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수상한 영애와 수상한 경호관 (3)2016.07.19.
“일부러 업히고 싶어서 기어코 더 마신 거야?”
“아아니.”
말로는 아니라면서 설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민준은 그녀를 등에 업고 걷고 있었다.
인정은 소싯적 육상 선수가 꿈이었는지, 두 사람을 뒤로하고 힘차게 달려가 버렸다.
민준이 생각하기엔 참 좋은 술버릇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그녀의 모습이 벌써 콩알만큼 작게 보였다. 달리는 방향을 보니 다행히 제대로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가 있을 때만 이러는 거지? 다른 남자 등에도 업히고 그랬던 건 아니지?”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
“아니야? 술 먹으면 늘 이랬던 거였어?”
그녀가 대답이 없자 민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이가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몰라.”
그러자 설은 그의 등에 뺨을 기대며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옆을 돌아본 민준은 모자를 거꾸로 쓴 설이 개구쟁이 소년처럼 귀여워, 결국 화내는 걸 포기하고 다시 웃으며 걷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말이야, 어떤 할아버지가 꼬마 여자애를 데리고 우리 아버지를 찾아온 적이 있었어. 그날 그 애랑 놀이터에서 같이 그네를 타며 놀았어. 그러다 그 애가 나한테 가운데 말 잇기를 하자고 했는데, 딱 봐도 나보다 어린 게 그런 말을 하니까 어처구니가 없었지. 근데 그때 그 애가 뭐라고 말을 했는데 내가 대답을 못 했어. 나보다 어린애한테 진 게 분해서 국어사전을 얼마나 열심히 외웠던지.”
민준은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설은 잠이 든 건지, 아니면 숨죽여 듣고 있는 건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
“……강조국.”
갑자기 등 뒤에서 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응?”
“가운데 말 잇기. 내가 강조국이라고 말했어.”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민준이 두 눈을 크게 뜨며 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는 김 국장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때 그 꼬맹이가 설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당연히 그보다 나이가 어렸던 설은 기억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응. 그 오빠 머리가 아주 나빴어.”
“야, 그런 거 아니야.”
“야? 나한테 지금 야라고 한 거야?”
민준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항의하자 설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목을 두 팔로 더 세게 끌어안았다.
설은 그때 놀이터에서 만났던 오빠가 민준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떠난 뒤 알게 되었다.
김 국장이 평창동 집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말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는데, 그 기억은 이제 그녀에게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민준이 피식 웃더니 다시 앞을 향해 느긋하게 걷기 시작했다.
설은 저번처럼 민준의 등에 손가락을 대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강조국, 내가 이번 기회에 오해를 바로잡고 싶은데, 사실 그때 내가 몰라서 대답을 못 한 게 아니라 당신이 동생이라서 봐준 거였어.”
“하지만 두 번째도 졌잖아.”
“두 번째? 아, 그건 당신이 귀여워서 내가 봐준 거였고.”
“아닌 거 같은데…….”
“나쁜 말이야, 강조국.”
민준의 나무라는 목소리에 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등에 ‘바보’라고 썼는데 민준이 금방 눈치를 챘던 거였다.
설이 글씨를 지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쓱쓱 그의 등을 문질르고 다시 민준의 목에 양팔을 둘렀다.
“어차피 다시 해도 내가 또 이길 거야.”
“내가 먼저 시작하면 아마 내가 이길 텐데?”
“좋아, 그럼 이번엔 당신이 먼저 시작해.”
설은 그 말을 끝으로 민준의 등에 다시 뺨을 기댔다.
찬바람을 막아주는 민준의 넓고 따듯한 등이 좋았다. 그녀는 마치 기분 좋게 흔들리는 요람에 누워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랑해.”
그의 등이 약하게 떨리는 것과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이 가만히 숨을 멈추었다.
“사랑해, 강조국.”
“……뭐라는 거야.”
그녀는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사랑해.”
“…….”
“이제 2대 1이야.”
설이 말없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자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일도, 또 그다음 날도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영애 님, 괜찮으세요?”
