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사랑은 감기 같아서2016.06.30.
설이 씻고 거실로 나가 보니 민준은 소파에 팔짱을 끼고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가 가져다 준 이불은 민준 옆에 개킨 그대로 놓여 있었다.
“불편하지 않아요?”
“괜찮아. 편해.”
자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 민준은 그녀가 묻는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설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뜩이나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사람이라 더욱 마음이 쓰였다. 작은 소파도, 민준이 잠자리로 삼기엔 너무 불편해 보였다.
그렇다고 그한테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할 수도 없고, ‘우리 침대에서 손만 잡고 잘래요?’라는 말을 꺼낼 용기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도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나도 당신이랑 같이 자고 싶은데, 내가 오늘은 별로 순수할 자신이 없어.”
“내가 언제 당신이랑 자고 싶다고 했어요?”
설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들어가 자라는 말인 건 잘 알았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얼른 자. 난 눈 좀 붙이고 있다 알아서 잘 갈 테니까, 괜히 아침 일찍 일어나지 말고.”
“그래도…….”
설이 여전히 그 앞에 머뭇거리며 서 있자, 민준이 턱짓으로 침실을 가리켰다.
“토끼는 위치로.”
“치.”
그녀의 아랫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이건 뭔가 입장이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었다. 누가 얼핏 보면 설은 같이 자자고 조르고 있고 민준이 완강히 거절하는 모양새였다.
설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침실을 향했다.
그녀는 미련이 남은 듯,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이미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
거실 불이 꺼지고 마침내 어둠 속에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민준은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맑고 푸르른 자연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머릿속에 재현된 장면은 정말 순수함의 극치였다.
민준은 자신의 인내와 정신력에 후한 점수를 주며 이불을 덮고 소파에 길게 누웠다.
좁은 소파가 불편하긴 했지만 그의 순수한 마음과 대조를 이루는 육체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침대에서 한참 동안 몸을 뒤척거리던 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쳐다보았다.
혹시 민준이 저번처럼 잠을 잘 자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방문을 꼭 닫으면 바깥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까 봐 일부러 방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작은 소음이라도 들릴라치면 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러기를 몇 번쯤 했을까, 이러다 정말 밤을 샐 것 같았던 설은 차라리 민준의 근처에서 잠을 자는 게 더 낫지 싶었다.
설은 침대에서 일어나 붙박이장 문을 열고 두툼한 이불과 요를 꺼냈다.
베개와 이불 세트를 품에 안은 그녀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거실로 걸어 나갔다.
설이 소파를 흘끔 쳐다보니 민준은 오른팔을 이마에 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설은 소파와 가까운 바닥에 조심스럽게 요를 깔고 난 뒤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동안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고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랐다.
마침내 자세를 잡은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민준의 얼굴을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
“……!”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설은 민준이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민준은 깨어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그녀와 민준의 눈이 마주쳤다.
“안 잤어요?”
“……응.”
설은 낮게 갈라진 민준의 목소리에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이 안 와요?”
“……그런가 봐.”
“그럼 내가 순수하게 안아 줄까요?”
민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설은 아마 민준이 걱정되어 거실로 나왔을 것이었다.
걱정은 되는데 같이 자자고 할 수는 없고, 해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게 차가운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것일 터였다.
바보 같은 민들레 때문에 그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러다 감기 걸려. 어서 방으로 들어가.”
“나 하나도 안 추워요. 이거 되게 따듯한 이불이에요.”
설이 자신 있게 이불을 들춰 보이며 탁월한 보온성을 강조했다.
“……진짜.”
민준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설에게 성큼 다가왔다.
“으으응?”
설의 몸이 갑자기 공중에 붕 떠올랐다.
민준은 설을 이불로 둘둘 말아 안고 침실로 향했다. 그녀를 이불로 말아 침대로 배송하는 데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나 괜찮다니까요? 하나도 안 추워요, 진짜!”
“내가 추워서 안 되겠어.”
민준은 애벌레가 된 설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후 옆에 누워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쿵쿵 낮게 울리는 민준의 심장박동이 느껴지자 설이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그녀가 돌돌 말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자 민준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만있어. 죽겠으니까.”
“…….”
설의 목 뒤에서 더운 입김이 느껴졌다. 민준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익숙한 향기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
깜박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5시가 다 되어가는 아침이었다.
