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수상한 행보.2016.08.25.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인정은 의아한 얼굴로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민준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손에 든 와인병을 인정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선배가 여긴 어쩐 일이세요?”
“특별히 할 일 없으면 나랑 술이나 한잔하자고.”
“선배님은 내일 아침 일찍 서울 올라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대?”
“…….”
“내가 너 말 많이 하지 말라고 했지? 또 이렇게 꼬투리 잡히잖아.”
민준은 당황한 인정의 얼굴을 보고 웃으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인정은 그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민준은 그녀의 대답이 궁금하지 않았는지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예고도 없이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오시면 어떻게 해요?”
인정은 거실에 어지럽게 놓여 있는 옷가지를 치우며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와인병을 들고 찾아온 그가 근사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집에 잔은 있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인정은 빨개진 얼굴로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잠시 호흡을 다스린 후 유리잔 두 개를 들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인정은 민준이 왜 그녀를 찾아왔는지 그 의도가 궁금했지만 거실 소파에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궁금증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저 그가 그녀의 공간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좋을 뿐이었다.
“와인 잔은 없어요.”
“아무거나 괜찮아.”
민준은 와인 뚜껑을 따고 유리잔 두 개에 붉은 와인을 따랐고, 인정은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냥 온 건 아닐 텐데 무슨 일 때문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어서 오신 거예요?”
“당분간 네 얼굴 못 볼 것 같아서 송별회도 할 겸 겸사겸사 올라온 거야.”
“선배님 어디 가세요? 갑자기 왜요?”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앞으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니 인정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글쎄, 아마도 국장님께서 내게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 아닐까?”
“전 국장님께 선배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알아.”
민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인정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 술술 불어주는 건 좋은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도 그럴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나중에 기회 봐서 그녀에게 진지하게 전직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얘기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당분간 얼굴을 못 볼 것 같다는 말씀을 하세요?”
“국장님이 내가 아닌 너한테 보고를 받아야 했던 이유 때문이겠지.”
“…….”
순간 얼굴이 빨개진 인정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또 중요한 사실을 얘기하고 만 거였다.
인정은 왜 유독 민준 앞에만 가면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민준이 그녀에게 잔을 건네자 인정은 잔을 받아 단숨에 와인을 비워 낸 후 그에게 다시 내밀었다.
김 국장은 그녀에게 영애의 특이한 동향에 대해 따로 보고하라는 말을 했고, 인정은 단지 상부의 명을 따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민준을 가까이서 볼 수 없게 되는 거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빨리 마시는 거야?”
민준이 그녀가 내민 잔에 와인을 따르자 인정은 두 번째 잔도 한 번에 들이켜 마셨다.
두 번째 잔을 비워 내자 와인의 붉은빛이 뺨으로 갔는지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인정은 굳게 결심한 듯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민준을 바라보았다.
“선배님은 제가 선배님을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여기 오셨어요.”
“그런데?”
“혹시 저를 찾아온 이유가 영애 님한테서 저를 떼어놓기 위한 건가요? 제가 또 몰래 영애 님의 뒤를 밟을까 봐서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선배님이 만나는 여자가 바로 영애 님이니까요.”
“흐음.”
민준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유리잔을 입에 가져갔다.
그동안 눈치를 못 챈 인정이 이상한 거였을 뿐, 그녀가 이제 알게 되었다고 해서 새삼 놀라거나 특별히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기가 문제였다.
인정이 두 사람의 관계를 누군가에게 일부러 얘기하거나 또는 그녀도 모르게 발설하게 될 경우를 생각하자 별로 아름답지 않은 그림이 그려졌다.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2년 전 파견 근무를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맡았던 임무는 영애의 근접 경호였어.”
“선배님이 예전에 영애 님 경호를 한 적이 있었다고요?”
“그래.”
민준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나지막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불행하게도 영애가 납치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영애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이래저래 내가 맘고생 몸 고생을 좀 했지. 이대철 사건 때는 영애가 또 위험한 일에 휘말릴까 봐 달려갔던 거고,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거야. 너한테 자세히 얘기해줄 순 없지만, 영애하고는 어렸을 때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고. 어쨌든 내가 그동안 영애한테 좀 각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지만 그게 다야. 그러니 그걸 가지고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만나는 사이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
민준의 뜻밖의 고백에 인정은 빠르게 심적 안정을 찾았다.
그녀의 어조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럼 선배님은 도대체 저한테 왜 오신 거예요?”
“인사도 하고 당부할 것도 있고 해서 왔어.”
“당부라니요? 무슨 당부요?”
“내가 없으면 영애 옆에 있을 사람은 너뿐이잖아. 우리는 애초에 영애를 보호하기 위해 대전에 왔어. 영애를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게 네가 영애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
인정은 민준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는 인정이 질투가 날 만큼 정성스럽게 영애를 보살피고 있었다.
인정은 그가 그녀에게 당부하려던 말도 결국 영애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게 씁쓸했지만, 그래도 그가 영애에게 다른 감정을 품고 있던 게 아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안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건 아까와 마찬가지로 책임감의 연장선에서 하는 말인데, 내가 옆에 없어도 영애에 대한 일은 내가 알고 있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선배님께 보고해 달라는 말씀이잖아요.”
