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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44화 (44/94)

44화. 인공호흡2016.06.02.

“여기는 맘에 드세요?”

남자는 설의 글라스에 와인을 채워 넣으며 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금 전 사무적인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남자에게 재킷을 건넨 후로는 별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설은 주변을 잠깐 둘러보았다.

꽤 넓은 공간인데도 테이블이 몇 개밖에 놓여 있지 않았고, 그마저도 모두 비어 있었기에 지금 이 레스토랑 안에는 이대철 사장과 설밖에 없었다.

경호관이 레스토랑 문밖에서 대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설은 남자와 단둘이 이곳에 앉아 있다는 게 너무 불편했다.

역시 나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오늘 오후 이대철 사장은 재킷을 돌려받고 싶다며 설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재킷 세탁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대신 원자력 연구원에 관련된 연구 개발 이야기도 나눌 겸, 둘이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전화였다.

처음엔 경호관을 통해 재킷만 보내고 이 자리에 나올 생각은 아니었던 설은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녀는 기다릴 사람도 없는 집에서 복잡한 마음으로 혼자 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막상 이 자리에 나오니 그녀의 마음은 더 공허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설은 얼른 저녁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저희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안 보이는 건가요?”

설이 주변을 살펴보며 남자에게 물었다.

지나치게 고요한 레스토랑의 정적이 그녀의 불편한 마음을 배가시켰다.

“사람들은 다 자기 설 자리가 따로 있는 것 아니겠어요? 조국 씨를 만나는데 제가 아무나 이 안으로 들일 수는 없지요.”

설은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남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같은 재벌이라도, 건우는 그래도 기본 품성이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이 남자를 보며 돈과 인성이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은 조금 전까지 입가에 짓고 있던 의례적인 미소마저 거두었다.

“이대철 사장님께서는 디지털 원자로 안전 계통에 관심이 많으시다면서요? 앞으로 궁금한 게 있으시면 제가 아니라 연구원장님을 뵙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그쪽 분야 연구원도 아닐뿐더러 기술 개발 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적임자도 못 돼요.”

“그런 이야기야 제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전 그런 이야기보다 우리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조국 씨와 제 얘기를 말이죠. 아마 조국 씨는 오늘 이후로 저를 계속 만나고 싶어질 겁니다.”

남자는 설의 몸매를 눈으로 빠르게 스캔했다.

영애라고 해서 그저 그렇고 재미없는 영양인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주변에서 늘 봐왔던 계집애들과는 다르게 눈빛이 또렷했고, 고고하면서도 무심한 모습은 아주 상큼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 고상한 영애가 과연 침대에서는 어떤 소리를 낼지 너무 궁금했기에 오늘 아주 재미있고 스릴 있는 도박을 했다.

상대가 영애인 게 마음에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그녀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그의 이성을 눌렀던 것이다.

그가 호텔도 아닌 이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 레스토랑 안쪽에 VIP를 위한 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짜릿한 쾌락을 취할 수 있는 이곳은 아는 사람들끼리만 은밀하게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바깥을 지키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레스토랑 안에서 식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남자가 의도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남자가 설 앞에 놓인 와인 잔을 슬쩍 쳐다보았다.

와인 잔에 담긴 소량의 마약이라면 영애를 쉽게 저 안으로 데리고 갈 수 있을 터였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어서 빨리 데려가 달라며 온몸을 그에게 비비적거릴 것이다.

남자는 생각만으로 몸속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손과 발이 근질거렸다.

“우리 건배할까요?”

남자가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눈앞에 들어 올리며 웃었다.

그는 와인 잔 아래 음흉한 미소를 감추었고, 설은 잔을 들어 조용히 입가로 가져갔다.

우당탕탕!

밖에서 물건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무슨 시비라도 붙은 건지, 레스토랑 출입구 밖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거칠고 시끄러운 소음이 연달아 들렸다.

설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덜컥덜컥, 밖에서 출입문 손잡이를 거칠게 돌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안에서 굳게 잠긴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문이 왜 잠겨 있는 거지?

설의 심장이 두려움에 덜컥 내려앉았다.

불안한 생각이 들려는 찰나였다.

쾅!

굉음과 함께 레스토랑 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며 열렸다.

묵직한 황금색 손잡이가 바닥에 떨어져, 붉은 카펫 위에서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설은 깜짝 놀란 얼굴로 부서지기 직전 같은 문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설의 안색을 살핀 민준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설과 이대철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설은 멍한 얼굴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를 보자 방금 전까지 단단하게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던 설의 얼굴근육이 하릴없이 풀어졌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그녀 앞에 나타난 민준이 반가웠다.

불안하게 두근거리던 심장이 그를 보자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가 분명히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요!”

잔뜩 열이 받은 이대철 사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고지가 코앞이었는데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렸다.

영애 앞이라 평소처럼 험한 말을 밖으로 뱉을 수도 없었던 그는 삭제 주먹만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 곁에 다가온 민준이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짚고 서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아하아, 빌어먹을 새끼.”

“뭐? 빌어…….”

-갑자기 블라인드를 다 내려서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아요, 선배님.