민준이 설을 업고 오피스텔 입구에 다다르자, 출입구를 어슬렁거리던 인정이 얼른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찬바람을 맞으며 달려가는 동안 술이 깼는지 꽤나 멀쩡해 보였다.
인정의 시선이 민준의 등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설을 향했다. 그녀는 정색하며 설을 바라보았다.
인정은 달려오면서 열심히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민준이야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이해할 수 있었지만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거기에 박자를 맞춰주는 영애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인정은 아무리 영애라지만 민준을 너무 편하게 대하는 게 아닌지 싶어 언짢기까지 했다.
“추워. 눌러.”
민준이 인정에게 눈짓으로 현관 키패드를 가리켰다.
인정은 오피스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녀는 민준의 등에 업힌 설을 서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선배님이 영애 님을 업고 올 줄은 몰랐어요.”
“취하셨잖아. 그리고 부축해서 걷는 게 더 힘들어.”
“이렇게 남자 등에 업혀 오는 걸 보면, 영애 님도 생각보다 되게 털털한 성격이신가 봐요?”
“박인정, 할 말 있으면 뒤에서 얘기하지 말고 앞에서 얘기해. 그리고 앞에서 할 수 없는 얘기면 뒤에서도 하지 마.”
“…….”
인정의 말투가 거슬린 민준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띵-
7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민준이 뒤돌아서 경고하는 눈빛으로 인정을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자 701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손가락.”
701호 현관 앞에 선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그는 설이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은 아무 말 없이 팔을 뻗어 도어록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문이 열리자 민준은 안으로 들어가 현관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당신도 이제 가요.”
“조금만 있다가.”
“…….”
설은 대답 없이 바닥을 응시했다.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찬물을 확 끼얹은 기분이었다.
“방금 들은 이야기도 안 잊어버릴 거야?”
“그게 내가 노력해서 잊어버려야 할 정도로 중요한 얘기예요?”
“아니, 계속 기억이 날 것 같으면 차라리 때려버리라고.”
민준의 농담 같은 진담에, 설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그에게 건네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잘 잘 거지?”
“노력해 볼게요.”
“레드썬. 강조국은 이제부터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
민준은 최면을 걸듯, 설의 눈앞에서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 나한테 잘 자라고 최면 걸어주는 거예요?”
“응. 그러니까 걸려야 돼.”
‘레드썬. 강조국은 앞으로도 김민준만 사랑합니다.’
민준이 눈을 감았다 뜨며 부드럽게 웃었다.
**
이튿날, Boni 커피사업부 사무실.
‘주임 김서연’
서연은 승진과 함께 새로 받은 사원증에 입김을 불어 소매로 정성껏 닦았다.
사원이나 주임이나 위치는 거기서 거기였지만, 서연은 그녀가 일 년 동안 잘 다녔다는 칭찬 같아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아, 맞다!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전해야지!
서연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빠르게 문자를 보냈다.
-나 주임 됐어요! 내가 승진한 기념으로 오늘 맛있는 거 사줄게요.
그녀가 신나게 전송 버튼을 누르는 그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의 손가락은 뇌의 명령을 받고 이미 착실하게 전송을 실행한 후였다.
“으악!”
서연은 마치 벌레라도 만진 것처럼 핸드폰을 책상 위로 집어 던졌다.
사람들에게는 종종 그녀의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서연 스스로는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기억력을 원망했다.
수신인, 로미오. 전송 완료.
서연은 눈을 질끈 감고 잠시 현실을 부정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딩동-
창가에 서서 아래 풍경을 내려다보고 서 있던 건우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집어 문자 내용을 확인한 건우는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뭘 잘못 보았나, 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문자메시지가 한 통 더 수신되었다.
-잘못 보냈어요. 죄송합니다. 정말이에요.
“…….”
오늘 정기 승진 공고가 났다는 건 건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구태여 아래 직원들의 인사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기 때문에 거기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건우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서연을 만나기만 하면 그의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불쑥불쑥 밖으로 튀어나왔다.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익숙한 건우가 벌써 몇 번이나 서연에게 민낯을 보였다.
얼마 전 건우는 그답지 않게 그녀에게 모진 말을 했다.
