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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46화 (46/94)

46화. 나의 조국 (2)2016.06.09.

설은 얼른 달려가 잠금장치를 풀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그녀는 언제 두려워했냐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시간에 말도 없이 어쩐 일이에요?”

“당신이 나한테 오라고 문자 보냈잖아.”

“내가요? 내가 언제요?”

설은 시치미를 뚝 뗐지만, 한 걸음에 달려온 민준을 보니 웃음이 자꾸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민준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띠딕- 소리가 나며 현관문이 자동으로 잠겼다.

“보고 싶으니까 지금 오라는 말 아니었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도 이 시간에 여길 오면 어떻게 해요? 집에는 언제 가려고요.”

“오늘은 안 갈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당신 소파 좀 빌려 줘.”

“설마, 지금 우리 집에서 자고 가겠다는 거예요?”

설이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깜빡거렸다.

쿵쿵쿵,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가 귓가에 둥둥 울렸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지?

설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가 민준의 웃음기 어린 얼굴에 머물렀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끊겼어. 순수한 마음으로 온 거니까 눈에서 힘 빼도 돼.”

민준의 짓궂은 말투에 설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흘겨보았다.

못 알아들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그녀는 한 번에 정확히 알아듣고 정직하게 얼굴이 빨개졌다.

민준은 홍시처럼 붉어진 설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버스가 끊겼다니 어쩔 도리가 없네요. 소파에서 자요, 이불 가져다줄게요.”

설은 턱을 조금 위로 치켜들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그녀처럼 도도하지 못하고, 주인의 의사에 반해 크게 뛰는 심장 소리를 감추고 싶었다.

민준은 설이 당연히 그냥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대답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설이 먼저 문자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민준은 지금쯤 그녀의 아파트 옥상에 줄을 걸고 거꾸로 매달려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침대에 누워 설을 생각하다 보니 오늘 그녀를 만난 일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민준은 그녀가 신기루가 아니라는 걸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다행이야. 덕분에 줄은 안 타도 되겠네.”

민준이 신발을 벗으며 거실로 들어서자, 설은 침실로 달려가 잠시 후 도톰한 이불을 손에 들고 나왔다.

민준이 소파에 걸터앉자 설은 그 앞에 이불을 내밀었다.

“이거 덮고 자요. 얇아 보여도 따듯할 거예요.”

“얼굴 조금만 더 보고.”

민준은 이불을 받아 옆에 내려놓은 후 설의 양손을 잡았다.

그의 오른손을 감싼 까슬까슬한 붕대 밖으로 힘차게 뛰고 있는 설의 맥박이 느껴졌다.

민준이 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지자, 그의 손가락 끝에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신기루가 아니라 진짜 설이었다.

“집에 갔는데 다시 내가 보고 싶었어요?”

“그런가 봐.”

민준이 두 눈을 감았다 뜨며 부드럽게 웃었다.

억눌러 있던 마음은 빗장을 열자마자 하나도 남김없이 그녀에게 흘러들어 갔다.

그는 그녀에게 오늘 보인 진심을 도로 거두지도, 감추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럼 그전에는 내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어요?”

“……했어. 아주 많이.”

설은 잠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뱉은 후, 민준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물었다.

그녀는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물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오지 않았어요?”

“응?”

“당신은 귀국하고도 나한테 오지 않았잖아요.”

“……”

“당신이 나를 떠난 이유가, 나랑 정말 헤어지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어요?”

오늘 일이 아니었다면 민준과 설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가 정말 그녀와 헤어지려고 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설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었다.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맞는데 강설이랑 헤어지진 못했어.”

“……왜 나랑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이런 여자라서.”

자신이 손에 얼마나 좋은 카드를 쥐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바보 같은 여자였다.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민준은 그런 설을 곁에 두려 하는 게 그의 욕심이라는 생각이 다 떨쳐진 건 아니었다.

“돌려 말하지 말아요. 그리고 난 당신한테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어요.”

“강설이 수학만 못하는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국어도 못하는군.”

“말장난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지 말아요!”

“그게 왜 그렇게 알고 싶은 거야?”

“그걸 알아야!”

“그걸 알면.”

“……당신이 같은 이유로 떠나지 않게 할 수 있잖아요.”

민준은 입을 다물고 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금세 투명한 물기를 머금었다.

그는 설의 눈물을 보았는데도 가슴이 욱신거리거나 저릿하지 않았다. 설은 그녀의 눈동자 안에 슬픔이 아니라 희망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내 옆에 있을지 말지 앞으로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까지 생각해야 하는데요?”

사실 설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민준이 설에게 달려온 순간 그녀는 이미 마음을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계속 생각해도 돼. 1년이든 2년이든 괜찮아.”

“당신은 여유가 있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솔직히 여유는 별로 없고, 일단은 지금 내 앞에 강설이 있다는 게 좋아.”

민준이 설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까지 그릴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진 못했다.

그는 손에 잡히지 않는 꿈같은 미래보다 지금 그의 눈앞에 설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에게 손에 쥐고 있는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으면 언젠가 더 많은 마시멜로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마시멜로마저 덧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하지 않아요?”

