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70화 (70/94)

70화. 야옹이의 위협2016.09.01.

그날 오후 국장실.

김 국장은 그의 책상 앞에 서 있는 민준을 차가운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는 단단히 화가 난 듯, 민준을 바라보는 눈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매서웠다.

“자, 이제 내게 설명을 해봐.”

“제가 따로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아까 이미 다 들으신 게 아닙니까?”

“영애가 물류창고 연구동에서 야밤에 밀회를 즐겼다는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김 국장이 코웃음을 쳤다.

“증거가 나왔다는데 왜 믿을 수가 없습니까?”

“그러기 전에 네가 그놈을 반 죽여 놨겠지, 안 그래?”

“제가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가 이대철한테 한 짓을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

김 국장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분노가 어려 있었지만 민준의 반응은 영 미지근했다.

그는 속으로 조사실에서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리던 설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모른 척하고 계셨습니까?”

“그놈은 맞을 만했으니까 그렇지. 겁대가리 상실한 놈, 감히 누구한테 그런 장난을 쳐.”

“알고 계신다니 그 일을 부인하진 않겠지만, 영애가 대전에서 밤에 누구를 만나 그 안에서 뭘 했는지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네가 모른다고?”

“네, 모릅니다.”

김 국장이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며 깍지를 꼈다.

“넌 영애가 수상한 외출을 하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내게 보고하지 않았고 Pakin이 광산의 실질적인 소유주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했다. 일이 이러한데, 네가 과연 숨기는 게 없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조사를 방해해?”

“제 임무는 조국의 안녕과 평화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제거하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에 적합한 임무 수행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그래서 보고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네게 그런 결정권을 줬지?”

“아버지께서도 이번 조사가 외부로 알려지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해결 방법은 없습니다.”

민준의 말이 맞았다.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가 NIS조차도 조사할 수 없도록 의심스런 흔적을 모두 지워 버린 건 다른 문제였다. 그건 항명이었다.

“영애의 오피스텔과 관련된 녹화 자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구나. 관리 사무소 측 얘기로는 직원의 실수로 삭제된 것 같다고 하던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넌 알고 있겠지.”

“컴퓨터라는 게 원래 오류도 나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계라고 해서 완벽할 순 없으니까요.”

김 국장은 더 이상 소모적인 언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민준은 사실을 털어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류창고 쪽 CCTV에도 녹화 자료가 없고, 영애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도 자료가 없다라…… 우연치고는 참 기막힌 우연이구나.”

“그렇습니까?”

“지금 너랑 영애 중 누가 연기를 하고 있는 거냐.”

“제가 생각하기에 영애는 연기에 소질이 없어 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누군가 연기를 하고 있다면 그건 아마 네놈이겠지.”

김 국장이 서늘한 얼굴로 책상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징계위원회가 열릴 거다, 각오하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추가로 뭐가 나오느냐에 따라 징계 수위가 달라질 거다, 그것도 물론 알고 있겠지.”

“네.”

“신분증 반납하고 대기해.”

“알겠습니다.”

민준이 목례를 하고 나가자 김 국장은 의자를 거칠게 뒤로 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았다.

영애의 생각이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이인호 박사를 존경했던 사람으로서, 과학자의 문제가 정치·외교의 문제로 번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운 건 마찬가지였다.

대전 물류창고 연구동의 방사능 측정 결과 자연방사능 수치를 훨씬 상회하는 방사능이 검출되었다.

그건 그 안에서 그와 관련된 실험을 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백건우는 장비 수입과 광산 보유는 인정했지만 원자력연구원과는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고, 영애에게선 아직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김 국장은 뒤돌아 서랍을 열고 설의 목걸이와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냈다.

조금 전 영애의 반응으로 유추해 보건대 그녀는 아직 이 물건에 대해 모르고 있는 듯했다.

“……망할 놈.”

그는 물건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섞인 욕설을 뱉어냈다.

왜 항상 희생은 민준의 몫이어야 하는 건지…….

그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

늦은 저녁 청와대 집무실.