정작 그 자신은 두 사람 사이에 다른 감정이 섞여 들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건우는 그날 그만 만나자는 자신의 말에 너무 쉽게 동의하는 서연에게 화가 났다.
그녀는 분명 마음이 상했을 텐데도 건우에게 잘 가라고 손을 흔들며 웃어 주었다.
건우는 말없이 핸드폰을 응시하다 이윽고 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
딩동-
서연은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경계하듯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화면을 켜고 전송된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래요.
“……뭐지?”
서연은 핸드폰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이것이 첫 번째 문자에 대한 답인지, 아니면 두 번째 문자에 대한 답인지 알 수 없었다.
-일 끝나면 저번에 만났던 그 골목으로 와요. 거기서 기다릴게요.
“……첫 번째다.”
서연이 눈동자를 옆으로 데구루루 굴렸다.
건우와 서연은 그날 밤 이미 그만 만나기로 결정을 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녀는 건우가 왜 그런 답장을 보냈는지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서연은 가방에서 동전 지갑을 꺼냈다. 그녀는 백 원짜리 동전을 공중에 던졌다 잡은 후 천천히 주먹을 폈다.
“100이네.”
백건우의 100이었다.
이걸로 오늘 저녁, 그녀에게는 없던 스케줄이 생겼다.
**
“서연 씨, 잠깐 나 좀 볼까요?”
“네, 팀장님.”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핸드폰 시계를 들여다보던 서연은 김 팀장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그녀의 책상 앞에 다가가 섰다.
그녀는 회전의자를 옆으로 빙글 돌리더니 두 손을 깍지 끼고 팔걸이에 얹은 채 서연을 흥미로운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별 뜻은 없는데 이건 그냥 생각이 나서 묻는 거예요.”
“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 뜻이 없다는 것은 서연의 대답에 따라 그녀의 삶이 앞으로 평화로울 수도, 전쟁 같을 수도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냥 생각이 나서 묻는 거라는 말은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해 묻는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서연은 그녀의 정신 건강을 위해 김 팀장의 사나운 눈초리는 별 뜻이 없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연 씨 혹시 부사장님 알아요?”
서연은 눈을 끔뻑거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이것은 그녀에게 마치 대통령을 아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 질문이 그녀의 대답에 따라 안녕 못할지도 모르는 미래와 어떤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Boni 부사장님이요? 백 회장님 아들 그 부사장님이요?”
“네, 백 부사장님이요.”
서연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회사에서 부사장을 만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만날 예정은 없었다.
우연히 1층 로비에서 만나 스쳐 갈 수도 있겠지만, 부사장이 Boni에 나오는 일은 드문 일이라 그마저도 가능성이 희박했다.
서연은 그저 부사장에 대한 무성한 소문만 들었을 뿐,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부사장은 예전에 이 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여직원을 사랑했는데 집안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그 여직원은 퇴사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그 여자와 헤어지는 조건으로, 당시 팀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던 부사장이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백 회장이 부사장과 그 여자를 헤어지게 하기 위해 비열한 수를 쓰다 현재 큰집에 가 있다는 문장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외전으로는 그 여직원을 좋아하던 대리 한 명이 그녀를 따라 퇴사를 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하는 건지, 서연은 쉽게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슬쩍 김 팀장을 살펴보니 그녀의 등 뒤로 아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무서운 오라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신데렐라에 나오는 이복 언니들의 느낌과 매우 흡사했다.
“모르는데요. 제가 부사장님을 어떻게 알겠어요, 팀장님?”
그녀가 부사장을 모르는 건 사실이었기에 서연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서연은 행여 김 팀장이 그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봐 눈을 두어 번 더 깜빡거리며 순진무구해 보이는 연기에 디테일을 더했다.
서연의 대답은 정답이었다. 김 팀장의 목소리가 금세 나긋나긋하게 변했다.
“이건 그냥 덤으로 물어보는 건데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혹시 서연 씨 아버지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이건 서연에게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이것저것 하셨는데, 지금은 공무원이세요.”
아빠는 늘 바빴다.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오는 일도 많았고 나가는 시간도, 들어오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아빠 몸에 이런저런 흉터가 있는 걸 봤던 서연은 그저 막연하게, 아빠가 몸으로 하는 힘든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빠의 직업을 정확히 알게 된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아…… 그래요?”