인정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에 민준이 미소 짓는 걸 보니 얼른 대답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똑하네, 박인정.”
“그럼 저도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돼요? 선배님이나 영애 님 얘기는 아니에요.”
“물어봐.”
“선배님이 예전에 절 보면 누가 생각난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아, 그거? 영애를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했던 영애의 납치범, 지금은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야.”
“선…… 선배님!”
인정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납치범이라니! 어떻게 나를 그런 사람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울상을 짓자 민준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사람이 생각났던 건 맞는데 너랑은 달라. 넌 그 사람과 다르게 사리 분별을 할 줄 알고 의식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지?”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별로 좋지 않네요.”
“한 잔 더 할래?”
“아니요, 저도 내일 서울 올라가야 해서 많이 마시면 안 돼요.”
민준이 와인을 따르려다 행동을 멈추고 인정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녀는 민준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너도 내일 서울로 올라간다고?”
“네. 국장님이 여기로 차량을 보낼 테니까 영애 님과 같이 올라오라고 하셨어요.”
“……그렇군.”
나는 내일 서울로 올라가고 NIS에서는 이곳에 차량을 보낸다라…….
민준은 손에 쥔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설을 조사하기 위해 NIS 요원들이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일 터였다.
“네! 참, 그런데 영애 님께는 인사 안 하고 가셔도 괜찮아요? 선배님 말씀대로라면 영애 님께 각별한 책임감을 가지고 계신 거잖아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제가 지금 여기로 영애 님을 모셔올까요?”
민준이 시선을 들어 인정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설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
그가 설을 찾아가는 것보다 이게 모양새가 더 자연스러웠다.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으면.”
“그럼 잠깐만 기다리세요.”
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민준은 빈 잔에 와인을 채워 넣은 후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잡히는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
딩동-
누군가가 7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손에 리모컨을 들고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설은 모니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여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인정이 설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설은 인정이 뛰어와서 얼굴이 붉은 건가 싶었는데, 그녀 쪽에서 옅은 알코올 냄새가 났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죠?”
설은 하루 종일 노트북을 가지고 씨름하느라 남은 힘이 별로 없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짙었다.
“영애 님, 많이 바쁘신가요?”
“바쁘진 않지만 좀 피곤하네요.”
그녀는 인정과의 대화를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에 시선을 내렸다.
“많이 피곤하지 않으시면 저희 집에 올라가서 와인 한잔해요, 영애 님.”
“다음에 해요, 난 지금 좀 쉬고 싶어요.”
“지금 저희 집에 민준 선배 와 있어요, 영애 님.”
민준이라는 말에 설이 눈을 들어 인정을 바라보았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선배랑 같이 와인을 마시고 있었는데 영애 님 생각이 나서요. 그래도 선배가 마지막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제가 영애 님을 모셔온다고 했어요.”
“마지막…… 이라뇨?”
마지막이라는 말에 설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선배가 내일 서울로 올라가면 앞으로 영애 님 뵙기 힘들 것 같다고 해서요. 선배가 그러는데 자기는 영애 님한테 책임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인연도 있었고, 영애 님 납치당했을 때 일도 있고 해서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 영애 님도 도와준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 정도는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내 얘기를 인정 씨한테 했다고……? 도대체 왜?’
“부탁합니다, 영애 님.”
“…….”
설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처음 느끼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예전에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우울하고 슬프고 가슴 아팠던, 그가 설을 두고 떠나려고 했던 그날과 같은 기분이었다.
**
“오셨습니까?”
설이 인정의 집 거실에 들어섰을 때, 민준은 소파에 기대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설이 인정을 따라 이곳에 올라온 이유는 그녀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설은 그가 왜 그녀의 집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는 건지, 그리고 갑자기 왜 그녀에게 설의 이야기를 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가 내일 서울로 올라간다는 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이 시간에 그녀의 집에 있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괜히 그러는 건 아닐 터였다.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내일 올라가신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습니다. 한잔하시겠습니까?”
민준은 설에게 잔을 내밀었지만, 설은 받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으신가요?”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 앉으세요.”
“…….”
“제가 잔 가져다 드릴게요, 영애 님.”
“…….”
인정이 잔을 가지러 간 사이 설은 민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별일 없다는 듯 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며 그녀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당신 지금 여기에서 뭐하는 거예요?”
설이 주방 쪽의 기척을 살피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보다시피 술 마시고 있잖아. 내일 서울로 올라가면 대전에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데.”
“그럼 인정 씨한테 내 얘기는 왜 한 거예요? 혹시 안줏감이 필요했던 거예요?”
“안주감?”
“둘이서 내 뒷담화를 했냐고요.”
줄곧 여유 있어 보이던 민준이 갑자기 얼굴을 잔뜩 구기며 설을 바라보았다.
그가 막 입술을 움직이려는 찰나 인정이 잔을 들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영애 님.”
“…….”
