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56화 (56/94)

56화. 수상한 영애와 수상한 경호관 (2)2016.07.14.

한참을 달리던 설의 자동차가 넓은 공터에 멈췄다.

계속 달려 봤자 민준이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올 기세였기 때문에 어차피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자동차가 멈추자 민준의 자동차가 나란히 멈춰 섰다.

설은 운전대에 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번 격해진 감정은 생각보다 잘 수그러들지 않았다.

똑똑.

민준이 설의 자동차 차창에 대고 노크를 했다.

그는 고개를 돌린 그녀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치자 진정하라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잠시 숨을 고르던 설이 안전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와 자동차를 등에 대고 섰다.

그녀는 그를 날선 눈으로 바라보았고 민준은 그녀를 말없이 응시했다.

“……이제 진정이 좀 됐어?”

“당신은 날 속였어요.”

“속인 게 아니야. 난 당신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도대체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거지?”

“솔직하게 말해요. 당신이 여기에 온 진짜 이유가 뭐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일하러 온 거잖아, 지금. 물론 강조국 얼굴을 아침에도 보고 저녁에도 보겠다는 숨은 의도를 부인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나 지금 당신이랑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나 농담하는 거 아닌데.”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예요? NIS에서 당신더러 내 얼굴 보러 가라고 당신 후배랑 둘이 묶어서 여길 보냈다고요?”

“박인정을 내가 데리고 온 건 아니지만, 당신 때문에 둘이 내려온 건 맞아.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난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당신 설마, 일부러 내 앞에 다시 나타난 건 아니지?’

설은 입을 꾹 다물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아는 민준은 설 때문에 일을 포기하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민준은 그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의 임무를 외면하진 않을 것이고, 그건 차후 두 사람에게 불행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난 NIS 요원의 경호를 받을 이유도 없고, 받고 싶지도 않아요. 당신도 잘 알겠지만 NIS와 좋지 않은 기억이 있거든요. 그러니 당신들이 정말 내 경호 때문에 여길 온 거라면 다시 돌아가요.”

“당신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럴 수는 없어. 이건 당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영애라고 해도 내겐 마찬가지야.”

“내가 당신한테 부탁을 해도요?”

“날 움직이는 건 당신의 부탁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이야, 강조국.”

“…….”

민준은 어느새 감정을 지운 채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설은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가슴이 그의 말을 납득하지 못했다.

“김민준 씨, 당신은 나랑 NIS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거예요?”

“예를 들어도 꼭 그렇게 살벌한 예를 들어야겠어?”

“대답해 봐요. 당신은 누구 편이에요?”

“내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일 같은 건 없어. 당신이 나라를 팔아먹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단 뜻이야.”

“내가 나라를 팔아먹으면 어떡할 건데요?”

“당신 지금 억지 부리는 거야, 이런 건 당신답지 않아.”

“그래요, 나 지금 당신한테 억지 부리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도 대답을 못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민준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설은 뭔가 단단히 심사가 뒤틀린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말을 하고 있었다.

“강조국. 만약 당신이 나라를 팔아먹으면 나는 그 나라를 되찾아 올 거야.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겠지. 당신이 무얼 하든 그 옆에 내가 있을 거란 얘기야.”

설은 눈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민준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조건 당신의 편에 서겠다는 말 또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설은 이런 민준이 좋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착잡했다.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어?”

“안 들어요.”

“강조국은 화를 내도 예쁘네. 아주 제대로 갑이야, 갑순이.”

민준이 추위에 파래진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의 손길이 닿자 그녀의 뺨에 어려 있던 냉기가 따듯한 기운에 사르르 녹아 풀어지는 느낌이 났다.

설이 이마를 찡그리자 민준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와 닿았다 떨어졌다.

민준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보고 싶었어, 갑순 씨.”

“…….”

이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설은 기쁘게 반짝이는 그의 눈빛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설과 민준의 자동차가 오피스텔 앞에 나란히 멈췄다.

“영애 님!”

출입구 앞을 서성거리던 인정이 두 사람 앞으로 곧장 달려왔다.

설은 차에서 내려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선배님이 따라가셔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걱정했어요.”

