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71화 (71/94)

71화. 민들레 반지2016.09.06.

건우가 소환되어 조사받은 건에 대해 비서로부터 보고를 받은 백 회장은 가슴께를 움켜쥐며 거칠게 호흡했다.

건우가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건우가 한 일의 옳고 그름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사건 때문에 Pakin이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아들 건우에게 위기가 닥칠 거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주치의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그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건우까지 흔들린다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백 회장은 병상 옆에 서 있는 비서를 향해 힘겹게 말했다.

“조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봐. 그리고 내가 전에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나.”

“부사장님께서 요즘 그 아가씨를 만나는 것 같진 않습니다. 아무래도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닌 듯합니다만…….”

“아니야, 그 녀석 성격에 여자를 그냥 만났을 리가 없어. 아마 지금 여자를 감춰둘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 쿨럭!”

“회장님!”

백 회장이 기침을 하며 침대 시트에 손을 짚었다. 놀라서 손을 내미는 비서를 향해 그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그래, 그 아가씨는 뭐하는 집 딸인가?”

“입사 지원서를 찾아보니 부모의 직업란이 공란이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보이진 않았지만, 회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집안의 아가씨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안 봐도 훤하지, 건우에게서 돈 냄새를 맡고 들러붙은 계집애일 게 뻔해.”

그는 생각만 해도 그 여자가 괘씸해 이를 아득 갈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건우 모르게 내 앞에 데리고 와.”

“부사장님이 알면 가만있지 않으실 텐데요.”

“그러니까 걔 모르게 데려오라는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회장님.”

남자가 인사를 하고 나간 후 백 회장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거친 호흡을 다스렸다.

그는 얼마 전에 건우가 마케팅팀 김 팀장과 저녁 식사를 한 이유가 그의 눈을 속이려 한 행동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역으로, 건우가 그렇게 하면서까지 그 여자를 감추고 싶어 한다는 거였고 그녀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 깊다는 걸 뜻했다.

그 여자는 백 회장 앞에서 건우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며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건우가 Pakin의 부사장이 아니더라도 사랑했을 거라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백 회장은 그런 값싼 연기에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돈 냄새를 맡고 달려든 계집애 따위, 적당히 겁을 주든 돈을 몇 푼 쥐여주든 해서 건우의 눈앞에서 치워 버리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

비슷한 시각에 설은 서울 시내에 있는 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대통령은 바람도 쏘일 겸 쇼핑을 하러 나가겠다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안 된다고 만류를 하진 않았다.

대통령이 설에게 청와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했던 말은 원자력연구원과 관련된 일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지, 그녀의 외출 자체를 금지시킨다는 뜻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설이 밖으로 외출을 한다는 사실이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그녀가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낫다고 여긴 것이다.

경호관이 그녀 옆에 있으니 설도 섣부르게 행동하지는 않을 터였다.

대통령은 그렇게 생각했고, 설은 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설은 이렇게 해서 평소에 관심 없던 쇼핑을 밖으로 나갈 구실로 삼았다.

그녀가 민준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려면 일단은 청와대를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설의 전언에 그녀에게 돌아온 그의 대답은, 인형을 불태우면 고양이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협박뿐이었다.

그녀가 맞선을 볼 거라는 말에 대한 반응은 없었으며 연락을 하겠다는 대답 또한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설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한 상황을 만들면 될 일이었다. 그에 대한 응징은 그다음 문제였다.

이번 쇼핑은 민준이 연락을 하게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영애 님, 설마 그 옷을 사시려고요?”

설은 가슴골이 살짝 들여다보이고 몸에 착 달라붙어서 곡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빨간색의 미니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무심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몸을 돌려 보았고 인정은 그런 설을 바라보며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인정이 생각하기에 아무리 영애의 취향이 이렇다 해도, 적어도 영애라는 위치에서 선 자리에 입고 나갈 만한 옷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은 뜨악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인정을 흘끔 쳐다보았다.

