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소용돌이 (1)2016.08.09.
건우는 굳은 얼굴로 한국병원 VIP 병실 앞에 서 있었다.
백 회장의 변호인 측이 지병의 악화를 사유로 하여 신청한 백 회장의 형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졌고, 그는 어제 이곳 병실로 이동되었다.
방금 전 건우는 백 회장의 주치의를 만나고 왔다.
주치의는 건우에게 심근경색을 앓고 있는 백 회장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말을 했지만, 그는 백 회장이 정말 아픈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얼마든지 교도소를 나올 구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병실 문을 열자 열린 틈 사이로 백 회장의 핼쑥한 얼굴이 얼핏 보였다.
건우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서류를 보고 있던 백 회장이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편찮으시다더니 정정하시네요.”
“내가 없는 동안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더구나.”
백 회장이 탁, 서류를 덮으며 날카로운 눈으로 건우를 쳐다보았다. 기력은 쇠했어도 그의 매서운 눈초리는 여전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네가 여섯 개의 나라로 쪼개서 차명으로 수입한 물건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께서 관심 두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건우는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야? 대체 지금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거야!”
“그럼, 제가 아버지 아들인데 제정신일 수 있겠습니까?”
“이, 이놈이! 윽.”
손을 부들부들 떨던 백 회장이 가슴께를 움켜쥐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건우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서늘한 눈빛으로 백 회장을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여기에 계십니까?”
“난 다시는 그곳으로 안 돌아갈 거다.”
“돈이 좋긴 좋네요.”
“괘씸한 놈, 애비한테 할 말이 고작 그것밖에 없어?”
“많이 편찮으신 줄 알았는데 멀쩡하시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일이 좀 바빠서요.”
그때, 건우의 등 뒤에서 탐탁지 않은 백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요즘 만난다는 그 여자애는 어느 집 여식이냐.”
건우는 뒤돌아 가던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를 돌아 백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만나는 여자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앞으로 누굴 만난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시답지 않은 계집애를 만나고 있다면 하루빨리 정리해. 티 안 나게 데리고 노는 건 상관없다만 격식 따지는 집에서 나중에 따지고 들자면 흠잡을 수도 있어.”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앞으로 결혼을 한다거나 아버지한테 손주를 안겨드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누굴 만나서 뭘 하며 놀든 관심 두시지 말란 얘깁니다.”
건우는 백 회장을 경멸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건우가 만나는 여자가 시답잖다면 아버지는 그 여자를 정리하려 들 것이고, 반대로 만약 그의 마음에 흡족한 상대라면 계산기를 두드리며 또다시 탐욕을 드러낼 터였다.
그가 어느 쪽이든 간에 건우에게 혐오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백 회장은 건우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모습을 보고 싶겠지만, 그는 절대 아버지에게 그런 기쁨을 주고 싶지 않았다.
건우가 병실 문을 닫고 나가자 백 회장은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건우가 만난다는 그 여자에 대해 좀 알아봐.”
심각한 얼굴로 전화를 끊은 백 회장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건우의 옆에 괜찮은 짝을 붙여놓아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주말인데 뭐 해요?
침대에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뒹굴거리던 서연이 건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서연은 건우가 그녀에게 케이크도 사줬고 해서, 오늘 별일이 없다면 그에게 밥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많이 바빠요. 한가해지면 연락할게요.
“…….”
서연은 건우의 답장을 바라보며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건우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해놓고 연인에게나 할 법한 행동을 하기도 했고, 그런가 하면 또 이렇게 냉정하게 그녀를 밀어내기도 했다.
“남자친구…… 도 아니고, 남자사람친구…… 도 아니고. 로미오, 넌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서연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가슴 위에 깍지 낀 두 손을 얹은 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다정하면서도 차가웠고, 그녀를 줄곧 시선으로 쫓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 서연을 외면하곤 했다.
건우는 서연이 만난 남자 중 가장 복잡한 사람이었다.
