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의 조국 (1)2016.06.07.
늦은 밤, 설과 민준은 병원 근처 고깃집에서 둥그런 테이블을 사이에 놓고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설의 복장과 분위기는 소박한 식당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기에,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민준은 조금 전 손에 들고 있던 집게를 설에게 빼앗긴 후로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며 얌전히 앉아 있었다.
설이 불판 위의 두툼한 안심 덩어리를 집게로 뒤집다가 멈칫하며 행동을 멈추더니 무서운 눈으로 민준을 노려보았다.
민준은 당당하게 시선을 마주했으나 채 2초를 견디지 못하고 시선을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렸다.
“왜, 또.”
민준은 설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전에는 설이 이끄는 대로 소꿉장난 같은 병원 나들이도 순순히 갔다 왔다.
그는 단지 저녁 먹는 시간을 조금 앞당기기 위해, 그냥 마취 없이 상처를 빨리 꿰매 달라고 말한 것뿐이었다.
민준은 강설이 빨리하고 나왔다고 칭찬해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진료실 문을 자랑스럽게 열고 나온 그를 지금처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당신은 당신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기는 게 어때요?”
설이 붕대가 감긴 민준의 오른손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또 화가 났다.
민준이 아무리 용가리 통뼈라고 해도 다치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아픈 건 마찬가지일 텐데, 밥 먹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마취도 하지 않고 생살을 꿰매냔 말이다.
“지금도 충분히 소중히 여기고 있는데…… 더 소중히 여기지, 뭐.”
민준은 항의하듯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눈의 힘을 풀었다.
자신만큼 체력과 근력을 유지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억울하긴 했지만, 설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이제 더 이상 몸에 상처를 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민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설은 다시 시선을 내렸고, 집게와 가위로 고기를 일정한 크기로 잘랐다.
설이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민준의 앞에 있는 접시에 올려놓으려다 또 멈칫하더니, 하얀 붕대가 감긴 민준의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괜찮아. 내가 먹을 수 있어.”
민준이 설의 눈치를 살피며 얼른 대답을 했다.
아까부터 설이 멈칫할 때마다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다행히 이번 대답도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는지 설은 더 이상 민준을 노려보지 않았다.
설이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더니 후후 입김을 불어 민준 앞에 내밀었다.
“아, 해요.”
“응?”
“아, 하라고요.”
주위를 살펴보며 잠깐 망설이던 민준이 앞으로 조금 고개를 숙이며 입을 벌렸고, 설은 민준의 입안으로 고기를 넣어 주었다.
방금 전까지 민준을 무섭게 노려보던 강설은 민준에게 고기를 먹여주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가벼운 상처 정도는 앞으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왕이면 오른손에 말이다.
“많이 먹어요, 그래야 빨리 낫지. 이거 다 먹고 가야 해요.”
설은 여전히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민준이 고기를 목구멍 뒤로 다 넘길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줬고, 다시 그의 입안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이 많은 걸 나보고 어떻게 다 먹으라는 거야?”
민준은 둥근 접시 위에 담긴 두툼한 안심 덩어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꼭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일부러 떼를 쓰는 아이처럼, 갑자기 되지도 않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던 것이다.
“앞으로 내 얼굴 보기 힘들어요. 그러니까 지금 많이 먹어두라고요.”
“……아, 그래?”
민준은 시선을 내린 채 왼손으로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한번 풀어진 마음은 설의 표정과 작은 몸짓 하나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설은 민준을 노려보다 고기를 먹여주었고, 그다음으론 이제 앞으로 얼굴 보기 힘들 거라는 말을 했다.
오른손에 난 상처가 민준의 가슴속 심장으로 자리를 옮겨 잡았고, 심장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꼭짓점에서 바닥으로 단숨에 내리꽂혔다.