“왜요, 이상해요?”

“이상하다기보다 영애 님껜 조금 과한 것 같아서요.”

“너무 과해서 상대가 싫어할까요?”

“그럴 것 같진 않은데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정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냥…… 영애 님께서 선을 보러 나가신다는 게 좀 이상해서요.”

“내가 선을 보러 나간다는 게 뭐가 이상해요? 부모님께서 날 결혼시키기 위해 서울로 불러들였다는 얘기, 듣지 않았어요?”

“듣긴 들었는데요, 전 영애 님한테 따로 만나는 남자분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아, 내가 밤에 몰래 나가서 만났다는 그 남자 말이에요?”

설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옅게 웃었다.

인정은 설이 Pakin 연구동에서 몰래 만났던 남자를 두고 왜 선을 보러 나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 전 두 분이 보통 사이가 아닌 줄 알았거든요.”

“보통 사이예요, 보통 사이니까 내가 이렇게 선을 보러 나가겠다고 하잖아요.”

“두 분이 진지하게 만난 게 아니었어요? 그 왜, 두 분이 연구동에서…….”

설은 인정이 말끝을 흐리자 픽 웃었다. 그녀도 건우가 연구동의 장비를 치우면서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침대 얘기군요?”

“…….”

“침대에서 만났다고 진지한 사이라고 생각하다니, 인정 씨도 생각보다 고루한 사람이네요.”

“남자한테서 반지를 받았는데도 보통 사이예요? 전 영애 님이 그분께 프러포즈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요.”

무심하게 옷을 고르던 설이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정색을 하며 인정을 바라보았다.

“반지라뇨? 무슨 반지요?”

“네?”

인정은 당황한 얼굴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영애가 그 반지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을 줄 알았다.

영애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 안에 반지가 들어 있었는데, 정작 목걸이의 주인인 영애가 그 반지를 모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정은 NIS 선배로부터 영애의 목걸이 안에서 반지가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영애가 밤에 몰래 남자를 만났다는 말이 사실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애가 그녀와 민준을 따돌리고 그 남자를 몰래 만났을 정도였으니 두 사람은 애절한 사랑을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영애는 정말로 그 반지의 존재에 대해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정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반지냐고 물었는데요, 인정 씨.”

설은 인정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녀에게 재차 물었다.

“그게…… 영애 님 반지요.”

“난 반지 같은 거 안 가지고 있는데, 무슨 반지를 말하는 거죠?”

“아, 저는 영애 님 목걸이 안에 반지가 들어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아마 제가 잘못 들었나 봐요.”

‘목걸이 안에 반지가 들어 있었다고?’

“신경 쓰지 마세요, 영애 님. 아무래도 제가 착각을 한 것 같으니까요.”

“……아니요, 내가 그 안에 반지를 넣어두었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런데, 내가 돌려받은 목걸이 안엔 반지가 들어 있지 않던데요?”

설은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꾹 눌러 참았다.

민준은 파일을 가져가는 대신 반지를 목걸이 안에 넣어 두었다.

그는 파일이 없어진 걸 알고 놀랄 설을 안심시키려 했고, 그녀가 그의 변치 않는 마음을 믿어주길 바랐던 거였다.

‘장인어른께서 네게 주신 목걸이에, 혹시 네게 중요한 뭔가를 넣어놓았느냐?’

아빠는 목걸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다 알고 계셨다. 아시면서도 나에게 그렇게 물었던 거였다.

아빠는 그 반지를 나에게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던 걸까?

“그렇죠, 영애 님? 목걸이 안에 반지가 들어 있었던 게 맞죠? 휴우, 전 또 제가 실수한 줄 알았잖아요. 그럼 그 반지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전 분명히 국장님께서 주신 목걸이를 영애 님께 그대로 돌려드렸는데요. 반지를 본 사람들이 반지가 되게 독특하게 생겼다고 한 걸 보면, 어디에 섞여서 사라졌을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에요.”

“……반지가 독특하게 생겼다고요?”

