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76화 (76/94)

76화. 돌고래의 의미2016.09.22.

식사를 마치고 나온 세 사람은 한식당의 너른 마당에 서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설은 마치 영부인을 배웅하려는 듯 민준 옆에 서서 그녀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안 가니?”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전 밖에서 바람 좀 쐬고 들어갈게요.”

한마디로, 민준과 데이트를 하다 들어가겠으니 먼저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경호관도 없이 혼자?”

“걱정 마세요, 이 사람이 있잖아요.”

설의 말에 영부인의 시선이 민준을 향했다.

민준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설에게 앞으로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사전에 꼭 예고를 해달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늦지 않게 데려다주겠습니다.”

“난 늦게 들어갈 건데요? 오늘 들어가면 또 언제 나올지 모른단 말이에요.”

“…….”

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민준을 쳐다보았다.

도발적인 대답을 한 건 설이었는데 어쩐지 민준이 민망해졌다. 그는 목덜미가 홧홧해지는 걸 느꼈다.

“……그럼, 부탁할게요.”

민망한 건 그만이 아니었는지, 수행원들을 의식한 영부인이 민준에게 속삭이듯 낮고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따 보자꾸나.”

그녀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설에게 살짝 눈을 흘긴 뒤 자동차 뒷좌석에 몸을 실었다.

영부인이 탄 까만 자동차와 수행 차량이 멀리 사라지는 걸 확인한 민준은 몸을 홱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설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당신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요?”

“걱정 마세요, 이 사람이 있잖아요? 강조국 씨는 날 팔아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알아도 좀 모른 척해 주면 안 돼요?”

설이 불퉁한 얼굴을 하자 민준이 그녀의 허리에 양팔을 두르며 물었다.

“어디서 뭘 할 건데.”

“그건 묻지 말아요, 나는 아주 약간의 자유 시간만 필요하니 당신만 잠깐 눈감아 주면 되는 일이에요.”

“내가 당신을 혼자 있게 놔둘 것 같아?”

민준이 그녀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가 짐짓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설은 웃으며 그의 목 주위에 팔을 둘렀다.

민준은 얼굴 근육이 스르르 풀어지는 걸 느끼며, 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단단히 힘을 주어 무표정을 유지했다.

“응, 당신은 그럴 거예요.”

“내가 왜?”

“당신은 날 믿고 또 사랑하니까요.”

“……비겁한 조국.”

민준이 고개를 기울여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에 닿는 순간 민준은 가슴 밑바닥에서 뭉근하게 피어오른 행복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민준이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설을 안으로 바짝 끌어당기자 설은 반대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상체를 조금 뒤로 물렸다.

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왜?”

“주변이 너무 환하잖아요.”

얼굴이 붉어진 설이 주변을 슬쩍 살피더니 민준을 나무라는 듯 바라보았다.

“괜찮아, 눈 감으면 깜깜해질 거야.”

“지금 말고 이따 진짜 깜깜할 때 만나요.”

“응?”

“지금은 나 혼자 갈 곳이 있어요.”

“……그건 싫은데.”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를 이용해 뜻을 이루었으면 그에 대한 작은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녀는 민준을 약만 올린 상태로 도망을 가려하고 있었다.

“내가 어디로 데리러 갈까?”

설의 말간 눈을 잠시 바라보던 민준이 그녀의 귓불을 살짝 물었다 놓으며 물었다. 그는 자신이 결국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내가 당신 있는 곳으로 갈게요. 이따 내가 전화하면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줘요.”

“그럼 대신 이걸 가져가.”

“이게 뭔데요?”

“호신용 경보기.”

민준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플라스틱 장치를 꺼내 그녀 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는 경보기 안에 GPS 기능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설이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쯤은 애교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거 누르면 어떻게 돼요?”

“아주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내가 나타날 거야.”

설은 신기한 듯 호신용 경보기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웃었다.

“지금 한번 눌러 볼까요?”

“시끄러워서 안 돼.”

“누르면 진짜 와요?”

“그럼.”

