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67화 (67/94)

67화. 개와 고양이2016.08.23.

퇴근을 조금 앞둔 시간, 서연이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지이잉- 울렸다.

서연은 잠깐 망설이다 핸드폰 화면을 켜서 내용을 확인했다.

-1층 로비로 나올 것.

문자를 확인한 서연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겉옷과 가방을 손에 들고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오빠!”

“김서연.”

서연은 민준에게 한걸음에 달려가 두 팔로 끌어안고 가슴에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그녀는 오빠의 품에 안기자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며칠 동안 계속 우울했는데 오늘은 우울의 정점인 날이었다.

서연은 이런 날에 오빠의 얼굴을 보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민준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잘 지냈어?”

“아니, 잘 지내지 못했어. 오빠, 나 아픈 거 같아!”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민준을 바라보자 그는 근심스런 얼굴로 서연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마에 닿는 따듯한 손길이 좋아 서연은 배시시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응? 그러고 보니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어, 오빠가 일 끝나면 집에 데려다줄게.”

“헤헤. 아니야, 괜찮아. 뛰어와서 그래. 근데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야?”

“잠깐 오빠 친구 좀 만나러 왔어.”

민준은 서연의 눈을 가까이에서 마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친구 누구?”

“있어, 네가 모르는 사람. 왜, 오빠가 너 보러 온 건 줄 알았어?”

“응, 나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오빠도 내가 보고 싶었나 했지.”

서연이 몸을 흔들며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자 민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그가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랑 싸웠어?”

“남자친구가 있어야 싸우지, 난 남자친구 없어.”

“없다고?”

“응, 없어.”

“흠…….”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알쏭달쏭한 얼굴을 했다.

서연은 연애하는 걸 특별히 감추지 않았는데 남자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새 헤어진 모양이었다.

“오빠 있잖아, 오빠가 회사 다닐 때 말이야…….”

“응? 회사 다닐 때? 회사 다닐 때 뭐.”

“……아니야.”

서연은 그에게 건우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민준이 그녀에게 왜 묻는 건지 물어보면 적당히 둘러댈 핑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으면 집에 일찍 들어가, 어머니 혼자 적적하셔.”

“응, 일찍 갈 거야.”

민준은 시무룩한 서연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놓으며 웃었다.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진득하게 남자친구를 사귀면 좋으련만 서연은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오빠 올라간다?”

“응.”

“조심해서 들어가.”

“알겠어.”

민준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자 서연은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렸다.

오빠와 함께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그때, 로비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서연의 어깨를 누군가 가볍게 두드리며 아는 체를 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다른 팀 대리였다.

“서연 씨, 방금 전 그 사람 혹시 김민준 대리 아니에요?”

“네,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여자의 말에 서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죠? 어머, 진짜 오랜만이네! 저 사람 부사장과 삼각관계였다가 강 주임이 회사 그만뒀을 때 같이 퇴사한 그 사람이잖아요!”

“네……? 강 주임은 누구고, 또 삼각관계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순간 정신이 멍해진 서연은 자신이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들은 게 맞다면, 오빠가 여자를 사이에 두고 백건우와 삼각관계였다는 얘기였다.

“부사장 스캔들의 주인공인 강 주임이라고 있었는데, 서연 씨는 입사하기 전 일이라 아마 잘 모를 거예요. 김 대리는 그때 회사 그만두고 어디 해외로 멀리 나갔다고 들었는데 다시 돌아왔나 보네.”

“…….”

“그때 항간에 김 대리랑 강 주임이랑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는데 부사장이 끼어들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또 누구는 강 주임이랑 부사장이 사귀었는데 김 대리가 뺏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뭐, 진실은 당사자만 아는 거겠지요. 아, 서연 씨가 아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미안해요.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말아줘요.”

연예인 얘기하듯 신 나게 얘기하던 여자는 서연의 굳은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그녀에게 먼저 간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졌지만, 서연은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하고 얼음처럼 얼어붙은 채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김 대리와 강 주임이라니, 정황상 민준 오빠와 강설 언니를 가리키는 게 맞을 터였다.

하지만 서연은 건우가 사랑했던 여자가 그 언니인 줄은 정말 몰랐다.

건우가 그 언니를 사랑했다고 해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서연은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뭐야. 왜 울어, 김서연.”

서연은 눈가의 물기를 재빨리 손등으로 닦아냈다.

조금 전 오빠에게 거짓말로 아프다고 했는데 갑자기 등에 식은땀이 나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서연은 제 이마에 손등을 대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렸을 때처럼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손등에 닿은 이마가 뜨거웠다.

**

“오랜만이네요. 귀국했다는 얘긴 들었어요.”

민준이 부사장실로 들어가자 건우가 책상에서 일어서며 손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는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후 자리에 앉아 사무실을 빙 둘러보았다.

건우가 그를 마주 보고 앉았다.

“사무실이 아주 좋습니다. 넓고, 쾌적하고, 전망도 좋고.”

“내 사무실 구경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바로 물어봐 주니 고맙네요. 르블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하고 왔습니다.”