설은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잠긴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분명히 반지에 무슨 꽃 모양이 새겨져 있다고 들었는데 뭐였더라…….”

설은 미간을 좁히며 기억해 내려 애쓰는 인정을 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꽃은 하나밖에 없었다.

“……민들레꽃.”

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 맞아요! 민들레꽃! 어떤 분인진 모르겠지만 되게 낭만적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분을 두고 정말 선을 보셔도 괜찮은 거예요?”

“그래도 보러 나가야죠.”

“아…….”

설은 맞선 자리에 나가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확고히 했다. 청와대를 멀리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대통령을 만나야 했다.

설은 대통령을 찾아가 반지를 되찾아올 생각이었다.

“인정 씨, 부탁이 있는데요. 인정 씨 핸드폰으로 지금 내 모습 좀 찍어줄 수 있어요?”

“영애 님을요?”

“네,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래요.”

“아…… 네!”

인정은 그녀의 말에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영애는 반지를 선물한 그분에게 사진을 찍어 보여주고 싶은 거였다.

인정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도 마음에도 없는 선을 보러 나가야 하는 영애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인정은 설의 모습을 핸드폰 화면에 담고 버튼을 눌렀다.

찰칵-

몸에 꼭 맞는 빨간 미니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인정의 핸드폰 화면을 가득 메웠다.

“찍었어요, 영애 님.”

“내가 좀 봐도 될까요?”

인정의 핸드폰을 건네받은 설은 설핏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최근 통화 목록에서 민준을 찾아 방금 찍은 사진을 전송한 후 핸드폰을 인정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인정은 멍한 얼굴로 핸드폰과 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지금 사진 보내신 거예요?”

“네.”

“누구한테요?”

설은 대답 대신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1.

2.

띠리리리-

인정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하자 설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적어도 5까지는 셀 생각이었는데 3을 넘지 못했다.

직접 그를 보지 않아도 민준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녀의 눈앞에 훤했다.

인정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발신자는 민준이었다. 민준 선배와는 연락이 잘 안 된다고 영애에게 거짓말했던 게 들통 난 것이었다.

“전화 안 받아요?”

설은 픽 웃더니 팔짱을 끼고 인정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서둘러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죽을래? 너 그 사진 뭐야, 합성한 거야?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잔뜩 화가 난 민준의 고함 소리가 튀어나왔다.

씩씩거리는 걸 보니 그는 지금 몹시 분노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인정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애는 조금 전 애인이 아니라 민준 선배에게 그 사진을 보낸 거였다.

인정은 영애가 사진을 잘못 보냈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눈만 깜빡거렸다.

“솔직하게 말해요.”

그리고 인정을 격려했다.

“……영애 님 쇼핑하시는 데에 따라왔어요.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영애 님이 선배님한테 그 사진을 보내셨네요.”

인정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예전에 설과 민준이 함께 있었던 모습을 떠올렸다.

민준은 매사에 시큰둥했고 늘 귀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곁에 영애가 있을 때는 표정부터 달랐다.

그의 시선의 끝은 항상 영애에게 가 닿았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매는 언제나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근데 영애 님 복장이 왜 그래, 어디 춤추러 가신대?

“……춤추러 가는 건 아니고 맞선 보러 나갈 때 입겠다고 사신 건데요.”

-뭐? 어디에서 뭘 입어?

“선볼 때 저 옷을 입겠다고 하셨다고요.”

인정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영애가 비밀리에 만났다는 남자는 아마 민준일 터였다.

그가 영애의 상대가 아니기를 줄곧 바랐는데 민준의 전화를 받는 순간 그녀의 바람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옆에 계시면 잠깐 바꿔봐.

“계시긴 한데 바꿔드릴 수는 없어요, 선배님.”

-국장님이 너한테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어?

“…….”

-별말 안 할 거니까 바꿔. 국장님께 말씀드리든 말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인정은 설의 눈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내린 채 그녀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영애 님, 민준 선배인데 전화 받아 보시겠어요?”

