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60화 (60/94)

60화. 로미오와 줄리엣2016.07.28.

인정은 아침 일찍부터 민준의 오피스텔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려가며 그녀에게 설명을 했다.

“광구로 들어가는 길은 이 도로뿐이야. 광산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쪽으로 드나들 일이 없을 테니까, 인정이 너는 이 라인에 도로 초입을 비추는 CCTV가 있는지 살펴보고 드나드는 차량 번호 조회해 봐. 어디로 가는지 알아볼 수 있으면 더 좋고. 오케이?”

“그냥 사무실에 한 달이면 한 달, 일주일이면 일주일 이렇게 자료 뽑아달라고 하면 안 돼요? 쉽게 하면 될 걸 굳이 이렇게 아날로그식으로 해결해야 해요? 제가 범인을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민준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인정이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일을 한다는 게 좋기도 하고, 또 민준이 선배이기 때문에 군말 없이 따르고는 있었다.

그러나 인정은 여전히 그녀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문명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주진 않아. 최소한의 도움만 받고 나머진 스스로 해결하는 습관을 길러야지. CCTV 없으면 조사 안 할래?”

“그럼 전 서울엔 언제 올라가요? 오늘 금요일이에요, 선배님. 영애 님은 오늘 안 올라가세요?”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거기 들렀다가 곧장 서울로 올라가. 주말에 쉬고 월요일에 내려오면 돼.”

“알겠습니다. 근데 선배님, 어젯밤에 잘 못 주무셨어요? 되게 피곤해 보이세요.”

“…….”

민준은 인정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말없이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젯밤 701호의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설은 끝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민준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바로 소리샘으로 넘어갔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준은 어젯밤, 한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설은 위태롭게 잡고 있던 민준의 손을 놓고 깜깜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민준이 놓친 게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손을 놓고 사라졌다.

그때 느낀 심장의 통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자립적이지 못했고, 그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인정을 내려보낸 후 민준은 설의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오전 7시가 넘었으니 지금쯤 설도 일어났을 터였다.

그는 문을 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후에 현관문이 열렸고, 문틈 사이로 설이 보였다.

그녀는 일찍 일어난 건지 이미 외출복 차림이었다.

민준이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잤어?”

“그럼요.”

“난 잘 못 잤어.”

“그랬군요.”

“왜 잘 못 잤는지 안 물어봐?”

“궁금하지 않아요.”

“……이제는 잘 잤는지 안 궁금해?”

“…….”

“질문한 거 아니야. 대답 안 해도 돼.”

설은 잠시 출렁이는 마음을 속으로 다독였다.

하룻밤 새 민준의 얼굴이 까칠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그가 잠을 못 잔 것 같아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젯밤 두 사람은 불편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로서는 충분히 의심이 갈 만한 상황이었고, 설이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 이상 민준은 오해를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녀가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설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진 못할 터였다.

“30분 뒤에 올게. 쉬고 있어.”

“다른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면 잠깐 들어와요. 나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요.”

설은 뒤돌아 가려는 민준을 불러 세웠다. 이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소파에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나한테 할 말이라는 게 뭐야?”

“오늘 아침 일찍 아버지께서 전화를 거셨어요. 저한테 며칠 전 연구실에서 나오자마자 경호관도 없이 어딜 갔었던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랬어?”

아마 대전에 내려온 날 박인정이 호들갑을 떨며 경호실에 연락을 한 것 때문일 거였다.

“나한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어요. 나는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누군가 지켜보고 낱낱이 알게 되는 걸 바라지 않아요. 난, 그렇게는 살 수 없어요.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난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들 눈을 피할 거예요. 그러니 내가 최소한의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당신이 날 좀 도와줘요.”

“나한테 부탁할 건 그게 전부야?”

“이게 전부예요. 난 당신이 이것만 지켜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할게.”

“정말이에요?”

“대신,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한테 연락하겠다고 약속해. 그리고 그날처럼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지는 건 절대 안 돼.”

“알았어요, 그럴게요.”

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겁게 가슴을 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그제야 밑으로 내려간 것 같았다.

민준이 일어나 그녀에게 양팔을 벌렸다.

