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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50화 (50/94)

50화. 로미오와 줄리엣2016.06.23.

건우는 비서실장을 통해 아버지인 백 회장이 몸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전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우는 그동안 백 회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건우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끔찍이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은 가볍게 여겼던 아버지에게 그런 기쁨을 주고 싶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여느 재벌 총수들처럼 바로 구속 집행정지 신청을 하고 휠체어에 마스크를 쓰고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백 회장은 의외로 조용한 수감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긴, 만약 백 회장이 그랬다면 아버지에 대한 건우의 혐오감은 더 짙어졌을 것이다.

딸깍-

교도소 면회실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건우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백 회장이 교도관과 함께 면회실로 들어오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백 회장을 바라보았다.

2년 만에 본 아버지는 많이 쇠약해 보였다.

회장실에 앉아 있을 때에는 그렇게 위풍당당하던 아버지도 수의를 입고 있으니 그저 평범한 할아버지에 불과해 보였다.

그래도 아버지인지라, 백 회장의 초라한 모습을 대면하는 순간 그의 가슴이 꽉 막혀왔다.

“오랜만이구나.”

백 회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건우를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아 들렀습니다.”

건우는 냉정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을 침착하게 가다듬었다.

부드러운 외모와 달리 건우는 차가운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성격이 그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주고 있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다. DX는 이제 완전히 정리가 된 거냐?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Pakin 그룹은 무기를 생산 수출하는 방위산업체를 더 이상 소유할 수 없게 되었다.

Pakin의 방위산업체였던 계열사 DX는 직원 고용 승계 조건으로 다른 기업에 매각되었다.

“그 정도로 끝난 게 감사할 일이지요.”

사실 정부가 마음만 먹었다면 Pakin 그룹을 해체시킬 수 있는 명분은 충분했다.

그래도 Pakin 그룹이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건 영애를 보호하려 했던 건우의 행적이 암묵적으로 정상참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전에 갑자기 공장은 왜 지은 거냐.”

백 회장이 교도관의 눈치를 살피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전에 물류 창고가 필요해서요.”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건우를 바라보았지만, 건우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백 회장은 회사에 관련된 일이라 계속해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바깥출입을 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해도 불필요한 시설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걸 백 회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건우 너, DX도 넘어간 마당에 국제 무기상에 아직도 줄을 대고 있는 이유는 또 뭐야. 혹시…… 나중을 생각하는 거냐?”

“아버진 여전하시네요.”

백 회장의 낮은 목소리에는 희망이 섞여 있었기에 건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백 회장의 탐욕스러운 눈빛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기업 운영은 자선사업이 아니야, 명심해.”

“아버지!”

건우가 언성을 높이자 백 회장은 고개를 돌리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백 회장은 아들 건우가 정부 기관과 관련된 투자에 적극적이고, 사회 각계 계층에 목돈을 기부하는 이유가 바로 그의 특별사면을 염두에 두고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제아무리 그를 미워해도 그래도 속으로는 핏줄이라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건우는 백 회장의 사면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점은 기특했지만, 부모 앞에서도 누그러지지 않는 건우의 차가운 면모는 내심 괘씸했다.

“다른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건우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와 마주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날 이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워졌다.

한때 남들보다 더 높은 긍지를 가지고 살았던 건우에게 그 수치심이란 생각만 해도 몸서리칠 정도로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건강하세요, 아버지.”

건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뱉으며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나도 일이 이 지경까지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후회는 안 해. 후회 같은 건 나약한 패배자들이나 하는 거다.”

“전 후회합니다, 아버지.”

건우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만약이라는 경우의 수를 따지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언제나 그 출발점에 그가 있었다.

그가 NIS를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안기영도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백 회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날 추워지는데 옷 따듯하게 입고 다녀라.”

건우가 고개를 돌리며 백 회장을 외면했다.

그는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도 아버지라 온전히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이따금씩 지독하게 외로울 때면, 의식의 끄트머리에 어릴 적 다정했던 아버지의 환영이 보이기도 했다.

“……건강이 안 좋으시다면서요.”

울음을 삼킨 목소리가 제멋대로 갈라져 나왔다.

“아프긴 내가 왜 아파! 여기서 나갈 때까지 건강해야지. 내가 밖에 나가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금세 오만함과 뻣뻣한 자세를 되찾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건우는 거부감이 아닌 안도감이 들었다.

아버지의 이런 욕심과 오만한 모습이 오히려 건우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그때까지 네가 Pakin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나가기만 하면 DX보다 더한 걸 만들 테니 말이다. 두고 봐라!”

“…….”

그는 아버지가 많이 달라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가에 촉촉이 맺혔던 물기는 빠르게 말랐고, 건우는 다시 침착한 모습을 되찾았다.

“네가 오기 싫으면 박 실장이라도 자주 보내.”