“그것보다도 나는…… 당신이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가 더 궁금해.”

“꽃이요?”

“응. 꽃.”

그래서 민준은 바꿀 수 없는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보다, 지금 그녀가 좋아하는 꽃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했다.

오늘도 어차피 내일이면 과거가 될 거였고, 그렇다면 앞으로 올 그녀의 과거는 더 나은 기억으로 채워주고 싶었다.

“나 꽃 안 좋아해요.”

“…….”

하지만 강설은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다.

“진짠데. 난 나무 좋아해요. 알잖아요, 나 나무 좋아하는 거.”

“……어. 알아.”

물론 강설은 나무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술에 취하면 그렇게 아무 나무나 붙들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근데 꼭 골라야 한다면…… 민들레꽃이요.”

“민들레꽃?”

“왜, 입으로 훅 불면 홀씨가 날아가잖아요. 그 민들레꽃이요.”

“민들레꽃 좋아해?”

“응. 노랗고 하얀 민들레꽃. 봄이 오면 들판에 많이 필 거예요. 우리 그때 같이 보러 가요.”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넓은 들을 걷노라면 작고 하얀 꽃들이 그녀의 발치에서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꼭 멀리까지 나가지 않아도, 민들레는 할아버지의 마당에도 피었고, 골목길 시멘트 바닥 사이에서도 얼굴을 내밀었다.

설이 민들레꽃을 보기 위해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할아버지께서는 서재의 창문을 열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다.

민들레꽃은 설에게 행복한 추억이었다.

“강설은 민들레꽃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나한테 알려주고 싶은 건?”

“알려주고 싶은 것……? 아! 강조국. 내 이름 이제 강조국이에요.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개명했거든요.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날 조국이라고 불러줘요. 어감은 좀 그렇긴 하지만요.”

설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민준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성과 같이 불러도, 따로 불러도 조국이란 이름은 그녀의 귀에 조금도 예쁘게 들리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유리, 빛나, 구슬 등과 같이 예쁜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할아버지에게 왜 그녀의 이름은 하필 조국이냐고 울면서 투정 부렸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설이 연구원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이름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그녀가 외면한다고 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설은 더 이상 안기영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조. 국.”

민준이 천천히 발음하며 설을 바라보았다.

“같이 부르면 좀 덜 이상해요. 강조국, 이렇게.”

“강조국.”

“응.”

민준이 웃으며 설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그의 애틋한 손길은 설의 등허리에 머물렀다.

“조국.”

“붙여서 부르는 게 덜 이상하다니까요.”

설이 부르르 몸을 떨며 진저리를 치자 민준은 웃으며 손을 뻗어 그녀의 한쪽 뺨을 감쌌다.

민준의 손이 매만지는 설의 뺨에 금세 홍조가 어렸다.

설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내렸고, 민준은 일어나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설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벌어지자 민준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애틋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아프게 물면 상처가 날까 싶어, 그녀의 입술을 머금는 그의 몸짓이 조심스러웠다.

민준이 설에게서 얼굴을 떼어내고 다시 한 번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또 무슨 얘기를 해줄 거야?”

“……늦었어요. 오늘은 그만 자요.”

그의 뜨거운 손바닥 안에서 설의 얼굴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민준은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뺨을 감싼 손을 거두었다.

“벌써?”

“지금 12시 넘었어요.”

“착한 어린이네.”

설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왔다고 말은 했지만, 민준의 속마음은 사실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다.

눈앞에 꽃을 두고도 향기만 맡고 있자니 향기만으로는 너무 아쉬웠다.

민준은 자꾸만 설에게 향하려는 두 손을 양쪽 바지 주머니 속에 느슨하게 찔러 가두었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흐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민들레 생각.”

낮게 잠긴 민준의 목소리는 설의 귀에 조금 전과 다르게, 탁하게 들렸다.

“민들레는 왜요?”

“내가 내년 봄까지 기다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설은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워 오른손을 들어 민준의 눈을 가렸다.

그의 뜨거운 눈빛이 닿아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감추고 싶기도 했다.

“민들레는 가을에도 피지만 오늘은 아니에요.”

설의 핀잔 어린 말투에 민준은 두 눈이 가려진 채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름 꽤 의미심장한 은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의 말을 잘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설이 민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게 아니었다.

바로 그녀가 민들레는 가을에도 핀다고 말했다는 거였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이 가을이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침에 깨워줄게.”

민준이 그의 두 눈을 가린 설의 손을 잡아 내리며 웃었다.

**

설은 집 안에 민준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여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꽃 이야기를 꺼낸 그 탓인지, 민들레를 보러 가자고 한 내 탓인지 모르겠다.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민들레는 가을에도 핀다는 말을 꺼낸 나 때문이 맞다.

그녀의 손으로 가린 눈 아래로 슬쩍 웃음 짓던 민준의 미소가 떠오른 설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어둠 속에서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 무렵, 갑자기 설의 귓가에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순간 무섭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지만, 곧 거실에는 지금 민준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설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하아.”

