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72화 (72/94)

72화.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2016.09.08.

“자네 이름이 뭔가? 듣자 하니 우리 회사 직원이라던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백 회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커피사업부 마케팅팀 김서연 주임입니다.”

“자네가 여길 왜 왔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회장님께서 절 왜 부르셨는지는 아직 얘기를 못 들었는데요.”

“그래서 모른다고?”

“네. 모릅니다, 회장님.”

하!

백 회장이 코웃음을 치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돌한 눈빛으로 똑바로 쳐다보는 게 아주 뻔뻔하기가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건우를 믿고 이렇게 천방지축 날뛰는 것 같은데, 산전수전 다 겪은 나에게는 어림도 없지,’

그는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자네 같은 사람의 시간과 그 가치가 다르네. 그러니, 내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내가 자네 존재를 안 이상 자넨 건우와 더 이상 만나지 말아야 할걸세. 만약 자네가 건우를 만난다는 이야기가 내 귀에 또다시 들려온다면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야.”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거예요, 회장님?”

“그렇게 들린다면 그게 맞겠군.”

“제가 왜 백 부사장님을 만나면 안 되는데요?”

서연은 무심한 어조로 백 회장에게 되물었다.

백 회장이 그녀를 회사 업무와는 관련이 없는 사적인 일로 불렀기 때문에, 서연은 백 회장에게 절절맬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그녀는 백 회장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조금도 없었고,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오빠가 가만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 아빠도.

“어린 아가씨가 욕심이 보통이 아니군. 건우가 몇 번 만나주니까 자네가 내 아들과 결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인데,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테니 꿈 깨는 게 좋을 거야. 조용히 건우 옆에서 사라진다면 내가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신경 써 주겠지만,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면 그마저도 없을 줄 알아.”

백 회장은 그녀를 위협하듯 날카롭게 눈을 번뜩였다.

그는 그녀가 동정심을 얻기 위해서라도 눈물을 짜낼 줄 알았다.

그러나 여자는 백 회장의 예상외로 아주 뻔뻔했다.

백 회장이, 정 이렇게 나온다면 자신 역시 그녀를 곱게 대접해 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서연이 입을 열었다.

“제가 부사장님과 무슨 사이라도 될까 봐 이러시는 거라면 번지수 잘못 짚으셨어요. 전 부사장님과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요. 그래도 굳이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신경 써 주시겠다면 사양하지는 않을게요.”

“자네가 건우와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네, 아니에요.”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아니요, 책임 안 질 건데요? 회장님이 책임 운운하면서 앞으로 절 괴롭힐 수도 있잖아요.”

백 회장이 인상을 쓰며 서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반응은 그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백 회장은 그녀의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말에 매서운 눈길을 거두면서도,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기에 의심스런 눈초리까지 거두진 않았다.

“자네 원래 이렇게 겁이 없는 사람인가? 내가 자넬 어떻게 할 줄 알고 이렇게 나한테 맹랑하게 구는 거지?”

“회장님 시간은 비싸다면서요, 회장님이 저 같은 말단 직원을 어떻게 하려고 그 비싼 시간을 쓰실 것 같진 않아서요.”

“…….”

그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서연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는 문자나 전화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였는데 굳이 병원까지 오게 만든 게 좀 짜증 나긴 했지만, 어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저한테 하실 말씀은 다 끝난 건가요? 더 없으시면 이만 가보려고요.”

“왜, 무슨 약속이라도 있는 건가?”

“부사장님과 만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절 부르신 거라면서요.”

“그래, 맞네.”

“부사장님과 만나는 사이도 아니지만, 앞으로도 만나고 싶지 않으니 그건 걱정 마세요. 오늘은 그냥 왔지만 두 번째는 안 올 거니까 앞으로 저 부르지도 마시고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건 무슨 소리지? 자네 지금 내 앞에서 허세라도 부리고 싶은 겐가?”

앞으로도 건우를 만나지 않을 거라는 서연의 확신 어린 대답에 백 회장의 말투와 표정이 나긋나긋해졌다.

