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소용돌이 (2)2016.08.11.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민준은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갔고, 설은 인정과 함께 설의 차를 타고 출근했다.
그녀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인정의 자동차에 문제가 생겨 정비를 맡겼다는 말에 어쩔 수가 없었다.
“영애 님은 주말에도 연구실에 나가셨어요? 보니까 서울에 안 올라가셨던 것 같아서요.”
인정이 운전을 하며 설에게 물었다.
영애가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당연히 민준도 주말 동안 이곳에 머물렀을 터였다.
주말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침에 인정이 잠깐 본 그는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구실 일이 좀 많았어요. 인정 씨는 주말 잘 보내고 왔어요?”
“부모님도 뵙고 이것저것 하느라고 좀 바빴어요. 바빠서 제대로 연애할 시간도 없네요.”
“인정 씨, 만나는 사람이 있었어요?”
설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인정이 민준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아직 남자로 만나는 사람은 아니고 그렇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 기적이라면서요. 그래서 지금은 그저, 제가 언젠가는 그 사람한테 기적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어요.”
“…….”
설은 이럴 땐 어떤 얼굴을 해야 하나, 생각하며 난감한 표정을 감추었다.
아마도 인정이 염두에 둔 사람은 민준일 터였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인정이 그 사람과 잘되기를 바란다는 덕담을 할 순 없었다.
괜히 아는 척을 해 없던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영애 님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김민준 선배거든요.”
하지만 인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설이 이 사실을 꼭 알아두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그런가요?”
설은 짧게 응수한 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인정의 말대로라면 민준과 설은 지금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인정은 언젠가 그 기적이 그녀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설은 인정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에 새삼스럽게 큰 충격 같은 건 받지 않았지만,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정은 그래서 민준을 따라 이곳에 내려왔던 것일까?
설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인정 씨, 내가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어보세요.”
“김민준 씨와 인정 씨 두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같이 내려오게 된 거죠? 난 그전엔 남자 경호관이 없었고, 또 지금처럼 두 사람이 와 있는 경우는 처음이라 궁금해요.”
“원래는 저만 내려오는 거였는데 선배가 자기도 내려가겠다고 자원했어요. 아무래도 영애 님 저번 사건도 있고 해서 선배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인정은 민준이 내려온 데에 별다른 뜻은 없었다는 걸 설에게 강조했다.
“그럼 그날 레스토랑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건데요?”
“제가 사실 이대철 사장을 조사하고 있었어요. 그날 이대철 사장이 있는 곳에 영애 님이 계시다고 하니까 선배가 갑자기 그쪽으로 달려왔고요. 아무래도 무언가 위험하다는 촉이 있었나 봐요. 역시 선배가 괜히 선배가 아니더라고요.”
“자기 일에…… 참 열심인 사람이네요.”
그날 민준이 어떤 마음으로 그녀에게 달려왔는지 잘 알면서도 설은 이렇게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하면 뭘 해요? 그것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죠. 선배는 해외 파견을 뜬금없이 2년이나 나갔다 왔어요. 선배는 그전에도 해외에 있다 들어왔기 때문에 꼭 가야 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나갈 필요가 없었거든요. 아무튼, 되게 특이한 경우였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특이한 경우였다고요?”
“네. 선배들 말로는 위에서 누가 찍어서 내보냈다는데 누가 일부러 민준 선배를 밖으로 내보내겠어요? 국장님보다 높은 사람이면 뭐, 대통령께서 쫓아낸 것도 아니…… 아, 죄송합니다! 별 뜻 아니에요, 영애 님. 오해하지 마세요!”
“…….”
힐끗 쳐다본 설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걸 보며 인정은 사색이 되었다.
민준 선배가 그녀에게, 너는 입을 다물고 살아야 한다고 핀잔을 줬던 게 그제야 생각났다.
영애는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갑자기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그 뒤로는 계속 창밖만 바라보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 님.”
인정의 진심 어린 사과에도 영애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설은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글쎄, 로마의 휴일 때문이었을까?’
민준은 왜 하필 이탈리아였냐고 묻던 그녀에게 와인 잔을 건네며 담담하게 웃었다.