김 팀장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서연의 입에서 그녀가 알 만한 기업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다.
혹시 그녀 자신처럼 다른 계열사 임원 딸이라도 되나 싶었는데 아니었던 거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이만 퇴근해요, 서연 씨.”
“네, 팀장님. 내일 뵙겠습니다.”
서연은 친절해진 김 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얼른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친절함이 사라지기 전에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다행히 서연이 사무실을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그녀의 친절함이 유효했다.
**
“그래서 부사장을 안다고 했어요?”
서연은 건우를 만나자마자 대뜸, 혹시 커피사업부 마케팅팀 김 팀장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도 이 회사를 다녔으니 어쩌면 그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였다.
그러자 건우는 김 팀장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고, 서연은 건우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아니요, 모른다고 했어요. 부사장님에 대한 건 진짜 여자 얘기밖에 모르는걸요?”
“여자 얘기라니요?”
건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저씨는 그 얘기 안 들어봤어요? 왜 부사장님이 우리 회사 여직원하고 사귀었는데 집에서 반대해서 헤어졌다는 거요. 그 여직원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부사장님은 그 여자랑 헤어지는 조건으로 회장님이 승진시켜 줬대요. 회장님이 그 여자한테 자기 아들한테서 떨어지라고 해코지하다가 그게 잘못돼서 큰집에 간 거라면서요? 부사장님이 Boni에 잘 출근하지 않는 것도 그 여자를 못 잊어서 그런 거래요. 회사에 나오면 막 생각나고 보고 싶을까 봐서요.”
“…….”
건우는 연예인들이 항간에 도는 유언비어를 듣는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문 중 정확한 사실은 여자가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과 건우가 부사장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백 회장이 현재 복역 중이라는 것뿐이었다.
사실과 추측이 골고루 잘 버무려진 이야기였다.
건우가 Boni에 잘 들르지 못하는 것은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탓이었다.
건우는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회사 직원들이 이런 소설을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서연 씨, 그거 다 헛소문이에요.”
“이게 다 헛소문이라고요?”
“헛소문이라는데 왜 실망하는 표정이에요?”
서연이 아쉬운 표정을 짓자 건우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진짜 사랑은 변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난 부사장님이 진짜 사랑을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게 가짜였다면 어쩐지 좀 슬플 것 같아요.”
“진짜 사랑한 건 맞는데 사랑은 변하는 거예요.”
“변하는 건 사랑이 아니에요!”
갑자기 서연이 발끈하며 외쳤다. 건우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 어쩌고 하는 걸 보니 그녀가 건우보다 어린 친구라는 게 실감이 났다.
“내가 어렸을 때 고구마를 정말 좋아했는데 지금은 감자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지금 내가 감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예전에 고구마를 좋아했던 게 가짜인 건 아니잖아요. 난 정말 고구마를 좋아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누군가 나한테 고구마와 감자 중 무엇을 선택할거냐고 묻는다면 난 당연히 감자를 선택할 거예요.”
“그럼 고구마는 어떻게 해요?”
“고구마를 감자보다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지 않겠어요?”
“아니에요, 고구마는 결국 혼자일 거예요. 사랑을 믿을 수 없게 되었을 테니까요.”
“누구예요?”
“뭐가요?”
“서연 씨한테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 사람 말이에요.”
“흠…… 내가 그동안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서연은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우가 그런 서연을 흘끔 쳐다보며 웃다가 천천히 웃음기를 거두었다.
“……지난번엔 미안했어요, 서연 씨.”
건우는 핸들을 돌리며 차분한 어조로 사과했다.
그녀가 차에 타자마자 다짜고짜 김 팀장의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그의 사과가 늦어졌던 거였다.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죠.”
기분이 좋아진 서연은 창문을 아래로 내리며 활짝 웃었다.
그녀가 창틀에 팔을 올리고 고개를 밖으로 쑥 내밀자 건우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밖으로 머리 내밀지 말아요!”
“안 들려요!”
서연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며 까르르르,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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