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잘했어, 야옹이.2016.08.30.
“수고하십니다.”
자정을 넘긴 시각, 민준은 오피스텔 관리 사무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보안경비 팀 직원 한 명이 모니터를 쳐다보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직원은 민준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C동 702호 입주민입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해 놓은 차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는데 C동 녹화 자료를 좀 찾아볼 수 있을까요?”
“아, 그렇습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그런데 저희는 자료 보관 기간이 열흘밖에 안 돼서 만약 그 이전 걸 찾으시는 거라면 삭제되고 없을 텐데요.”
남자는 많이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면서 민준을 안내했다.
“C동…… 주차장, 여기 있네. 보고 계시다가 이상한 거 보이면 말씀하세요, 제가 봐 드릴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준은 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아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남자는 처음엔 그의 곁에 서서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았지만, 곧 흥미를 잃고 하품을 하며 저만치 멀어져 갔다.
슬쩍 남자의 눈치를 살핀 민준이 팔짱을 풀고 조용히 마우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울로 가기 전에 한 곳을 더 들렀다 가야 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
설은 잠에서 깨자마자 지독한 두통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어젯밤 인정의 오피스텔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했다.
민준은 오늘 아침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었고, 그가 서울로 간다는 건 그녀의 신변에 어떤 변화가 있을 거라는 예고였다.
하지만 그녀가 작업했던 흔적은 깨끗이 지웠고 황 원장, 건우와도 이야기를 맞추었으니 이제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 설은 문득 어젯밤 그녀의 목에 닿았던 차가운 감촉을 기억해 내고 목 주변을 두 손으로 더듬거렸다.
다행히 그녀의 목걸이는 제자리에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이 연구를 계속하려면 축적된 데이터가 필요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자료를 어딘가에 남겨 놓기로 했는데, 현재로서는 믿고 맡길 사람이나 감춰둘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설은 원장님을 만나 의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그녀는 행동을 멈추고 민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때는 취중이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강조국은 총이 아니라 말로 사람을 죽이네. 정작 기억해야 할 말은 다 잊어버리고.’
“…….”
그가 그녀에게 기억하라고 했던 중요한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거, 잊지 말라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설은 씩씩거리며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그녀는 사귀는 사이를 사귀는 사이라고 털어놓지 못하는 그의 입장이 이해가 가면서도, 하필이면 민준이 그를 좋아하는 인정에게 그 말을 해야만 했다는 게 속상했다.
하지만 계속 그 생각을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가 곁에 없을 때 한시라도 빨리 황 원장을 만나 이 파일을 어디에 보관할지 의논해야 했다.
씻고 나온 설은 서둘러 연구원으로 갈 준비를 했다.
병가를 내긴 했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황 원장을 만나 이 파일을 어디에 보관할지 의논해야 했다.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환해진 모니터 화면에는 그녀가 처음 보는 얼굴이 보였다. 설은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얼른 인정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인정은 낯선 방문객들과 함께 그녀의 집 앞에 서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인정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이 상황에 대해 사전에 언질을 받지 못했던 것 같았다.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영애 님. 괜찮으시다면 저랑 같이 온 분들이 지금 영애 님께 말씀드릴게 있다고 합니다.”
“네, 괜찮아요. 말해요.”
설은 잠깐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영애 님. NIS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에 서 있던 남자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녀에게 NIS 신분증을 내보이며 경직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설에게 예의가 발랐지만 눈빛이 단호했다.
“이 시간에 제집엔 무슨 일이시죠?”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만, 영애 님께서는 지금 저희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셔야겠습니다. 이미 청와대에도 보고가 들어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
쿵.
바닥으로 떨어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조만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떻게든 황 원장님께 이 사실을 알려 드려야 하는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남자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원자력연구원 황철호 원장 쪽에도 사람이 갔습니다. 저희가 이곳을 떠나는 대로 영애 님의 연구실과 오피스텔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언짢으시겠지만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설은 고개를 돌려 인정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혹시 잠깐이라도 설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인정은 설보다도 더 긴장하고 있었다.
설은 곧바로 체념하고 다시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올라가더라도 무슨 일 때문인지는 알고 가야겠는데요.”
“저희는 다만 영애 님을 정중히 모셔오라는 명령을 전달받았을 뿐 무슨 일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이미 청와대에도 보고가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질의하실 게 있다면 서울로 올라가 직접 물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
민준은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 오늘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던 거였을까?
설은 그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것보다는 서울로 올라간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만약 저 무리 속에서 그를 발견했다면 설은 더 비참한 기분일 것 같았다.