그는 마음이 여유로워지자 호기심이 일었다.

“부사장님이 별로라서요.”

“건우가 별로라고? 내 아들이?”

“네.”

“이유를 말해보게.”

“회장님께 말씀드리기엔 좀 그런데요.”

“괜찮네, 내가 궁금해서 그러니 얘기해보게.”

대답을 할까 말까 잠깐 망설이던 서연의 뒤로 병실 문이 드르륵하며 갑자기 열렸다.

“대답할 필요 없어요!”

서연은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곁에 다가와 선 건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급하게 뛰어왔는지 밖으로 내뱉는 호흡이 거칠었다.

서연은 그를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닌데 이전과 달리 건우가 낯설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서연 씨.”

건우가 서연의 표정을 빠르게 살핀 후 백 회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런 짓을 할 기력이 남아 있으세요?”

“건우한테 얘기를 했습니까?”

백 회장은 건우를 외면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긋나긋한 표정으로 서연을 대했던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서연이 막 입술을 떼려는 순간, 건우가 한 템포 빠르게 먼저 대답했다.

“아버지가 절 감시하시는 것처럼 저도 아버지를 감시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모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걸 알아두세요, 아버지. 도대체 김서연 씨는 왜 부르신 겁니까?”

“부사장인 네가 일개 주임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놀랍구나. 이 아가씨는 너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던데, 너는 도대체 여기에 왜 온 거냐.”

“아버지 전과가 더 늘어날지도 몰라서 왔습니다.”

“이 아가씨가 네 약점이 맞긴 맞나 보구나,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백 회장은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고, 서연은 집에 가겠다는 말을 꺼낼 타이밍을 찾느라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더 이상 이런 분위기 속에서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어진 틈을 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두 분은 계속 말씀 나누세요. 전 이만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안녕히 계세요, 회장님, 부사장님.”

“앞으론 불러도 오지 말아요, 서연 씨.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칠 수도 있거든요.”

“…….”

건우는 백 회장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연에게 하는 말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그녀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 회장은 오히려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건우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백 회장이야말로 더 이상 두렵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내가 앞으로 자네 얼굴을 보기 힘들 것 같은데, 갈 땐 가더라도 건우가 별로인 이유는 얘기해 주고 가지 않겠나? 내가 앞으로 건우의 짝을 생각할 때 참고하도록 하지.”

“대답하지 말아요, 서연 씨.”

건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서연에게서 그 얘기를 듣는다면 마음에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회장님께 대답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진짜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서연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뒤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고, 건우는 그녀가 병실 주변에서 사라질 때까지 백 회장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마세요, 아버지. 제 손으로 아버지를 그곳에 보내는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요.”

“몹쓸 놈.”

건우가 몸을 홱 돌려 병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로 나간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서연을 보자 서둘러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다행히 크게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서연 씨, 미안합니다.”

엘리베이터 상단의 숫자를 바라보던 서연은 고개를 돌려 건우를 바라보았고,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재미있었어요……?”

“네. 제가 어디 가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요? 꼭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니까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연은 건우에게 작별 인사도 없이 안으로 성큼 발을 내딛었다.

사실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건우를 보는 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좀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서연은 갑자기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건우가 발을 내딛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 바람에 서연은 오히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나야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행동에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왜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까?”

“묻고 싶은 게 없으니까요.”

서연은 잡힌 손목을 빼낸 후 인상을 찌푸리며 손목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는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다르게 손아귀 힘은 제법 강한지, 잡혔던 손목이 시큰거렸다.

“내가 서연 씨한테 왜 연락을 하지 않는 건지, 왜 부사장이란 걸 얘기하지 않았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어요?”

“묻지 않아도 그 정돈 그냥 알 수 있어요. 나한테 호감은 가는데 그러다 엮일까 봐 걱정이 됐던 거겠죠.”

“비슷하긴 하지만 서연 씨가 생각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뭔 줄 알고요? 난 부사장님이 날 사랑할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서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시 누른 후 상단의 숫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건우는 서연처럼, 타인에게 사랑받는 것에 자신이 없었고 타인을 사랑할 용기마저 부족했다.