“그래서 김민준 씨가 따라온 걸 알면서도 경호실에 제 위치를 찾아달라고 했나요?”

“네? 그건…….”

설은 머쓱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오피스텔로 돌아오는 동안, 그녀에게는 계속 전화가 걸려 왔다.

만약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면 별일 아닌 일이 매우 커졌을 터였다.

“전 집에 잘 돌아왔다고 보고하세요.”

인정을 바라보던 설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인정은 민준을 쳐다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팔짱을 끼며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박인정, 넌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 거지?”

“영애 님이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갑자기 사라졌잖아요! 게다가 선배님도 연락이 안 됐고요.”

박인정이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아까 다급히 영애를 따라가던 민준의 모습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여 누가 보았다면 두 사람이 사랑 다툼을 하는 연인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경호실에 보고를 했어?”

“전 그냥 영애 님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었어요. 아빠라면 빨리 찾아줄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박인정, 넌 어디 소속이야?”

“그거야 당연히 NIS요.”

“그건 알고 있네? 난 또 모르는 줄 알았지.”

“…….”

“다음번에도 소속을 착각하면 아예 그쪽으로 보내줄게.”

민준은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인정이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

오피스텔로 돌아온 설은 제일 먼저 핸드폰 전원을 껐다. 지금은 그 누구의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주방 냉장고를 열어, 그 안에 빼곡하게 들어 있던 비타민 워터 중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돌려 땄다.

‘아주 제대로 갑이야, 갑순이.’

갑순이는 무슨.

설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녀가 갑순이라면 민준도 만만치 않은 갑돌이였다.

대놓고 702호로 이사 온 사람이 누구인데, 지금 누구 앞에서 을돌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냔 말이다.

민준은 그가 대전에 내려온 이유가 설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녀가 그의 집에서 본 서류를 생각하면 그 말을 백 프로 믿을 수는 없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설이 거실로 가 벽면에 부착된 모니터의 버튼을 누르자 인정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모니터 화면으로 얼굴이 보인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건지,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설은 그녀를 바라보며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영애 님, 혹시 저녁 안 드셨으면 저희랑 저녁 드시겠어요? 오늘이 첫날인데 그래도 같이 식사라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설은 모니터 뒤에서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목소리는 나긋나긋한 인정을 보자 문득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떠올랐다.

기영은 속으로는 설을 죽도록 미워했으면서도 겉으로는 늘 웃는 낯을 했다.

안기영,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설이 기영을 떠올리며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전 괜찮으니 두 분이 다녀오세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영애 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시면 저한테 바로 연락 주세요.

얼굴이 밝아진 인정이 냉큼 뒤로 돌더니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702호 초인종을 눌렀다.

설은 모니터를 통해 앞집 현관문이 열리고 민준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민준은 오랫동안 702호에 살아온 사람처럼,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아까 올라오면서 오늘 702호에 사다리차가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어제 입주 청소 업체도 다녀갔다고 하더니, 민준은 아예 이곳으로 이사를 온 모양이었다.

-선배님, 우리 밥 먹으러 가요!

-난 됐어, 너나 가서 먹고 와.

-그럼 대전에 내려온 기념으로 우리 술이나 한잔할까요?

-피곤해. 난 좀 쉴 거야.

-그럼 어떡해요. 전 대전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선배님밖에 없고, 또 혼자 밥 먹어본 적도 없단 말이에요.

-그럼 오늘 먹어보면 되겠네.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야.

-아니, 그래도…….

설은 버튼을 눌러 모니터 화면을 껐다. 얘기를 거기까지 들었을 때 문득, 도청 장치를 싫다고 했던 그녀가 남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셈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설은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신 후 뚜껑을 닫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누른 그녀는 USB를 노트북 단자에 꽂은 후 자판을 타닥타닥 두드리기 시작했다.

설은 일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쫓는 사람은 없는데,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이 불안함의 원인이 민준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딩동-

핸드폰을 꺼 놓았더니 대신 벨을 누르려는 건지, 벌써 두 번째 방문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냐고 묻지 않고 모니터 화면의 버튼만 눌러 화면에 비친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준이었다.

