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라면 먹고 가는 남자2016.06.28.
설은 저녁을 먹고 연구실 식구들과 함께 가볍게 맥주 한 잔을 마셨다.
그녀는 조금 더 있다가 집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근처에서 차를 대고 설을 기다리는 경호관을 생각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최근 그녀에게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로 경호관이 교체되었는데,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사람에게 술에 취한 모습까지 보여줄 순 없었다.
설을 태운 차량이 오피스텔 정문을 지나 동별 출입구에서 멈췄고 그녀는 경호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응?”
설이 제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선 채 눈을 깜빡거렸다.
맥주를 한 잔만 마시고 왔는데 눈에 헛것이 보였다.
서울에 있어야 할 민준이 오피스텔 출입구에 서서 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늦었네.”
설을 발견한 민준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를 기다리느라 많이 피곤했는지, 그는 설을 보고도 웃지 않았다.
민준이 설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경호관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며칠 전 영애가 위험에 처했던 일 때문에 경호실에는 한차례 거센 폭풍우가 지나갔다.
경호원들에게는 굴욕적이게도 이제 영애의 경호는 경호실이 아니라 NIS 소관으로 넘어갈 예정이었고, 그녀는 그때까지만 영애의 곁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영애에게 또 다른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긴다면 경호실의 체면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민준은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결연한 얼굴의 여자 경호관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입니까?”
“안 보입니다.”
“제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안 보인다고.”
경호관이 민준을 똑바로 쳐다보며 품 안으로 천천히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설이 경호관의 팔을 붙잡았다.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제가 아는 분이에요.”
“하지만 영애 님.”
“정말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먼저 올라가세요.”
설이 경호관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관은 탐탁지 않은 눈길로 민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품 안으로 집어넣었던 손을 밖으로 뺐다.
그녀는 설의 환한 얼굴을 보며 잠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 두 사람 앞에서 사라졌다.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경호관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설은 토끼처럼 깡충 뛰어 민준 앞에 섰다.
그녀는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온 민준이 너무 반가웠다.
“그냥 얼굴 보려고 잠깐 들렀어.”
“얼굴 보려고 이 시간에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예요? 왜요……?”
“할 얘기도 있고.”
민준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할 말이 있다는 말에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은 민준의 눈빛이 복잡해 보여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이런 얼굴로 할 말이 있다는 걸 보니 그녀에게 하기 어려운 말일 터였다.
“우리 급한 이야기가 아니면 오늘 말고 나중에 얘기할까요?”
“왜 갑자기 그런 얼굴을 하는 거야?”
민준이 설핏 미간을 좁히며 설을 바라보았다.
“당신 혹시…… 또 어디 가는 거예요?”
의아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던 민준은 이내 그녀의 말뜻을 알아채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당신이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딜 가.”
그는 자신을 보며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설이 안쓰러웠다.
“안아 줄래, 안길래?”
민준이 설을 바라보며 두 팔을 양옆으로 넓게 벌렸다. 그제야 안심이 된 설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의 품에 덥석 안겼다.
민준은 설의 어깨에 고개를 깊이 묻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품 안으로 날아온 민들레 홀씨가 혹시라도 바람에 다시 날아갈까 봐 두 팔로 가슴 안에 단단히 가두었다.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난 또 안 좋은 일이 있는 줄 알았잖아요.”
“……내 얼굴이 어땠는데.”
“표정이 예전과 똑같았어요.”
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민준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자 두 사람이 헤어지던 날이 떠올랐고, 그때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눈물이 났다.
민준이 이렇게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은 그 뒤에 감춰야 할 감정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래서 설은 그날처럼 표정을 감춘 민준이 불안하고 두려웠다.
“내가 오늘 부모님께 다녀왔거든.”
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설이 작게 숨을 죽였다.
부모님이라니, 어떤 부모님을 말하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직 두 사람은 민준의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그래서 설은 그에게 어떤 부모님을 이야기하는 거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서 민들레꽃을 봤어. 당신이 좋아하는 꽃.”
민준은 아직, 그녀가 어떻게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해 알고 있는지 김 국장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으니 설은 분명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터였다.
그녀는 어쩌면 민준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랬군요.”
“응.”
설은 짧게 대답한 뒤 천천히 팔을 올려 민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조금 전 안아줄 건지 안길 건지 물었던 민준은, 사실 그녀가 안아주기를 바랐던 것이었을까?
안아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해서 그녀를 안고 기대는 민준을 생각하니 그녀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민준은 설의 어깨에 고개를 얹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설이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바람을 타고 우연히 날아든 홀씨가 척박하고 메마른 그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예쁜 꽃을 피웠다.
민준은 이제 그녀가 떠난다고 해도 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녁은 먹었어요? 피곤하지 않아요?”
“당신은 왜 나한테 항상 밥 먹었냐, 잘 잤냐만 묻는 거지? 꼭 엄마 같잖아.”