사랑에 확신이 없는 그녀가 사랑에 망설이고 주저하는 건우를 만났으니 두 사람은 이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보고 하는 말입니까? 내가 무슨 자신이 없다는 거죠?”

“부사장님은 사랑 때문에 힘들거나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사랑을 해요, 꼭 나처럼요. 아깐 말하지 못했는데 그게 바로 제가 부사장님이 별로라고 했던 이유예요. 부사장님한테는 내가 어렵게 용기를 낼 만한 사람은 아닌 거죠.”

건우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그럼 내가 좀 더 용기를 낸다면, 서연 씨도 용기를 내줄 건가요?”

“아니요, 우리 두 사람이 만나려면 그렇게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거잖아요. 난 용기가 없어도 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러니 부사장님도 나 말고 그런 사람을 만나요.”

엘리베이터 문이 양옆으로 열리자 서연이 안으로 들어가 몸을 돌리며 곧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지만, 건우는 손으로 문을 붙잡은 뒤 엘리베이터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부사장님은 다음 거 타시면 안 돼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내가 다른 사람 찾아보라고 했잖아요.”

“서연 씨는 잘 모르겠지만 난 서연 씨한테 이미 많은 용기를 보여줬어요.”

“……?”

서연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건우를 곁눈질로 바라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눈을 마주치는 데에도 나한테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죠.”

“…….”

눈이 마주친 그가 희미하게 웃었고, 서연은 이상하게 가슴이 뜨끈해지는 걸 느끼며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머리의 열이 가슴으로 옮겨 왔는지, 그녀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쇼핑을 갔던 조국은 사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대통령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바로 시선을 내리며 설에게 무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냐?”

“제 물건 돌려주세요, 아빠.”

“……물건? 무슨 물건을 말하는 거지?”

대통령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설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오른 손바닥을 내보이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했다.

“다 알고 왔으니 시치미 떼지 마세요. 아빠가 저 모르게 가져가신 물건 말이에요. 저한텐 중요한 거니까 돌려주세요, 그리고 제 핸드폰도요.”

“…….”

대통령은 설의 눈을 마주 보며 오른손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고, 그 안에서 금빛 반지와 핸드폰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 말하는 거냐?”

대통령이 반지를 집어 들자 설이 책상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그는 재빨리 반지를 손바닥 안으로 감추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다음 주에 네 엄마가 영빈관 앞에서 사랑의 바자회를 연다고 하더구나. 네 엄마가 그날 네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을 초대할까 한다던데.”

“그런데요?”

“그날 엄마 옆에 얌전히 서 있겠다고 약속하면 돌려주마. 물론 엄마 손님들께 인사도 하고.”

대통령은 설이 그녀의 핸드폰을 집어 드는 걸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그녀가 알고 온 이상, 그는 반지를 내어주고 다른 걸 얻기로 했던 것이다.

“그럼 그날 저도 제 친구를 초대해도 되나요?”

“어떤 친구를 말하는 거지? 연구원 동료는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예전에 제가 다녔던 직장 동료예요.”

“그럼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대통령이 반지를 책상 위에 천천히 내려놓자 설은 냉큼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조금 전의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주먹을 쥐어 반지를 손안에 감추었다.

대통령은 반지를 감춰 흥정을 하려는 거였지만 설은 그에게 다시 뺏기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말해봐.”

“아빤 절 언제까지 이곳에 붙잡아둘 생각이세요?”

“주변이 잠잠해지고 네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다.”

그는 설이 꼭 쥐고 있는 오른손에 힐끗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 말씀은 제가 밖으로 나가 아빠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할까 봐 걱정이 된다는 말로 들리는데, 제 생각이 맞나요?”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지 않을게요. 저한테 사람들을 붙이셔도 되고요.”

“지금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지?”

“전 이곳 말고 할아버지 집에 있고 싶어요, 아빠.”

“할아버지 집이라니, 무슨 집을 말하는 거냐?”