그녀는 속으로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부터는 저희와 함께 움직이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핸드폰은 이리 주시겠습니까, 영애 님?”
‘이제 어떻게 하지?’
설은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이곳에 파일을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숨길 곳을 찾는 것보다 오히려 숨겨둔 파일이 발각되었을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소지품을 챙기고 코트를 찾아 입었다.
설이 그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현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조사를 위한 것일 터였다.
오피스텔 밖으로 나온 설은 인정과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랐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목 주변에 손을 대지 않으려 애를 쓰며 창밖의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
NIS 조사실.
그녀는 2년 만에 이곳에 다시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입장이 달랐다.
그때 그녀가 참고인의 자격이었다면 지금은 정황상 피고인이 된 게 분명했다.
설은 조사실 앞 의자에 앉아 입술을 다물고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인정이 앉아 있었고 옆에는 남자 요원 두 명이 서 있었다. 조사실 안에서는 원장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원장님과는 미리 말을 맞추어두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었지만 그녀가 지금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문제였다.
하지만 설은 그녀가 파일을 가지고 있었던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키더라도 원자력연구원장보다는 말단 연구원인 그녀가 가지고 있다 들키는 편이 더 나았다.
그녀는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때, 조사실 문이 열렸고 황 원장이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그는 설의 어깨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황 원장은 분명 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겠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더 가볍게 두드린 후 곧 그 자리를 떴다.
“들어오십시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설은 조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사실 안에는 김 국장과 요원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길쭉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민준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설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그는 표정의 변화 없이 담담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설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민준은 그녀가 꼭 말아 쥐고 있는 주먹이 두려움으로 떨리는 걸 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애틋한 눈빛을 감추었다.
“오랜만입니다, 조국 양.”
“……안녕하세요.”
김 국장이 먼저 설에게 인사를 건넸고 설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불편하게 모셨다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몇 가지 가볍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으니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김 국장은 편안하게 생각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숨겨야만 하는 게 있는 입장에서 조사를 받는데,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설이 요원들을 마주 보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에게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조국 씨는 연구원에서 무슨 연구를 하고 계십니까?”
“원자로 개발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연구원에서 특별히 구성한 팀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한 팀입니까?”
공격적인 어조로 묻는 이 남자는 아마 원장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을 터였다.
그녀는 미리 말을 맞추어 놓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원자력 에너지를 대체할 미래 에너지 개발을 위한 팀입니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백건우 씨를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두 분이 최근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설은 잠시 숨을 고른 후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네, 있습니다.”
“무슨 일로 만나셨지요?”
“개인적인 일 때문입니다.”
“백건우 씨는 지금 불법 장비와 무기 수입 등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설은 순간 몸을 움찔거렸다.
건우는 그녀에게 혹시라도 일이 탄로 났을 경우에도 절대로 아는 척을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기업의 문제로 끝날 일이 더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거였다.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지 지금처럼 시선을 피하면 안 돼. 그럼 이렇게, 거짓말이 들통 나게 되거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려던 설은 이내 민준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해 내고선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신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모르는 일입니다.”
‘잘했어, 야옹이.’
갑자기 그녀의 귀에 환청이 들렸다. 설은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가 이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민준의 시선은 줄곧 그녀를 향해 있었다.
설은 그가 자신이 쓰러지지 않도록 시선으로 붙잡아 주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조국 씨는 며칠 전 대전에 있는 Pakin 물류창고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대전에서 민준이 그녀에게 묻던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남자의 어조는 정중했지만 눈빛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김민준 요원이 이미 확인한 사실입니다. 영애 님께서는 거기에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민준이라는 말을 듣자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설은 떨리는 입술을 안으로 꽉 깨물었다.
그녀가 들키면 건우와 황 원장, 그리고 다른 연구원들도 무사하지 않을 터였다.
지금 이 사람들에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남자친구를 만났습니다.”
“남자친구를 그 늦은 시간에 그런 장소에서 만났습니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 전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요? 아시겠지만 제겐 행동의 자유가 없습니다. 경호관들 눈을 피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었어요.”
설의 떨리는 목소리에 분노가 설핏 어렸다.
남자는 당황하는 얼굴로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설을 바라보았다.
김 국장은 눈썹을 찌푸리며 민준을 힐끗 쳐다보았다. 설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 있는 민준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2년 전에 국정원에서 파기한 파일이 있습니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 파일에 복사본이 따로 있었습니까?”
“당시 국정원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자료를 가져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따로 복사본은 없었습니다.”