“이리 와봐.”

설이 이마를 찡그리며 그에게 다가가자 민준은 그녀를 두 팔로 가득 안았다.

민준은 그녀를 가슴에 안자 이제야 겨우 살 것 같았다.

설이 그의 아가미도 아닌데, 그녀를 가슴에 안아야만 비로소 그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민준이 설을 가슴에 안으면 한숨이 원 플러스 원처럼 따라붙었다.

“강조국은 조그만 게 너무 무서워. 나 어제 한숨도 못 잤어.”

“어젠 당신이 너무 미워서 보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아무리 미워도 내 지푸라기 인형 바늘로 막 찌르고 그러지 마, 지금 온몸이 욱신거린다고.”

“나한테 당신 지푸라기 인형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설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도 인간적으로 심장은 찌르지 말자. 잘못 찌르면 나 죽어.”

“알았어요. 심장은 피해줄게요.”

“허리도 안 돼.”

설이 피식 웃음소리를 내자 민준이 고개를 들어 다정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숨을 쉬는 데에도 강조국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것은 아무리 괴로워도 기꺼이 감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그래서 오늘 영애 님 스케줄은 어떻게 되나? 오늘 금요일이야.”

“나 앞으로 당분간 대전에 있을 거예요. 주말에도 일해야 할 것 같거든요. 오늘은 연구실로 갔다가 오후에 이곳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럼 우리 오늘은 자전거 타고 같이 출근할까? 어제 자전거 같이 못 탔잖아. 대신 추우니까 옷은 따듯하게 입고.”

“응. 그래요.”

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민준이 그녀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놓았다.

“그런데 박인정 씨는 어디 갔어요?”

“내가 심부름 보냈어. 월요일에나 올 거야. 왜, 박인정한테 할 말 있어?”

“아니요. 그냥 눈에 보여야 하는 사람이 안 보이니까 좀 이상해서요.”

“걔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의욕이 넘쳐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야.”

아마 민준이 말하는 신경과 설이 생각하는 신경의 의미는 다를 것이었다.

민준은 인정이 그를 쳐다보는 눈빛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건우와 설이 만나는 걸 바라보는 민준의 심정이 지금 그녀의 마음과 같았을 텐데, 그는 언제나 겉으로는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민준은 그녀를 믿는 것일까, 아니면 모른 척 외면하는 것일까?

“나 뭐 좀 물어봐도 돼요?”

“응?”

“당신은…… 내가 건우 씨를 만나도 이상한 생각 같은 거 안 해요?”

“해, 그것도 아주 많이. 하지만 되도록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 것뿐이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달라질 순 없잖아. 내 정신 건강을 위해 굳이 마음 쓰지 않는 것뿐이야.”

아무리 그리워해도 친부모님이 돌아오실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가 어쩔 수 없는 일은 있었다.

민준은 그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건 되도록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 흘려보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당신이 마음 쓸 일 같은 건 전혀 없어요. 건우 씨, 요즘 연애하는 것 같아요.”

“백건우가 연애를 한다고? 백건우랑 연애는 별로 안 어울리는데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하네.”

건우는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여도 사실 차갑고 냉정한 면모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 깐깐한 백건우가 연애를 한다니.

민준도 남의 연애 상대가 궁금하긴 처음이었다.

“건우 씨 얼굴이 요즘 많이 밝아졌더라고요.”

“강조국 씨, 남의 연애에는 그만 신경 쓰고 내 연애나 좀 신경 써주는 게 어떨까? 내 눈 밑에 시커먼 다크서클 안 보여?”

“아주 잘 보여요.”

설이 발뒤꿈치를 들어 민준의 입술에 입을 맞춘 후 빙긋 웃었다. 그러자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영애 님? 저는 3세가 아니라 30세입니다만. 기회를 한 번 더 드리겠습니다.”

“못됐어요.”

설이 웃으며 민준의 목 주변에 팔을 둘렀다. 그녀의 입술이 다가가기 전에 그의 입술이 먼저 그녀를 찾아왔다.

“화내지 마, 나 속상해.”

민준이 한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당기며 눈을 감았다.