설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며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에요?”

“저녁 먹었어? 아직 안 먹었으면 나랑 같이 나가자.”

말로는 나갈 건지 말 건지 설의 의향을 물었지만, 민준은 이미 외출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난 한 번 집에 들어오면 외출하지 않는다고 아까 말했잖아요.”

“외출을 하자는 게 아니라 저녁 먹으러 가자는 거야. 저녁을 먹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당신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잖아.”

“그래서 지금 나랑 같이 나가자는 거예요?”

“난 혼자 밥 먹는 거 싫어.”

“그럼 왜 아까!”

“아까 뭐?”

“……아니에요.”

하마터면 왜 아까 동료와 같이 가지 않았냐는 말을 꺼낼 뻔했다.

“같이 가줄 거지?”

“나 할 일 있어요, 바빠요.”

“밥 먹고 나서 바쁘면 안 돼?”

오늘 민준은 대전으로 내려온 이후 설의 화난 얼굴밖에 보지 못했다. 그는 앵그리 설이 아니라 활짝 웃는 설을 보고 싶었다.

“……잠깐 거기서 기다려요.”

잠깐 고민하던 설이 체념하듯 말했다.

민준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녀는 그가 식사를 하지 않을까 봐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던 설은 잠시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타났다.

“가까운 데로 가요. 뭐 먹고 싶어요?”

설이 현관문을 닫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무거나 먹자.”

민준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쓰고 있던 까만 모자를 벗어 그녀에게 씌웠다.

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을 깜빡거렸다.

“모자는 왜요?”

“밖에 추워.”

설이 턱을 치켜들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민준이 모자챙을 꾹 누르며 웃었다.

**

저녁을 먹고 난 후에는 설의 기분이 훨씬 좋아 보였다.

그녀의 표정은 민준이 자기도 모르게 설이 아까 화를 냈던 이유가 배가 고파서였을까, 라는 생각을 할 만큼 안정되어 있었다.

“짐은 다 정리한 거예요?”

“이사 업체하고 가구 업체에서 다 알아서 해서 특별히 내가 할 일은 없었어.”

“여기로 아예 이사 온 것도 아니면서 무슨 짐이 그렇게 많아요? 게다가 우리 오피스텔은 웬만한 건 대부분 빌트인으로 되어 있잖아요.”

“알잖아, 내가 곱게 자라서 남이 쓰던 걸 싫어해.”

민준이 곁눈질로 그녀의 손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는 설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대전에 내려오니 그녀를 자주 볼 수 있다는 건 좋았지만, 아무래도 행동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진짜 대전엔 왜 내려온 거예요?”

“당신 보려고 왔다고 아까 말했잖아.”

“그게 정말 전부라고요?”

“나는 그게 전부야.”

“그렇다고 두 사람이나 여기에 내려올 필요가 있었어요?”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텐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모험을 사랑하는 영애 님 덕분이지.”

민준의 너스레에 설이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영애가 꽤 골치 아픈가 봐요?”

“응. 누가 밥 사준다고 하면 아무 놈이나 막 따라가거든.”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

“내가 보여줄 수는 있는데 무릎 조심해야 할 거야. 요즘 로우킥 연습을 하나 보더라고.”

민준이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했다.

“참, 이대철 사장이 불구속 수사 중이라면서요? 그 사람 며칠 전에 어떤 괴한한테 폭행을 당했대요.”

“아 이런, 어쩌다가. 조심 좀 하지.”

“당신도 몰랐던 얘기예요?”

“당연하지, 내가 그런 얘기를 알 턱이 있나.”

“난 또, 혹시 당신이 그 사람을 때려줬나 했죠.”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아니요, 그건 싫어요.”

민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녀와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산책하는 기분이 평온하니 좋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여유로운 산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걷고 있는 두 사람 앞에 인정이 갑자기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 두 분, 언제 밖에 나오신 거예요?”

설과의 시간을 방해받은 민준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늘로 둥실 떠오르던 풍선이 공중에서 갑자기 팡- 하고 터진 것 같았다.

