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수상한 영애와 수상한 경호관 (1)2016.07.12.
“토요일에 출근하라니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야?”
“깜짝이야!”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서연은 갑자기 들리는 소프라노 목소리에 흠칫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영업기획팀의 정 주임이 책상 위에 가방을 던지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서연은 오늘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휴일에 출근을 하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어젯밤 늦은 시간, 커피사업부 본부에 비상 연락이 돌았다.
부사장이 본부장과 사업부 전반에 관한 미팅을 할 예정이니 커피사업부 직원들은 팀별로 몇 명씩 사무실에 비상대기를 하라는 전달이었다.
말하자면 부사장이 본부장에게 질문을 했을 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해 답안지들을 출근시킨 거였다.
사실 비상대기라고 해도 특별히 그네들이 더 해야 할 일은 없었지만, 꿀맛 같은 휴일을 뺏긴 직원들의 분노와 상실감은 대단했다.
“서연 씨, 바빠?”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우리는 1층 카페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줄래?”
서연은 김 팀장의 말에 잠시 우리의 범위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말하는 ‘우리’라는 집합에는 김 팀장 외 과장 및 대리 등이 몇 명 포함되어 있었고, ‘우리’의 여집합은 서연이었다.
“네, 팀장님.”
서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마케팅팀 막내이고 유일한 여자 사원인데도 김 팀장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김 팀장은 서연을 대놓고 구박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은연중에 그녀를 끼워주지 않곤 했다.
서연은 자신이 막내인 게 문제인지 아니면 김 팀장과 같은 여자인 게 문제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서연 씨만 두고 우리끼리 가요?”
박 과장이 미안한 뉘앙스를 풍기며 서연을 흘끔 뒤돌아봤지만 김 팀장은 아주 상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 하나는 사무실에 있어야 하잖아요. 막내인 게 죄지요, 뭐.”
김 팀장은 서연이 막내인 게 죄라고 말했지만 서연은 여전히 그녀의 문제점을 알 수 없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빈칸이었다.
서연은 멀어지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컴퓨터로 이런저런 기사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너 미운 오리 새끼야?”
그때, 동기 정빈우가 혀를 차며 서연의 옆 책상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혹시나 있을 연락에 대비해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응. 그런데 나중에도 백조가 될 것 같지는 않아.”
“쯧. 가엾은 줄리엣. 이따 점심시간에 내가 불타는 주꾸미 같이 먹어줄까?”
“아니야, 됐어. 오늘은 안 먹을래.”
“하룻밤 사이에 변덕은.”
서연은 왼손에 턱을 괴고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빈우 씨. 빈우 씨가 보기에도 내가 이상해?”
“이상하다기보다…… 좀 독특하다고나 할까?”
“이상하다는 말이네.”
“응. 미안.”
“……역시 내가 문제구나.”
서연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채우는 주관식 답안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때가 많았다.
어젯밤 건우의 물음에 대한 그녀의 대답도 정답이 아니었다. 어제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그녀의 어떤 말이 그를 화나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친구인 척하는 썸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썸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다. 그럼 그는 도대체 왜 나를 만났던 걸까?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 남자 친구랑 싸웠어?”
“난 남자 친구 같은 거 없어.”
“뭐야, 어제는 정인 어쩌고 하더니 그럼 나한테 거짓말한 거였어?”
“응. 거짓말이었나 봐.”
어제 이른 저녁까지 그녀에게 진실이었던 것은 밤이 되자 거짓말이 되었다.
여전히 그가 화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잘못은 서연 자신에게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 연애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같았다.
남자들은 서연의 귀여운 얼굴과 밝은 성격에 호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왔고 몇 번의 데이트를 거친 후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서연은 막상 고백을 받으면 상대방이 언젠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불안해졌다.
그래서 그녀의 연애는 늘 그즈음에서 끝이 났다.
건우는 그런 불안을 느낄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처음부터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말했다.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나았다.
그래서 서연은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어제부터 가슴이 가시에 찔린 듯 따끔따끔 아팠다.
“김서연, 차였구나!”
“그렇게 너무 신바람 난 말투로 말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서연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녀는 이제 정말 그 사람을 못 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우울해졌다.
**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던 설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민준에게 아무 연락이 없었다.
민준은 핸드폰으로 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녀는 많이 피곤했는지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소리가 왜 이래, 몸이 많이 안 좋아?”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피곤했나 봐요. 졸려서 좀 잤어요.
“내가 지금 거기로 갈까?”
-아니에요, 좀 잤더니 괜찮아졌어요. 집으로 갈 테니까 기다려요.
“…….”
착 가라앉은 설의 목소리가 신경이 쓰였던 민준은 뒤 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느껴질 무렵, 1층 출입구 밖으로 설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
설은 꼭 억지로 끌려오는 사람처럼 민준의 아파트를 향해 힘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설은 1층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르자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민준이 그녀를 의심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진짜였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설이 그에게 모든 걸 다 얘기할 수 없듯이 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 번 가라앉은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띵-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 그녀의 눈앞에서 엘리베이터가 활짝 열렸다.