비슷한 시각, 건우는 그녀에게 굳은 얼굴로 답장을 보냈다.
아버지인 백 회장에게 그녀를 들켜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백 회장이 서연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제일 먼저 이용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할 것이고, 만약 이용 가치가 없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리에 들어갈 게 분명했다.
건우는 이 구질구질하고 역겨운 관계에 서연을 끼워 넣고 싶지 않았다.
**
늦은 오후 민준은 샤워를 마친 후 욕실 밖으로 나왔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그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조금 열려 있던 침실 문을 딸깍 소리가 나도록 닫은 후에야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침에 701호에서 밥을 먹고 난 뒤 납치해 온 야옹이가 지금 그의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기에, 내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네 단장님,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십니까?”
민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하룻밤 새 그에게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되었다. 세상은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고 인생은 그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계속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거였다.
설이 그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어라? 여보세요?
“제 말 안 들리십니까?”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야, 불만 있으면 차라리 화를 내. 난 네가 이러면 무섭다, 민준아.
“제가 단장님께 왜 화를 냅니까? 그나저나 제가 부탁드린 건 알아보셨어요?”
민준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어, 알아봤는데 네가 말한 트럭 중 두 대는 대전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올라왔고, 한 대는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어. 네가 찾는 게 혹시 대전으로 다시 돌아간 트럭이야?
찾았다!
민준이 입가에 씩 미소를 지었다.
“그 트럭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보다 먼저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너 도대체 이 트럭은 왜 찾는 거야?
“그럴 일이 좀 있어요. 아직 확실한 게 없어서 지금은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너 혹시 건우랑 아직도 뭐가 남아 있는 거야?
“백건우 이야기가 여기에서 왜 나옵니까?”
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Pakin이 이번에 대전에 지은 물류창고 있잖아, 네가 찾는 트럭이 거기에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 트럭이 지금 Pakin 물류 창고에 있다고요?”
-어, 금요일 오후부터 지금까지 쭉 그곳에 있다고 하던데? 자, 이제 얘길 해봐. 뭐야, 도대체?
“글쎄요. 그게 도대체 뭘까요, 단장님.”
Pakin이 Le blanc과 무슨 관계가 있지?
굳은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던 민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장님.”
-어, 말해.
“백건우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걔? 프랑스에 있다 들어왔지, 아마?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야?
“……아닙니다.”
민준이 눈빛이 싸늘해졌다.
Le blanc은 프랑스에 본사를 둔 기업이었다. Pakin이 Le blanc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연관이 있는 건 분명했다.
관련이 있는 쪽은 백건우일까, 백 회장일까. 하지만 백 회장은 운신의 폭이 좁을 텐데…….
-참, 백인회 회장 형 집행정지로 나왔다. 지금 한국병원에 있어.
“백 회장이 나왔다고요?”
-어. 건우한테 잘됐다고 얘길 해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래.
“…….”
백 회장이 혹시 2년 전 일에 대한 앙심으로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백 회장은 충분히 의심을 살만한 전적이 있고 백건우는 프랑스에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참, 단장님. 제가 2년 전 사건 관련 파일을 열어보려고 했더니 접근 제한이 걸려 있던데요. 왜 제가 볼 수 없습니까?”
-응? 국장님이 너한테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
“아직 못 들었습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그때 찾은 파일을 폐기하면서 관련된 모든 정보를 삭제했어.
“파일을 폐기했다고요? 왜죠?”
-그때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우리나라에 강하게 항의를 하면서 연구 자료들을 전부 폐기할 것을 요구했어. 그 파일 내용 중 우라늄 농축에 관한 내용이 걔네 레이더망에 걸려든 거지.