“김민준 씨가 나를 바꿔 달래요?”

“……네.”

설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김민준 씨?”

-그 옷 입고 나가기만 해봐, 내가 진짜 가만 안 둬!

민준은 그녀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큰 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설은 인정의 눈치를 흘끔 살핀 후 매장을 나와 복도를 걸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당연히 그녀를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던 인정은 대리석 바닥을 응시하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입고 나가는 건 안 되고 내가 선보러 나가는 건 괜찮은가 보죠?”

-진짜로 선보러 나갈 생각이었어?

“그럼요, 그러니까 이렇게 옷도 사러 왔죠.”

-당신이 지금 그러고 돌아다닐 때가 아닐 텐데?

“이러고 돌아다녀야 할 때라서 이러고 다니는 거예요. 말장난 그만하고, 그건 지금 어디에 있어요?”

-뭐가 어디에 있어?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이 반지 대신 훔쳐간 거 말이에요!”

설이 발끈해 언성을 조금 높였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그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부드러운 음색이 그녀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반지는 마음에 들었어?

“……응. 예뻤어요.”

-맘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설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지만, 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반지가 예뻤다는 대답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는 민준의 모습은 그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나저나 당신 지금 어디에 있는 거예요? 사무실에 있는 거 아니에요?”

-나 사무실 아니야, 당분간 여행이나 다닐까 해서 휴가 냈어.

“휴가를…… 냈다고요?”

-응. 부럽지?

“……그래요, 부러워요. 그러니까 내 몫까지 좋은 거 많이 보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요.”

설은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직무 정지 상태라는 걸 알고 있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조국.

“응.”

-나랑 같이 여행 갈래?

민준의 물음에 설은 눈물을 닦으며 피식 웃었다.

그에게 어디든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막상 그 말을 듣자 눈물이 났던 것이다.

“그래요.”

-내가 어딜 데려갈 줄 알고 그렇게 순순히 따라나서겠다는 거야?

“날 어디로 데려갈 건지는 상관없지만, 만약 데리러 안 오면 나 진짜 이 옷 입고 선보러 갈 거예요.”

-못됐네, 마음 씀씀이가 그래 가지고 어디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이나 받겠어?

“내가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요?”

-아니, 꼭 그럴 거 같아. 고집쟁이 강조국 같으니라고.

“그래서, 나한테는 언제 올 건데요?”

-늦지 않게 갈게.

민준이 핸드폰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

통화를 끝낸 설은 고개를 숙이고 손등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걸음을 옮기려다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언제 왔는지, 인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분이신가 봐요?”

“네, 인정 씨.”

“…….”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

설은 차분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인정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설에게서 익숙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인정이 민준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 맡은 적이 있던, 바로 그 향이였다.

**

서연은 점심 무렵 이상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를 건 남자는 Pakin 대표인 백 회장의 비서실장이라고 했다.

백 회장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니 퇴근 후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같이 갔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서연은 퇴근 후 회사 지하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까만 차량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백 회장이 자신을 왜 만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이해가 가진 않았다.

서연은 더 이상 1층 카페에 출입하지 않았고, 그녀가 건우와 연락을 안 한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백 회장을 만나러 가는 건, 일단 그가 서연에게 용무가 있다고 말했으며, 그녀 또한 백 회장에게 두 사람이 아무 사이가 아님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태운 자동차가 한국병원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서연은 비서실장이라는 사람과 함께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는 동안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은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서연도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가 VIP 병실 앞에 서서 노크를 했고, 곧이어 서연은 그를 따라 들어갔다.

그녀가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서류를 읽고 있던 백 회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연을 쏘아보았다.

“김서연이라는 아가씨가 이 아가씨인가?”

“…….”

백 회장은 서연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기에 서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백 회장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처럼 빤히,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안 그런가?”

“안녕하세요.”

그녀의 무성의한 대답에 백 회장의 입술이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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