설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앞의 민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실망스런 표정을 다 감추지도 못할 거면서, 그는 그녀에게 도대체 무얼 생각해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설은 아까부터 그녀의 얼굴에서 단 1초도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는 민준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는 민준이 예전 그대로라는 사실이 가슴이 떨리게 기쁘면서도 또 그만큼 마음이 아팠다.
“내일 오후에는 대전에 내려가야 해요. 평일에는 대전에서 지내거든요.”
“아, 원자력연구원에서 일한다고 했지? 그럼 서울은 주말에 올라오는 거야?”
민준의 얼굴에 금세 따듯한 온기가 돌았다.
강설이 앞으로 보기 힘들다고 했던 말은 민준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뜻이었다.
롤러코스터는 다시 칙칙폭폭,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고 심장으로 옮겨간 상처는 금방 봉합되었다.
“내가 거기서 일하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하는 일이 워낙 그렇잖아.”
“금요일 밤에 올라오고 일요일 저녁에 다시 내려가요. 예전에 누가 영애도 직업이냐고 비웃어서 아주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죠.”
민준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설의 뛰어난 기억력은 분명 좋은 것인데, 민준에게는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정말 뒤끝 있는 강설이었다.
“왜 주말에 청와대로 가지 않는 건데?”
설이 예전 아파트에 머무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곳에서 혼자 지내는 건 역시 마음에 걸렸다.
경호실을 폄하하고 싶진 않았지만, 경호관이 하는 행동을 보니 영 미덥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께 부담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설은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버지는 설이 원자력연구원에 들어가는 걸 강력하게 반대했고, 그녀는 아버지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일을 찾아낸 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시작이었고, 설은 자신의 운명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원자력연구원에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위해가 갈 만한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고 밀착 경호관을 옆에 붙이는 것으로 설과 암묵적인 타협을 했다.
대통령은 그녀가 단순히 그곳에서 일을 하고 싶은 거라고만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설은 고기 조각에 후후 바람을 불어 뜨거운 김을 식힌 다음 민준 앞에 내밀었다.
“자, 먹어요.”
“나는 지금 손을 다쳤지, 어린애가 된 게 아니야.”
민준은 투덜거리면서도 설이 입안으로 넣어주는 고기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힐끗힐끗 주변을 돌아보았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몸에 밴 긴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다치지 마요.”
설이 고기를 가위로 자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응.”
“아프지도 말고요.”
“그래.”
“그럼 생각은 계속 해볼게요.”
“어.”
“아.”
아, 소리에 민준이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설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고, 민준은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민준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아닌데요, 아저씨 지금 되게 우울한 것 같은데요. 아저씨 무슨 속상한 일 있어요?’
건우는 바의 테이블에 앉아 손에 쥔 온더락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가도 이렇게 느긋하게 숨 좀 돌릴 만하면, 어김없이 그날 서연이 그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누가 김민준 동생 아니랄까 봐, 남매가 어쩜 그렇게 둘 다 건우의 신경을 툭툭 건드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부사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건우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다가와 앉은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풍성한 갈색 머리에 단정한 투피스 차림의 여자는 건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비서실장을 바꿔야 하나 생각 중입니다.”
잠시 여자를 바라보던 건우는 이내 무심한 얼굴로 잔을 비웠다.
Boni 부사장인 건우가 예전에 그만둔 마케팅팀 주임을 좋아했다는 건 직원들 사이에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리고 정말 우습게도 그 뒤로 강설과 비슷한 헤어스타일과 비슷한 옷차림, 비슷한 화장을 한 여자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건우를 대하는 데 좀 더 자신감이 있다는 게 다를 뿐, 눈앞에 있는 여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서실장님은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건우가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가 가끔 이곳을 다니는 걸 알고 있는 건 비서실장뿐이었다.
“아빠한테 들었어요. 제가 근처에 약속이 있었는데, 마침 부사장님도 여기 계시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와봤는데 혼자 계셔서 제가 말동무나 해드릴까 하고요.”
“그렇다고 이 시간에 여길 와요?”