“알겠습니다.”

건우는 서류 가방 손잡이를 힘주어 잡은 뒤 면회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서 그는 복도 벽을 한 손으로 짚고 섰다.

목구멍까지 눈물이 차오르는데 쏟아낼 곳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아서 숨을 헐떡거리는 건우의 머릿속에 문득 서연이 떠올랐다.

정말 웃기게도 그 순간, 서연이 보고 싶었다.

**

5.

4.

3.

2.

1.

땡!

“내일 뵙겠습니다!”

초침과 분침이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찰나의 순간, 서연이 의자를 뒤로 힘껏 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가방을 손에 들고 의자를 책상 밑으로 도로 밀어 넣은 후 사무실 출입구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걷듯이 달렸다.

서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반복해서 누르며 초조하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 들렀는데, 시간 괜찮으면 나랑 저녁 같이할래요?

후훗.

서연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긴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도도하게 쓸어 넘겼다.

아닌 척하더니 역시 그린 라이트였다.

안 그래도 그녀는 건우의 우울한 얼굴이 계속 눈에 밟혔다.

아직도 먹구름을 머리 위에 이고 다니는지도 궁금했고, 그녀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도 궁금했다.

마음이 급하니 엘리베이터 움직이는 속도가 영 굼뜨게만 느껴졌다.

잠시 후 서연은 빠르게 달려 건우와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회사 옆 골목 안쪽에 있는 편의점 앞에, 안이 잘 보이지 않는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딱 봐도 저 차는 아닐 터인데 주변에 다른 차는 없었다.

서연은 고개를 앞으로 쑥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는데 어디에도 건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씨. 오늘이 만우절이야? 쳇.”

서연이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힘없이 뒤돌아섰을 때였다.

빠앙-

그녀의 등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응?

다시 뒤돌아보니 까만 자동차가 그녀를 향해 깜빡깜빡, 헤드라이트를 비추었다.

서연이 까만 자동차를 향해 다가가자 조수석 창문이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타요, 서연 씨.”

로미오였다.

서연은 반색을 하며 냉큼 조수석에 올라 신 나게 안전벨트를 찼다.

“이거 아저씨 차예요?”

“네. 내 차예요.”

“아저씨 부자였군요?”

“맞아요. 부자예요. 내가 부자라서 좋아요?”

“부자이면 당연히 좋은 것 아니에요? 참, 그런데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예전에 그 회사 다녔잖아요. 아직도 그곳에 거미줄 같은 인맥이 남아 있죠.”

“그럼 오늘은 정말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예요?”

“네. 네?”

핸들을 돌리며 무심코 대답을 하던 건우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혹시 못 알아들었나 싶었던 서연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또박또박 말했다.

“오늘은.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냐고요.”

“아…….”

건우는 뭐라 대답을 할지 망설였다.

그가 서연의 직구 화법에 적응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곤란하면 대답 안 해도 괜찮아요. 대신 저녁은 우리 아주 끔찍하게 매운 걸 먹으러 가요.”

“끔찍하게…… 매운 걸로요?”

“네. 아주아주 끔찍한 걸로요.”

서연이 당황한 건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난꾸러기 같은 눈빛을 했다.

**

건우는 같은 가격의 음식에도 레벨이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식당 벽에 붙은 메뉴판에는 매운 단계가 총 6단계로 세심하게 나뉘어 적혀 있었다.

가격의 차이가 아니라 매운 강도의 차이라니, 그는 아무리 메뉴판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아도 도무지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매운맛이 강하다고 했는데, 단순히 생각해 볼 때 아무리 매워봤자 그래도 사람이 먹을 만하지는 않겠나 싶었다.

“몇 단계 드실 거예요?”

서연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건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잠시 후 일어나게 될 위장 습격 사건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3단계가 중간이니까 그 정도는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4단계 먹을까요?”

“아저씨, 혹시 매운 고추를 밥 없이 여러 개 먹을 수 있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건우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 1단계 드세요. 저도 1단계 먹을 거니까요.”

“그렇게 많이 매워요?”

후훗.

서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에…….”

건우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혀를 길게 내밀어 붙인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혀의 화기를 식혀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서연은 이따금씩 킥킥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혀로 날름거렸다.

“1단계도 잘 못 먹을 거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3단계를 먹겠다고 그랬어요?”

“끔찍하게 매운 걸 먹겠다던 사람도 잘 못 먹던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요?”

건우가 억울한 표정으로 툴툴거리더니 다시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혀를 갖다 댔다.

엄청나게 매운 걸 먹겠다고 잔뜩 벼르더니, 서연도 건우와 별로 처지가 다르지 않았다.