문을 열자 한층 더 크게 들리는 그 소리는 설에게 무척 고통스럽게 들렸다.

민준이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아주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설은 민준 옆으로 다가가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김민준 씨……?”

“하아. 안 돼…….”

“당신 괜찮아요? 민준…… 아야!”

설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민준이 거실 바닥에 설의 손목을 아프게 짓누르며 무서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잔뜩 일그러진 민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당신 왜 그래요?”

두려운 마음에 설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민준은 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강설?”

무엇에라도 홀린 양 민준이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짜 강설이네.”

털썩.

그는 갑자기 기절한 것처럼 설의 몸 위로 쓰러졌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설은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민준을 조심조심 등 뒤로 감싸 안았다.

그녀는 그가 또다시 나쁜 꿈을 꿀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민준은 아침이 올 때까지 고른 숨소리를 내며 계속 잠이 들어 있었다.

**

그의 등에 딱딱한 바닥이 닿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내 이불이 원래 이렇게 두꺼웠던가?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꼬물꼬물 움직이기도 하는……?

민준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아, 이런.

갑자기 동공을 찌르며 들어온 햇빛이 눈이 부셨던 민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손을 들어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을 덮고 있는 두툼한 이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왼손이 두툼한 이불을 꽉 끌어안고 있었다.

“……으응? 일어났어요……?”

“…….”

이불이 가슴 언저리에서 꼼지락거리더니 민준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이불은, 강설을 닮았다.

어제 분명히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나는 지금 왜 거실 바닥에 설을 이불 삼아 누워 있는가.

내가 설의 이름을 불러서 그녀가 내게로 와 이불이 된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럼 이제 나 좀 놔줘요. 나 당신 때문에 한숨도 못 잤어요.”

“……아.”

민준이 스르르 팔을 풀어내자, 설은 고개를 들어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설의 등 아래로 이불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당신,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굿모닝?”

“…….”

민준이 슬쩍 설의 눈치를 살피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설은 입술을 꾹 다물고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강설.”

“정말 나한테 할 말이 없어요?”

설이 발끈하며 상체를 조금 더 일으켰다.

심한 잠꼬대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가 민준의 이런 모습을 본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잠깐!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몸을 틀며 무언가 항의하려던 설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설의 몸 아래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이를 테면, 아침 인사 같은 거지.”

“…….”

“이제 그만 내려올까?”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니까.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 설이 얼른 민준의 몸 위에서 내려와 이불을 어깨너머로 두르며 바닥에 앉았다.

몸을 일으켜 앉은 민준이 한 손으로 설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흐트러트리며 달뜬 기분을 감추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새벽에 당신이 나쁜 꿈을 꾸는 것 같아서 깨우려고 했는데.”

“……그랬어?”

“당신이 날 끌어안고 또 잠들었어요. 날 놔주질 않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고요.”

“흐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민준이 갑자기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말꼬리를 돌렸다. 딴청을 피우는 걸 보니 더 이상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김민준 씨.”

“응. 강조국 씨.”

설이 대명사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심장이 두근, 엇박자로 뛰었다.

달라진 호칭이 두 사람의 달라진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민준은 갑자기 아침 공기가 그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어제보다 훨씬 상쾌했고 더욱 청량하게 느껴졌다.

“당신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야겠어요.”

“어디를?”

“병원이요.”

“병원은 왜. 당신 어디 아파?”

민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겉옷을 찾았다.

“내가 아니라 당신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병원을 왜 가?”

설이 아픈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이 된 민준이 팔을 위로 쭉쭉 뻗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늘 몸이 무거웠는데, 오늘은 몸도 마음도 깃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하지만 그와 다르게 설은 여전히 진지했고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민준은 단순히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설은 민준의 비닐봉지에서 보았던 수면유도제를 떠올렸다.

“솔직하게 말해봐요. 당신, 왜 잠을 잘 못 자는 거예요?”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돼서 그러는 거야. 곧 괜찮아질 테니 신경 쓸 것 없어.”

“거짓말하지 말아요.”

뜨끔.

민준이 곤란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설을 내려다보았다. 설은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하고 결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 나한테 뭐든지 솔직해야 해요. 앞으로 나한테 거짓말을 하거나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흐흠…….”

“약속해 줄 수 없나요?”

“아니.”

민준이 설 앞에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았다.

쪽, 민준의 입술이 설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약속할게. 뭐든지 다.”

“진짜로 약속, 어어어?”

갑자기 민준이 설을 이불로 돌돌 말아 두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

얼굴만 빼고 온몸이 이불 속에 파묻힌 설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민준을 째려보았지만, 민준은 웃으며 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병원은 내일 가고 오늘은 그냥 둘이 놀자.”

민준이 설을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남겨두더라도 오늘은 온전히 두 사람만의 행복한 날이 될 터였다.

“짹짹. 해봐.”

“뭐라고요?”

곧이어 퍽, 하는 둔탁한 효과음과 동시에 민준의 입에서 윽, 하는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민준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둥지를 벗어난 아기 새는 무사히 침대로 배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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