그럼.”

“단장님께서는 선배님한테 애인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내가 없을 것 같아?”

“…….”

이 남자가 그녀 눈에만 이렇게 근사하게 보일 리가 없을 거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 정도 되는 여자를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이 선배는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척하고 있는 걸까?

“선배님은 야망도 없으세요?”

인정은 민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인정에게 보이는 남자들의 관심이 비단 그녀의 외모 때문만은 아님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청와대 경호실장이라는 후광이 그녀 뒤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민준은 대답 대신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인정을 쳐다보았다.

인정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민준은 누르고 있던 버튼에서 손을 떼고 양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어린놈이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는. 또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재미없을 줄 알아.”

침울한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보던 인정의 눈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차라리 그가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냈으면 더 나았을 텐데, 민준은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인정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

민준은 현관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설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차분하게 바닥을 응시하던 설이 고개를 들어 고요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방해가 되었다면 미안합니다.”

설은 민준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 거라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왜 그가 당연히 다른 여자와 사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지금 멍하게 있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설은 방금 전 본 여자가 낯이 익었고, 그녀를 어디에서 봤는지 금방 기억이 났다.

청와대에서 민준의 뒤에 숨어 마치 보호를 받듯 서 있던 그 여자였다.

“……방해를 한 건 아니야. 오히려 날 도와준 거지.”

설의 말에 민준이 눈썹을 찡그리며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갔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지만 민준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기색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설이 그대로 뒤돌아 가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민준은 그녀가 자신을 따라 안으로 들어올 줄 알았지만, 설은 여전히 현관에 멈춰 서 있었다.

뒤에서 기척이 없자 민준은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은 제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제, 우리 집에 이걸 두고 갔어요.”

이게 아니었더라면 모양새가 정말 우스워질 뻔했다, 속으로 그렇게 자조한 설은 맥주 캔이 가득 담긴 하얀 비닐봉지를 민준에게 내밀었다.

민준이 어젯밤 설의 아파트에 두고 간 물건이었다.

민준이 설에게서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역시 설은 어젯밤 민준을 만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억을 하고 있는 걸까.

민준은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설의 눈빛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사람은 가슴으로 기억하는 거라던 설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걸 먹고 있던데요.”

“…….”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하지만 왜 수면 유도제를 먹고 있어요?”

설은 민준에게 비닐봉지를 가져다주기 위해 봉지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봉지 안에는 맥주 캔 여러 개와 담배, 그리고 약국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종이 상자가 들어 있었다.

“……별 거 아닌데.”

“당신한테도 별 거라는 게 있긴 있어요?”

당신한테도 정말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게 있었을까? 당신을 붙잡지 못해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슨 뜻이지, 그게?”

민준이 태연한 척 팔짱을 끼고 설을 내려다보았다. 민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신, 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나요?”

“당신한텐 그게 아직도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나한테는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당신이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에 대한 당신 마음이 그 정도였다는 거겠죠. 그리고 아직도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당신에게 잊어버려도 될 정도의 의미가 없었던 사람이었겠죠.”

그런데 당신은 기억이 돌아왔잖아.

그것도, 2년 전에.

“말하고 나니 우습네요. 그래 봤자 어차피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당신 입으로 듣고 싶어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요.”

“돌아왔어.”

민준이 너무 쉽게 대답을 해, 설은 잠깐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 말을 물어보는 데 2년이 걸렸고, 입 밖으로 이 말을 꺼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내 어려운 마음을 이렇게 쉽게 돌려주는가.

“또 궁금한 게 있어?”

“……진짜 나를.”

서걱, 그녀의 심장이 썰려 나갔다.

“사랑한 게 아니었어요……?”

힘들게 감추고 있던 감정이 큰 충격을 받아 그녀의 얼굴에 다 드러났다.

애처롭게 떨리는 설의 목소리에 민준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설이 몸을 가늘게 떨며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뒷걸음쳤다.

그녀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가는 걸 바라보는 민준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설이 그의 눈앞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또다시 그의 심장이 타들어 갔다.

‘아니야! 가지 마, 제발.’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설을 잡으려 민준이 다급히 손을 뻗었다.

‘이봐요! 왜 이래요, 당신!’

환청이다.

나는 또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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