설은 몰랐던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될수록 그에 대한 미안함이 가슴속에 쌓여갔다.
안 그래도 고단한 그의 삶을 그녀가 더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만난 기적이 그녀가 아니었다면 민준은 좀 더 예쁜 사랑을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자 설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툭,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그를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설은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
“대전에서 오는 길이야?”
“네.”
“생일날 미역국은 먹었어?”
“미역국도 먹고 밥도 잘 먹었습니다.”
늦은 오후, 민준은 김 국장의 사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김 국장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전 공기가 좋아서 그런 건지, 민준의 분위기가 내려가기 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김 국장이 확연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유난히 생기가 돌았다.
“뭐 좋은 일 있냐? 좋은 일 있으면 나도 좀 같이 알자?”
“새삼스럽게 무슨 좋은 일은요. 그런데 갑자기 전 왜 부르셨습니까?”
“네가 보고하지 않으니 내가 널 부를 수밖에 없지 않겠냐?”
“보고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너 그 트럭은 뭐야?”
“무슨 트럭 말씀입니까?”
“시치미 떼지 마. 네가 박 단장한테 트럭 동선 추적해달라고 했다며? 그거 뭐냐고.”
“아, 뭐 좀 찾아보려고 하는 중이었어요. 그러다 하나 걸린 건데 아직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말씀 못 드렸습니다.”
민준은 김 국장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가진 퍼즐 조각들이 아직 정확히 맞춰지지 않아 김 국장에게 보고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대전에 있는 Pakin 물류 창고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것도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고드릴 게 있으면 같이 말씀드릴게요. 그런데 아버지, 여쭈어 볼 게 있는데요. 2년 전에 이 박사님 연구 파일을 폐기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인트라넷에 들어가 보니 사건 파일에 접근 제한이 걸려 있더라고요, 그러다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박사님 연구 자료는 지금 세상에 없어. 물론 남아 있어서도 안 되지만 말이야. 그때 파일과 관련된 모든 증거물은 다 지웠다. 하물며 네가 영애한테 달아놓았던 GPS 수신기까지 모두 제거했어.”
“혹시라도 카피본이 남아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일은 없어. 그때 황 원장과 민 박사, 영애가 가지고 있던 것들까지 전부 다 찾아 없앴으니까. 만약 지금 어딘가에 파일이 남아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문제가 될 거다. 그 파일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 우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 아니니 말이다. 만약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다른 곳에서 눈치채기 전에 먼저 찾아 없애야 해.”
“전부 없앴다고 조금 전에 말씀하셔 놓고, 만약을 가정하시는 건 또 무슨 뜻입니까?”
그가 묻자, 김 국장이 잠시 입을 다물고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파일이 있다면 누군가 복구를 했을 테고, 그건 아마 영애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는 뜻이다.”
“왜 영애가 그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2년 전 파일을 복구한 건 영애와 황 박사, 그리고 민 박사 이 세 사람이었다. 그리고 세 사람 중 영애만이 그 파일을 폐기했다는 걸 안 뒤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 영애가 그럴 수 있었던 건 파일이 없어도 괜찮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 숨겨놨을 경우뿐인데, 내가 알기로는 다른 곳에 숨겨놓진 않았더군.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완성 파일이 없어져도 괜찮다는 것인데 왜 그랬던 걸까?”
“…….”
“그리고 만약 파일을 복구했다면 그다음으로는 무엇을 할까, 진짜로 만들 수 있는지 실험을 하고 싶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건 거기까지다. 하지만 그러려면 눈에 띄지 않는 실험실이 있어야 하고 실험 장비가 있어야 하며 우라늄이 있어야겠지. 셋 다 당연히 쉬운 문제가 아니야.”
“……정말 쉬운 문제가 아니네요.”
민준이 속으로 뜨거운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남은 퍼즐 조각을 비어 있는 자리에 차마 놓지 못하고 손에 그대로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퍼즐 조각을 맞추면 퍼즐 판이 완성될 터였다.
민준은 아직은, 아니 적어도 오늘은 퍼즐을 완성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아버지. 참, 서연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제 전화가 왔는데 통화를 길게 못 했습니다.”
