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59화 (59/94)

59화. 비밀 남녀2016.07.26.

다음 날 저녁 민준의 오피스텔.

“르 블랑(Le Blanc)이 내일 제49호 광구에서 시추탐사를 시작할 거래요. 며칠 전부터 큰 트럭과 장비들이 근처에 왔다 갔다 하는 걸 동네 주민들이 많이 봤대나 봐요.”

“그럼 인정이 너는 내일 그곳에 가서 드나드는 차량이 어디로 가는지 좀 조사해 봐.”

“그곳에 드나드는 차량이 한두 대가 아닐 텐데요? 제가 그걸 다 조사할 순 없잖아요.”

“들어가는 차량 말고 광물을 싣고 나오는 트럭을 찾으면 되는데, 찾을 수 없을까? 없으면 내가 가고.”

“아니요, 찾을 수 있어요.”

“다행이네.”

“…….”

대화는 끝났는데, 인정은 여전히 민준의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민준이 종이를 위로 넘겨가며 읽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민준이 인정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안 가?”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인데요, 선배님.”

“그런데?”

“전 어제오늘 아주 힘들었고 내일도 아주 힘들 예정이에요.”

“말 빙빙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해.”

민준이 종이를 탁 덮으며 인상을 구겼다.

“저 밥 좀 사주세요.”

“……밥?”

그는 ‘밥’이라는 단어를 듣자 설 생각이 났다.

어젯밤 이후, 민준과 설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설은 그에게 어색하게 굴고 있었고 민준은 머릿속에서 맞춰지지 않는 퍼즐 조각이 신경 쓰였다.

“가서 지금 식사하러 가실 건지 여쭈어봐.”

“누구한테요? 영애 님 말이에요?”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정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민준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와 7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그녀는 내심 영애가 없기를 바랐지만, 인정의 바람과는 달리 영애는 그녀에게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영애 님, 저희 지금 밥 먹으러 나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선배랑 집에서 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하다가 그만 식사할 때를 놓쳤어요. 선배가 같이 밖에 나가 먹자고 하는데, 영애 님 혹시 식사 안 하셨으면 저희랑 같이 가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

설이 인정의 어깨너머로 열린 702호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젯밤 이후로 민준과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는 오늘 아침 설이 요구하는 대로 그녀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뒤에서 따라왔으며, 그것은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나랑 가고 싶어요?”

설은 인정이 자신이 함께 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의 떨떠름한 표정으로 볼 때 그녀가 그냥 인사치레로 한번 물어본 거라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설도 동료들의 식사에 끼어들어 함께 가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래도 되고, 아니어도 괜찮아요.”

인정이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녀는 이 정도 말했으면 영애도 대강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이미 먹었어요. 두 분이서 다녀오세요.”

그때, 겉옷을 입고 나온 민준이 702호 문을 닫고 701호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설은 담담한 어조로 인정에게 말을 건넨 후 그를 바라보지 않은 채 그대로 현관문을 닫았다.

‘일 때문에 건우와 만나는 나를 보는 민준 씨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속마음은 어찌 되었든 간에 겉으로는 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 민준과는 다르게, 설은 겉으로 드러날 표정을 감출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설은 밖에서 민준과 둘이 마음 편하게 식사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같이 영화를 본 적도, 여행을 간 적도 없었다.

설은 그의 오피스텔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인정을 보면서, 자신이 민준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선배님, 엘리베이터 왔어요!”

인정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누르고 민준을 불렀다.

민준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701호 현관을 한 번 쳐다본 뒤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인정을 불렀다.

“박인정.”

“네.”

“여자들은 기분이 좋지 않거나 화가 났을 때 어떻게 해줘야 기분이 좋아지는 거지?”

“그거야 기분이 안 좋은 원인이 뭐냐에 따라 다르죠.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아, 내 애인이 화가 난 것 같아서 달래주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네.”

“……뭐, 선배님 같은 경우 자주 못 만나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원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거 아닌가요?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아주 헤어지라고 악담을 하는군.”

“애인이 있긴 있으신 거예요?”

“있어, 아주 예쁜 사람.”

“…….”

민준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애인을 떠올리는 듯싶었다.

인정은 그런 민준을 보면서 불현듯 그의 집 앞에서 맡았던 여자의 향기를 기억해 냈다.

그 여자의 향기……?

인정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의 향수 냄새나 화장품 냄새가 아니라 체향과 어우러진 그 은은한 향기는 매우 독특해 인정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인정은 분명 그 향기를 최근에 다시 맡은 적이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아니에요.”

인정은 얼른 고개를 돌리며 당황스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건 분명히 영애에게서 나던 향기와 같았다.

**

잠시 후 설은 외출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동차를 타려다 마음을 바꿔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설의 자동차가 밖에 없는 걸 보면 민준이 그녀가 밖에 나간 걸 눈치챌 터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민준은 설에게 봄이 오면 한강에 가서 같이 자전거를 타자고 말했다.