설을 두고 멀리 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가지고 있던 거였다.

민준은 누를까 말까 망설이는 설을 보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꼭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러다 뭔가 이상했는지 설이 웃음기를 거두고 민준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근데 당신이 어떻게 알고 와요? 내가 어디에 있을 줄 알고요?”

“…….”

“사기꾼.”

“사랑의 사기꾼이지.”

민준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

설은 민준에게 광화문역 인근에 자신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차에서 내린 설은 민준의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손을 앞으로 뻗어 지나가던 택시를 세웠다.

“평창동으로 가주세요.”

설은 택시 기사에게 할아버지의 집 주소를 일러준 후 핸드폰을 켜고 전송된 문자를 확인했다.

-예상 도착 시간은 오후 4시경입니다.

황 원장이 그녀에게 보낸 문자였다.

그녀는 청와대를 나오기 전, 영부인의 핸드폰으로 황 원장에게 전화했다.

영부인은 설이 민준에게 전화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에게 순순히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황 원장은 건우가 그에게 맡겨 놓은 물건을 모처에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고 설은 그 물건을 오늘 평창동으로 보내 달라 부탁했다.

설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영부인의 핸드폰에서 기록을 삭제함으로써 황 원장과의 통화 흔적을 지웠기에 들킬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설이 평창동 대문 앞을 서성거리며 몇십 분 남짓 기다렸을 때, 저만치서 까만 밴 두 대가 시간 차이를 두고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와 함께 일했던 동료 두 명이 자동차에서 내려서자, 설은 대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이쪽이에요.”

설은 주변을 잠깐 두리번거린 후 대문 안쪽 방향을 가리키며 얼른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대로 연구를 멈출 수는 없었다. 소나기가 지나갔으니 이제 다시 시작해야 했다.

“…….”

민준은 골목 안쪽에 차를 대고 설과 동료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밴 안에서 박스를 꺼내 여러 차례에 걸쳐 대문 안쪽으로 실어 날랐다. 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얼굴엔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건 민준이 곁에 있을 때 그녀가 짓는 표정과는 달랐지만, 행복해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민준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동차 핸들을 돌렸다.

**

박 단장이 주도하는 회식은 광화문 근처에서 열렸다.

그는 회식 장소를 결정한 민준에게 왜 하필이면 이곳이냐며 투덜거렸지만, 민준이 여자친구의 얼굴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민준은 맥주를 마시면서 이따금씩 손목시계 화면을 두드렸다.

그는 조금 전 설에게 그가 있는 곳의 위치를 문자로 전송했다. 그러나 있는 곳을 알려주면 그리로 오겠다던 설에게선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여자친구 데려온다며, 어떻게 된 거야?”

박 단장이 세 번째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민준의 여자는 몇 년째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었는데, 왠지 오늘도 그의 상상으로만 끝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 왔다.

“글쎄요. 만나기로 하긴 했는데.”

“여자친구가 무슨 일을 하는데 그래? 늦게 끝나는 일이야?”

“지금은 잠깐 일을 쉬고 있는데, 그래도 한가한 사람은 아니에요.”

민준이 잔을 들어 올리며 인정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가 오늘 영애의 경호를 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이 자리에 참석할 줄은 몰랐다.

“여기에 오실까요?”

인정이 시니컬한 말투로 물었다. 민준에 대한 마음은 깨끗이 접었지만 두 사람한테 느낀 배신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글쎄.”

민준이 무심하게 대답하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 순간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빨간 점이 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야, 안 온다고 하면 내가 꼭 좀 보자고 했다고 전해! 설마 남자친구 상사가 부르는데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옛날 같았으면 남친의 하늘 같은 상사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노래요?”

“……아니, 내가 꼭 시키겠다는 건 아니고. 이를테면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박 단장은 민준이 정색하자 말을 흐리며 딴청을 피웠다. 민준은 마치 그가 엄청난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박 단장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저 자식 저거, 내 밑이 아니라 내 위였으면 어쩔 뻔했어?”