르블랑이라는 말에 건우의 얼굴이 움찔거렸지만, 그는 바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르블랑이라니요. 칸쿤에 있는 리조트를 말하는 겁니까?”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면 모르는 게 됩니까? 백건우 씨도 눈치가 있을 테니 모른 척할 단계는 이미 지났다는 걸 알 텐데요.”

“……그것에 관한 거라면 나는 김민준 씨와 나눌 이야기가 없습니다. 기업의 세세한 비즈니스까지 시시콜콜 남한테 알려줄 의무는 없으니까요.”

건우가 느긋하게 허리를 뒤로 젖혔다.

순간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정도 감정은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었다.

“나도 남의 일에 관심 두고 싶진 않은데 아시다시피 직업이 직업인지라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직접 물어보러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친절하지 않습니까?”

“뭘 묻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왜 그런 사업을 하고 있냐고 물을 거라면 거기에 대답해 줄 말은 없는데요.”

“백건우 씨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인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 또한 김민준 씨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내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건우의 표정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내가 알았고, 내가 알았으니 이제 다른 사람도 곧 알게 되겠죠. 당신이 그럴 경우를 미리 생각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백건우 씨가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좀 알아야겠는데요.”

“책임 소재가 궁금한 거라면 내가 책임질 일은 책임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책임질 사람은 여럿인데 책임의 무게는 각자 다를 것 같아 묻는 겁니다. 황 원장은 해임으로 끝나고 당신은 경제적인 손실과 제재를 당하는 걸로 책임을 진다고 한다면, 강조국은 어떻게 합니까?”

“…….”

당황한 건우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으며 눈빛을 감추었다.

NIS에서 강조국와 원자력연구원의 일까지 이렇게 빨리 알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연구를 완성하고 다시 숨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숨기 전에 꼬리를 들켰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게 할 거라면 이왕이면 제일 타격이 클 만한 놈한테 덮어씌우겠죠. 내가 생각하기엔 그게 영애 같습니다만.”

민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건우를 바라보았다.

영애가 이런 일에 휘말렸다는 게 알려지면 그 파장은 분명 상당할 터였다.

문제를 삼고 싶은 사람과 집단의 목적에 따라 정도는 다르겠지만, 영애는 희생양으로 삼기에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영애가 혼자 뒤집어쓸 일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황 원장이 알고 보니 몰래 파일 복사본을 가지고 있었던 거고, 욕심 많은 기업인과 황 원장은 비밀리에 연구를 계속해 제3국으로 다시 유출하려고 했던 거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이미 전례가 있는 Pakin이니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원래 재벌들의 선행은 잘 믿기지 않아도 악행은 수긍되지 않습니까? 거기서 영애를 빼는 건 당신 몫으로 남겨두죠.”

건우의 말에 민준이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있는 사람은 설이 아니라 건우였다.

“당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벌인 일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대전에서 일어난 일이 쓸데없이 글로벌해질 수도 있을 거라는 거, 당신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요.”

“죄책감이 아니라 다른 의미의 애국심이라고 봐주면 좋겠습니다만 NIS의 입장이 있으니 거기까지 바라진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김민준 씨가 나를 찾아왔다는 건 상부에 아직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 같은데, 굳이 나를 먼저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건우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조사가 이루어지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인데 민준이 굳이 자신을 찾아와 묻는 이유가 궁금했다.

“날 회유하려고 묻는 말은 아닐 텐데 그게 왜 궁금합니까?”

“이 일에 누구까지 책임을 지게 될지 궁금해서 말이에요. 지금 김민준 씨도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 얘기가 또 그렇게 됩니까?”

민준이 허리를 뒤로 물리며 느슨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알게 되는 사람이 늘어나면 그만큼 책임질 사람도 늘어난다. 건우는 지금 사실을 알고 있는 민준이 침묵함으로써 지게 될 책임에 대해 묻고 있는 거였다.

“사랑과 임무 중 NIS 요원의 긍지가 과연 어디를 향할지 정말 궁금하네요. 고민되겠어요?”

“나는 그런 걸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결정에 따라 조국 씨가 당신을 떠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거야말로 백건우 씨가 상관할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은 연인이 떠날까 봐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위한 결정이었는데도 그 사람은 그걸 모르고 당신을 외면한다면 당신은 괜찮겠어요?”

낮게 깔리는 건우의 목소리에 민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건우를 바라보았다.

친절하게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는데 건우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왠지 성의껏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알려주고 마음의 짐을 함께 나누든가, 그게 싫다면 그 짐을 혼자 짊어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김민준 씨는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난 후자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그걸 원하지 않으면 틀린 답이지요.”

민준이 무심하게 대꾸하며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는 건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가려다 멈추고 고개를 돌려 건우를 바라보았다.

“참,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 왜 하필이면 이름이 르블랑이었습니까?”

민준의 질문 의도를 눈치챈 건우가 피식 웃었다.

그도 그 이름을 지으면서 떠올렸던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김민준 씨는 내가 강설을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아닙니까?”

“기대에 부응하고 싶긴 한데 아쉽게도 백건우의 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건 마음에 드네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거라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조만간 대전에 방문객들이 많아지겠습니다.”