“이 시간이 어때서요? 우리 아빠 그렇게 고루한 분 아니세요.”
생긋 웃는 여자의 말에 건우가 여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 보니 강설과 비슷하게 차려입긴 했는데 다른 점이 있었다.
강설은 재킷 안에 저렇게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옷을 입진 않았다.
“그런데 어쩌나, 난 말동무 같은 건 필요 없는 사람인데.”
건우가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틀며 흥미롭다는 듯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럼 부사장님은 저랑 무얼 하고 싶으신데요?”
“뭐든지 말만 하면 다 해줍니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커피 사업부 참 한가하네요. 전년 대비 매출 실적도 별로 좋지 않던데 말이에요.”
건우의 무심한 말투에 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참, 거기 김서연이라는 사원 있습니까?”
“김서연이요……? 서연 씨는 왜요? 부사장님이 김서연 씨를 아세요?”
“뭐, 그냥 조금 압니다. 그 친구 일은 잘하고 있습니까?”
“……신입 사원이 일을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겠어요. 시키는 일만 제대로 하기도 벅찰 텐데요.”
“하긴, 그렇겠네요.”
건우는 잔을 모두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과 재킷을 손에 들었다.
“벌써 가시게요?”
“늦었는데 집에 가야죠. 김 팀장은 집에 안 갑니까?”
그는 민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를 자리에 둔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조용해서 꽤 맘에 드는 곳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제 단골집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될 것 같았다.
**
민준은 일부러 아파트 단지 밖에 차를 주차하고 소화를 시킨다는 명목으로 설과 함께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설이 살고 있는 아파트 동 앞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하는 일은 재미있어? 그래도 대전하고 서울을 오가려면 꽤 피곤할 텐데.”
“내가 피곤할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나 때문에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경호관들이 힘들죠. 이제 그냥 나 혼자 다녀도 될 것 같은데 아빠는 여전히 내가 미덥지 않나 봐요.”
“근데 내가 귀국하는 건 어떻게 안 거야?”
“건우 씨한테 들었어요.”
“단장님도 참.”
백건우가 그의 소식을 들어 알게 될 곳은 딱 한 군데뿐이었다. 박 단장은 분명히 돼지껍데기나 소주 몇 잔에 순순히 입을 열었을 터였다.
“내일 오후에 대전으로 내려가는 거야? 괜찮으면 내가 데려다줄까?”
“아니에요, 차 있잖아요. 괜찮아요.”
“마침 대전에 볼일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괜찮아.”
“알았어요. 그런데 나 내일 꼭 안 내려가도 돼요, 월요일 아침에 일찍 내려가도 되거든요.”
두 사람은 아까부터 아파트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설은 이따금 한쪽 구두 끝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툭툭 치고 있었고, 민준은 설을 눈에 이식하기라도 하려는 건지 그녀에게서 단 1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른 들어가서 씻고 자,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민준은 저도 모르게 설의 뺨을 어루만지려다 손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내일 일요일이잖아요, 늦게 일어나도 돼요.”
“당신 눈 밑이 시커메졌어, 얼른 들어가.”
“정말 괜찮은데…….”
“바보야.”
민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으로 설의 이마를 가볍게 콩, 두드렸다.
설이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예요? 지금 나 때린 거예요?”
“당신, 학교 다닐 때 수학 잘 못했지?”
“왜 이래요, 진짜. 내가 이공계 출신이라는 거 잊었어요?”
“그럼 뭐해, 이렇게 계산도 못 하는데.”
설은 자신이 뭘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뭘 더 얻을 수 있는지 계산도 못 하는 바보였다.
그녀가 이렇게, 더하기와 곱하기는 모르고 빼기와 나누기만 아는 바보였기에 대통령도 그렇게 설을 걱정하는 것일 터였다.
“내가 왜 계산을 못 해요?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계산기를 써본 적이 없다고요.”
“강설 많이 발전했네, 이런 말도 안 되는 농담도 다 하고 말이야.”