그 말 때문에 설은 자전거를 샀고, 그녀는 가끔 혼자 자전거를 타고 인근 공원을 돌곤 했다.

상대방이 꺼낸 이야기를 정작 그 본인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렇게 그녀 혼자만 기억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혼자만 기억할 때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의 크기는 작지 않았다.

설은 자전거에 올라 천천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

“영애 님은 좀 특이한 것 같아요. 얼마 전엔 같이 맥주도 마셨는데 오늘은 또 같이 식사하는 건 싫다고 하고, 아무래도 우리랑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싶다는 걸까요?”

“…….”

“선배님?”

인정은 민준이 대답이 없자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던 민준이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뭐 먹을까요?”

인정이 기분 좋은 듯 메뉴판을 테이블 위에 쫙 펼치고 눈을 반짝였다.

“네가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시켜.”

“아무거나 다요? 그럼 선배님은 뭐 드실 건데요?”

“난 속이 별로 안 좋아서 생각이 없네.”

민준은 벨을 눌러 직원을 호출한 뒤 인정의 식사와 함께 맥주를 주문했다.

조금 전 오피스텔 7층에서 설은 민준의 시선을 피하며 그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화를 낸 건 아니었지만, 민준은 분명 불편한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정이 식사를 하는 동안 민준은 말없이 맥주 두 병을 비웠다.

계산을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민준은 701호에 가 초인종을 눌렀다. 밖에 자동차가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설은 분명 안에 있을 터였다.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민준은 재차 초인종을 눌렀다.

“…….”

여전히 고요한 현관 앞에서 민준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부우웅-

호수 공원의 한 벤치에 앉아 호수에 비친 불빛을 바라보고 있던 설은 그녀의 주머니에서 무거운 진동 소리를 내는 핸드폰을 꺼냈다.

민준이었다.

그는 아마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을 테고, 그녀가 답이 없자 전화를 한 것일 터였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으면 민준은 그녀가 무사히 있는지를 확인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설은 핸드폰이 잠잠해지자, 곧바로 문자메시지를 열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요. 내일 봐요.

민준에게 문자를 보내고 난 뒤 그녀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설은 가로등 불빛이 비쳐 보이는 호수의 물결을 응시하며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부우웅-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핸드폰을 꺼내 보니 이번엔 건우였다.

설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렇게 건우의 전화가 반가운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웬일이에요?”

-혹시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강조국이 나를 왜 이렇게 반가워하지? 괜히 사람 불안하게 말이야.

“기다리긴요, 잠깐 밖에 나와서 운동하다 쉬고 있던 참이에요. 오랜만에 운동했더니 활력이 넘치나 봐요.”

-내 선물 봤어? 어때, 맘에 들었어?

“아주 완벽했어요. 고맙고…… 또 미안해요, 건우 씨.”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목소리에 힘이 없어, 혹시 애인을 자주 못 봐서 그런 거야? 하긴, 대전하고 서울은 좀 멀지?

“아무리 멀다고 해도 이탈리아와 한국만큼 멀겠어요?”

-흠. 그건 그렇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오히려 옆집 사는 거 같을 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설은 건우에게 민준이 이곳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건우는 당연히 민준이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궁금해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건우 씨.”

-한 번만 더 같은 소리하면, 선물 도로 가져갈 거야.

“한번 준 선물을 도로 가져가는 법이 어디 있어요?”

-가져가서 강조국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한테 줘야지.

“장담하건대 우리나라에서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은 못 만날걸요?”

-자신만만한데?

핸드폰 너머에서 건우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설은 웃으며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든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늦었다. 운동 그만하고 들어가서 얼른 자.

“……그래요. 건우 씨도 잘 자요.”

그녀는 통화를 끝낸 후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통화한 줄 몰랐는데, 벌써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설은 통화를 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누군가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몰랐다.

“밖에서 자기엔 날씨가 많이 추운 것 같은데?”

민준이 자전거를 끌고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잠이 안 와서 잠깐 산책 나온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도 핸드폰에 붙인 거예요?”

“당신이 당신 모르게 그렇게 하는 거 싫다고 말했잖아.”

“솔직히 당신이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어줄 줄은 몰랐어요.”

설이 뾰족하게 대답하며 민준과 그의 자전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데 웬 자전거예요?”

“내가 옛날에 당신이랑 자전거 타고 싶다고 말했잖아. 당신이랑 자전거나 탈까 해서 내려오던 날 샀어.”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기억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간절히 바라고 있었지.”

민준이 그녀의 오피스텔에 처음 왔을 때, 그는 현관에서 그녀의 자전거를 보았다.

그날 이후 민준은 그녀와 함께 나란히 자전거를 타는 상상을 했다.

그랬던 그가 대전으로 내려오던 날 제일 먼저 한 일은 당연히 그녀와 함께 탈 자전거를 사는 거였다.

설과 민준은 자전거를 나란히 끌며 집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당신이 호수 공원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혹시나 해서 한번 와봤어.”

“당신은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아요?”