설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 안에서 민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마중 나왔어.”
설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녀의 몸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빨려 들어가 민준의 품에 안착했다.
민준은 한 손으로 설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민준은 양손을 설의 뺨에 올리고 그녀의 눈을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설은 민준의 아파트 1층에 도착했지만 한참 동안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민준이 1층으로 내려갔을 때,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 멍하니 서 있던 설을 보았다.
그녀가 짓고 있던 우울한 표정이 그의 머릿속에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민준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폈다.
설의 표정 하나에 민준은 금세 눈빛에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 냈다.
“많이 피곤했어?”
“응. 그랬나 봐요.”
“앞으론 이런 거 하지 마.”
“내가 해주고 싶었던 건데요 뭘.”
설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눈.”
“…….”
“내 눈 봐야지.”
설이 다시 그의 눈을 바라보자 민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도 같은 온도의 눈빛으로 웃어주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신 설은 고개를 내려 민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 진짜 피곤했나 봐요.”
“걱정했어.”
민준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설은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
며칠 뒤.
대전 연구소로 내려온 설은 금세 바쁜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민준과는 전화 통화밖에 할 수 없었지만 주말이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 괜찮았다.
그의 집에서 서류 봉투를 본 이후 설은 이따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잊어버릴 수는 없으니 잊지 않았을 뿐이고, 다만 그날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설은 경호실장으로부터 새로 교체된 경호관이 오늘 대전으로 내려올 거라는 이야기를 미리 전해 들었다.
이대철 사건이 꽤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는지, 그는 설에게 여러 번 반복해서 경호에 만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불구속 상태로 조용히 조사를 받던 이대철이 늦은 밤 귀가를 하다가 정체 모를 괴한을 만나 온몸을 구석구석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는 덤으로 들려주었다.
어쨌든 만전을 다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그냥 말뿐인 건 아니었다.
보통 두 명의 경호관이 교대로 근무했는데 그는 이제 두 명의 경호관이 아예 대전에 상주할 예정이라 말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대전에서 그녀의 삶은 비교적 단조로웠고 설은 퇴근 후에는 밖으로 일절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설이 오피스텔로 돌아오면 경호관은 그 이후의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유용할 수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이 내려오면 오히려 설에게 관심을 덜 기울이게 될지도 모르니 그녀에겐 어쩌면 더 다행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오후에 내려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설은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들을 만나면 해줄 이야기가 있었다.
경호관이 바뀔 때마다 반복해서 말을 해야 하는 건 번거로웠지만, 설은 이렇게 해서라도 최소한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했다.
**
비슷한 시각, 민준은 이미 대전의 오피스텔 앞에 와 있었다.
그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702호에 포장 이사 박스가 들어가는 걸 아주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강설이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설이 놀라기보다 많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주말에 보고 지금껏 못 본 민준은 지금 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딱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선배님!”
민준이 힐끗 고개를 돌려보니 인정이 저만치서 달려오고 있었다. 인정은 꼭 소풍 나온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민준이 702호를 득템 할 수 있었던 건 다 박인정 덕분이었다. 보기보다 쓸 만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짐 정리는 다 했나 봐?”
“짐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는데요, 뭘. 저희 이따 원자력연구원으로 가는 거 맞죠?”
“그럴걸?”
“영애 님이 혹시 제 얼굴을 기억할까요? 아마 못 하시겠죠?”
“글쎄.”
민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사를 왔으니 당장 옆집 주인에게 인사를 가야 하겠지만, 일단은 생각했던 일을 먼저 해야 했다.
박인정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그래도 이제는 견딜 만했다. 설을 만나고 나서 그는 한층 너그러워졌다.
“난 잠깐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넌 이따 시간 맞춰서 그쪽으로 와.”
“어디 가시게요? 저도 지금 할 일 없는데 같이 가면 안 돼요?”
“응, 안 돼.”
민준은 대전에 내려오면 설과 하고 싶은 게 있었다.
그는 설에게 행복한 기억을, 행복한 과거를 만들어 주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민준이 순식간에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인정은 그가 차를 몰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모습을 멍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
뉘엿뉘엿 지던 해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설은 겉옷을 갈아입고 나서 덤덤한 얼굴로 연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연구동 출입구에서 새로 온 경호관들을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응?”
정면을 향해 무심코 고개를 들던 설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민준이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설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반가운 기색으로 그에게 달려가던 설이 걸음을 천천히 멈추고 어색한 얼굴로 민준을 마주 보고 섰다. 민준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에, 설도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여자가 함께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금일부터 영애 님의 경호를 맡은 김민준입니다.”
“…….”
민준은 설을 발견하자 한쪽 눈썹을 위로 살짝 올리며 웃었다.
