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1)2016.09.27.
TV 채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며칠째 같은 방송을 반복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그건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해외 피랍 사건에 쏠려 있었다.
설은 그날 이후 연락이 없는 민준을 생각하며 처음엔 두렵고 걱정스런 마음뿐이었다.
그러다 설은 그녀가 민준을 계속 만나는 한 앞으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다칠 때마다 그렇게 울 거야?’
설은 언젠가 민준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설이 위험에 빠진 날 민준은 그녀를 구하러 왔고, 그때 그의 마음을 솔직히 내보였다. 그 말 속엔 민준이 그녀에게 쉽게 다가올 수 없었던 이유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그날 그가 설에게 말했던 것처럼, 민준이 올 때까지 무기력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민준은 설이 그러길 결코 바라지 않을 터였다.
평창동 집에 장비를 몰래 들여온 이후 설의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동료들과 함께 재조립한 장비는 할아버지의 집에 있는 마당 안쪽 건물에 잘 숨겨두었다.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평창동 집으로 들어가 연구를 재개하고 싶었다.
다행히 위험수위가 높은 우라늄 농축실험은 Pakin의 물류창고 연구동에서 마무리 되었다. 후속 연구와 실험 정리는 설 혼자서 할 수 있었고 또 혼자 해야 하는 그녀의 몫이었다.
어머니와는 아주머니 한 분과 아저씨 한 분이 그녀의 생활을 도와주고, 설이 외출할 때에는 경호관이 반드시 동행하는 걸로 얘기가 끝났는데 아직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국민 피랍 문제 때문에 그녀는 며칠째 대통령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10분 만이다.”
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버지의 방 앞을 서성거린 끝에 사택의 서재에서 간신히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잠시 후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의 주재로 세 번째 안보정책조정회의가 열릴 예정이었고, 때문에 설은 그를 오랜 시간 붙잡고 얘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통령은 손목시계를 쳐다본 후 굳은 얼굴로 설을 바라보았다.
“죄송해요, 아빠. 바쁘신 걸 알지만, 지금이 아니면 아빠를 뵐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짧게 말씀드릴게요. 저 평창동으로 들어가요. 수서동 아파트도 정리했고, 제가 대전에서 사용하던 오피스텔은 짐 정리해서 그쪽으로 보내달라고 경호관에게 부탁도 했어요. 이 말씀을 드리려고 기다렸어요.”
“허락이 아니라 통보하는 거냐? 내가 안 된다고 할 걸 알면서도 끝까지 이러는구나.”
“제가 갈 거라는 거, 아빠도 알고 계셨잖아요.”
“…….”
설의 말이 맞았다. 대통령은 그가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딸이 결국 그의 품을 떠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부모의 마음으로 끝까지 붙잡아보고 싶었는데, 결국 이번에도 그는 그녀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이번에 설을 청와대에서 내보낸다는 의미는 그 전과 달랐다. 그가 대통령으로서도, 부모로서도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오늘 안보정책조정회의가 끝나면 아마 그는 젊고 유능한 요원들을 먼 곳으로 보내게 될 터였다.
피랍된 자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다방면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테러 단체와 타협을 할 순 없었다.
결국 또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누군가의 목숨을 지켜야 될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설은 자신의 의지로 그녀의 길을 가고 있었고, 그건 피랍된 인질 구출 작전에 진입 요원으로 차출된 민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는 두 사람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허락과 승인이 아니라 격려와 기도뿐이라는 것을 마음 깊숙이 깨달았다.
“넌 후회하지 않겠지.”
“네, 아빠.”
대통령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
다음 날 설은 평창동 집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녀 혼자는 아니었다. 설을 보호하기 위해 두 명의 경호관이 그곳에 함께 머물기로 했고, 보안은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점검하고 있었다.
민준은 여전히 그녀에게 연락이 없었다.
설은 민준이 그녀를 찾아오는 걸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인정이 그녀에게, 요원들이 소중한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의식에 대해 이야기해 줬기 때문이었다.
설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야 그가 2년 전 아침에 자신을 찾아와 함께 짜장면을 먹자고 했던 행동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가 이제 그녀를 만나러 온다면, 그건 민준이 어려운 길을 떠나기 전 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함일 터였다.
“영애 님, 바람이 너무 찬데요.”
도우미 아주머니가 2층 테라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던 설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녀는 아까부터 의자에 앉아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다 들어갈게요, 감사합니다.”
설은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가 거실 유리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자 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가까이 다가가 섰다. 부는 바람이 차가워서 몸이 절로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문득, 그녀에게 재킷을 벗어주고 목에 머플러를 칭칭 감아주던 민준이 생각났다.
설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가 짓던 미소, 나직한 목소리가 또렷한 기억과 함께 생생하게 떠올랐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울면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는 민준의 말이 생각난 설은 밖으로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걸 억지로 꾹 참았다.