박 단장은 혼잣말처럼 작게 투덜거리며 술잔에 입을 댔다.

“선배님은 그분이 뭐가 그렇게 좋아요?”

“그 사람이 왜 좋은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는 인정의 질문에 박 단장에게서 매서운 눈길을 거두었다.

“그럼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해요? 그저 마냥 좋기만 하나요?”

“그 사람 앞에서 다치거나 아프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 그럼 그 사람이 많이 울 테니까.”

인정은 민준의 대답을 듣고, 영애가 없다고 해도 그 자리가 그녀의 것이 되진 않을 거라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민준을 그대로 바라보는 영애와, 영애가 곁에 있든 없든 한결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민준 사이에 그녀가 들어갈 틈 같은 건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두 분 모두 짜증나요.”

인정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녀는 속이 상했지만, 두 사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없을 때에는 그 사람 잘 부탁해.”

“제가 왜요?”

민준은 얼굴이 벌게져 씩씩거리는 인정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시계를 쳐다보다 빨간 점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박 단장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바람 쐬러 나갑니다.”

“너 그대로 튀면 인간도 아니야, 알지? 내가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 기억해! 어?”

민준의 등 뒤에서 박 단장이 소리쳤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거리에 서 있는 민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자동차 한 대가 도로변에 멈춰 서더니 설이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그녀는 차 안쪽을 향해 인사를 한 후 문을 닫고 섰다. 민준을 발견한 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이 민준에게 달려오자 그는 코트 자락을 양옆으로 넓게 펼쳤고,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나 잘 찾아왔죠?”

“응. 하지만 혼자 돌아다니는 건 오늘만이야, 이젠 안 돼.”

“알았어요. 그런데 왜 밖에 나와 있어요? 사람들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요?”

“만나고 있었는데, 당신이 왔으니까 이제 가야지.”

민준에게 설을 동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만나는 사람이 영애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경우 그 후폭풍은 작지 않을 터였다.

그는 상관없지만 설은 입장이 다를 수 있었다.

“사람들한테 인사 안 하고 가도 돼요?”

“괜찮아. 우리 헤어질 때 인사하고 그러는 사이 아니야.”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때, 민준의 등 뒤에서 쯧쯧 하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왔는지, 박 단장이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제수씨. 내가 이놈 직장 선배 되는 사람인데 말이지요, 제수씨 얼굴 한번 보기 참 힘드네요.”

설이 고개를 들려는 순간 민준이 그녀의 뒤통수를 지그시 눌러 자신의 품 안에 더 깊게 묻었다.

“저분이 나 부르는 거 같아요.”

“신경 쓰지 마, 모르는 사람이야.”

설이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자 민준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 김민준! 제수씨가 왔으면 같이 들어와야지 거기서 뭐하는 거야? 두 사람 지금 영화 찍고 있는 거야?”

박 단장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민준이 인상을 구겼다.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할지 잠깐 생각하는 사이 설이 고개를 옆으로 빼꼼 내밀었다. 그녀의 시선이 박 단장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아, 제수씨! 안녕…….”

설과 눈이 마주치자 반색을 하던 박 단장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는 눈을 두어 차례 끔뻑거린 후 고개를 돌려 민준을 쳐다보았다.

“하하하하…… 내가 아는 분과 닮은…… 것 같은데, 그래도 너무 많이 닮았…….”

“…….”

“그…… 실례지만, 성함이…….”

“강조국입니다.”

“…….”

박 단장이 취기가 싹 가신 얼굴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어느새 그의 몸이 절로 꼿꼿이 세워졌고, 두 손은 몸통 옆에 자석처럼 딱 달라붙었다.

“제가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아니요, 안 괜찮습니다!”

“저 안에 들어가면 노래해야 된다는데.”

“노래요……? 내가요?”

민준의 말에 설이 근심스럽게 인상을 찡그리자 박 단장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가 불러드린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두 눈에 힘을 주고 민준을 한껏 노려보았다.

“그럼 제가 합석해도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그냥 가셔도 괜찮습니다! 민준아, 뭐해. 얼른 모시고 가.”

