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조국을 지켜라2016.05.31.
민준은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설을 가슴에 안고 있었고 그녀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감각에 민준은 드디어 자신이 미쳐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꼭 실제로 설을 품에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민준은 진짜 같은 이 꿈에서 깰까 봐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안 가요. 그러니까 좀 더 자요.’
설은 꿈속에서 불안해하는 민준을 안심시켜 주려는 듯, 다정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민준은 미소 지으며 설의 목덜미에 고개를 더 깊숙이 파묻었고,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녀는 그가 이대로 영영 눈을 감아도 별로 미련이 남을 것 같지 않을 만큼 포근하고 따듯했다.
설은 깊은 잠에 빠진 민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 민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설에게 손을 뻗었고, 그녀는 기절할 듯 쓰러지는 그를 부축해서 간신히 침대에 데려와 눕혔다.
“……강설.”
민준은 설을 품에 안고, 꼭 술에 취한 사람처럼 이따금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설을 안고 있던 팔에 조금이라도 힘이 풀어질라치면 그는 다시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래서 설은 민준을 혼자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설은 민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민준은 잠이 들고 나서야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기고 있던, 외롭고 지친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느낀 설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민준은 왼손 손목에 여전히 시계를 차고 있었다.
위치 확인 목표물로 설정된 이름은 강설이었고, 그녀가 확인 버튼을 누르자 시계 화면에 ‘ERROR’라는 글자가 떴다.
민준은 이제 신호가 잡히지도 않을 강설의 위치를 여태 지우지 않고 남겨두었다.
설은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힘들게 참아내며 민준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를 미워하고 원망해야 하는데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
어느덧 오후가 되었다.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던 설이 시간을 확인하고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는 몇 초 후에야 간신히 정신이 돌아왔고, 이곳이 민준의 아파트이며 지금 자신은 민준의 침대에 함께 누워 있다는 현실을 자각했다.
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민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동안 통 잠을 못 자고 산 사람처럼 도무지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든 모습이 너무 편안해 보여 깨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잔다 싶었던 설이 조심스럽게 민준을 흔들어 깨웠다.
“이제 좀 일어나 봐요. 좀 있으면 저녁이에요.”
“……이젠 소리도 들리네.”
민준은 잠에 취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도 설의 따듯한 온기와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민준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강설…….”
민준이 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는 이건 현실이 아니라 꿈이기에 그녀가 대답을 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민준이 입가에 호선을 더욱 짙게 그리며 그녀를 제 품 안으로 꽉 끌어안았다.
“으윽. 나, 숨 막혀요.”
응? 그런데 대답을 하네?
“……윽, 나, 숨 막힌, 다고요.”
그것도 아주 실감 나게 들리는 게 꼭 진짜 같다.
“아, 정말!”
설이 있는 힘껏 민준의 가슴을 밀어내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후아후아.
그녀는 명치에 손을 올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민준은 눈을 깜박이며,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하는 설을 멀뚱멀뚱 올려다보았다.
진짜 강설이야? 3D 강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깜짝 놀란 민준이 침대에서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나 당신 때문에 숨 막혀 죽을 뻔한 건 안 보여요?”
“당신이 왜 여기에 있냐고 묻잖아!”
“사람이 무슨 잠을 그렇게 자요? 꼭 며칠 동안 잠도 못 잔 사람 같잖아요. 내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내가, 당신이랑, 잤다고……?”
“미……쳤어요? 당신이 기절한 것처럼 쓰러져서 내가 도와줬을 뿐이라고요!”
설이 붉어진 뺨을 옆으로 돌렸다.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민준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다행히 그가 미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남자 침대에 같이 누워 있다니, 봉사 정신이 너무 과하네. 마실 거라도 줄까?”
민준이 이불을 옆으로 젖히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서 그런지 몸이 상당히 가뿐했다.
“김민준 씨.”
“응.”
“당신은 기억이 돌아왔으면서도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요?”
아까 기절하기 전, 민준은 그녀에게 자신의 기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설을 찾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잊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화면을 두드려도 신호가 잡히지 않는 시계를 여전히 손목에 차고 있었고 잠결에 몇 번이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건 분명 그리움과 애틋함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굳이 얘기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랬어.”
“거짓말하지 말아요!”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묻는 거야?”
민준이 옷을 갈아입으려는 듯, 뒤돌아 두 팔을 엑스자로 만들며 셔츠를 위로 돌돌 말아 올렸다.
그는 눈앞에 있는 그녀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태연하게 상의를 갈아입었다.
설은 민준의 어깨에 남아 있는 총상의 흉터가 보이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신은 나한테 묻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아니었어?”
“……맞아요, 아주 잘 지내고 있었죠.”
설은 민준이 도대체 그녀에게 무엇을 감추고 싶어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가 그의 친아버지와 설의 할아버지 사이의 관계 때문에 그녀를 외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뿐이었다.
그래서 민준은 그녀에게 평창동 집을 주고 떠났고, 그걸 끝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싶어 했는지도 몰랐다.
“지금 안 가 봐도 돼?”