대통령은 아까부터 설을 책상 앞에 세워 둔 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설은 단단히 각오를 하고 들어왔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류에 사인을 한 대통령이 서류를 탁 소리가 나게 덮은 후 마침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일 정도는 벌어져야 내가 네 얼굴을 볼 수 있구나.”

“…….”

그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말을 이어갔다.

“듣자 하니 대전에 있는 Pakin 연구동에 네가 남자를 만나러 갔다고 했다던데,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냐.”

“제가 남자를 만나는 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아빠.”

“그렇지, 네가 거기서 어떤 남자를 만났든 간에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연적인 수치를 상회하는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건 문제가 될 것 같구나.”

대통령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Pakin의 연구동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건 누가 들어도 이상한 얘기였다.

제아무리 실험 장비를 감추고 흔적을 지웠다고 해도 그 수치까지 지울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어요.”

“나한테 할 말이 없다고?”

“네, 아빠.”

“그곳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게 외부로 알려지면 그 사실을 덮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국가적 희생이 필요한지 알고 있는 게냐!”

단단히 화가 난 대통령이 언성을 높였다.

설은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오늘 처음 보았다.

“어디에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거기서 실험한 데이터. NIS에서는 네가 자료를 전부 지운 것 같다고 말했지만 네가 그 자료를 그냥 없앴을 리가 없지.”

‘이게 무슨 소리지? 목걸이 안에 파일이 없다고?’

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제까지 있었던 파일이 지금 없다는 건, 어젯밤부터 아침 사이에 누군가 그녀의 목걸이에 손을 댔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김민준, 그 사람은 파일을 가지고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지?

“난 지금 네가 감춘 파일이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묻고 있는 거다.”

“……파일 같은 건 없어요.”

설은 시선을 들어 당당하게 대통령을 마주 보았다.

지금 상황을 보니 아버지는 파일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그 말은 NIS에서도 그 파일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강조국.”

“전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아빠.”

대통령은 굳은 얼굴로 김 국장과의 통화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영애의 목걸이 안에서 물건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데이터 파일은 아닙니다, 각하.’

‘물건이라니, 그게 뭔가?’

‘문양이 새겨진 반지입니다. 아무래도 사적인 물건인 것 같으니 영애에게 돌려주려고 합니다.’

‘……아니, 목걸이만 돌려주고 그건 내게 가져오게.’

그가 짐작컨대 조국에게 반지를 준 사람은 아마 민준일 터였다.

그 반지가 왜 목걸이 안에 들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두 사람이 그런 물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는 거였다.

대통령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얘기였다.

“장인어른께서 네게 주신 목걸이에, 혹시 네게 중요한 뭔가를 넣어놓았느냐?”

“아니요, 그런 건 없어요.”

“……그래?”

“네, 아빠.”

대통령이 얼핏 설의 안색을 살폈다. 설의 표정으로 볼 때 그녀는 그 반지의 존재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 네가 밤늦게 만났다는 그 남자 문제만 남았구나. 다시 한 번 묻겠다, 그 남자가 누구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제가 말씀드리면 아빠가 찾으실 거잖아요.”

대통령은 조국이 말하는 남자가 김 국장의 아들이란 걸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네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이유로 이제 곧 많은 추측과 소문이 무성해질 거다. 그러면 나는 사람들한테, 내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서울로 불러들인 것이라고 얘기할 생각이다. 빈말을 할 순 없으니 네 엄마와 상의해서 시간 잡아. 네가 남자를 만난다는 걸 알게 되면 이런저런 억측을 하던 사람들도 곧 잠잠해지겠지.”

“아빠!”

“내가 할 말은 다 끝났다, 그만 나가 봐.”

할 말을 마친 대통령이 다시 손에 펜을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조국이 위험한 행동을 한다면, 그녀에게서 그럴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조국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그녀에게 적당한 남자를 만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빤 절 가지고 장사라도 하고 싶으신 거예요?”

“너는 진심으로 내가 널 가지고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 나라의 대통령인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위를 봐서 무슨 대단한 이득을 보겠다고!”

“이득을 보지 않아도, 적어도 손해는 안 보고 싶으신 게 아니고요?”