“정말인데.”
설은 이마를 문지르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말로, 농담 스킬이 늘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은 민준이 잘 알지 못하는 그녀의 능력에 대해 굳이 일부러 얘기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변수가 생기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참, 당신 오른손에 물 들어가면 안 돼요. 아까 병원에서 들은 말 잊지 않았죠?”
“도대체 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민준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고작 몇 바늘 꿰맸을 뿐인데, 설은 마치 큰 수술이라도 받고 온 것처럼 신신당부를 하고 있었다.
다치지 말고 잘 먹고 잘 자라는 그녀의 당부가 민준의 서늘한 가슴에 계속해서 따듯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나온 민준은 곧바로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핸드폰이 딩동딩동 울려댈 때마다 발신자를 확인한 후 인상을 쓰며 뒤집어 놓기가 벌써 몇 번째였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그녀가 의논하고 보고해야 할 대상은 민준이 아닌데도, 인정은 줄기차게 민준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결국, 민준은 인정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녀 덕분에 민준이 설에게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고마움은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그래도 그 고마움을 아예 모른 척할 순 없었던 민준은 그가 생각하기에 최대한 친절한 어투로, 이제 문자를 그만 보내라는 부탁을 네모 칸에 담아 전송했다.
-나의 인내심은 여기까지다.
이심전심이라고 했던가.
다행히 인정은 그의 정중한 부탁을 알아들었고 민준의 핸드폰은 곧 잠잠해졌다.
**
민준을 보내고 난 뒤 집 안으로 들어온 설은 발그레 붉어진 두 뺨에 손을 올리며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하고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가볍게 닦아 낸 후, 침대에 올라가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올렸다.
하지만 막상 침대에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설은 몸을 뒤척거리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생각하다 문득 민준과 같이 있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은 그 여자를 민준의 집 앞에서도 보았고 레스토랑에서도 보았다. 청와대에서도 그 여자를 본 기억이 나는 걸 보니 민준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설은 머리를 부르르 털며 그녀의 잔상을 떨쳐낸 후, 다시 머릿속에 민준을 떠올렸다.
민준은 지금 잠이 들었을까?
설은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벌써 잠이 들었는지 아파트의 불이 꺼져 있었다.
설은 민준이 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또 내일까지 기다리자니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갈 것만 같았다.
설은 다시 침실로 되돌아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민준에게 문자를 보내볼까 생각하던 설의 얼굴에 낭패의 기색이 짙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녀는 민준의 전화번호를 몰랐다. 민준이 2년 전 전화번호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설은 잠시 망설이다 예전에 저장한 민준의 전화번호를 찾아 창을 열었다.
그리고 문자 작성 화면에 작은 점 하나를 찍은 후 얼른 전송 버튼을 눌렀다.
상대방이 만약 민준이 아니라면 실수라고 생각해주지 않을까?
나쁜 짓을 하는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딩동-
답 문자가 바로 왔다.
-무슨 뜻이야?
“…….”
실패였다. 이 내용만으로는 상대방이 민준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좀 더 구체적인 힌트를 보냈다.
-돌고래.
이제 이 번호의 주인이 민준인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엔 아예 아무런 답이 없었다.
역시 다른 사람이었던 걸까? 설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설은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낼까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내일 민준을 만나면 해야 하는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민준에게 평창동 집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하자면 민준의 친아버지 이야기도 꺼내야 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설에게 조심스러운 이야기였다.
그에게 할아버지가 수첩에 남긴 말도 전해줘야 하는데, 그 또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딩동-
현관 벨소리에 설은 화들짝 놀라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거실로 조심스럽게 걸어 나갔다.
여차하면 그녀의 경호관에게 전화를 걸 생각이었다.
“누구세요?”
설은 실내등을 환하게 켠 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이후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설은 아직도 늦은 시간의 낯선 방문자가 두려웠다.
“나야, 돌고래.”
민준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