민준이 방문 손잡이를 잡고 멈추더니 뒤돌아서 설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건 왜 물어요?”
“나 때문에 점심도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많이 바쁘지 않으면 저녁 먹고 가,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내가 저녁 사줄게.”
“당신이야말로 봉사 정신이 너무 투철하네요. 당신 여자 친구가 괜히 오해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설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아까 민준의 집 앞에 서 있던 여자에 대한 질투였다.
그리고, 아직도 잠결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민준에게 주는 벌이기도 했다.
설의 말에 당황한 민준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가 정색을 하며 그녀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거 아니야!”
“뭐가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무슨 사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냥 후배야!”
“그럼 우리는 무슨 사이예요?”
“…….”
갑자기 허를 찔린 민준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민준이 팔짱을 끼며 말없이 설을 응시했다.
“당신과 나는 이제 무슨 사이냐고요.”
아직도 잠결에 내 이름을 부르는 당신과 당신이 보고 싶고 그리웠다는 말을 꺼내기가 두려운 나는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걸까.
우리 사이가 2년 전에 끝이 난 건지, 아닌지…… 난 그걸 알고 싶어.
“무슨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저녁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잖아.”
“아니요, 난 그럴 수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대답해 봐요, 우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그녀는 민준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지만, 설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아무래도 같이 먹을 수 없겠네요.”
설은 씁쓸한 얼굴로 민준을 지나쳐 방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민준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설을 잡아도 그가 그녀에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그게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
잠시 후 민준은 아파트 단지 안의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벽면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려던 민준은 아래 칸에 진열된 비타민 음료를 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색깔별로 가지런히 정돈된 음료들을 보니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수 생각이 났다.
버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마시기도 그래서 민준은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수를 그냥 내버려둔 채였다.
민준은 생수 한 병을 꺼낸 후 계산대에서 담배와 함께 계산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그대로 집에 올려 가려다 발길을 돌려 아파트 관리 사무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언가 확인할 게 있었다.
“수고하십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민준이 관리 사무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경리 직원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주민입니다. 5동 1, 2호 라인 엘리베이터 CCTV 좀 확인할 수 있습니까?”
“아, 그건 경비 팀장님한테 물어봐야 하는데요. 저기로 가시면 안에 경비 팀장님 계실 거예요.”
경리 직원이 왼쪽 유리문을 가리켰고, 민준은 고맙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 팀 사무실 한쪽 벽면에는 CCTV용 모니터가 가득 차 있었고, 경비 팀 직원 두 명이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민준을 보더니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났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난주 일요일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 5동 1, 2호 라인 엘리베이터 CCTV 좀 확인하고 싶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민준은 시선을 내리고 잠시 무어라 대답할지 생각하다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가 저희 집에 물건을 두고 갔는데 아무래도 주인을 찾아줘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 일이시라면…… 잠깐만 기다리세요, 왼쪽 끝, 위에서 세 번째 모니터 보고 계시면 됩니다.”
남자는 분주한 손길로 녹화 화면을 뒤로 돌리기 시작했고, 민준은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업체 사람 말로는 그 아가씨가 오후 2시 넘어서 음료수를 주고 갔다고 했다.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 손에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여자를 찾으면 될 터였다.
“재생 화면 속도를 좀 올리겠습니다.”
남자가 재생 속도를 높이자 화면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거기 뒤로 좀 다시 돌려주세요.”
“찾으셨어요?”
무언가를 발견한 민준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남자는 녹화 화면을 뒤로 돌리더니 빠르기를 정상 속도로 바꾸어 놓았다.
화면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민준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갔다.
설이 양손 가득 무거운 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 상단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엘리베이터를 탄 설은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멍하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는 다른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얼른 소매로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따금씩 그녀의 소매가 눈가에 가 닿았다.
“찾으셨습니까? 이분 맞아요?”
“……모르겠습니다.”
그의 목이 메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미동도 없이 모니터를 바라보는 민준의 눈가가 벌겋게 변해갔다.
이 여자는 예쁜 꽃길을 두고도 왜 기어이 험한 길을 찾아오는가.
강설은 왜 이렇게 바보 같고 어리석은지 모르겠다.
**
2년 전.
남자가 앉아 있는 까만 가죽 의자 뒤로 큼지막한 노란 무궁화가 보였다.
무궁화 양옆에는 황금색 봉황 두 마리가 꼬리를 아래로 길게 내리고 있었다.
짙은 갈색 데스크 앞에 펜을 들고 앉아 있던 남자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민준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고생 많았습니다. 몸은 이제 괜찮습니까?”
그는 이 나라 대한민국의 대통령, 강설의 아버지였다.
“네, 각하.”
“곧 출국한다고 들었습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김민준 요원, 이건 그냥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니, 곤란하면 답변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왜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 행동을 했습니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줄 알고 말입니다. 자칫하다간 일을 완전히 그르칠 수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민준에게 상부의 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가 먼저 달려간 연유를 물었다.
민준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아니었지만 쉽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강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강설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에게 답을 했다.