둘 다 우유를 마시러 간 김에 매운 짬뽕을 몇 젓가락 먹고 나왔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건우는 그래도 남자 체면이 있지, 라는 몹쓸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두 번째 젓가락질부터 그는 급속히 겸손해졌다. 눈물, 콧물에 쓰린 속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까지 지끈거렸다.

그는 도대체 왜 이런 걸 돈 주고, 줄을 서면서까지 사먹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이제 기분이 좀 괜찮아졌어요?”

서연은 혀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건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서연을 쳐다보았다.

“내가 언제 기분 안 좋다고 했어요? 그냥 저녁이나 먹자고 했지.”

“나한테 왜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요?”

“김민준…… 대리 여동생이기도 하고 회사 후배이기도 하고, 그리고 또…….”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서연과는 딱 이만큼의 거리만 유지했으면, 그저 가끔 같이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사이 정도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건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너무 지쳤고, 누군가를 만나 위로받고 싶기도 했다.

그저 이렇게 서연을 만나 웃으며 잠깐이나마 시름을 잊고 싶을 뿐이었다.

“……우린 친구잖아요.”

“우리가 친구예요?”

“커피도 같이 몇 번 마셨고, 오늘은 매운 음식도 같이 먹었고. 이 정도면 우리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않아요?”

“전 남자랑 친구 안 하는데요? 애인이라면 또 모를까요.”

“젊은 사람이…… 생각이 참 고루하네요.”

건우는 민망한 표정을 감추며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얘기를 꺼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저랑 놀고만 싶다는 거군요? 연애는 하기 싫고, 놀고는 싶고.”

“그렇게까지 비약하진 말아요, 서연 씨.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니까.”

건우가 정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뜻과 다르게 굉장히 나쁜 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언짢아졌다.

“좋아요! 친구해요, 우리.”

“네?”

“내가 이제부터 아저씨랑 놀아주겠다고요.”

서연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아이스크림콘을 깨물어 입안으로 모두 털어 넣은 뒤, 두 손과 옷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마저 툭툭 털어냈다.

“근데, 그 전에 우유 하나만 더 사 먹고 친구해요.”

서연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그 안에서 손바닥만 한 동전 지갑을 꺼냈다.

“매운 거 잘 먹어서 나한테 먹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저 매운 거 잘 못 먹어요. 일부러 신체에 고통을 가하며 즐길 정도로 가학적인 취미도 없고요. 전 달콤한 거 좋아한다고 말했잖아요.”

참, 그랬지.

서연은 ‘생크림 아주 많이’ 아가씨였다.

“그런데 여기는 왜 오자고 한 거예요?”

“이를테면 뇌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거예요. 쓰린 속 때문에 다른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거죠. 제가 울고 싶을 때 가끔 써먹는 방법이에요.”

“서연 씨 아까 울고 싶었어요?”

“나 말고 아저씨요. 그러게 아저씨는 왜 아직도 청승맞게 머리 위에 먹구름을 이고 다녀요?”

그럼 나 때문에 여길 오자고 한 거였나.

그가 서연을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먹었다.

건우는 이 생크림 아가씨와 친구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친구와 연인 사이 정도면 좋겠다는 건 그의 욕심인 걸까?

“아저씨도 우유 사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데 그보다.”

“응?”

편의점 문손잡이를 잡은 서연이 뒤돌아 건우를 바라보았다.

“서연 씨는 언제까지 나를 아저씨라고 부를 거예요?”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안 부르면,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냥 오빠라고 부르던가요.”

“그건 안 돼요. 세상에 오빠는 우리 오빠 한 사람뿐이에요.”

“치사해요, 서연 씨.”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요.”

“……백건우.”

“응?”

“내 이름 백건우라고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줘요.”

백건우?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이름인데…….

“우유 안 사도 돼요?”

“아니요? 살 거예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서연이 편의점 문을 열고 곧장 안으로 사라졌다.

건우는 피식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

2년 만이었다.

민준은 추모 공원, 부모님의 납골당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두 분을 그리워하며 눈물 흘리던 아이는 이제 어린 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두 분의 심중을 헤아리는 어른이 되었다.

“다녀왔습니다.”

민준이 감았던 눈을 뜨며 조용히 읊조렸다.

민준과 김 국장이 아니라면 두 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터라, 그가 없는 동안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많이 외로우셨을 것이었다.

묵념을 마치고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민준이 갑자기 제자리에 걸음을 멈춰 섰다.

부모님의 납골당 유리문 옆에 작은 꽃다발이 꽂혀 있었다.

납골당 사이즈에 맞춰 제작을 한 것처럼 보이는, 화사한 꽃들이 하나하나 세심하게 다듬어진 작은 꽃다발이었다.

민준은 의아한 얼굴로 유리문에 가까이 다가가 꽃다발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

그곳에 하얗고 노란 민들레꽃이 아름다운 리본으로 곱게 묶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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