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61화 (61/94)

61화. 숨바꼭질2016.08.02.

-선배님. 뭔가 좀 이상해요.

오후 무렵, 민준은 트럭을 따라갔던 인정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그 트럭이요, 목적지가 화원이에요. 운전기사가 지금 짐을 내리고 있는데 트럭에 나무 묘목들이 잔뜩 실려 있어요.

“트럭에 나무 묘목이 실려 있다고?”

-네.

하-

기가 찬 민준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광구에서 나온 트럭의 목적지가 화원이라니, 그건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선배님? 제가 운전기사한테 가서 한번 물어볼까요?

“아니, 화원 위치만 기억하고 철수해. 고생했다, 쉬어.”

민준은 전화를 끊고 난 뒤 아까 인정이 보내온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트럭이 중간에 멈춰 서 있던 곳은 고속도로 휴게소뿐이었다.

만약 그의 생각이 맞다면, 이 방법을 생각해 낸 놈은 범죄 영화를 많이 봤거나 아니면 본인이 이런 상황을 이미 겪어 봤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즉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지금 뒤가 켕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Le blanc씨, 빨리 만나 보고 싶네.”

민준이 웃으며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Le blanc의 낯짝을 빨리 보려면 일의 효율성을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단장님, 김민준입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아무렴, 네가 나한테 부탁할 게 없다면 전화 걸 일이 있겠냐?

“제가 차량 번호 알려 드릴 테니 오늘 하루 동선 파악 좀 해주세요. 총 세 대고 모두 같은 회사 화물 트럭입니다.”

-너 이제 나한테 이런 거 부탁하고 그러면 안 돼. 아무리 내가 격식을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넌 너무 격식이 없어, 알아?

툴툴거리는 박 단장의 어조에 민준이 픽 웃었다.

“압니다. 잘 아는데, 단장님께서 지시를 내리셔야 밑의 애들이 신속하게 알아내서 보고할 것 아닙니까? 제가 알아보는 것보다 그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너 지금 나한테 공손하게 부탁하는 거야?

“두 손으로 전화 받고 있습니다.”

-쯧, 말이나 못하면. 알았다!

“참, 단장님. 하얀색 하면 뭐가 떠오릅니까?”

-뭐야, 이거 퀴즈야? 그럼 혹시 상품도 있는 거야? 하얀색이라고 하면…… 눈! 당연히 눈이지,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 어때, 정답이야?

민준의 기분이 찝찝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Le blanc은 프랑스어로 하얀색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얀 이미지는 오직 강설뿐이었다.

“정답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연락주세요.”

민준은 전화를 끊고 난 후 핸드폰 속 사진을 바라보았다.

이건 세 개의 컵에 조그만 공을 넣고 컵을 이리저리 돌려, 어느 컵에 공이 들어 있는지 알아맞히는 야바위꾼의 노름과 같았다.

민준이 알기로는 트럭이 멈춰 있던 휴게소 주차장은 CCTV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깜찍하게 트럭 세 대로 장난을 치다니, 그도 인정이 보내온 사진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놓치고 지나갈 뻔했다.

“자, 공은 이제 어디로 갔을라나?”

민준이 핸드폰을 공중에 던졌다가 손으로 받으며 웃었다.

**

늦은 저녁, 민준은 설이 근무하는 연구동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그녀를 기다렸다. 겨울이 코앞이라 밤공기가 차가웠다.

그는 괜히 설에게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자고 했나 싶었다.

민준은 그녀가 나오면 따듯하게 손을 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고 보온을 유지했다.

연구동의 유리문이 열리자 민준이 고개를 들어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설과 함께 다른 연구원들 몇 명이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중엔 원자력연구원장인 황 원장도 있었다. 민준은 황 원장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바로 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황 원장은 민준이 시선을 돌린 후에도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설이 민준 곁으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자전거 자물쇠를 풀며 살짝 미소 지었다.

“목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 맞다, 목도리!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수줍은 듯 상기된 얼굴의 설은 왔던 길을 종종걸음으로 되돌아갔다.