설은 여전히 예뻤고, 그는 이제 이 고운 얼굴을 매일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박인정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반갑습니다.”
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민준은 설을 보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사람들은 경호실에서 나온 경호관이 아니라, NIS에서 나온 요원 두 명이었다.
“두 분이 오셨네요……?”
“네, 영애 님. 저희는 경호실에서 영애 님의 경호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인정은 또박또박 자신 있게 대답했다.
민준이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굳은 얼굴로 서 있는 설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이 경호실 경호관이 아닌 NIS 요원인 걸 이미 알고 있는 설이 괜한 억측을 할까 봐 마음이 쓰였다.
“저는…… 퇴근 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상 집에 있으니, 지금 이 시간 후로는 저에게 다른 신경은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영애 님, 저희는 그런 지시는 받지 않았습니다.”
인정은 ‘내 말이 맞죠?’라는 표정을 지으며 곁에 서 있는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민준은 아무 대꾸 없이 영애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저에게 제가 모르는 도청 장치나 추적 장치를 부착하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전에 계시던 분들은 잘 알고 계시던 이야기입니다.”
“네? 도, 도청 장치라니요? 저희가 그, 그럴 리가요!”
인정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영애는 두 사람을 만나자마자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민준이 설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접었다.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이곳에서 강설이랑 쎄쎄쎄나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는 그의 생각과 달리 냉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설은 지금 심기가 아주 많이 불편해 보였다.
“또한, 서울과 대전을 오갈 때를 제외하고 대전 안에서는 대부분 저 혼자 움직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러셨는지 몰라도 이제 안 됩니다.”
설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민준이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지금까지 계속 그녀 혼자서 대전을 돌아다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앞으로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이 차가운 눈빛으로 민준을 응시하자 인정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안 된다는 거죠?”
“근래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로 영애 님에 대한 경호를 강화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불편하시더라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것 참…… 정말 짜증나는 일이네요.”
“…….”
두 사람의 공방을 얌전히 듣고 있던 인정은 제 귀를 의심하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곱고 단아하게 생긴 영애는 생각보다 자기주장을 잘하고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는 타입이었다.
그녀는 실제로도 정말 짜증이 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전부입니다.”
설이 홱 뒤돌아 그녀의 자동차를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민준의 죄목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민준은 경호관으로 온다는 이야기를 설에게 미리 하지 않았다.
게다가 NIS에서 두 사람을 보낸 이상 단순히 경호나 하러 온 것은 아닐 텐데 그걸 숨기고 있으며, 하물며 같이 온 경호관은 민준의 집에까지 찾아왔던 여자 요원이었다.
거친 욕설을 하고 싶었지만 아는 욕이 없었다. 기껏해야 짜증난다는 말뿐이었다.
“영애 님?”
뒤에서 민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설은 대꾸하지 않았다.
띠딕-
그녀는 자동차 잠금장치를 풀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영애 님.”
탁.
민준이 운전석 문을 붙잡으며 그녀를 불렀다. 설이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이런 행동은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겁니다.”
민준이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설이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사전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갑자기 경호관이라고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한데,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화났어?”
민준이 설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그러자 설이 민준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찬 뒤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 차 문을 잠갔다.
그 모습을 저만치 뒤에서 지켜보던 인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붕어처럼 뻐끔거렸다.
‘열어.’
민준이 운전석 유리에 대고 두 손을 짚고 서서 설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설은 민준을 흘끔 쳐다본 후 그를 무시하고 쌩하니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민준이 인상을 잔뜩 구기며 낮게 욕설을 뱉어내더니, 재빨리 그의 자동차를 향해 뛰어갔다.
인정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영애는 기분이 좋지 않은지 처음 보는 경호관의 다리를 걷어차고 자동차를 몰고 달아나버렸다.
정말로 이대철 앞에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던, 감정 없어 보이던 그때 그 영애가 맞나 싶었다.
민준 선배는 뭐라 낮게 신음하듯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자동차를 몰고 영애의 자동차를 따라갔다.
이 모든 게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민준은 자동차에 타자마자 블루투스로 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우웅-
민준이 속도를 높여 앞 자동차를 추월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계속 울리는 걸 바라보던 설이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내가 지금 운전 중인 걸 뻔히 알면서 전화를 걸어요?
“차 갓길에 세워, 당신 지금 흥분했어.”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말아요.
“강조국.”
-날 감시하러 온 경호관처럼 말하지 말란 말이에요!
설이 전화를 끊고 자동차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유일하게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선을 넘어 상대편으로 가버린 것처럼 서럽고 서운했다.
NIS에서 아무 이유 없이 두 사람을 이곳에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민준의 집에서 우연히 본 서류를 생각하다 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알아낼 게 있고, 그게 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우웅-
설이 자동차 속도를 더 높였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전화벨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민준의 차가 바로 뒤에서 설을 따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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