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로미오가 너무 많아서2016.07.05.
서연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서울로 올라온 건우는 일부러 저녁 시간에 맞추어 Boni에 왔다.
하지만 그가 직접 그녀가 있는 사무실로 올라가는 건 무리였다.
그곳엔 그를 알아보는 직원들이 분명 있을 테고, 건우는 그들에게 불필요한 오해의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연이 그의 정체를 이런 식으로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건우가 Pakin 오너의 아들인 걸 알게 되면 반응이 어떨지 좀 궁금하긴 했지만, 서연이 그 사실을 몰라서 그에게 주는 즐거움이 훨씬 더 컸다.
건우는 난감한 표정으로 손에 든 쇼핑백을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전 일식집에 들러 미리 전화로 주문해 두었던 초밥 정식을 받아 왔다.
물론 단순히 야근하는 직원에 대한 격려 차원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를 불러내어 전해주려고 하니 너무 오버스러운 행동이 아닌가 싶어 망설여졌다.
그는 격려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떳떳하지 못하고 찜찜한 기분이었다.
건우는 두 사람 사이에 연애라는 감정이 싹트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서연이 문득문득 생각나고 같이 있으면 좋긴 했지만, 그녀와 어떤 관계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거였다.
김민준과 강조국, 그리고 그의 아버지 백인회 회장을 생각하면 건우가 김서연이라는 아가씨와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애당초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었다.
건우는 이걸 그녀에게 어떻게 전해주고 가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아, 배불러!”
그때, 건우의 귀에 서연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렸다.
갈팡질팡하며 고민하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는 대뜸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건우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
서연은 어떤 남자와 함께 로비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아마 ‘카페모카 생크림 아주아주 많이’일 것으로 추정되는 테이크아웃용 컵을 들고 있었다.
서연은 곁의 남자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짓궂게 헤집으며 장난을 치는데도 기분이 좋은 듯 마냥 헤헤거리며 웃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1층 로비는 한산했고, 덕분에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건우의 귀에 아주 또렷하고 정확하게 들렸다.
“로미오, 우리 다음엔 꼭 불타는 주꾸미를 먹어 보자.”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그대의 위는 정말 위대하군, 줄리엣.”
“흠. 당신이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불타는 주꾸미의 역경을 나와 함께 넘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요, 로미오?”
“그대가 나에게 사랑의 키스만 해준다면 나는 그대와 불타는 주꾸미뿐 아니라 불타는 돈가스의 역경까지 함께 하겠소, 줄리엣.”
두 사람은 키득거리며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건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건우가 미련 없이 뒤돌아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지금 자신이 왜 화가 나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꽤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로미오,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이미 불짬뽕의 고난을 함께한 정인이 있어요.”
서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괴로운 심경을 표현했다.
그 모습에 남자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Pakin 그룹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작년부터 갑자기 복지시설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후원하기 시작했다.
재능을 가진 아이들은 재능을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학업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연말의 ‘사랑의 밤’ 행사는 바로 이 아이들을 불러 1박 2일 동안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거였다.
행사 프로그램으로는 마술과 연극 등을 보여줄 예정이었으며, 서연은 학부 시절에 연극 동아리를 했다는 이유로 연극에서 여주인공인 줄리엣 역할에 덜컥 낙점되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은 가장 허우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입사 동기인 정빈우로 결정되었다.
“젠장, 그나저나 크리스마스이브에 연극이라니 이게 말이 돼? 나처럼 약속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떡하라는 거야?”
생각해 보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 서연이 두 눈을 부릅뜨며 죄 없는 동료를 노려보았다.
건우와 처음으로 함께 보내게 될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서연은 아직 건우와 구체적인 약속을 하진 않은 상태였지만 이대로라면 크리스마스이브는 당연히 그와 보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브에 연수원에서 연극이라니, 커플에 대한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녀는 아이들에 대한 배려는 있으면서 정작 직원들에 대한 배려는 왜 없냐고 툴툴거렸다.