“그 녀석이야 인생이 늘 즐거운 녀석 아니냐? 회사는 열심히 다니고 있는 것 같더구나. 지 엄마를 닮았으면 좀 더 차분한 맛도 있었을 텐데, 아직도 철부지 어린애야.”
김 국장에게 서연은 마냥 철없는 딸이었다.
그녀는 손에 신용카드 한 장만 쥐어주면 헤헤거리며 아빠 최고를 외치는 밝고 경쾌한 딸이었다.
“올라온 김에 서연이 얼굴이나 보고 내려가야겠어요.”
민준이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김 국장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네 엄마 보고 가라. 말은 안 해도 많이 서운한 눈치야.”
“안 그래도 들렀다 갈 겁니다.”
“박인정은 거기서 잘하고 있고?”
“뭐, 그럭저럭 잘은 지내는 것 같습니다.”
“넌 가까이 있어도 인정이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냐?”
“동료끼리 관심이 있고 없고가 어딨습니까?”
“그 마음이 설마 동료에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겠지?”
“제 마음과 상관없이 제가 해야 하는 일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 나가 봐.”
김 국장이 인상을 구기며 민준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민준이 얼굴이 밝아진 이유가 인정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걸 깨달은 김 국장의 얼굴에 근심스런 기색이 짙게 드리웠다.
그는 민준이 영애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대통령은 민준이 영애의 곁에 있다는 사실에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제는 김 국장이야말로 대놓고 반대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밖으로 나온 민준이 자동차에 시동을 걸며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일날 길게 통화하지 못하고 전화를 바삐 끊었던 게 그의 마음에 불편하게 남아 있었다.
“오빠야. 지금 어디야?”
-나? 나는…… 회사! 지금 회사에 있어.
“언제 끝나는데? 오빠 어차피 집으로 갈 거니까 지금 회사로 데리러 갈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오빠 일하느라 바쁘잖아!
“지금은 안 바빠.”
-일이 언제 끝날지 몰라서 그래. 앗! 나 일해야 해. 오빠, 안녕!
민준은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쳐다보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직접 데리러 가겠다는데 마다할 서연이 아니었다. 이 부자연스러운 말투를 보니 서연이 뭔가 켕기는 짓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지 말라니까 꼭 가야겠네.”
민준이 자동차를 몰고 Boni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에 가면 서연이 그의 마중을 극구 사양하며 오지 말라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터였다.
퇴근 시간이 정확히 5분 지난 뒤 서연이 1층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종종걸음을 치며 재빨리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도로변에 잠시 주차하고 있던 민준이 다시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만치 앞에 달려간 서연이 까만 자동차 조수석에 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자동차는 유리가 짙게 선팅돼 있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민준이 피식 웃으며 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오지 말라던 이유는 남자 때문이었다.
“쉿! 조용히 해야 해요. 알았죠?”
핸드폰 벨이 울리자 서연은 건우에게 미리 신신당부를 한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오빠야.
“응, 알아.”
-퇴근 멀었어?
“으, 응. 그런 거 같아.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오랜만에 오빠가 저녁이나 사주고 가려고 하는데, 많이 늦어?
“어, 아주 늦게 끝날 거 같아.”
-그럼 끝날 때 전화해, 오빠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언제 끝날지 모른다니까?
-김서연.
“어.”
-날도 추운데 옷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지 말고 따듯하게 입고 다녀, 알았어?
“어. 어, 어?”
-오빠 간다.
“어…….”
서연이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김 대리예요?”
“네.”
“김 대리가 뭐라고 했는데 그렇게 얼이 빠졌어요?”
“오빠가 나보고 옷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지 말래요.”
건우가 사이드미러를 흘끔 쳐다보았다. 자동차 한 대가 천천히 유턴을 해 뒤돌아 가는 게 보였다.
건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민준이 나를 봤을까? 아니다, 보진 못했을 것이다. 나를 봤다면 서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들켰다!”
“……뭘 들켜요?”
“우리 오빠가 나 이 차 타는 거 봤나 봐요, 이제 어떡하죠?”
“그게 어때서요, 김 대리가 우릴 보면 특별히 곤란할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나는 없는데 로미오는 아닌 것 같아서요.”