“강조국!”

대통령은 대단히 모욕적인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이번에도 제가 아빠 눈에 차지 않는 남자를 만난다면 또 그 사람을 멀리 보내실 건가요?”

“김 국장 아들이 그러더냐? 내가 그렇게 자길 내보냈다고?”

“그 사람이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으면 2년 동안 그렇게 밖으로 떠돌지도 않았을 거예요!”

민준의 얘기에 발끈하는 조국을 바라보며 대통령도 평정심을 잃었다.

“난 네가 평범하지 않은 부친과 남편 때문에 힘들었던 네 엄마처럼 살게 하고 싶진 않아! 그런데 넌 또 네 엄마와는 다르지. 너는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는 데다가 네가 하고 싶은 일은 기어이 해야만 하는데, 내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항상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를 네 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럼 그런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의 짝이 될 수 있나요?”

조국은 대통령 자신을 꼭 빼다 박은 것처럼 고집이 셌다.

그는 골치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짚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아빠가, 누구에게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아빠 가족은 안 되는군요. 누군가는 위험한 일을 해야 하지만 그게 가족이면 안 되고,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셔놓고도 그런 사람이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는 건 싫으신 거죠.”

설은 그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만 삼켰던 말을 기어이 내뱉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흐려질까 봐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있었던 말이었다.

“난 네가 평범하게 살길 바랄 뿐이다! 내가 아비로서 그런 바람도 가질 수 없는 거냐? 네가 어떻게 살게 될지 눈앞에 훤히 보이는데 그걸 그대로 보고만 있으라고? 게다가 김 국장 아들은 죽으면 죽었지 여자 때문에 그 일을 그만두진 않을 사람이야, 네가 지금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기어이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대통령이 책상을 강하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자식이 불안한 삶을 살지 않길 바랄 뿐이었고, 그런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는 조국이 서운했다.

“아빤, 제가 아빠 말씀대로 순순히 선을 볼 것 같으세요?”

“네 이름이 같은 일에 반복해서 오르내린 이상 넌 그래야 할 거다. 네가 영애라서 내가 조용히 넘어가는 게 아니라 그 일이 알려져 미칠 악영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침묵한다는 걸 명심해. 당분간 청와대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이건 네 아버지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하는 말이다.”

“…….”

“……대답 안 할 거냐?”

“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면 나가 볼게요.”

설은 침착한 얼굴로 뒤돌아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청와대 안에서 꼼짝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닐 터였다.

설은 당분간 얌전히 지내면서 밖으로 나갈 기회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인정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설은 그녀를 따르는 인정의 기척을 느꼈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인정 씨는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건가요? 이제 옆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저는 당분간 계속 영애 님 곁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럼 다른 한 분은 어디로 갔나요? 내가 좀 만나야겠는데요.”

인정의 대답이 없자 설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설은 끝까지 대답을 듣겠다는 듯 인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지금은 선배를 만나기 어려우세요.”

“만나기 어렵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민준 선배는 징계를 받아 현재 직무 정지 상태예요. 선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가 징계를 받았다고?

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직무 정지라니요? 왜 징계를 받은 거죠?”

“자세한 이유는 저도 몰라요. 저도 다른 선배한테 들은 거라서…….”

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민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내 핸드폰 이제 돌려줘요, 인정 씨.”

“영애 님 핸드폰은 제가 아까 국장님께 받아서 비서실장님께 전해 드렸어요.”

“내 핸드폰을 비서실장님께 드렸다고요?”

“네, 영애 님.”

아빠다!

설이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통령이 그녀의 핸드폰을 받고도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럼 내 목걸이는요? 그것도 드렸나요?”

“아, 목걸이는 여기 있어요! 국장님이 영애 님한테 전해달라고 하셨거든요.”

“…….”

설은 인정이 내민 목걸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준은 NIS 조사실에서, 이 안에 파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사를 하겠다며 목걸이를 가져갔다.

그건 분명 설을 곤란하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가 대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부에 보고했으면서도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김민준 씨한테 전화 좀 걸어주세요, 알겠지만 내가 지금 핸드폰이 없으니 연락할 방법이 없네요.”