“원래 효녀 심청 하자는 걸 내가 강력하게 우겨서 이걸로 바꿨잖아. 심청이 옷보다는 줄리엣 드레스가 더 예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나한테 감사하는 마음도 절대 잊지 말고.”
“웃기지 마. 빈우 씨가 심 봉사 역할 하기 싫어서 바꾼 거 다 알고 있거든?”
“이제 독심술도 하냐?”
띵-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리자 남자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서연은 핸드폰 액정을 바쁘게 눌러대고 있었다.
“뭐해? 안 타?”
“응? 어, 타.”
서연은 대화창에 문자를 입력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딩동-
도로변에 세워놓은 자동차로 걸어가던 건우의 주머니에서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로미오 바빠요? 나는 한 시간 정도면 일이 끝날 것 같아요. 그냥 그렇다고 알려주는 거예요.
건우는 표정 없는 얼굴로 핸드폰을 쳐다보다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서연은 일이 끝난 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운 좋게도 창가 자리 몇 개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핸드폰을 손에 쥐고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야, 왜 문자를 보고도 아무런 답이 없어? 이 몹쓸 로미오 같으니라고!”
대화창의 1이라는 숫자가 사라진 걸 보니 그가 메시지를 읽은 게 분명했다.
서연이 아까 회사를 나오면서 이제 끝났다는 두 번째 문자를 보냈는데도 건우에게서는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문자를 두 개나 보고도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많이 바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자 하나 보낼 시간이 없을까 싶어, 서연의 아랫입술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그녀는 혹시 건우에게 전화가 걸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휴대폰을 진동 모드로 바꾼 후 손에 꼭 쥐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머리를 유리창에 콩콩 부딪치며 생각했다.
어제 같이 저녁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신 후 건우는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는 서연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받았다.
여러 가지 정황상 이건 분명히 썸을 지나 연애의 시작으로 가는 단계였다.
그런데 문자를 두 개나 확인하고도 연락이 없는 남자라니, 이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마침내 그녀의 집 근처 정류장에 멈췄다.
서연이 손에 꼭 쥐고 있던 핸드폰은 그때까지도 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골목을 힘없이 걸었다.
“괜찮아, 김서연. 둘이 진짜로 사귄 것도 아니잖아. 내 말이 맞지?”
그녀는 혹시라도 다시 혼자가 될 경우를 생각해 미리 스스로를 위로했다.
서연은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상하게 몸과 마음이 반대로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더 소심해지고 더 겁쟁이가 되었다.
서연은 자신이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났다.
그녀가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갑자기 멈추었다.
“아저씨……?”
서연은 골목 한쪽에 주차되어 있는 차를 발견하고서는 활짝 웃었다.
건우가 골목에 차를 대고 그 안에서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서연이 자신을 발견하자 차에서 내려, 그녀가 달려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아까 아저씨한테 문자 보냈었는데, 아직 못 본 거였군요?”
서연이 쌩긋 웃으며 건우를 올려다보았다. 대화창에서 숫자 1이 사라졌지만, 그건 분명히 전산상의 오류였을 터였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그의 입매가 묘하게 뒤틀린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서연의 귓가에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서연 씨는 인생이 참 쉬워요, 그렇죠? 내키는 대로 말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복잡한 것도, 어려운 것도 없지요.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고, 조금만 잘해주면 아무나 따라나서고.”
“아저씨, 혹시 지금 나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왜 김서연 씨한테 화를 냅니까?”
“혹시 너무 많이 기다려서 화가 났어요? 그럼 우리 회사 근처에 엄청 매운 식당이 새로 생겼는데 나랑 내일 같이 가 볼래요? 거기 가면 로미오도 분명 기분이 좋아…….”
서연의 말에 건우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건우는 그녀의 말을 끊어 내며 힘주어 말했다.
“내 이름은 백건우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가르쳐 줘도 도저히 머리에 입력이 안 됩니까?”
건우의 눈빛이 너무 차가워, 서연은 입을 다물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아요, 아마 앞으로 부를 일도 없겠지만.”