“파일을 건네진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납치범은 파일 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어 시간이 지체되면 영애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납치된 사람이 영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김민준 요원이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민준은 대통령에게 답을 했는데 그에게 되물은 건 강설의 아버지였다.
민준은 대통령이 왜 그를 불렀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공중에서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은 자신의 눈빛을 피하지 않는 민준을 보며 참 맹랑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양한 아들이라고 들었는데 꼿꼿한 성미가 김 국장과 꼭 닮았다.
세상에 무서운 것 없어 보이는 민준의 눈빛은 그가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시 민준을 바라보던 대통령이 이윽고 다시 입술을 열었다.
“……이탈리아는 좋은 나라입니다. 김민준 요원이 좋은 곳에서 쉬었으면 하는 생각에 내가 직접 골랐지요.”
“…….”
“내 딸은 융통성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만이 전부인 양 길도 가르쳐 준 길로만 다니고, 버스도 항상 같은 번호만 타고 다니지요. 나는 아비로서 딸아이가 탄 버스 밖으로 고운 풍경이 펼쳐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비도 날아다니고 꽃향기도 나는 그런 풍경 말입니다.”
대통령은 진중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고급 승용차를 태워주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딸아이가 버스 창문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따듯한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아비로서 최소한의 욕심이었다.
그는 장인어른이 그렇게 세상을 등지고 난 뒤 조국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쁜 것을 보면 그게 전부인 것처럼 예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아이가 험한 걸 너무 많이 겪고, 보고 살아왔다.
그래서 그는 파일과 관련된 모든 흔적을 딸에게서 지우고 싶었다.
더 이상 불안하고 위험한 세상에 딸을 두고 싶지 않았고, 또한 그런 사람을 조국의 곁에 두고 싶지도 않았다.
“…….”
민준은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속뜻을 알아들었다.
사실은 아버지인 김 국장에게서 그가 한국에 남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
민준이 한국에 남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따로 있던 거였다.
“아마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요. 건강하길 바랍니다.”
그가 줄곧 갈등하고 있었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말에 쐐기를 박았다.
그저 강설 옆에만 있고 싶다는 마음과 그녀가 더 좋은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설을 놓아줘야 한다는 생각이 내내 민준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민준이 가까이 있어 설이 아프다는 말에 간신히 그 욕심을 끊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설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은 생각처럼 잘 버려지지 않았다.
그녀를 보면 도돌이표처럼 그녀 곁에 가서 머무는 마음은 민준도 어찌할 수 없었다.
**
띠리리-
민준의 전화벨이 울렸다.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민준이 걸음을 옮겨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발신자를 확인하자 민준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민준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단장님.”
-너 왜 사무실로 안 들어와? 인정이한테 아직 얘기 못 들었어?
“저한테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내가 다른 놈들 다 제치고 특별히 너한테 인정이를 보내줬는데 말이야, 이 자식이 고맙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지는 못할망정! 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박인정 걔가 누구냐면 말이야…….
“저 피곤해서 오늘 못 들어갑니다. 그리고 신입이 그렇게 한가합니까? 아무리 할 일이 없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시키지 마십시오.”
-야야, 걔도 지금 바빠. 걔 지금 이대철 사장 쫓아갔거든. 오늘 저녁에 이대철이 누굴 만나려는지 레스토랑을 통째로 싹 다 비웠단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냐?
“거길 그 애송이 혼자 보냅니까?”
-걱정되면 니가 같이 가볼래?
“저 피곤합니다.”
-싫음 말아라. 이 자식이 다 저 좋으라고 내가 그렇게…….
뚝.
민준이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럼 우린 무슨 사이죠?’
설의 목소리가 아까부터 민준의 머릿속을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다.
딩동.
문자 수신음이 들렸다.
민준은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다. 박인정이었다.
그는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딩동, 딩동, 딩동.
문자 수신음이 경박스럽게 연달아 울렸고, 민준은 아득 이를 갈며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선배님, 저 가림레스토랑 건물 맞은편 옥상에 와 있는데요. 이대철이 오늘 만나는 사람이 여자예요.
-이대철이 여자랑 이런저런 지저분한 소문이 많던데, 저 여자분 괜찮을까요? 연예인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낯이 많이 익어요.
-방금 전에 여자가 이대철한테 무슨 재킷 같은 걸 건네줬는데요, 혹시 이대철 애인일까요?
‘제 재킷 세탁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중에 조국 씨께서 돌려주시면 좋겠어요.’
강설!
민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민준은 다급하게 차 키를 찾아들고 뛰쳐나가 계단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설을 잡지 않아서 그녀가 그곳에 갔다는 자책감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혀왔다.
눈가가 시큰해지며 뜨거운 눈물이 민준의 눈가로 가득 번졌다.
사실은 언제나 이렇게 설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설이 예쁜 꽃밭이 아니라 잡초만 무성한 벌판에 데려다 놓아도 괜찮다고만 말해준다면, 고운 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그녀를 품에 안고 걷고 싶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녀는 그가 지켜야 하는 조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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