민준이 피식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은 분명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게 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존재할 수 있을까?
설은 그에게 사랑하는 여인이면서 한편으론 어머니 같고, 또 다정한 누이 같기도 했다.
그녀는 그에게 따듯하고 사랑스럽고 편안한 보금자리였다.
“당신 지금 많이 피곤해 보여요. 근처에 호텔 있으니까 오늘은 여기에서 자고 내일 올라가요. 그렇게 해요, 응?”
설은 민준의 품에서 상체를 조금 떨어뜨리며 근심스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민준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 나랑 같이 있어 준다면.”
오늘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 따듯한 온기를 좀 더 오래 붙잡고 있고 싶었다.
**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하자 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깥으로 고개를 쑥 내밀고 702호 현관을 슬쩍 쳐다보았다.
이 상황에서 만약 경호관과 얼굴이라도 마주친다면 서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설은 뒤꿈치를 들고 701호를 향해 살금살금 걸었고, 민준은 그런 설을 보며 귀엽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설은 재빨리 현관문을 연 뒤 그에게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꼭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설은 민준을 이대로 서울로 올려 보내고 싶지 않았고, 그녀의 집을 코앞에 두고 그가 이 시간에 호텔을 찾아 거리를 전전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기엔 민준이 너무 지쳐 보였다.
두 사람이 오피스텔 안으로 무사히 들어오자 설은 움츠렸던 어깨와 허리를 당당히 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려운 장애물을 무사히 극복하고 마침내 결승선을 통과한 기분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당신이 입을 만한 옷이랑 세면도구 찾아줄게요.”
설이 서둘러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민준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먼저 나 먹을 것 좀 주면 안 돼?”
“당신 아직 저녁 안 먹었어요?”
“응, 안 먹었어. 나 배고파.”
민준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지금 먹을 만한 게 없어요. 라면도 괜찮겠어요?”
“집에 라면이 있어?”
“혹시 몰라서 내가 사다 놓았어요.”
설은 라면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민준이 돌아온 이후 평소 같았으면 사지 않았을 물건을 구입해 집에 구비해 놓았고, 라면도 그중 하나였다.
민준이 셔츠 소매를 올리고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 동안 설은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작은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민준은 식탁 의자에 앉아 설의 분주한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당신도 나랑 같이 먹을 거지?”
“그럼, 나 빼고 당신 혼자 먹으려고 했단 말이에요?”
“아니. 혼자 먹기 싫어서.”
민준은 그를 향해 살짝 눈을 흘기는 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상하게도 설을 만나면 그가 사실은 배가 고팠고, 사실은 피곤했으며, 사실은 쉬고 싶었던 거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이제 무슨 일을 하는 거예요?”
설은 끓는 물에 라면을 넣으며 아무것도 아닌 말인 양 담담하게 물었다.
사실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건지 궁금한 건 아니었다. 그저, 민준이 이젠 그녀를 두고 멀리 가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냥 늘 하던 일.”
“지금 나한테도 비밀이라는 거예요? 난 이미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은 묻지 마. 당신은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어.”
민준의 장난스런 말투에 설은 흘끔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가족들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죠? 걱정이 많겠어요.”
“아버지만 알고 계셔. 어머니랑 서연인 모르고.”
“그래도 가족인데 너무하네요. 진짜 모른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어쩌면 어머니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계실 수도 있어. 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셔서 나까지 그런 일을 한다고 믿고 싶진 않으실 거야.”
“……그런데도 당신은 그 일이 좋아요?”
“응.”
설은 양손에 보호 장갑을 끼고 냄비 손잡이를 잡아 식탁 위로 가져왔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
그녀는 왠지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어 아무 말 없이 냄비 뚜껑을 열었다.
그가 그녀 때문에 일을 그만두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설 때문에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었다.
하지만 민준이 만약 설에게 연구원을 그만두길 바란다는 말을 했다면 그녀 역시 같은 대답을 했을 터였다.
그녀 역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고, 또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그만두길 바란다면요?”
“정말 내가 이 일을 그만두길 바라는 거야?”
민준이 뜨거운 김이 나는 라면을 집어 입안으로 가져갔다.
“그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 일은 내가 좋아하고 또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야.”
“알아요. 그렇지만.”
“응?”
“……아니에요. 내가 괜한 말을 했어요.”
설은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입가로 가져가 후후 불어 뜨거운 김을 식힌 후 입에 넣었다.
이제 더 이상 그가 다치거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진지하게 꺼낼 수는 없었다.
그건 그를 걱정하면서 괴로워하고 싶지 않은, 그녀의 이기적인 마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설이 민준에게 그런 걸 바랄 입장도 아니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위험한 일을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아버지 때문에 그래?”
민준의 물음에 설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잠시 그를 응시했다. 그가 어떤 아버지를 얘기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내 친아버지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고. 당신 지금 걱정하는 거잖아.”