민준은 설이 깰세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욕실에서 간단한 세면을 한 후 옷을 갈아입고 1층 현관 밖으로 나왔다.
“춥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칼바람을 품고 있었다.
하아-
민준이 오피스텔 출입구에 서서 허공에 길게 입김을 뿜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시간이 꽤 남았는데, 벌써 희끄무레한 어둠을 가르며 출근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금 올라가는 거예요?”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서운함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민준이 뒤를 돌아보니 설이 잠옷 바람에 기다란 카디건을 걸친 채 서 있었다. 그녀는 급하게 뛰어 나왔는지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일어나지 말라니까. 추운데 왜 나왔어?”
“눈 뜨니까 당신이 없길래…….”
미간을 찌푸리며 설에게 다가간 민준이 코트 자락을 펼쳐 그녀를 품 안에 안았다.
그 역시 그녀를 이곳에 두고 가야 하는 서운함이 설보다 컸으면 컸지 작진 않았다.
민준은 그녀를 다독였다.
“금요일 저녁에 데리러 올게.”
“그럴 필요 없어요. 나 금요일 저녁에 약속 있어요.”
“약속 있어? 무슨 약속.”
“아버지께서 그날 얼굴 좀 보자고 하셨어요.”
“그럼 일 끝나면 전화해.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응.”
설은 헤어지기가 아쉬워 민준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면 그가 안녕이라고 말할 것 같았다.
민준이 설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요즘 영애한테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온다던데. 아무래도 영애의 혼기가 꽉 찼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갑자기 언짢은 생각이 떠오른 민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강조국.”
“응.”
“모르는 사람이 과자 준다고 따라가면 돼, 안 돼.”
“……안 돼요.”
“잘 모르는 사람이 밥 먹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지?”
“빨리 신고해야 해요.”
“누구한테?”
“당신한테요.”
설은 그제야 웃으며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민준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설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다시 한 번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지금 나 따라갈래?”
“그럴까요?”
설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나른하게 웃었다.
물론 민준의 말이 농담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이 설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졌기에, 그녀의 아쉬움은 깨끗이 사라졌다.
“추워. 얼른 올라가.”
“서울에 도착하면 나한테 전화해 줘요, 알았죠?”
“그래.”
민준이 웃으며 설에게 손을 흔들었다. 손을 마주 흔들어 인사하는 설은 마치 출근하는 신랑을 배웅 나온 새색시의 모습 같았다.
민준의 자동차가 눈앞에서 멀어지자 설은 카디건을 앞으로 여미며 뒤돌아섰다.
옅게 웃고 있던 설이 웃음기를 거두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몇 발자국 앞에, 경호관이 당혹스런 얼굴로 서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일어나셨습니까, 영애 님.”
아마 설이 현관문을 닫고 나오는 소리를 듣고 쫓아 나온 모양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설과 민준의 애틋한 이별 장면을 전부 보았을 터였다.
설은 경호관의 앞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녀는 버튼을 누른 후 옆에 다가와 선 경호관을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잠이 일찍 깨서 잠깐 바람 쐬러 나온 거예요.”
“네, 하지만 아까…….”
“나 혼자서 말이지요.”
설의 단호한 목소리에 경호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설은 경호관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경호실에 보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물며 다른 일도 아니고 영애의 오피스텔에 남자가 나타났다는 특이 사항은 분명 위에 보고가 될 터였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경호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임시로 와 있는 처지인데 괜한 분란 거리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잠깐 본 남자의, 묘한 기류를 형성하는 위화감과 긴장감이 도는 눈빛을 떠올리자 건드려서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경호관은 주머니 안에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체념하며 밖으로 손을 뺐다.
“고맙습니다.”
설이 경호관을 바라보며 설핏 웃어 보였다.
**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민준은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설은 지금쯤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민준은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누른 후 스피커 모드로 바꾸어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를 한 병 꺼내 마셨다.
꿀꺽, 꿀꺽-
목울대가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따르르-
-이제 도착한 거예요?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은 진작 했고 샤워도 했어. 지금 출근하는 거야?”
-아니요.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조금 있다 나가도 돼요.
“아침부터 무슨 약속이 있어?”
-……아, 건우 씨요. 가끔 일 때문에 만나는데 오늘 만나기로 했거든요. 지금 아마 대전으로 내려오고 있을 거예요.
“흐음. 백건우랑 여전히 친하게 지내나 보네?”