**

똑똑.

누군가 부사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건우가 고개를 들자, 비서실장이 들어와 건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그의 앞에 섰다.

“부사장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잘 일러두었습니다. 오늘 오후 중으로 처리가 될 예정입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다른 말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단속은 잘 해두셨습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점은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후에 작업이 완료되면 다시 보고해 주세요.”

“네, 부사장님.”

“그런데, 박 실장님.”

비서실장이 막 등을 돌리려는 찰나 건우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는 다시 뒤돌아섰다.

“며칠 전에 제가 자주 가던 바에 커피사업부 김 팀장이 나타났던데, 혹시 짚이는 데가 있으십니까?”

“아, 그건…….”

건우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비서실장은 큰 질책이라도 받은 듯 얼굴이 굳어졌다.

“제가 좋아하는 곳이었는데 이젠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음번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까 봐 우려가 되는데, 박 실장님 생각엔 같은 일이 또 반복될 것 같습니까, 아닙니까?”

“……앞으로는 그럴 일 절대 없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 보세요.”

비서실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건우는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 줄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Boni의 대표이사인 김 사장이 그의 딸 김 팀장을 자신에게 붙이고 싶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서실장이, 비록 월급 사장이라고 하긴 해도 대표이사의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순 없었을 터였다.

그래도 건우는 같은 일이 두 번 일어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피로감이 짙어졌다.

건우가 핸드폰을 들어 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일 늦게 끝나요?

-네. 일 끝나고 남아서 연극 연습을 해야 돼요.

-연극이요? 무슨 연극이요?

-우리 회사에서 다음 달에 사랑의 밤 행사를 하거든요. 에헴. 저 주인공이에요.

-어디서 연습해요?

-12층 사무실 소회의실에서요. 일이 다 끝나면 그때 전화할게요.

“…….”

건우가 문자를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슴을 아무것도 없이 전부 비워냈더니, 그의 가슴이 아주 작은 바람에도 들썩였다.

**

인정은 민준이 말한 도로의 갓길에 차를 대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광구를 향해 들어가는 차량은 많았지만 나오는 차량은 없었다.

그때, 커다란 화물 트럭 한 대가 광구 쪽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인정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녀는 바로 쫓아가 볼까 하다가 혹시 모르니 같은 장소에서 그대로 대기했다.

그 뒤 그쪽 방향으로는 몇 시간 전에 들어간 화물 트럭 한 대를 제외하고는 나오는 차량도, 들어가는 차량도 없었다.

잠시 후 그 트럭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트럭은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묵직한 무언가를 가득 싣고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인정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조용히 그 트럭을 뒤따랐다.

그 트럭은 몇십 분을 달려 고속도로 휴게소의 넓은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인정은 그 트럭의 사진을 찍어 민준에게 전송을 한 후, 다시 트럭이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때, 그 트럭 뒤로 같은 모양의 트럭 여러 대가 주차를 하려는 듯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며 인정의 시야를 가렸다.

인정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시야가 완전히 가로막히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잠시 후 인정은 눈앞에 똑같은 모양의 트럭 여러 대가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끔벅거렸다.

그녀가 차량 번호를 외워두었던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어떤 차였는지 헷갈릴 뻔했다.

잠시 후 그 트럭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정은 그 트럭을 따라 다시 차를 몰았다.

**

저녁이 되었다.

건우는 특별한 일 없이 Boni 20층 부사장실에 머물러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잠시 망설이다 12층 버튼을 눌렀다. 서연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걸로 봐서는 아직 연습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사장님, 12층엔 무슨 일로 가십니까?”

건우의 곁에 서 있던 비서실정이 그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직원들이 연말에 하는 사랑의 밤 자선 행사 연습을 한다고 하더군요. 겸사겸사 잠깐 둘러보고 가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건우는 박 실장과 함께 12층 복도를 걸었다.

직원들은 퇴근을 한 후라 사무실은 대부분 텅 비어 있었다. 단 한 곳, 소회의실을 제외하고 말이다.

소회의실 문밖으로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음성이 들렸다.

건우는 소회의실 문의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서연은 몇몇 직원들과 함께 종이를 손에 들고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다.