대통령이 고개를 기울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평창동 할아버지 집이요.”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는 헛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황당한 얼굴이었다.

설이 말하는 평창동 할아버지 집이란 그녀의 외할아버지이자 대통령의 장인어른이었던, 지금은 작고한 이인호 박사의 옛날 집을 말하는 거였다.

장인어른께서 생전에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을 넘겼다고 알고 있던 대통령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집 소유주가 할아버지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사람인데, 고맙게도 2년 전에 저한테 그 집을 선물로 줬어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제가 꼭 받길 원해서 거절하지 않았고요.”

“충분히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일인데 왜 나한테 그 얘길 하지 않았지?”

“그 사람은 제가 그 집에서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어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순진하게 그 얘기를 믿었단 말이야?”

대통령은 곧장 책상 위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어 버튼을 눌러서 비서실장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메모지에 평창동 집의 주소를 적어 비서실장에게 건네며 지시를 내렸다.

“평창동에 있는 주택이네. 현재 소유주, 그전 소유주까지 확인해서 즉시 내게 보고하게.”

비서실장이 목례를 하고 나가자 대통령의 시선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누군가가 그런 고가의 주택을 선뜻 주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으니, 분명 그 뒤에 다른 얘기가 숨어 있을 터였다.

“말해봐, 그 사람한테 따로 무슨 청탁이라도 받은 거냐?”

“아빠!”

“뇌물 청탁 수수 문제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구나.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 말이 맞다면 절 평창동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 전 그 집에서 당분간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있을게요.”

대통령은 고집이 센 자신의 딸이 혹시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평창동 집이 조국의 소유가 되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 거라는 그녀의 다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네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한번 생각은 해보마.”

그는 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청와대 사택, 그녀의 방으로 돌아온 설은 방문을 닫자마자 충전기에 핸드폰을 꽂고 나서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바라보았다.

인정의 말대로 그 반지에는 꽃 한 송이가 그려 넣은 것처럼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직접 끼워줘야지, 이렇게 주는 게 어디 있어.”

설은 작게 투덜거리며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반지를 낀 손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라보았다.

‘영애 님께선 그동안 절 놀리신 건가요?’

‘감춘 건 사실이지만 일부러 인정 씨를 속이려 했던 건 아니에요.’

“…….”

설은 반지를 바라보며 인정과의 대화를 문득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자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고 싶진 않았기에 곧바로 그 기억을 털어버렸다.

그러다 그녀는 몸을 옆으로 세워 핸드폰을 집은 후 버튼을 길게 눌러 전원을 켰다.

설은 혹시 도청이 되는 건 아닐까 잠깐 생각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대화가 아니면 괜찮을 것 같았기에 더 주저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따르르르-

신호음이 가고 딸깍,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설은 마치 눈앞에서 민준을 만난 것처럼, 반가움으로 눈이 커다래졌다.

-여보세요.

“나예요!”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민준이 설에게 존댓말을 하는 걸 보니 그도 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대전에서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진 게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 님.

“그러지 말고 인사도 나눌 겸 다음 주에 청와대 영빈관 앞에서 열리는 바자회에 오지 않을래요? 아마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어머니와 함께 그곳에 있을 것 같아요.”

-아.

민준이 짧게 탄성을 냈다. 그녀가 뱉은 ‘어머니’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그날 여기로 오면 내가 네 번째 손가락을 보여줄게요.”

-예쁩니까?

잠깐 긴장했던 민준이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은 그에게 지금 반지를 끼고 있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얘기한 거였다.

“네, 정말 예뻐요.”

설은 손을 앞으로 쭉 뻗어 네 번째 손가락을 감싸고 반짝거리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민준은 아마 설이 생각하고 있는 곳에 파일을 감추어 놓았을 터였다.

“꼭 내가 어딘가에 두고 온 민들레꽃처럼요.”

-아, 이런.

설은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민준을 향해 상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날 봐요.”

반지에 새겨진 민들레꽃이 전등불을 받아 예쁘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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