-정말 일 때문에 만나는 거니까 질투하지 말아요. 아주 공적인 만남이라고요.
“모르는 사람 만나지 말랬다고 이제 아는 사람 만나는군.”
민준은 못마땅한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결국 입술 끝에 웃음을 머금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설이 기분 좋게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유쾌하지 않은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근데 당신이 공적으로 백건우를 만날 일이 뭐가 있어?”
-Pakin이 정부 산하 기관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어요. 민간 기업으로는 제일 큰 규모거든요.
“Pakin에서 투자하는 거랑 강조국 씨랑 무슨 상관이 있어?”
-……아무래도 내가 아는 사람이라 이야기하기가 편한가 봐요. 다른 뜻은 없어요.
“강조국 씨 한가하네, 근무 시간에 개인적인 외출을 다 하고 말이야. 그렇다고 백건우한테 급한 용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요새 너무 한가한 거 아니에요? 어제는 서울에서 대전으로 퇴근을 다 하고 말이죠.
설의 너스레에 민준이 손에 들고 있던 플라스틱 물병을 공중으로 던졌다 잡으며 웃었다.
“나 이따 시간 내서 잠깐 병원에 들를 거야.”
-말도 잘 듣고 착하네요?
“빨리 나아서 강조국한테 선물 받아야지. 근데 강조국 씨랑 있으면 잠이 잘 오는 걸 보니 병원을 꼭 다닐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나 그냥 병원 대신 대전으로 진료 받으러 다닐까 봐.”
사실 엄밀히 말하면 어젯밤 잠을 잘 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악몽을 꾼 것도 아니었다.
그가 잠을 잘 못 잔 건 심장이 잠들지 않아서였을 뿐, 불면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설을 다시 만난 이후로 그의 심장이 과도하게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심장이 더 이상 네 심장 못 해먹겠다고 파업을 해도 그가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갖고 싶은 게 뭔지 미리 말해주면 안 돼요? 갑자기 말하면 내가 준비 못 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뭘 받고 싶은지는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응? 시간 됐다. 알았어요, 나 이제 준비하고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따 건우 씨 만나면 당신 안부 전해줄게요.
“안부는 무슨. 백건우랑 나랑 서로 안부 전할 사이도 아닌데, 됐어.”
-아…….
설이 잠시 대답을 주저하며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머뭇거림에 민준이 눈썹을 찌푸렸다.
민준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 볼썽사납게 옛 남자 친구를 질투하는 꼴이 되었다.
“강조국 씨.”
-……말해요.
“백건우한테 내 안부도 전해주고 일도 열심히 해. 아무리 경호관이 같이 있다지만 너무 멀리 돌아다니진 말고.”
-알았어요.
“그래도 백건우랑은 너무 오래 있진 마.”
-후후후. 알았어요.
“그렇게 이상하게 웃지도 말고.”
-다른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웃으면 좀 귀엽다고 그랬는데요?
“그런 말, 들리는 대로 다 믿고 그러는 거 아니야.”
-질투쟁이.
그녀의 뽀로통한 말투에 민준이 미소 지으며 거실 창문을 옆으로 활짝 열었다.
그러자 파란 가을 하늘이 그의 눈에 시리게 가득 담겼다.
“강조국.”
-왜 불러요.
“……보고 싶네, 진짜.”
파란 하늘을 보아도 눈에 보이는 건 온통 설의 웃는 얼굴뿐이었다.
그녀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에 햇살처럼 흩어졌다.
**
그녀가 건우와 만나기로 한 곳은 연구원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카페였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매장 안은 한산했다. 설은 카페 한쪽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건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찰랑- 하며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은 고개를 들었고 입구를 들어서던 건우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었다.
“일찍 온 거야? 내가 늦은 것 같진 않은데.”
“아니요, 나도 방금 전에 왔어요. 커피 마실래요?”
“괜찮아. 어제 너무 매운 걸 먹었더니 아직도 속이 쓰려.”
“얼마나 매운 걸 먹었기에 아직도 속이 아픈 거예요?”
“말로 설명하긴 어렵고, 어딘지 알려줄 테니 나중에 한번 가서 먹어 봐.”
건우가 코트를 옆에 벗어 놓으며 설을 마주 보고 앉았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 두 사람 벌써 만난 거야?”
“나보다는 건우 씨 얼굴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내가 그렇게 보인다고? 난 아닌데.”
건우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기분 좋게 웃었다.