“…….”

민준과 건우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로서는 건우에게 충분한 배려를 한 거였고, 건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온전히 각자의 몫이 될 터였다.

늦은 밤, 대전으로 돌아온 민준은 설의 오피스텔 안에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남았지만, 사실 민준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에게는 이번 일의 결정권이 없었다.

“서울에서 건우 씨를 만나고 왔다면서요.”

“백건우가 그래?”

“네, 통화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은 이제 어떻게 하기로 한 거야?”

“…….”

“말해줄 수 없다는 건가?”

갑자기 민준이 대답 없이 서 있는 설의 허리를 한 팔로 감아 당겼다.

설은 그의 가슴에 두 손을 짚으며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민준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찌푸렸다.

“당신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정말 맘에 안 들어.”

“그런 눈이 어떤 눈인데요?”

“당신 눈빛에서 사랑이 사라졌잖아, 어제 가출했는데 아직도 안 돌아왔네.”

이번엔 설이 인상을 썼다.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그가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변하지 않은 그가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자 민준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할 거죠?”

“강조국이 지금 걱정하는 게 그것뿐이야? 내가 이제 어떻게 할지 걱정돼?”

“네,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거기에 혹시 내 생각은 없어?”

“…….”

“없나?”

설의 이마를 어루만지던 민준의 손길이 그녀의 뺨으로 내려왔다.

“나한테 쉽게 얘길 꺼낼 순 없었겠지, 물론 이해해. 이제 내가 알았으니 걱정도 되겠지, 그것도 물론 이해해. 그런데 말이야, 이걸 알게 되었으니 저 사람 입장이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은 혹시 안 해봤어?”

“이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예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강조국.”

설은 잠시 숨을 멈추고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선택을 했고, 그의 선택은 그녀가 아니었다.

“혹시 기대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당신이 기대하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당신은 이 일과 상관없이 마음이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럴 수…… 있어요.”

설이 민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민준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그녀는 그를 예전과 같은 얼굴로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강조국.”

민준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설은 내렸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지 지금처럼 시선을 피하면 안 돼. 그럼 이렇게, 거짓말이 들통 나게 되거든.”

“그런가요?”

그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한 설은 붉어진 얼굴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자 민준의 시선이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머물렀다.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융통성이 없네.”

민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

다음 날 설은 연구원에 들려 황 원장을 만났고, 연구원에 병가를 내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민준이 알게 되었고 그는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제 세 사람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감추고 숨자는 데 뜻을 모았다.

어차피 다른 대안은 없었다. 전부 잃거나 멀리 돌아가는 것 중에 선택할 수 있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오피스텔로 돌아온 설은 하루 종일 그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민준은 아침부터 얼굴을 볼 수가 없었고, 인정은 그녀를 수행하는 동안 긴 침묵을 지킴으로써 불편한 심경을 내비쳤지만 설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비슷한 시각, 민준 역시 그의 오피스텔 안에 있었다.

그는 노트북 앞에 앉아 후배가 보내온 CCTV 화면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것은 Pakin의 물류창고로 들어가는 도로를 비추는 카메라의 며칠 전 녹화 영상이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던 민준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Pakin의 물류창고를 향하는 메인 도로의 CCTV에 민준의 자동차는 보였지만 설의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건우는 그것까지 계산해서 다른 진입로를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인정의 차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그녀는 그날 설의 자동차를 뒤따라갔던 모양이었다.

건우가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놓은 이상, Pakin이 물류창고에 따로 CCTV를 설치했다고 해도 그 자료는 이미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영애가 혼자 뒤집어쓸 일을 걱정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건우가 그에게 했던 말이 괜한 허풍은 아니었다.

띠리리리-

팔짱을 끼고 창문 밖을 내려다보던 민준은 벨소리가 들리자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민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에게 전화한 사람은 아버지, 김 국장이었다.

“네, 아버지.”

-대전 동향에 대해 보고해 봐.

“……광산 개발권을 사들인 프랑스 법인 회사가 있는데 Pakin 소유입니다.”

-그리고.

“광구에서 나온 트럭이 Pakin 물류창고에 있던 걸로 보아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조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Pakin과 원자력연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Pakin의 투자로 원자력연구원이 연구개발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며칠 전 영애가 Pakin 물류 창고를 방문했다던데.

“네, 그렇습니다.”

CCTV에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아도 목격자는 있었다.

민준은 그날 밤 물류창고 연구동 앞에서 인정이 통화를 하던 상대가 김 국장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 모든 걸 인정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일부러 그에게 다시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알았다. 인정인 거기 두고 넌 내일 아침 사무실로 올라와.

“알겠습니다.”

김 국장과의 통화를 끝낸 민준이 굳은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내일 올라오라고 하 는 걸 보니 바로 문제 해결에 들어갈 게 분명했다.

“당분간 낚시나 하러 다니게 생겼군.”

민준이 픽 웃으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오늘 밤과 내일은 아주 길고 고된 하루가 될 게 분명했다.

“야옹이는 안 따라오려나…….”

그는 701호 방향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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