이곳으로 달려오는 도중 전화로 인정의 상황 보고를 듣는 순간 민준은 극도의 공포심에 휩싸였다.

2년 전 설에게 달려가던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핸들을 잡은 손이 두려움으로 덜덜 떨렸다.

문을 부수고 난 뒤 설의 얼굴이 보이자 민준은 그제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만약 지금 설이 괜찮지 않았다면, 눈앞의 남자는 이미 상당히 괜찮지 않아졌을 것이다.

“조국 씨, 혹시 아는 사람입니까?”

이대철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설에게 물었다.

분명 낯이 익은 놈인데 어디서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동네…… 주민이에요.”

설이 민준을 바라보며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까이 온 민준은 싸늘한 얼굴로 이대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사이 설의 경호관이 테이블로 달려왔고, 이대철 사장의 경호원들도 배를 움켜쥐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 무리 속에는 설이 본 적 있는 그 여자도 있었다.

“이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한테 설명을 좀 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설은 민준을 바라보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문을 기어이 부수고 들어온 걸 보니 설에게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갑자기 잊고 싶은 나쁜 기억이 떠올라 설이 떨리는 두 손을 테이블 밑으로 감추었다.

민준은 여전히 서늘한 눈빛으로 이대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이대철 사장이 설 앞에 놓인 와인 잔을 향해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탁.

갑자기 민준이 이대철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아 비틀었다.

“으아! 이거 안 놔?”

이대철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다.

민준은 곧바로 설 앞에 놓인 와인 잔을 들어 옆에 서 있던 인정에게 건넸다.

“곧 알게 되겠지요. 넌 지금 이거 가지고 나가.”

민준이 인정에게 와인 잔을 건네는 순간 이대철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인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준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난 후에야, 민준은 잡고 있던 그의 손목을 천천히 놓았다.

“너 지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이러는 거야.”

그는 욱신거리는 팔목을 매만지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일 조간신문 보면 니가 누군지 알 수 있겠지, 안 그래?”

“네가 뭐하는 놈인지 몰라도 내가 너 가만둘 것 같아?”

“가만두지 마! 그래야 정당방위가 되지.”

“……네까짓 놈이!”

남자는 분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지금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변호사 안 불러도 돼? 저기서 이상한 거 나오면 너 죽어.”

민준의 말에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초조한 얼굴로 어디론가 바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얼추 파악한 경호관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하다하다 이제 영애의 데이트 장소까지 나타난 동네 주민을 보고 처음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온몸에 살기를 휘감고 달려온 동네 주민이 아무래도 영애에게 위험할 것 같아 출입구에서 그를 제지하느라 한참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이대철 사장의 개인 경호원들까지 합세해 그를 저지했는데도 동네 주민이라는 남자는 기어이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 동네 주민이 아니었더라면 오늘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만약 영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그 막대한 책임을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께서 영애의 안전에 민감하시니 각별히 주의하라는 당부를 경호실에서 여러 번 받은지라  후폭풍에 대한 그녀의 두려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 갔다.

저 남자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네 주민만도 못한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웠다.

경호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영애 님은 지금 저랑 같이 나가셔야겠습니다.”

민준이 설의 눈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은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조금 전에 말을 한 것 같은데요.”

“아직은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당신은 나한테 말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군요.”

“……강설.”

민준이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예전처럼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 설의 심장이 아려왔다.

“……나가자.”

“내가 왜 지금 당신과 같이 나가야 돼요?”

“내가 당신 돌고래니까.”

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설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민준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자, 강설.”

그가 몸을 기울여 설의 손목을 잡았고, 설은 못 이기는 척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경호관이 당혹스런 얼굴로 민준의 앞을 두 팔로 가로막았다.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영애 님은 제가 댁으로 잘 모셔다드릴 테니 걱정 말고 비키세요.”

“안 됩니다.”

“……괜찮아요,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에요.”

설의 말에 경호관이 난처한 얼굴로 옆으로 비켜섰다. 대통령께서 보내셨다는 데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그렇지, 이런 남자가 그냥 동네 주민일 리가 없었다.

이 남자는 영애의 집 주소와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고, 심지어 아직 경호실에 보고도 하지 않은 영애의 저녁 식사 자리까지 귀신같이 알고 나타났다.

그럼 이 남자는 도대체 정체가 뭐지? 영애의 애인인가?

아니야, 청와대에서는 분명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었는데?

두 사람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자아분열 중인 경호관을 그대로 지나쳤다.

민준은 밖으로 나오자 설의 손을 깍지 껴서 잡았고,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그제야 설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나 혹시 조금 전에 위험했던 거였나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런 것 같아.”

“그럼 당신은 지금, 확실하지도 않은데 일을 이렇게까지 벌인 거예요?”

“아니면 말고.”

“당신은 이게 아니면 말고 정도로 끝날 일 같아요?”

“아니어도 이제 어쩔 수 없어.”

민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설을 흘끔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기가 찬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시선이 무심코 엘리베이터 바닥에 가 닿았다.

빨간 피가 민준의 오른손을 타고 아래로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이 깜짝 놀라 민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다쳤어요?”