어제저녁 서연을 만나고 나서 그전까지 우울했던 기분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녀를 집에 두고 매일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래저래 김민준은 정말 복도 많은 놈이었다. 김서연 같은 여동생에 강조국 같은 여자 친구가 있으니 말이다.
“난 건우 씨가 걱정돼요. 솔직히 난 건우 씨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던 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만일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건우 씨.”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전직이 요원이었는데 그렇게 쉽게 들키진 않을 테니까.”
Pakin이 방위산업을 접었는데도 건우는 여전히 부친인 백 회장이 거래하던 국제 무기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제법 돈독해지기까지 했다.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다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필요한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건 차라리 깔끔한 관계였다.
만약 이 사실이 밖으로 불거져 나갈 경우 건우는 꽤 난감해질 터였지만, 그래도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이렇게라도 보상하고 싶었다.
이 나라가 Pakin 때문에 3년이란 시간을 버린 이상 앞으로 올 시간을 더 빨리 흐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직도 건우에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요원의 습성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다만 그가 현직 요원은 아니기에 NIS와 같은 뜻을 가질 필요는 없을 뿐이었다.
“그런데 건우 씨, 혹시 연애해요?”
“나?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했어?”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잖아요. 꼭 기다리는 전화가 있는 사람처럼 말이에요.”
“연애는 무슨, 그냥 친구야. 친구하고 통화할 일이 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서 기다리는 거야.”
건우는 지금 출근하기 전에 전화하겠다고 먼저 말해놓고도 아무런 연락이 없는 몹쓸 친구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우가 이름을 콕 찍어서 정확히 가르쳐 줬는데도 불구하고 건우에 대해 잘 모르는 걸 보면 확실히 애사심은 없는 친구였다.
“그러는 설, 아니 강조국은 김민준을 이렇게 계속 만나도 되는 거야?”
“계속 만나도 되는 거냐니, 무슨 뜻으로 묻는 거예요?”
“김민준하고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쉽지 않아 보여서 말이야.”
“그런 생각 안 해요.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고요.”
건우가 NIS를 나온 후에 민준이 그곳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실 그가 민준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그저 김서연이라는 여동생이 있고,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민준이 입양아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민준의 집안 배경이 어떤지는 몰라도 어찌 되었든 영애를 만난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일 터였다.
따르-
“여보세요?”
건우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 동작이 얼마나 재빠르고 민첩했는지 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건우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고, 그건 설이 아주 오랜만에 보는 편안한 미소였다.
설이 건우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건우의 미소가 반갑고 또 고마웠다.
-나예요! 줄리엣.
“출근했어요?”
-네, 갑자기 로미오가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나 되게 반갑죠?
“반갑긴 한데, 어제 나한테 분명히 오늘 출근 전에 전화하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내가 그랬어요? 전화를 하긴 하려고 했는데 출근하자마자 제가 좀 바빴어요.
“많이 바빴어요?”
-네. 팀장님이 갑자기 커피사업부 현황 보고서를 만들라고 하셨거든요. 본부장님이 빨리 읽고 외우셔야 한대요. 본부장님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도록 자세히 만들라고 해서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건우는 지나가는 말로 커피사업부 본부장한테 몇 가지 질의한 적이 있었다.
건우는 본부장이 즉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났다.
결국, 본부장의 비어 있는 뇌를 채워주기 위해 밑의 직원들만 바빠진 것이다.
혈연과 인맥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임원의 안 좋은 예였다.
“그럼 오늘 늦게 끝나요?”
-그럴 것 같아요. 근데 다행히 회사 동기가 사무실에 같이 남아준다고 했어요.
“여자 동기가 참 의리 있네요?”
-남자 동기인데요?
“아, 남자 동기요.”
-앗, 저 지금 들어가야 돼요. 이만 끊을게요, 안녕!
“…….”
건우는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멍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통화가 끊어짐과 동시에 건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건우는 누군가 그에게 달콤한 사탕을 손에 쥐어줬다 도로 뺏어간 기분이었다.
“연애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앞에서 설이 웃는 소리가 들려 건우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 아니라니까, 정말 그런 거 아니야.”
건우가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핸드폰을 코트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공장…… 들렀다 바로 올라갈 거죠?”
“응. 다른 사람들은 그곳으로 직접 오는 거야?”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정말 기대되네.”
설은 대답 없이 미소를 지으며 커피 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설은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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