설은 인정이 내민 잔을 받아들고 힐끗 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는 설의 말이 억울했는지 정색을 하며 입모양으로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녀가 잔을 비워 내자 인정이 설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그녀의 빈 잔을 채웠다.
그녀에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미적미적하던 인정이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오해해서 죄송했어요, 영애 님. 저 솔직히 선배와 영애 님이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거든요. 선배가 사실을 얘기 안 해줬으면 저 영애 님을 속으로 계속 미워했을지도 몰라요.”
“사실이라니요? 무슨 사실이요?”
“아, 별거 아닙니…….”
“두 분이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거 말이에요.”
“…….”
인정의 대답에 설은 민준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그는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가 정색을 하는 걸 보니 민준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설이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말했군요.”
“네.”
“그리고 또 다른 얘기는요?”
설은 여전히 민준을 바라보며 인정에게 물었다.
인정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민준은 재빨리 설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영애 님이 되게 유능한 연구원이라고 해서 저 사실 놀랐어요. 전 영애 님이 이곳에서 취미 생활을 하고 계시는 줄 알았거든요.”
“유능한 게 아니라 애인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나도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 연구원에만 처박혀 살고 있진 않았겠죠.”
“그럼 영애님은 연애를 안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못 하시는 거예요?”
“일부러 안 하는 건 아니니 앞으로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만나야죠.”
“영애 님?”
민준이 갑자기 설을 부르자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설을 위아래로 훑어보자 어쩐지 통쾌해진 설이 픽 웃으며 손에 잔을 쥐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셋이 건배할까요?”
설은 잔을 눈앞에 들어 보이더니 한 번에 잔을 끝까지 비웠다.
그의 시선이 계속 설에게 머물렀지만 그녀는 더 이상 민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지만 설은 그대로 무시했다.
“영애 님, 어렸을 때 민준 선배 만난 적 있으시다면서요? 옛날 선배 모습은 어땠어요? 지금하고 똑같았어요? 되게 귀여웠을 것 같아요, 무뚝뚝하고 잘생긴 꼬마 말이에요.”
“글쎄요. 만난 적이 있었다는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의 일인데 기억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요?”
그가 인정에게 이런 얘기까지 해 가며 나와의 관계를 감추는 이유가 뭘까?
혹시 그가 내일 서울로 올라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걸까?
“그리고 참, 영애 님 납치도 당하셨다면서요! 그래서 영애 님 경호에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는 거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그때 영애 님을 사랑하는 남자를 짝사랑하던 여자가 범인이었다면서요?”
“…….”
설은 그제야 시선을 돌려 민준과 두 눈을 마주했다.
그날을 떠올리기 괴로운 건 그녀만이 아닐 텐데, 그가 이 얘기까지 꺼냈을 줄은 몰랐다.
민준은 차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얘기가 재밌어요?”
“네, 궁금해요! 그래서 그 남자 분은 어떻게 되었어요?”
그녀는 민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지만, 대답을 한 건 인정이었다.
설은 그녀의 말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나한테 미안하고 고마운 친구가 되었죠. 좋은 사람이에요.”
“그럼 그분하고 잘해보시는 건 어때요? 왠지 그분하고 영애 님하고 되게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박인정,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민준이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한번 생각해 봐야겠네요.”
“이상한 생각을 하시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영애 님.”
민준이 눈을 가늘게 접으며 설을 바라보았다.
포장지를 뜯으면 반품이 불가하다고 분명 말을 해준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시 한 번 구매자가 유의할 점을 그녀에게 상기시켜 줘야 할 것 같았다.
“제 건강은 제가 알아서 한다고 예전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영애 님의 건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에 대한 책임감이 그 정도까지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누가 보면 우리가 무슨 친남매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
민준이 입을 다물고 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심장이 뜨거워지고 가슴에 격렬한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그녀가 그의 지푸라기 인형을 화형에 처한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그가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했다는 데에 여전히 삐쳐 있는 게 분명했다.
설은 들고 있던 잔을 비운 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사물이 가까이 보였다 멀어졌고 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가 하얗게 지워지기도 했다.
‘영애 님, 괜찮으세요?’
‘내가 할게.’
먼 곳에서 인정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고, 이어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먼저 간다.’
‘제가 안 따라가도 괜찮을까요?’
‘너도 취했잖아, 쉬어.’
드문드문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얼굴에 찬 공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인정의 집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강조국은 총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죽이네. 정작 기억해야 할 말은 다 잊어버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문이 닫히자 민준은 두 팔에 안겨 있는 설을 내려다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현관 잠금장치에 갖다 댔고, 문이 열리자 설을 두 팔로 안은 채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설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옆으로 천천히 쓸어 넘겼다.
‘이렇게…… 싶지 않았는데…….’
설은 그녀의 목덜미에 서늘한 촉감이 와 닿았다 사라지는 걸 어렴풋이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그대로 의식이 끊어졌다.
설의 침실 문을 닫고 나온 민준은 701호를 나와 702호로 가지 않고 오피스텔 건물 관리 사무소를 향했다.
오늘은 그에게 아주 바쁜 밤이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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