“네? 선배한테요?”

“네, 인정 씨는 그분한테 연락할 수 있잖아요.”

“안 그래도…… 제가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보았는데 연락이 되지 않았어요.”

인정은 설의 시선을 피해 눈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설이 픽, 가볍게 웃었다.

“거짓말이네요.”

“……!”

“이것도 아빠의 명령인가요?”

“아니요, 이건 아니…….”

인정이 뒤늦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설은 알 만하다는 듯,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건 김 국장님의 명령인가요?”

“…….”

“그런가 보네요.”

“영애 님…….”

설은 민준이 지금 그녀 때문에 곤란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파일까지 갖고 있는 게 발각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참 겁도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김민준 씨한테 고양이를 받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고양이를요? 고양이를 받기로 하셨어요?”

“네. 나도 부탁받은 거라 약속은 지켜야 해서요. 당분간 맞선을 보러 다니느라 바쁠 것 같으니 가능한 한 빨리 연락이 닿았으면 좋겠는데요.”

민준이라면 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거였다.

“……제가…… 혹시 연락이 닿게 되면…… 한번 물어볼게요.”

“참, 그리고 고양이를 안 주면 대신 인형을 태워야 한다고도 전해주세요.”

“네? 인형을 태우다니요……?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영애 님?”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거예요. 궁금하면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봐요.”

“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인정 씨.”

설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인정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인정은 분명 민준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전할 터였다.

설은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 너무 궁금했다.

**

서울 수서동의 아파트에서 여행을 가기 위해 캐리어에 짐을 챙기던 민준은 핸드폰 벨이 울리자 전화를 받았다.

다른 전화는 안 받아도, 설의 인간 GPS가 되어줄 인정의 전화는 무조건 받아야 했다.

“말해.”

-선배님, 지금 어디세요?

“내가 너한테 행선지를 보고할 필요는 없잖아. 왜, 무슨 일 있어?”

-네. 영애 님이 선배님한테 고양이를 받기로 했다던데요, 그 고양이 언제 주냐고 물어보시는데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돼요?

“내가 고양이를 주기로 했다고?”

민준은 핸드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캐리어 안에 옷을 집어넣다가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설이 파일에 대해 눈치챈 게 분명했다.

그녀는 고양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실은 파일을 내어놓으라는 말일 터였다.

-네, 당분간 맞선 때문에 바쁠 것 같으니 가급적 빨리 받고 싶다고 하시던데요.

“뭐라고? 맞선?”

이 여자가 진짜.

-네.

“…….”

-선배님? 여보세요?

민준은 끙 신음하며 작게 욕설질했다.

야옹이는 비뚤어졌고, 대놓고 그를 협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말은 없었어?”

-아, 고양이를 안 구해주면 인형을 태워야 한다던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한테 궁금하면 선배님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하시던데요?

“…….”

민준은 잠깐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설과 민준은 당분간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쨌든 대답은 해줘야 했다.

-선배님?

“박인정, 영애의 다음 주 일정이 어떻게 되지?”

-그건 아직 모르는데요, 선배님.

“알아내서 알려줘. 그리고 영애 님께는 인형의 신변에 위협을 가하면 고양이는 절대 만날 수 없으실 거라고 전해.”

-도대체 그 인형이 뭔데 그래요?

“내 목숨 같은 거야.”

민준의 목소리에 웃음이 작게 묻어 나왔다.

-그럼 영애 님께서 지금 선배님을 협박하고 계신 거예요?

“그거랑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지. 아무튼, 잊지 말고 전해, 일정 알려주는 것 잊지 말고.”

-네, 선배님.

통화를 끝낸 민준이 픽 웃으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야옹이는 화가 많이 났는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며 그를 귀엽게 협박하고 있었다.

설이 반지를 보면 파일이 어디에 있을지 당연히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별다른 얘기가 없는 걸 보니 그녀가 아직 반지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아직 반지를 못 본 건가.”

민준은 팔짱을 끼고 서서 설을 어떻게 보러 갈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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