“그걸 IAEA에서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나라에도 타국 정보국 요원들이 곳곳에 숨어 있잖냐, 그쪽을 통해서 얘기가 새어나간 모양이야. 뭐 우리도 같은 일을 하니까 뭐라고 할 순 없지만 말이야. 안 그래도 북한이 잊을 만하면 미사일 쏘고 또 잊을 만하면 핵실험을 하는데, 이 와중에 우리나라까지 도매금으로 같이 넘어갈 수 있으니까. 아까워도 어떻게 하겠어, 미래보다 지금 당장 우리나라가 살고 봐야지. 게다가 우리나라는 핵확산금지조약 회원국이잖아. 결국, 조용히 폐기하는 걸로 넘어가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끝냈지.
“그걸 정말 다 폐기했단 말씀이십니까?”
-진짜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잠잠한 거야. 넌 그때 밖에 있어서 몰랐겠지만, 우리 그거 수습하느라 꽤 피곤했다.
“……이해가 안 가네요.”
-거기에 네 이해는 필요 없고.
“원자력연구원 측에서 그걸 순순히 받아들였습니까?”
-그쪽에서 순순히 안 받아들이면 어쩔 거야.
민준이 이해할 수 없는 건 강설이었다.
설에게 그 파일이 어떤 의미인데, 그걸 그녀가 순순히 받아들였을 리가 없었다.
그가 알기로 설은 그동안 원자력연구원에서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며 조용히 살아왔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단장님, 영애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아마 알고 있지 않을까?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황 원장이 원자력연구원으로 영애를 데려갔으니까 말이야. 아마 그때 얘기해 주지 않았을까 싶은데?
“…….”
박 단장과의 통화를 끝낸 그는 머릿속으로 드러난 사실들을 정리했다.
2년 전 파일이 폐기되고 난 후 설은 원자력연구원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현재 Pakin은 우라늄 광산 개발권을 가진 Le blanc과 관련이 있었다.
민준이 텅 빈 화이트보드를 마주 보고 섰다. 그는 왠지 보드마커를 손에 쥐고 싶지 않아 하얀 칠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딸깍 소리와 함께 침실 문이 열렸다. 설이 잠기운이 남아 있는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언제 골치가 아팠냐는 듯 그녀를 보자마자 그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일어났어?”
“지금 몇 시예요?”
“5시 조금 안 됐어. 커피 줄까?”
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주방으로 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내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설은 거실 창 가까이 있는 테이블 의자에 가 앉았다.
잠시 후 민준이 두 개의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녀와 마주 앉았다.
“집에 화이트보드가 다 있네요?”
“나는 강조국 씨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여기저기 적어놓고 기억해야 하거든.”
“그럼 내가 당신의 외장 하드가 되어 줄까요?”
설이 머그잔을 손에 쥐며 웃었다.
“내 저장 용량이 부족할 것 같으면 얘기할게. 참, 그런데 말이야. 2년 전에 찾은 파일은 지금 원자력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나?”
민준이 아무렇지 않은 척 설에게 태연하게 물으며 머그잔을 입에 가져갔다.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요.”
설의 눈동자가 왼쪽으로 슬쩍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어색하게 굳어지는 걸 민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럼 황 원장님께 물어보면 되려나? 만나게 되면 한번 여쭈어 봐야겠네.”
“당신이 갑자기 그 파일에 대해서는 왜 묻는 거예요? 이미 옛날에 다 끝난 일이잖아요.”
“갑자기 생각이 났어. 밖에 드러낼 수 없는 내용이 들어 있으니 그걸로 뭘 했을 것 같지는 않고, 어딘가 잘 보관되어 있겠다 싶어서.”
“…….”
설은 사실대로 이야기를 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민준이 알고자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사실은…… 파일은 폐기되었어요.”
“폐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민준이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처음 듣는 얘기인 양 놀란 표정을 했다.
“파일의 내용이 외부로 흘러나갔고, 그중 우라늄 농축 부분을 국제원자력기구에서 문제 삼았어요. 우리가 그들이 정한 연구 범위를 넘어섰다는 이유였어요. 대한민국의 과학자들은 이 분야에 관한 한,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개발의 한계가 있죠.”