건우의 차가운 시선이 서연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가 냉기 어린 말을 쏟아내는데도 서연은 건우를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아니 백건우 씨는 나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이제 저랑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하러 온 거였군요? 그런 건 그냥 문자로 알려주셔도 괜찮은데요.”
건우가 그녀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다는 말을 꺼냈으니, 서연은 이제 그녀가 건우를 만나지 않아도 괜찮을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렇지만 아저씨는 제가 좋았다가 다시 싫어진 게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별생각이 없었던 거예요. 내 말이 맞죠?”
그러니 그녀가 상처받지 않아도 괜찮을 터였다. 그가 변한 게 아니라, 그의 마음이 거짓이 아니라, 원래부터 건우에겐 그런 감정이 없었던 거였다.
“맞아요. 내가 서연 씨한테 다른 감정을 가질 이유가 있겠습니까?”
“다행이다.”
“다행…… 이라고?”
건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았어요. 추우니까 이제 얼른 집에 가세요!”
서연이 잘 가라는 듯 건우에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얼른 집에 가……? 너 내가 그렇게 우스워?”
건우가 서연의 팔을 거칠게 붙들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울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으며 웃고 있는 서연을 보니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
서연이 건우를 금방 헤어져도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겼다는데, 정작 그가 그걸 바랐으면서도 왜 이렇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안 우스워요, 정말이에요.”
“그럼 자존심이 없나? 남자가 그런 말을 해도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저씨는 속으로는 날 안 좋아하면서 겉으로 좋아하는 척하지 않았잖아요, 날 좋아했다가 마음이 변해서 내가 싫어진 것도 아니잖아요. 난 그럼 정말 괜찮아요!”
“……뭐야, 너.”
건우가 서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서연은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처럼 건우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
“단장님, 초밥 드시겠습니까?”
-지금이 밤 10시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지?
“제가 마침 지금 목동에 있어서요. 괜찮으시면 잠깐 근처에서 뵙고 싶은데요.”
-그럼 그냥 우리 집으로 와. 우리 집에 지금 나밖에 없으니까.
박 단장과 통화를 끝낸 건우는 액셀러레이터에 올린 오른발에 더욱 힘을 주었다.
지금 목동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비슷하게 시간을 맞춰 가려면 속도를 높여야 했다.
건우는 박 단장이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난 뒤, 초밥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의 집 앞에서 벨을 누르자 박 단장이 건우를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었다.
“여어, 백건우. 이 시간에 목동까진 웬일이야? 여기서 무슨 약속 있었어?”
박 단장은 건우가 내민 쇼핑백을 받아들며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집에 정말 혼자 계신 거예요? 사모님은 어디 가셨나 봐요?”
“와이프는 우리 공주님 데리고 친정에 놀러 갔어. 내일 올 거야. 거기 앉아.”
건우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거실 한복판에 서 있자 박 단장이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집이 아주 아늑하네요.”
“어. 난방이 잘 되거든.”
건우는 고개를 돌려 거실을 빙 둘러보았다.
거실 벽은 온통 아이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바닥에는 캐릭터가 그려진 매트가 넓게 깔려 있었다.
참 따듯한 집이었다.
“차 가져온 거야?”
“네.”
“그럼 술은 못 하겠네?”
“주세요. 대리운전 부르면 돼요.”
박 단장이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 걸 본 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건우의 대답에 박 단장이 신난 표정을 지으며 주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낑낑거리며 검붉은 액체로 가득 찬 유리병을 들고 나왔다.
그는 테이블 위에 초밥 박스를 넓게 펼친 후 유리컵 두 개에 포도주를 따랐다.
“이거 우리 장모님이 직접 담가 주신 포도주야. 나한테는 제발 술 좀 줄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번번이 이렇게 담가서 올려 보내셔. 진정한 언행불일치의 표본이시지.”
“단장님은 참 좋아 보이시네요.”
건우의 얼굴빛이 쓸쓸해 보여, 박 단장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건강하셔?”
“……네, 뭐.”
“네가 고생이 많다.”
“고생은요.”