만약 지금 누군가 그녀를 톡 건드린다면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설은 한참 동안 베란다를 서성거리다 마침내 찻잔을 들고 거실 안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까부터 손에 쥐고 있던 호신용 경보기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설은 그가 보고 싶으면서도 경보기를 누르면 민준이 정말 나타날까 봐 차마 누르진 못하고 계속 손에만 쥐고 있었던 것이다.
“영애 님, 괜찮으십니까?”
설이 소파에 앉아 차를 몇 모금 마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경호관 한 명이 2층으로 헐레벌떡 뛰어올라 왔다. 그는 오늘부터 그녀를 보호할 경호관 중 한 사람이었다.
“전 괜찮은데요. 왜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보안 장치에 잠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마 기기 에러가 난 것 같은데 금방 복구될 예정이니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남자는 2층 거실을 빙 둘러보더니 설에게 목례를 하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그때, 찬 바람이 거실 안으로 휭 불어 들어왔다. 놀란 설이 눈을 크게 뜨고 베란다를 바라보았다.
“강조국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경각심이 너무 없네.”
민준이 유리문을 닫으며 거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가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설은 민준에게 달려가 두 팔로 그를 힘껏 감싸 안았다. 민준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설은 민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에게 우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경비가 너무 허술해. 그리고 또 거실 문은 왜 열어둔 거야? 내가 문 잘 잠그라고 했잖아.”
“……당신이 이렇게 올 것 같아서.”
“그런데 왜 우는 거야? 이제 나를 봐도 반갑지가 않아?”
“…….”
민준은 그녀가 왜 울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당분간 못 올 거야.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동안 밥 잘 먹고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어.”
“……정말 금방 돌아오는 거죠?”
그녀는 여전히 민준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옷깃을 꽉 움켜쥔 설의 손이 떨렸다.
“당연하지.”
“그럼 됐어요.”
“그런데 내가 만약…….”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나 안 들을래요.”
설이 고개를 저으며 양팔로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자 민준이 그녀의 팔을 천천히 풀고 눈물로 젖어 있는 설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렸지만, 그는 겉으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설의 눈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들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아도 절대 울지 않겠다고 약속해.”
“싫어요. 약속 안 할 거야.”
“하여튼 고집쟁이.”
민준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웃었다. 그리고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설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내가 갈 때마다 매번 이렇게 울 거야?”
“응, 매번 울 거예요.”
“그러면 안 되는데.”
설은 그를 이렇게 보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 짓고 있는 민준을 보면서 아프게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스스로 다독였다. 우는 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는데도 민준은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안 울고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건강하게 돌아와요.”
“응.”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민준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
“몸에 흉터 더 늘려오면 안 만나줄 거예요.”
“그래.”
설이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웃으니까 예쁘잖아.”
그녀는 눈물이 다시 솟아올라 민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
민준이 떠난 뒤 설은 더 이상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곤, 연구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설은 민준을 생각하며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연구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 늦은 밤 2층 거실 문을 잠그겠다는 약속만은 지키지 않았다.
똑똑.
누군가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설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달려갔다.
이 집 안에서 그녀의 연구실 문을 노크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머니와 집에 상주하는 경호관뿐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문을 열어 방문객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다. 인정이었다.
“인정 씨, 무슨 일이에요?”
“밖에 눈 와요, 영애 님.”
“…….”
그녀의 말에 설이 시선을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얀 첫눈이 그녀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설이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본 순간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강설. 강설…… 태어나던 날 눈이 많이 내려서 강설인가. 로맨틱하시네, 부모님이.’
‘어? 설이다.’
강설이라는 이름엔 좋은 기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얀 눈을 보자 강설이라는 이름과 함께 민준과 즐거웠던 날들이 생각났다.
“나한테 그거 알려주려고 온 거예요?”
“첫눈이니까요. 게다가 영애 님이 통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니 제가 올 수밖에요.”
인정이 무덤덤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인정은 특별히 설이 좋아진 건 아니었지만 이제 그녀를 더 이상 미워하거나 그녀에게 질투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처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었다.
“난 인정 씨가 날 따라서 이곳까지 올 줄은 몰랐어요. 솔직히 말해봐요, 인정 씨는 날 보호하기 위해 내 옆에 있는 거예요, 아니면 감시하기 위해 있는 거예요?”
“오늘은 첫눈도 내리니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전 영애 님을 보호도 하고 또 감시도 하고 있어요.”
“국장님도 참 한결같으시네요.”
설이 팔짱을 끼며 피식 웃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던 것이다.
꼭 눈 때문이 아니더라도 설은 인정이, 그녀가 알면 불편할 이유로 옆에 있다고 해도 이제 인정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방법은 다를지 몰라도 그녀가 지키려고 하는 것과 인정이 지키려고 하는 것이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 국장님 말씀이세요? 갑자기 그분은 왜요?”
“인정 씨가 지금 여기 있는 게 국장님의 뜻이 아닌가요?”
인정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설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에요. 영애 님을 보호하는 건 제 일이지만, 나머진 민준 선배의 부탁 때문이에요.”
“그럼 그 사람이 인정 씨한테 날 감시하라고 했다고요?”
“네.”