그 사이 민준은 그녀의 자전거 바퀴를 발로 툭툭 차며 공기가 빠지진 않았는지, 핸들이 괜찮은지 등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김 국장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조국 양한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서요.”

그의 등 뒤에서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민준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다른 연구원들은 이미 가고 없는데 황 원장은 아직도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영애에게 요원을 붙이겠다고 했더니 황 원장이 난색을 표하더구나.’

그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는 아버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눈을 들어 황 원장의 두 눈을 마주했다.

“다행히 잘 해결됐습니다.”

“제가 경호관님 이름을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김민준입니다.”

민준은 잠깐 망설이다 황 원장에게 대답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다.

“김민준 씨, 날씨가 춥습니다. 내가 차로 두 사람을 데려다 줄 테니 날 밝을 때 와서 자전거를 가져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국 양이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이 됩니다.”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영애 님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원장님.”

민준은 황 원장을 바라보며 입가에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황 원장은 그에게 뭔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민준은 대답해 줄 것이 없었으니, 협상은 결렬이었다.

“목도리 찾아왔어요!”

그때, 설이 유리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손에 목도리를 돌돌 말아 쥐고 있었다.

설은 칭찬을 받고 싶은 아이처럼 그에게 목도리를 들어 보이며 웃었다.

민준은 목도리를 받아들어 그녀의 목에 두어 번 감은 후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단단히 여몄다.

“팔 넣으세요.”

민준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설의 어깨에 둘렀다.

설이 그의 카키색 야상 점퍼를 입자 민준은 빠르게 지퍼를 채우고 목 부근까지 남김없이 단추를 잠갔다.

그녀는 양팔을 위아래로 붕붕 흔들더니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따듯하긴 한데 나 좀 웃긴 거 같지 않아요?”

“추운 것보다는 낫습니다. 이제 돌아갈까요?”

“원장님,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설이 황 원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민준도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황 원장은 인사를 하면서도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에 민준은 경호관이 아니라 마치 애인을 마중 나온 연인처럼 보였다.

김 국장이 남자 요원을 보냈다는 사실에 많은 생각을 했는데, 민준에게서 요원이 아닌 연인 같은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설마, 아니겠지.’

황 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에 올랐다.

**

“추우면 얘기해.”

민준은 설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옷 입은 모양만 보자면 민준은 봄이었고 설은 한겨울이었는데, 그는 설이 춥다고 하면 입고 있던 셔츠마저 벗어줄 기세였다.

“아무리 추워도 난 더 이상 옷을 껴입을 수 없어요.”

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지금도 두꺼운 옷 때문에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였다. 누군가 그녀를 손가락으로 툭 치면 옆으로 데굴데굴 구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운동 부족이야. 매일 실내에만 있으니까 얼굴에 핏기가 없잖아.”

“그렇다고 설마 나한테 앞으로도 매일 이렇게 출퇴근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죠?”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그러다 진짜 감기 들면 안 되니까 그건 안 될 것 같고.”

“이삿짐은 이제 다 정리가 됐어요?”

“궁금하면 와볼래? 당신 우리 집 안 와봤잖아. 내가 오늘 이사 온 기념으로 집들이할게.”

“좀 궁금하긴 한데 오늘 말고 다음에 갈게요.”

“왜?”

“내가 집에서 할 일이 많거든요.”

“그럼 내가 라면 끓여줄 테니까, 우리 집에서 라면만 먹고 갈래?”

“괜찮아요. 지금은 먹고 싶지 않아요.”

끼이이이익-

민준의 자전거가 그녀 앞으로 쌩하게 달려 나갔다가 갑자기 뒤돌아 설 앞에 멈춰 섰다.

“강조국 씨 대답이 너무 무성의한데? 잠깐 고민도 안 해보고 말이야.”

설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 듯, 민준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민준을 쳐다보았다.

“그게 지금 내가 고민해야 되는 질문이었어요?”

“내가 지금 당신을 우리 집에 초대하고 있잖아.”