박 단장은 유리컵을 들어 건우의 잔에 부딪친 후 꿀꺽꿀꺽 마셨다.
제 손으로 직접 아버지의 범죄 증거물을 가져다준 건우의 속이 어떨지, 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참, 김민준은 잘 지내요? 지금쯤 한국에 들어와 있을 텐데요.”
“아 민준이? 그 미친놈이 오자마자 이라크로 가겠다고 지랄 염병을 떨어서 보다 못한 국장님이 한소리 하신 모양이야. 요새 조용해.”
“밖으로 2년이나 돌았으면서 왜 또 나간다고 그래요? 2년 전에 나간 것도 사실 좀 특수한 경우 아니었습니까?”
“맞아. 사실 민준이가 2년 전에 왜 나가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그때 눈치를 보니까 국장님도 보내고 싶지 않으신 거 같았는데…… 윗분들의 세계를 내가 어떻게 알겠냐. 자기 자식인데도 그거 하나 못 빼주고 밖으로 내보낸 국장님 속이 더 말이 아니었겠지.”
묵묵히 박 단장의 말을 듣고 있던 건우가 놀란 눈을 들어 박 단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기 자식이라니요?”
“아, 넌 모르나? 하긴, 네가 나가고 나서 민준이가 들어왔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구나. 민준이가 김 국장님 아들이야.”
“……김민준이 국장님 아들이라고요?”
“응. 국장님한테 아들 하나, 딸 하나 있다고 했잖아. 그 아들이 민준이야. 잘 생각해 봐봐, 두 사람 성깔머리가 닮았잖아.”
“…….”
그럼 서연이 김 국장 딸이라는 말이었다. 건우는 왠지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서연이 어딘가 모르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건 건우의 지나친 기우였다.
“……국장님께서 딸을 많이 아끼시겠네요.”
하긴 기우이든 아니든 간에 건우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건우가 설을 많이 좋아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김 국장이 서연과 건우가 어울렸다는 사실을 알면 기함할 터였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건우는 민준을 다치게 만든 백인회 회장의 아들이었다.
“딸인데 당연히 아끼시겠지. 그런데 말이야,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긴 해.”
“뭐가 이상해요?”
“내가 딸을 낳아보니까 말이야, 진짜 너무 예뻐서 미치겠거든? 사무실에 있으면 눈앞에 아른거려 아주 죽겠어. 아, 생각하니까 또 보고 싶네, 우리 공주님.”
“그런데요?”
“국장님은…… 뭐랄까, 어떨 때 보면 딸한테 거리를 두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하여튼 뭔가 이상해. 딸 생일에도 일부러 밤늦게 퇴근하시고 말이야.”
“우연이겠죠. 정말 바쁘셔서 그런 건지 어떻게 압니까?”
“아니야, 진짜 이상하다니까? 민준이도 그…… 아니다!”
박 단장이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돌리며 잔에 남은 포도주를 남김없이 마셨다.
“왜 말씀을 하다 마세요?”
“민준이는 자기 얘기 하는 거 싫어해, 다른 얘기 하자. 그래, 넌 영애랑은 이제 아예 끝난 거야?”
“끝나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럴 사이 아니었어요.”
“그럼 너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 혼자 있으면 외로울 텐데.”
“……바빠서요.”
건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가에 잔을 가져갔다.
그에게 커다란 저택은 어느 순간부터 거대한 감옥 같았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건우는 언제나 그 안에서 혼자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차를 마실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건우는 요즘 부쩍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건우는 거나하게 취해 잠든 박 단장을 침대에 옮겨 놓고 난 뒤, 조용히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닫았다.
운전석에 앉았지만 사실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건우는 전화로 대리운전을 부른 후 차량 오디오 음량을 높였다.
‘아저씨는 속으로는 날 안 좋아하면서 겉으로 좋아하는 척하지 않았잖아요, 날 좋아했다가 마음이 변해 내가 싫어진 것도 아니잖아요. 난 그럼 정말 괜찮아요!’
“…….”
아니, 내가 괜찮지 않다.
건우는 천천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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