“별 거 아니야.”

“피 나잖아요, 지금!”

그녀가 당황해서 울먹거리자 민준이 오른손을 옷에 쓱쓱 문질러 닦은 후 눈물이 번진 설의 눈가를 닦아냈다.

어루만지는 손길이 따듯해,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다칠 때마다 이렇게 울 거야?”

“……하지만.”

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설을 바라보는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는 정말 민준이 틀림없었다.

그녀를 안고 다독거려주던, 설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가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울지 마. 당신이 울면 내가 기분이 이상해진다고 했잖아.”

민준은 아린 미소를 지으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설의 손을 잡으니 그의 마음에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

밖으로 나온 민준은 벤치에 설을 앉혔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어도 속으로 많이 놀랐을 터였다.

그녀가 완치되었다고는 들었지만, 그 사건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가 다시 덩치를 키워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민준은 그녀가 오늘 일로 다시 고통받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벤치에 앉은 설이 어깨를 안으로 움츠렸다.

실내에 있다 갑자기 밖으로 나오자 바깥 공기가 더 차게 느껴져서 그런가,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다리에 소름이 돋았다.

“예쁘게도 입고 나왔네.”

민준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설의 어깨에 둘러준 후 옆에 앉았다.

그는 설에게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이따금씩 오른손을 옷에 닦아냈다.

“손 이리 내요.”

“응?”

설이 핸드백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민준이 뒤로 감춘 오른손을 잡고, 피가 흐르는 상처를 손수건으로 감쌌다.

“차 가지고 왔죠? 내가 운전할 테니까 우리 지금 병원으로 가요.”

설은 눈물이 고인 눈을 깜빡거리며 조심스럽게 손수건의 매듭을 지었다.

툭 떨어진 눈물방울이 손수건에 스며들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런 걸로 사람 안 죽어.”

“그러게 왜 그랬어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됐잖아요!”

설은 화를 내고 싶었는데, 울음 섞인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민준이 어떤 모습으로 달려왔을지 그녀의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민준은 언제나 그랬다. 그가 여전히 예전과 똑같다는 사실이 설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가슴 아팠다.

“고개 좀 들어봐, 얼굴이 안 보이잖아.”

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손등으로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자꾸만 닦아내도 설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많이 보고 싶었거든.”

사실 보고 싶었다는 말로는 설을 그리워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민준은 설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도 그녀가 그립고 또 보고 싶었다.

오늘 그는 이곳으로 달려오면서 이제 다시는 그녀를 두고 가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수백 번 다짐했다.

“많이 보고 싶었다면서 왜 이제야 왔어요?”

“내가 느림보 거북이라서 그래.”

“혹시 당신…….”

“응, 말해.”

“……아니에요.”

설은 민준이 그녀의 곁을 떠난 게 그의 친아버지와 그녀의 외할아버지의 관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인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사실일지라도 굳이 입 밖으로 그 얘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설은 민준이 그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 다시 그녀를 두고 갈까 봐 두려웠다.

“그럼 당신은…… 이제 나한테 온 거예요?”

설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민준이 아니라고 말을 할까 봐 겁이 났다.

“강설. 나는 당신 옆에 평생 있겠다는 약속도, 당신을 지금처럼 울리지 않겠다는 약속도 해주지 못해.”

“그래서요……?”

“이제 내가 당신을 붙잡으면 당신이 더 예쁜 세상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될 수도 있어.”

“…….”

“그래도 당신이 내 옆에서 행복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 봐. 대신, 가슴 말고 머리로.”

민준은 손가락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 끝이 쓸쓸해, 설의 가슴이 저릿해졌다.

“내가 생각해야 하는 건 그게 다예요?”

“응? 응.”

“알았어요.”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마저 닦아낸 설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민준이 그녀의 얼굴을 멀뚱멀뚱 올려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 굉장히 무거운 이야기를 했는데, 설은 반대로 너무 홀가분해 보였다.

“머리로 잘 생각해 볼 테니까, 우선 지금은 나랑 병원으로 가요.”

확실히 민준을 내려다보는 설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졌다.

“얼른 차 키 줘요.”

설이 그 앞에 손바닥을 내밀자, 민준이 한쪽 눈썹을 아래로 찌푸렸다.

“됐어, 내가 해도 돼. 뭘 이 정도 가지고.”

“차 키.”

설의 목소리가 한 톤 더 아래로 내려갔다.

“…….”

민준이 마지못해 바지 주머니 속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 설의 손바닥 위로 살짝 떨어트렸다.

키를 받아든 설은 얼른 몸을 돌려 도로변에 제멋대로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민준은 여전히 벤치에 앉아 설의 뒷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빨리 와요. 병원 갔다가 돌고래 밥 주러 가야 하니까.”

설의 등 뒤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제야 민준이 슬며시 웃으며 일어나 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한 가을밤인데 설과 함께 있으니 따듯한 봄날이었다.

민준은 따듯한 봄기운을 따라 걸었다.

http://novel.naver.com/webnovel/list.nhn?novelId=505101&page=5 [carbo]영애의 경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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