“알아요, 하지만 꼭 오늘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나 정말 할 일이 많아요.”

“그럼 오늘은 더 이상 나랑 못 놀아주는 거야?”

“미안해요. 사실 피곤하기도 하고요.”

“어째 대전에 내려오니까 강조국 얼굴 보기가 더 힘드네?”

민준이 아쉬워하는 걸 보자 설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도 민준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정말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오늘 안으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민준이 서운해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내일은 시간이 되는 거야? 내일은 아무리 바빠도 나한테 시간을 내줬으면 좋겠는데.”

설은 오늘과 내일 스케줄을 재빨리 머릿속에 떠올렸다.

일을 서두르면 내일 오후쯤엔 민준과 데이트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내일은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럼 내일은 나랑 놀아주는 거지?”

“아마도요.”

“오케이.”

“응.”

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내밀어 입을 맞추었고, 당황한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습니다.”

민준이 피식 웃더니 페달을 힘차게 밟아 달려 나갔다.

설을 701호로 들여보내고 집으로 들어온 민준은 곧바로 노트북을 켜고 NIS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집에 돌아오는 도중, 어쩌면 인트라넷에 이곳의 광산과 관련된 자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는 문득 2년 전 사건을 떠올렸다. 그는 그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사건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던 민준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고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타닥타닥 두드렸다.

“이건 뭐지?”

해당 사건 파일에 접근 제한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박 단장에게 지금 전화를 걸까 하다가 너무 늦은 밤이라는 걸 확인하고 그만두었다.

조만간 전화가 걸려오면 그때 같이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비슷한 시각, 설은 노트북을 켜고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빨리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민준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지금은 그런 아쉬움보다 조급한 마음이 더 컸다.

두 사람의 오피스텔 불빛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

다음 날 민준은 늦잠을 잤다.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고 메시지함에는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민준아, 생일 축하해. 엄마가 미역국도 못 끓여줬네. 오늘 못 올라온다고 했지? 대신 집에 오면 엄마가 미역국 맛있게 끓여줄게.

핸드폰을 쳐다보던 민준이 미소를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역국이든 뭐든 오늘내일은 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으니, 그에게는 가장 좋은 생일날이 될 터였다.

빠르게 씻고 나간 그가 701호의 벨을 누르자, 설이 조그맣게 하품을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 역시 잠을 많이 자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설은 민준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거의 감겨 있다시피 했다.

“하암. 벌써 왔어요?”

“자고 있었어? 좀 이따가 올까?”

“아니에요, 일어났어요.”

“당신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사실 나 너무 졸려서 계속 자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이랑 있고 싶기도 해요.”

설이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난 거실에 앉아 있을 테니까 당신은 들어가서 좀 더 자고 나와.”

“아니에요! 집이 어질러져 있어서 여기는 안 돼요.”

집 안에 들어오려는 민준을 만류하며 설이 손을 내저었다.

701호의 거실에는 그녀가 작업한 서류들이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집이 지저분해서가 아니라, 민준을 서류들이 널려 있는 곳에 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다시 조그맣게 하품을 하자 민준은 설이 안쓰러워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우리 집으로 올래?”

“그래도 돼요?”

“안 될 리가 없잖아.”

민준은 두 눈이 반쯤 감긴 그녀의 손을 잡고 702호로 돌아왔다.

그는 설을 침대에 눕히고 난 뒤 옆에 누워 그녀와 마주 보았다.

그녀는 침대에 눕기도 전에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혼자 사는 사람 침대가 왜 이렇게 커요?”

잠에 취한 설이 이불을 가슴 앞으로 말아 쥐며 웅얼거렸다.

그녀의 의식은 반은 이쪽 세상에, 그리고 나머지 반은 저쪽 세상에 걸쳐 있었다.

“혹시 강조국이랑 둘이 쓸지도 몰라서 사는 김에 큰 걸로 샀어.”

“……잘했어요.”

설은 잠에 취한 게 꼭 술에 취한 사람 같아서, 민준이 보기에는 그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 같았다.