“넌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저녁 먹고 왔죠. 그런데 두 분은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네가 신경 쓸…….”

“제가, 밖에 나올 일이 있었는데 혼자 나오기가 좀 그래서 부탁을 드렸어요.”

설이 민준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채며 대신 인정에게 대답했다.

인정은 뭔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괜히 말대꾸를 하다 민준에게 혼이 날까 봐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왕 나오신 김에 저기에서 맥주 한잔하고 들어가실래요? 집에 들어가 혼자 있으려니까 좀 그래서요. 아…… 영애 님, 혹시 술은 안 드세요?”

“아니요, 맥주 한두 잔 정도는 괜찮아요.”

“저도 그 이상은 잘 못 마셔요, 취하거든요. 혹시 소주도 드세요?”

인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사래를 치더니 곧바로 질문을 이어갔다.

그녀는 기존 여자 경호관들과는 다르게 설을 별로 어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설에게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그러나 설의 경험상, 그녀에 대한 과한 친절과 관심은 그 속에 독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요.”

“영애 님, 저랑 비슷한 점이 많으시네요? 저도 소주는 안 마셔요. 소주는 투명한 게 꼭 눈물 같아서 마시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런가요?”

인정은 외모도 성격도 설과 달랐지만, 그녀와 의외의 공통점이 있었다. 순간 그녀는 기분이 묘해졌지만 이내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

설은 민준의 말대로 오늘 그녀가 유독 예민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가까운 데로 가요. 두 분보다 제가 이곳을 더 잘 알 테니 제가 안내할게요.”

그녀의 대답에 인정이 신이 난 듯 활짝 웃었다가 점차 어색하게 얼굴을 굳혔다.

인정의 시선이 설의 까만 모자에 머물렀다.

“……네, 영애 님.”

그 모자는 영애의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검정색 모자였다.

**

잠시 후 세 사람은 호프집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원탁에 둘러앉아 소소한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주로 설과 인정이 대화를 나누었고, 민준은 말없이 맥주잔을 비웠다.

설이 좋아하는 프라이드치킨이 나오자 민준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포크 두 개를 양손으로 집었다.

그리고 메스를 손에 쥔 외과 의사처럼 진지한 얼굴로 치킨의 살을 발라 설의 앞 접시에 올렸다.

“괜찮…… 습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설이 인정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인정이 뜨악한 얼굴로 민준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민준은 냉담하게 대답한 뒤 다시 진지한 얼굴로 뼈와 살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설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맥주잔을 얼른 입가에 갖다 댔다.

다시 맥주잔을 내려놓은 설은 민준이 발라놓은 치킨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었다.

민준이 곁눈질로 슬쩍 설을 쳐다보았고, 그는 그녀의 입 끝에 희미하게 걸린 미소를 보았다.

설은 시선을 돌리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정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미소를 거두었다.

그녀는 미묘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인정에게 질문을 던졌다.

“참, 인정 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저는 스물여섯 살이에요. 민준 선배하고는 네 살 차이고요.”

“여기에서 계속 지내려면 많이 외로울 텐데 괜찮겠어요?”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아요. 만약 혼자 내려와야 했다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와 있었을지도 몰라요.”

바로 그때, 설 앞으로 세 번째 맥주잔이 놓였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맥주잔에 손을 뻗자 민준이 잔을 쓱 가져가더니 곧바로 입을 대고 마셨다.

졸지에 눈앞의 맥주를 강탈당한 설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거 제 건데요?”

“제가 입 댔으니 이젠 제 겁니다.”

한쪽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민준이 꿀꺽꿀꺽, 몇 모금만에 잔을 깨끗이 비웠다.

설이 씩씩거리며 테이블 위 둥그런 버저에 손을 뻗자 민준은 얼른 다른 손으로 버저를 덮어 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정말 무례하시네요.”

“영애 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겁니다.”

“제 건강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듯,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인정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녀에게는 매우 낯설게도 민준의 한쪽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가 있었고, 그의 눈꼬리는 아래로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제가 그냥 두 잔 더 달라고 했어요.”

잠깐 자리를 비운 인정이 테이블로 돌아와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설이 쓰고 있는 모자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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