“아, 제가 불편하신 거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민준아, 뭐해. 얼른 모시고 들어오지 않고!”

박 단장을 속으론 울상을 지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있는 힘껏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속으로 민준을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했다.

박 단장은 술집 문을 열고 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다행히 술자리에 모인 요원 중 영애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인정과 박 단장뿐이었다.

박 단장은 자리에 앉아 자신이 영애에게 실수한 말은 없었는지 머릿속으로 테이프를 거꾸로 돌려 보았다.

조금 전 술집을 나가기 전과 달리 그의 앉은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형수님, 아주 미인이십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뵌 것 같기도 하고, 혹시 TV에 나오시는 분 아닙니까?”

누군가 설에게 술을 권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설 앞에 놓인 잔에 맥주를 따른 후 건배를 하려는 듯 자신의 잔을 들었다.

박 단장이 얼른 눈치를 줬지만 그에게까지 닿지 못했다.

“아니요. 제가 아직 TV에 나온 적은 없어요.”

설은 빙긋 웃으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민준의 옆에 앉아 그의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는 상황은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실례지만 뭐하시는 분이십니까? 미모를 보아하니…… 형수님 혹시 스튜어디스십니까?”

“아, 스튜어디스는 아니고요…….”

“입장 곤란하게 선배는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요? 민준 선배가 지금 선배 노려보는 거 안 보여요?”

인정이 퉁명스럽게 남자에게 면박을 주자, 설이 그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인정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뽀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설은 인정이 자신에게 적대적이진 않은 것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녀에게 미안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선배, 형수님한테 질문하면 안 됩니까?”

“어,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보기만 해.”

민준이 딱 잘라 대답하자 남자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갑자기 남자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형수님, 우리 선배님이 예전부터 여자가 끊이질 않았…….”

“야!”

남자가 말을 막 꺼내려는 순간 박 단장이 버럭 화를 내며 남자의 뒤통수를 세게 갈겼다. 남자는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단장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야, 너는 무슨 농담을 그렇게 심하게 해? 우리 제수님…… 아니 제수씨 놀라게!”

“민준 씨한테 진짜 그렇게 여자가 많았어요?”

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짓자 민준이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코트 안쪽으로 손을 천천히 집어넣으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헛소리하면, 죽여 버린다.”

“아니, 다들 왜 이러세요? 단장님, 제가 여자친구 데려왔을 때에는 더하셨잖아요! 제가 그때 화난 여자친구 달래주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남자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언성을 높이자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한 설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며 맥주잔을 높이 들었다. 그때였다.

-방금 들어온 긴급 속보입니다. 필리핀 남부를 여행 중이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채 사라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현지 대사관 측에서는 IS와 연계된 이슬람 무장 반군 단체의 소행일 거라는 의견에 조심스럽게 무게를 싣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국 정부는 지금 시각…….

“…….”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일순 조용해졌다. 요원들은 들고 있던 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굳은 얼굴로 TV를 응시했다.

-딩동, 딩동.

요원들의 핸드폰이 여기저기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민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 자리는 이쯤에서 정리해야 할 것 같네요. 민준이 너는 제수씨 모셔다드리고.”

핸드폰을 확인한 박 단장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른 요원들도 별말 없이 일어나 재킷을 몸에 걸쳤다. 설은 불안한 눈빛으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늦었는데 오늘은 이만 갈까?”

“…….”

설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민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는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인상 풀어.”

“어차피 들어가는 길이니까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그렇게 해줄래?”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인정이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핸드폰이 울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금 청와대 파견 근무 중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직무 정지 중이잖아요. 그런데도 들어가 봐야 하나요?”

설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2년 전 설을 만나러 왔던 민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때 건우가 민준에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 예외인 경우가 있어.”

“예를 들면…… 돌고래 같은 상황이요?”

민준은 설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 없이 눈꼬리를 아래로 휘어 내리며 웃었다.

돌고래.

설은 오늘에서야 그 단어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희생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