건우는 문밖에서 서연이 대사를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하더니, 서연은 진짜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이었다.

서연 앞에 건우가 1층 로비에서 보았던 남자 직원이 서 있었다. 서연이 그를 향해 대사를 하는 걸 보니 그가 로미오인 모양이었다.

“아, 로미오. 어째서 당신은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잊으시고 그 이름을 버려요. 그게 싫다면 절 사랑한다고 맹세만이라도 해 주세요.”

‘아니. 난 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고 앞으로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줄 수 없어.’

건우는 서연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로미오, 그 이름을 버리고 당신과 맞지 않는 그 이름 대신 이 몸을 가져요.”

‘백건우라는 이름을 버리면 내가 정말 너를 가질 수 있을까?’

“에잇, 진짜. 난 로미오가 정말 싫어!”

진지하게 대사를 하던 서연이 갑자기 종이를 구기며 버럭 화를 냈다.

“야, 김서연! 줄리엣이 로미오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

“하지만 로미오는 지조 없는 바람둥이잖아!”

서연은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거리며 상대 배역 남자인 정빈우를 노려보았다.

이런 서연이 전혀 당황스럽지 않은 듯, 빈우는 즐거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대꾸했다.

“로미오가 바람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로미오는 절절한 사랑의 아이콘이라고!”

“로미오가 원래 사랑했던 건 줄리엣이 아니라 로잘린이었어. 로잘린을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어떻게 금방 줄리엣을 사랑할 수가 있어? 로미오가 죽지 않았다면 아마 줄리엣과 헤어지고 또 다른 여자를 사랑했을 거야.”

“사랑의 밤 행사에, 숭고한 사랑에 자꾸 금 가는 소리 할래?”

“로잘린은 결국 로미오에게 고구마였어.”

서연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팔짱을 끼자, 빈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리님. 김 주임이 자꾸 헛소리하는 걸 보니 뭘 좀 먹이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줄리엣, 뭐 먹을래?”

“달달한 거 아무거나.”

“생크림 많이?”

“응. 아주 많이.”

“넌 애도 아닌데 왜 그렇게 단 걸 좋아하는 거야?”

“생크림은 나한테 행복이거든.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

“그래, 내가 행복 많이 사다 주마. 다른 분들은 커피 드시나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안쪽에서 밖으로 누군가 나오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지자 건우는 황급히 발길을 돌려 소회의실 앞을 빠져나갔다.

비서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그의 곁에 따라붙었다.

“둘러보시려고 했던 것 아니셨어요?”

“생각해 보니 제가 방해가 될 것 같네요. 박 실장님 먼저 들어가세요, 전 개인적인 용무 좀 보고 들어가겠습니다.”

비서실장을 먼저 보낸 후 건우는 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끝나면 전화해요. 지금 Boni 근처에 있는데 내가 집에 가는 길에 내려줄게요.

건우는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바삐 차를 몰았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자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지만, 사랑은 그에게 여전히 어렵고 두려운 감정이었다.

**

서연이 건우의 자동차에 타자 그는 서연에게 사놓았던 케이크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생크림 케이크예요.”

케이크 상자를 받아드는 서연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가 이내 떨떠름해졌다.

서연이 의심쩍은 눈초리로 건우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한테 케이크는 왜 주는 거예요?”

“서연 씨 표정이 왜 그래요, 케이크 싫어해요?”

“아뇨, 너무 좋아서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지 못했던 행운이 생기면 딱 그만한 불행이 뒤에 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다음에 올 불행을 미리 대비하는 중이에요.”

“행운은 눈덩이라서 굴리고 굴리면 다음엔 더 큰 행운이 서연 씨한테 찾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받아도 괜찮아요.”

“그럼 불행이 끼어들지 못하게, 내가 행운을 빠르게 굴릴까요?”

안심하며 밝게 웃는 서연의 얼굴을 보니 건우의 가슴에 따듯한 온기가 번져갔다.

하지만 따듯한 온기와 함께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는 만약 신이 있다면, 사랑이 그에게만 이렇게 혹독한 건지 묻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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