그때, 한 남자가 문에 노크를 하더니 조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김 국장에게 목례를 한 후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국장님. 물류창고 연구동 수색을 했는데 그 안에 별다른 장비는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다만, 뭔가?”
“그 안에 연구동 지하 시설에 어울리지 않는 몇 가지 물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
남자는 곤란한 얼굴로 설의 눈치를 살피더니 김 국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안에 이런저런 가구와 생활용품들이 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연인의 밀회 장소로 쓰였던 곳 같다고 합니다.”
보고를 하는 남자의 얼굴이 벌게졌다. 아마 설을 의식한 걸 터였다.
“이런저런 가구라는 게 도대체 뭔가?”
“……침대하고 화장대…… 같은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줄곧 팔짱을 낀 채 무심한 얼굴로 서 있던 민준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건우, 이 자식…….’
민준은 보고하는 남자가 마치 건우라도 되는 양, 그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김 국장이 그런 민준을 흘끔 쳐다보았다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또 다른 건?”
김 국장의 질문에 남자는 그에게 다가와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재 강조국 연구원의 노트북을 분석 중인데 최근에 데이터가 모두 삭제된 흔적이 있습니다.”
“복구는 가능한가?”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하지만 확신할 순 없다고 합니다.”
김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김 국장과 남자의 대화 때문에 잠시 끊겼던 질문이 그녀에게 다시 이어졌다.
“강조국 씨, 최근에 노트북 안에 들어 있던 데이터를 삭제한 적이 있습니까?”
“네, 제가 지웠습니다.”
“담겨 있던 내용과 삭제한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기록한 일기와 사진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니 추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모두 삭제했습니다.”
“…….”
조사실 안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설은 얼굴이 붉어졌지만,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민준은 끄응 앓는 신음을 냈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그녀의 대답에 줄곧 무표정한 얼굴이었던 조사 요원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만나는 남자에 대해 말씀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 나중에 따로 말씀을 드릴 생각이니 정 궁금하시면 아버지께 여쭈어봐 주세요.”
“…….”
조사 요원은 난감한 얼굴로 김 국장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의 질문이 곤란하다는 의미였다.
잠시 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김 국장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백건우는, 오고 있나?”
“네,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조국 양, 오늘은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불쾌한 질문을 드렸다고 해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 국장의 인사에 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 공간을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녀가 문을 향해 막 뒤돌아서려는 순간 갑자기 김 국장이 뭔가 생각난 듯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조국 양.”
“……?”
“지금 목에 걸고 계신 목걸이가 눈에 많이 익습니다.”
“……!”
쿵.
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번엔 아까와는 달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 국장은 그녀의 손이 떨리는 걸 똑똑히 지켜보았다.
“제가 좀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이리 건네주시겠습니까?”
설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목걸이를 붙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목걸이를 손으로 단단히 쥐며 저도 모르게 민준을 애원하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할아버지께서…… 제게 주셨던 선물입니다. 제겐 아주 소중한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돌려드릴 테니 이리 주십시오.”
남자 요원이 설에게 다가와 목걸이를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목걸이를 손에 쥔 채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설마 그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고 억지로 빼앗아 가지는 못할 터였다.
그때, 누군가 설의 목에 가만히 손가락을 얹었다. 그 차가운 감촉에 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어젯밤, 이와 비슷하게 그녀의 목덜미를 스치던 손길이 있었다.
민준이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손을 올린 채로 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원망스런 눈물이 차올랐지만 민준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리 주십시오.”
“……만지지 말아요.”
“주십시오, 영애 님.”
“……안 돼요.”
민준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그녀의 목에서 목걸이를 빼내 조사 요원에게 건네주었다.
툭, 그녀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백건우 씨를 조사하고 난 후 영애 님을 다시 부를 수 있습니다. 박인정 요원이 영애 님을 청와대로 모실 겁니다.”
그녀의 가까이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패닉 상태인 그녀의 귀에는 그저 윙윙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영애 님.”
“…….”
“제 말 안 들리십니까.”
“……려요.”
“영애 님.”
“들린다고요.”
설은 민준을 바라보며 작게 입술을 움직였다.
각오하고 한 일이었지만 결국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해야 할 때였다.
설은 황 원장과 건우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괜찮으십니까.”
민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 귀에는 형식적인 인사치레로 들렸지만, 설을 바라보는 민준의 눈빛은 애틋했으며 그녀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요.”
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괜찮아.’
그녀만 알아볼 수 있도록 그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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