민준은 설의 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그녀의 귀 너머로 넘겨주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조국. 당신 꿈은 여전히 베짱이가 되는 건가?”

“…… 응. 베짱이. 개미랑 같이…….”

“다리가 아프면 업어주기도 하고, 괴롭히는 벌레들 있으면 혼내주는 힘 센 개미는 어때?”

“…… 벌레…… 개미…… 좋아.”

“그럼 나한테 시집올래?”

“……응.”

민준이 픽 웃으며 설의 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녀가 잠결에 민준에게 손을 뻗자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설을 가슴에 안았다.

그의 품에 들어온 설은 제 자리를 찾은 퍼즐처럼 꼭 맞게 맞춰졌다.

민준은 설의 등을 어루만지며 잠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

민준이 어쩐지 옆자리가 허전한 것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오후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펴봤지만, 설은 보이지 않았다.

민준이 침실 문을 열고 나가자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안을 살펴보니 설이 주방을 분주하게 오가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언제 그녀의 집 냉장고를 털어왔는지, 식탁 위에는 민준이 처음 보는 식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민준은 팔짱을 끼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설이 요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설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 그를 발견하고서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깜짝이야! 일어났으면 말을 하지 왜 거기에 서 있어요?”

“요리하는 베짱이를 구경하고 있었어.”

“뜬금없이 베짱이 얘기는 또 뭐예요?”

베짱이는 오른손에 국자를 들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있어.”

담담한 민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그는 설이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뛰어난 기억력은 잠결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혹시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 건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잠시 의심하던 민준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려 다시 요리에 집중하는 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른 씻고 와요. 내가 우리 집 채소들을 다 가지고 왔어요.”

“강조국.”

“말해요.”

설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의 불을 약하게 줄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도대체 왜 침대에서 잠만 자는 거지?”

“콜록! 콜록!”

갑자기 사레가 들린 설이 빨개진 얼굴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민준이 냉장고에서 얼른 생수병을 하나 꺼내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건넸다.

꿀꺽꿀꺽 물을 마신 설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민준을 노려보았다. 생각지 못했던 기습 공격이었다.

“나한테 머리로 잘 생각해보라고 말했잖아요.”

“응, 분명히 그랬지.”

팔짱을 끼고 선 민준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분명 민준이 설에게 1년이든 2년이든 그의 곁에서 행복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보라고 말을 했었다.

“그런데 유효기간이 어제로 만료되었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한테 유효기간이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요.”

“당신이 기억을 못하나 본데, 어제 당신이 나한테 이미 그러겠다고 대답도 했어.”

설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어제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뇌 주름 사이사이를 구석구석 스캔한 설이 마침내 확신을 가지고 민준을 쳐다보았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거짓말 아니야.”

“김민준 씨, 난 내가 한 번 보고 들은 건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고 해도 절대 안 잊어버린다고요. 그런 내가, 어제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럼 당신 머릿속을 잘 찾아봐. 그 속에 들어 있겠네.”

“내가 당신한테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요?”

“안 가르쳐 줄 거야.”

민준이 웃으며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의 뚜껑을 열었다. 안을 들여다본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설을 바라보았다.

“미역국이네?”

“응, 날씨도 춥고 해서 끓여봤어요. 미역국은 싫어해요?”

“……아니, 좋아해. 마침 오늘 꼭 먹고 싶었어.”

민준이 냄비 뚜껑을 닫은 후 차분한 눈빛으로 설을 응시했다.

그녀에겐 아마 우연이었겠지만 그에겐 예상하지 못했던 감동이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새삼스럽게 왜 인사를 하고 그래요?”

“밥 먹고 얼른 밖에 나가자. 내가 오늘 할 일이 아주 많아. 강조국 씨한테 고기도 먹여야 되고, 시간이 별로 없어.”

“고기는 왜요? 나 고기 먹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요?”

“앞으로 강조국 씨 힘들 일 많을 테니 많이 먹고 힘내야 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게 무슨 뜻일까?”

설이 머리에 물음표를 달고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픽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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