“…….”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누구 탓이 아니라 사고였어. 그리고 꼭 이 일을 해서가 아니라 사고는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일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의 일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잖아요.”
“아니. 그건 분명 불행한 사고였어. 그러니 당신이 거기에 부채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어. 그건 돌아가신 이 박사님도 마찬가지고.”
후루룩-
민준은 면발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방관이 화재 진압을 하다가 유명을 달리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 집에 불이 난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민준은 혹시라도 설이 쓸데없이 책임감 비슷한 감정을 갖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럼…… 그 집은 왜 받지 않은 거예요?”
“내가 뭘 안 받아?”
“할아버지께서 당신한테 남기신 평창동 집이요.”
“…….”
민준이 입안에 든 음식을 느리게 씹으며 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민준이 부탁한 일을 설에게 일부러 전했을 리는 없었다. 그 이야기는 김 국장에게도 즐거운 이야기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설은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어떻게 안 거야?”
민준이 시선을 내리며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
“할아버지께서…… 수첩에 메모를 남겨 놓으셨어요.”
“그러셨어?”
하긴, 그렇게 들키지 않은 이상 아버지가 설에게 그 이야기를 먼저 꺼냈을 리가 없었다.
“김민준 씨.”
“응.”
“할아버지께선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소중한 추억이 있는 집을 당신한테 남겨 놓으신 거고요.”
“박사님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내가 그걸 받을 이유는 없어. 그리고 나한테 그 집이 생겼다고 해서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나한테는 도대체 그 집을 왜 준 거예요?”
“난 그 집의 진짜 주인한테 돌려줬을 뿐이야.”
이인호 박사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사실 그는 친아버지의 목숨값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집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해도 그는 거절했을 터였다.
그는 이인호 박사가 느꼈을 자책감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가 더 중요했다.
“난 그 집을 받을 수 없어요. 할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면 많이 속상하실 거예요.”
“당신이 그 집을 찾았으니 난 그걸로 됐어. 내가 좋다는데, 그걸로 안 되는 거야?”
“정말 그렇게 나한테 줘도 괜찮은 거예요?”
그냥 평창동 집만이 아니었다. 집이 워낙 고가라 납부해야 할 세금도 상당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 집은 이미 소유권 이전등기와 관련된 세금까지 깨끗하게 정리된 상태로 설에게 넘어왔다.
“박사님께서 내가 행복하길 바란다고 하셨다며. 난 당신이 그 집을 찾아서 충분히 행복해.”
민준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았고,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는 복잡했을 감정을 모두 정리한 후 그녀에게 갈무리한 감정만을 보여줬다.
설은 그녀가 오랫동안 잠 못 자고 고민했던 일을 민준이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리자 왠지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 이제 나한테 다시 돌려달라고 하지 말아요! 난 그 집 가지고 시집갈 거니까.”
“시집은 언제 갈 건데?”
“…….”
민준은 그릇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담담한 어조로 되물었다.
설은 할 말을 잃은 채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민준은 설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놓고도 후루룩후루룩, 면발을 입안으로 잘도 끌어 올렸다.
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자 민준이 힐끗 설을 쳐다보았다.
“응? 언제 갈 거냐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설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한 뒤 얼른 시선을 내렸다. 그녀는 그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것도 아닌데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라면 불겠는데.”
“응. 먹어요.”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 식사를 이어갔다.
사실 어색한 건 설뿐이었고, 민준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냄비를 바닥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
“여기 당신 옷이요. 칫솔은 새 거 꺼내서 욕실 세면대 위에 올려놓았어요.”
“이걸 여태 가지고 있었어?”
민준은 설이 건네준 옷가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날, 민준을 찾아왔던 설이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돌아갔을 때의 옷이었다.
이 옷에 대해서는 그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내 옷도 아닌데 마음대로 버릴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돌아오면 돌려주려고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설은 사실 민준이 한국으로 돌아오면 이 옷을 핑계로 그를 한 번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지금껏 그 옷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고만 있었을 뿐 차마 꺼내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 옷을 보며 민준과 헤어지던 날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민준은 설이 내민 옷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많이 울었어?”
민준의 낮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동안 지옥 같은 제 마음을 외면하기 급급해 설이 어떤 마음으로 남아 있을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병이 나았다니 다행이었고,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산다니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겨진 설의 마음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그와 다르지 않았으니 많이 아팠을 것이고, 많이 울었을 터였다.
“응. 많이 울었어요.”
설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지만, 지난날을 떠올리자 눈가가 촉촉해졌다.
민준이 설의 어깨를 두 팔로 감싸 안자 그녀가 들고 있던 옷가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가 잘못했어.”
민준은 눈을 감고 설의 귓가에 한숨처럼 속삭였다.
그녀가 그를 여전히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민준을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의 크기가 그와 같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잘못이었다.
“……응. 당신이 잘못했어요.”
설의 눈물이 민준의 셔츠에 진하게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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