설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 박사님께서 오랫동안 연구하셨던 결과물인데 당신이 많이 속상했겠네.”
“허탈하긴 했어요.”
설은 그때 허탈하기도 했고,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 비슷한 감정도 느꼈다.
그녀가 파일 내용을 다시 복구할 수 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만약 설이 없었다면 그건 말 그대로 폐기된 채 세상에서 사라졌을 터였다.
하지만 설은 복구한 파일을 그냥 가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들켜 복구한 파일을 또다시 빼앗기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실험을 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대통령이 알게 되면 기함할 이야기였다.
“하긴, 그 내용이 핵무기확산금지조약에 위배되는 내용이긴 하지.”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핵무기를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니었어요!”
발끈한 설의 뺨이 붉어졌다.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의 원자력 자립을 생각하다 그렇게까지 연구가 진행이 되었을 뿐이지, 일부러 무기를 만들려고 하셨던 건 아니었단 말이에요. 할아버지는 위대한 과학자가 어떤 시대에는 불안하고 불편한 과학자가 되기도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난 후 어떤 사람들한테는 불편한 과학자가 되었죠.”
“…….”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내가 지금 이런 말을 당신한테서 듣고 있다는 게 좀 놀라워서.”
“이런 내 생각이 놀랍나요?”
“놀랍다기보다, 영애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좀 의외라서. 솔직히 대통령께서 듣고 좋아할 만한 얘기는 아니니까.”
민준이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당신도 우리 할아버지가 무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박사님의 뜻은 알겠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입장이 곤란해진 건 사실이야.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이번엔 아마 국제원자력기구의 경고 정도로 지나가지 않겠지. 우리나라가 북한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될 수도 있어. 유엔 안보리 회의에 의제로 회부되면 골치 아프다는 말 정도로는 해결이 안 될 거고, 결과적으로 나라의 안정을 뒤흔드는 일이야. 난 조국의 안녕과 평화에 반하는 것엔 당연히 찬성할 수 없어. 그나저나 대통령께서 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언짢아하실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아버지는 그러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 그러면 안 되지?”
“아버지는 예전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어요. 그러니 적어도,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그게 너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나한테 하시지는 않겠죠.”
“글쎄,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 역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을 내가 하는 건 상관없지만, 당신이 하길 바라지는 않는 사람이니까.”
“그래요? 당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꽃밭을 걷겠다고 하면 기꺼이 손을 잡아줄 생각이야.”
민준이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진심이에요?”
“감동 안 해도 돼. 당신한테 걸어야 하는 게 내 목숨뿐이라면 나한테는 어려운 결정이 아니야. 그러나 당신이 그 폭탄을 어디에 터트리느냐는 분명 상관이 있겠지.”
“만약 그렇다면 내가 당신 손을 먼저 놓아야겠네요. 당신도 구하고 폭탄도 팡 터트리고.”
설은 민준의 말을 장난으로 넘기며 머그잔을 들어 올렸다.
“강조국 씨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역사 교과서에서 먼저 만났을 텐데 아쉽네.”
“비꼬지 말아요.”
“비꼬는 거 아니야. 다만 나는, 그래서 강조국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할 뿐이야.”
“나요? 나는 그냥…….”
설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가 그냥 해 본 질문일 텐데도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일꾼개미예요.”
“여왕개미가 아니고?”
민준이 테이블 위로 쓱 몸을 기울여 순식간에 설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쯧.
그는 가볍게 혀를 차더니 드라큘라처럼 설의 목덜미를 이빨로 콱 물었다.
“아얏! 지금 뭐하는 거예요?”
바로 코앞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민준을 보며 설은 황당한 얼굴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미워서 무는 거야.”
“내가 당신한테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요?”
“앞으로 뭘 잘못할지 몰라서 미리 무는 거야.”
민준은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에 아버지 김 국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운치가 않아. 대전에 무슨 일이 있는지 좀 알아봐야겠다.’
강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서, 그래서 당신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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