인정이 시원하게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사람이 인정 씨한테 뭐라고 했는데요?”
“별건 아니에요. 그냥 영애 님이 잘 지내는지 틈틈이 지켜보라고 했어요. 저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선배랑 약속을 한 게 있으니 어쩔 수가 없네요.”
“무슨 약속이요?”
“선배가 없을 때 제가 영애 님 곁에 있겠다는 약속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건지 정말…….”
“…….”
인정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민준은 자신을 짝사랑한 여자에 대한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눈동자가 촉촉이 젖은 설을 보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혹시 그 사람한테서 무슨 소식이 있었나요?”
“아직 아무 얘기가 없는 걸 보면 지금 소식을 전할 만한 상황이 아닌 거예요. 하지만 이럴 때는 보통 무소식이 희소식이에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인정은 NIS 선배로부터 현지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얘길 들었지만, 설에게 그 얘기를 전하지는 않았다.
언제일지는 인정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귀동냥으로 선배들에게 주워들은 얘기에 의하면 현지에선 곧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펼쳐질 터였다.
선배들은 그녀에게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지만, 인정은 그 대열의 맨 앞에 민준이 서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차출된 요원들 중 여러 번의 인질 구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뿐이기 때문이었다.
“……고마워요, 인정 씨.”
설은 진심으로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인정은 민준과의 어쩔 수 없는 약속 때문이라고 했지만 설을 생각해 일부러 이곳에 온 거였고, 설은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진짜 고맙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랑 같이 커피나 한잔해요, 영애 님. 첫눈도 내리는데 우중충하게 안에만 있고 싶지 않아요.”
“그럴까요? 인정 씨는 무슨 커피 좋아해요?”
“에스프레소 마키아토요, 그렇지만 그냥 아메리카노 마실래요.”
“에스프레소 마키아토를 좋아해요?”
설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인정과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몇 번 있었는데 커피 취향까지 같다는 게 신기했다.
“제가 좋아한다기보다는 그걸 좋아한다는 남자가 있었어요. 그래서 몇 번 따라 마셨는데 이제 안 그러려고요.”
“그 사람이, 그 커피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전 민준 선배라고 말하지 않았는데요? 그렇지만…… 네, 맞아요. 뭐, 제가 선배를 좋아한 건 어차피 영애 님도 알고 계시는 일이니까요.”
이제 와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물론 설 앞이라 그녀는 좀 낯 뜨겁기는 했다.
그러나 인정이 민준에게 스토커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괴롭힌 것도 아니니 이 정도는 설이 너그럽게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설이 문을 잠그고 나오자 인정은 커다란 우산을 그녀 위로 높이 펼쳐 들었다.
“난 괜찮아요. 눈 맞는 게 정 불편하면 인정 씨나 써요.”
“저도 눈 맞는 거 좋아해요. 바람 맞는 것도 아닌데 눈 맞는 것쯤이야, 뭐.”
설이 손사래를 치자 인정이 우산을 도로 접어 돌돌 말더니, 우산을 지팡이 삼아 그녀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영애 님은 민준 선배가 왜 좋으세요?”
그녀가 슬쩍 설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 사람이 왜 좋은 건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 사람이 왜 좋은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설의 대답에 인정이 그녀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설은 민준과 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럼 영애 님은 선배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 그저, 선배가 마냥 좋기만 하신 거예요?”
“그 사람 앞에서 울거나 힘들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가끔 해요. 내가 울면 그 사람이 힘들 테니까요.”
‘그 사람 앞에서 다치거나 아프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 그럼 그 사람이 많이 울 테니까.’
“두 분 다 정말 별로인 거 아세요?”
인정이 씩씩거리며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는 이미 민준에 대한 마음을 접었는데 둘이 꼭 이렇게까지 확인 사살을 해야 하나 싶었다.
인정이 그보다 더 짜증나는 건,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그러고 있다는 걸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왜 얘기가 갑자기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설은 뽀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정을 보며 픽 웃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제가 선배한테도 영애 님이 왜 좋냐고 물었거든요.”
“그랬어요?”
“그랬는데, 선배도 똑같은 대답을 하더라고요. 영애 님이 왜 좋은 건지는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영애 님 앞에서 다치거나 아프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한대요. 그럼 영애 님이 많이 울 거라면서요.”
설은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지금 이렇게 첫눈을 맞고 있는데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자 눈가가 시큰해졌다.
“얼마 안 있으면 크리스마스네요, 영애 님.”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되었어요?”
“하긴, 그럼 뭐해요,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특별히 할 일도 없는데요. 뭐, 어차피 일하느라 누굴 만날 수도 없겠지만요.”
“그날은 인정 씨도 쉬어요, 난 별일 없으면 아마 집에 있을 것 같으니까요.”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인정이 미안한 표정으로 설의 눈치를 살피자 설이 피식 웃었다.
언젠가 민준이 지나가는 말로 설에게 크리스마스 때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땐 그에게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지만, 만약 민준이 지금 다시 묻는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오직 당신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이브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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