서연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건우의 얼굴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그런 거 없습니다.”
힐끗 사이드미러를 살펴본 건우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다.
자동차 한 대가 조용히 건우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 백 회장이 지시한 일일 터였다.
건우가 차선을 변경하며 자동차의 속력을 높였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도망자 역할이었다.
**
민준은 사라지는 차를 사이드미러로 힐끗 쳐다본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차량 번호 하루 다 5X32. 소유주가 누구야? 지금 좀 알려줘.”
서연이 타고 가는 차는 일반 회사원이 타는 차치고는 꽤 고가의 차량이었기에, 왠지 기분이 찝찝했던 민준은 NIS 사무실에 있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던 것이다.
-잠시만요, 차량 소유주가 박oo. Boni…… 비서실장으로 나와 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Boni 비서실장이라고?”
-네. 부사장 직속 비서실장이네요. 또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없어. 고맙다.”
-수고하십시오.
“참나, 김서연. 비서실장하고 만나고 있는 거였어?”
민준이 사이드미러를 흘끔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
본가에 들러 어머니를 뵙고 나온 민준은 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전에 도착하면 늦은 밤일 것 같았기에 그는 설이 잠들기 전에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조국.”
-응.
“목소리가 안 좋은데, 어디 아파?”
-그냥……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민준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설의 목소리를 들으니 복잡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맞아요. 당신이 나를 두고 떠났던 날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좋은 날 다 놔두고 왜 하필 그날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때, 당신은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요……?
설의 목소리에 힘이 없어 민준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대전에 도착하려면 앞으로 최소한 2시간은 더 있어야 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민준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있잖아, 그제 잠깐 꿈을 꾸었는데 꿈에 당신이 나왔어. 사실 지금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다른 집으로 잠깐 입양을 간 적이 있었거든.”
-…….
“그때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지금도 가끔 그때의 꿈을 꾸는데, 그제는 그 꿈에 갑자기 당신이 나와서 내 손을 잡고 안아주는데 기분이 참 이상하더라고.”
-…….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누굴 그렇게 기다렸던 건지 생각해 봤는데, 내가 아마 당신을 기다렸나 봐.”
설은 쥐죽은 듯 고요하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상처를 내보이며 그녀를 위로하는 민준에게 설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듣고 있어?”
-응.
“2시간 정도 있다 도착할 거야, 도착하면 전화할게.”
-안 자고 기다릴게요, 조심해서 와요.
“보고 싶네, 우리 야옹이.”
민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설이 눈물을 닦아내며 웃었다.
딩동-
벨이 울렸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설은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민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설은 그의 얼굴을 보니 다시 눈물이 났다.
“다녀왔어.”
그녀는 민준을 와락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채 숨죽여 울었다.
“야옹이, 왜 울어.”
“……나 당신이 너무 좋아요.”
“타이밍이 좀 이상한데. 혹시 지지난밤 이후로 내가 급격히 더 좋아진 거야?”
민준이 농담을 했지만, 설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아빠가 그랬죠.”
고개를 들고 민준을 바라보는 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웃고 있던 민준의 입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
“우리 아빠가 당신 해외로 보냈던 거 맞죠.”
“아니야.”
“거짓말하지 말아요.”
“아니라니까. 그래서 바보같이 울고 있었던 거야? 내가 당신은 화내는 모습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했잖아.”
민준이 그녀의 눈가에 번진 눈물 자국을 닦아내며 부드럽게 웃었다.
설의 눈물에는 좀처럼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간에, 그녀가 울면 그의 심장은 영 안녕하지를 못했다.
“미안해요.”
“나는 미안하다는 말 말고 다른 말을 듣고 싶은데.”
“사랑해요.”
민준은 주저 없이 모범 답안을 바로 내놓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래도 나만큼은 아닐 거야.”
“다시는 날 두고 어디 가지 마요. 또 그러면 당신 지푸라기 인형에 바늘 꽂아 놓을 거야.”
“내가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정말 그럴 거예요.”
“난 이제 아무 데도 안 가. 만약 가더라도 야옹이는 데리고 가야지.”
민준이 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웃었다.
설은 그 웃음 끝이 슬퍼, 민준을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는 민준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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