“이건 기억이 아니라 관심이라고 했잖아, 강조국에 대한 관심.”

설이 잠들어 문을 열어주지 못한 건 아닐 터였다. 그녀의 성격상 집 안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다 민준은 문득 그녀의 현관에 놓여 있던 자전거를 떠올렸다.

“저녁 먹으러 나간다더니 술 마신 거예요?”

민준에게서 희미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맥주 한잔 마셨어.”

“…….”

설은 정면을 보고 걸으며 민준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백건우가 당신한테 무슨 선물을 준 거야?”

설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민준은 그녀가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던 거였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건우 씨랑 말장난한 거예요. 건우 씨가 나한테 특별히 선물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강조국.”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네.”

“당신, 백건우한테 뭐 약점 잡힌 거라도 있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면 백건우한테 가고 싶은데 나 때문에 못 가는 건가?”

설이 가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놀란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설은 그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그게 아니라면 당신은 왜 그렇게 백건우와 가깝게 지내는 거지?”

“말했잖아요, 그건 일 때문이라고요!”

“그걸로는 다 설명이 안 돼.”

“김민준 씨!”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내가 알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그러는 당신과 박인정 씨는 단순히 나를 경호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건가요? 정말 그것뿐이에요?”

“말 돌리지 마, 내가 지금 묻고 있잖아. 강조국, 당신 도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민준이 서늘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민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마주쳤다.

“…….”

“…….”

“와! 두 분 자전거 타고 계셨던 거예요? 혹시나 해서 나와봤는데 두 분이 진짜 밖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인정이 자전거를 타고 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설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너야말로 저녁 먹고 일찍 잔다더니 왜 또 밖으로 나온 거야?”

“너무 배불러서 잠이 안 올 것 같더라고요. 같이 자전거나 타자고 선배님 집에 내려갔는데 안 계시길래 그냥 밖으로 나온 거예요.”

설은 피로감을 느꼈다.

인정이 일부러 설을 자극하는 말투도 피곤했고, 그녀를 다그치는 민준의 얼굴도 보고 있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이 피곤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근데 영애 님은 제가 나가가고 말씀드리면 거절하시고, 민준 선배가 나가자고 하면 이렇게 허락하고 그러시는 거예요? 매번 그러시면 저 너무 서운해요, 영애 님.”

설이 시선을 들어 인정을 응시했다.

“김민준 씨가 같이 나가자고 한 게 아니라 여기에서 우연히 만난 거예요. 그것보다 박인정 씨.”

“네, 영애 님.”

“나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아요. 그러니, 나한테 이렇게 억지로 친밀감을 표시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지만, 인정을 바라보는 눈빛이 차가웠다.

“영애 님,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두 사람 다 따라오지 말아요, 부탁합니다.”

설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뱉은 뒤 자전거에 올랐다.

그녀는 당황해서 얼굴이 발개진 인정을 뒤에 두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그녀는 언젠가 민준이 돌아오면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을 상상하며 설렜었다.

하지만 지금 설은 눈앞에 민준이 있고 자전거가 있는데도 외로웠다.

설은 인정이 미웠고 민준도 미웠다. 그리고 이런 자신이 안기영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그녀는 페달을 아무리 밟아도 갈 곳이 없어 가슴에 눈물이 차올랐다.

설의 태도에 당황한 인정이 민준에게 물었다.

“선배님이랑 같이 나온 게 아니었어요?”

“…….”

민준은 설이 자전거를 타고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겁이 많은 설이 밤에 혼자 자전거를 끌고 나와, 또 혼자 자전거를 타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자신이 곁에 있는데도 그녀는 혼자 있는 외로움을 택했다. 그의 가슴이 까맣게 물들어갔다.

민준이 인정의 말을 무시하고 자전거에 올라 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그는 얼마 안 가 곧 설을 따라잡았고, 그녀의 자전거 앞에 멈춰서 핸들을 붙잡아 세웠다.

“비켜요, 나 지금은 당신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

설이 민준의 옆을 지나갔다. 그는 뒤돌아서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갈 곳이 없었던 설은 오피스텔로 그냥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집에 오자마자 욕탕 안에 물을 가득 받고, 그 안에 들어가 무릎을 감싸 안고 앉았다.

뜨거운 김이 금세 욕실 안을 뿌옇게 가득 채웠다.

설은 빨개진 눈가를 몇 번이고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한참 후에 욕탕 안의 뿌연 김이 다 사라지고 나자 젖은 머리카락이 살에 달라붙으며 한기가 느껴졌다.

설은 몸의 물기를 닦고 하얀 가운의 허리를 질끈 묶었다. 따듯한 물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더니 마음이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는 그 소리를 무시했지만, 설이 욕실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도 초인종이 울렸다.

모니터 화면을 보니 예상했던 것처럼 민준이었다.

설은 그대로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가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좀 진정되면 전화해. 기다릴게.

“…….”

설은 핸드폰 전원을 끄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오늘은 그냥 이대로, 민준을 미워하는 채로 잠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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