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78화 (78/94)

78화.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2)2016.09.29.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 크리스마스이브, Pakin 그룹이 운영하는 연수원에서 마침내 사랑의 밤 행사가 열렸다.

강당에는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올망졸망 모여 있었고, 직원들은 잠시 후 무대 위에서 열릴 연극을 준비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그들 사이에 즐거운 웃음소리가 오갔겠지만, 오늘 직원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차분했다.

그룹 회장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연은 핑크색 드레스를 입고 무대 안쪽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 나이에 핑크색 드레스가 말이 되냐며 의상을 담당한 디자인 부서 직원에게 항의했지만, 로미오 역의 빈우가 입은 촌스런 하늘색 턱시도를 보고 군말 없이 핑크색 드레스를 받아들였다.

“곧 연극 시작할 텐데, 부모님은 오셨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빈우가 서연 옆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물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오늘 열릴 사랑의 밤 행사에 가족들과 친구들, 연인을 초대했던 것이다.

서연은 지나가는 말로 엄마에게 얘기를 하긴 했지만 그녀가 오늘 이곳에 올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요 근래 엄마의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빠의 얼굴을 본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고, 오빠는 또 무슨 일인지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서연은 친구들을 초대할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직원들이 그녀의 가족이 아무도 안 온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리가 무슨 초등학생이야? 부모님 모시고 연극하게?”

서연은 문득 어렸을 때 다녔던 유치원 학예회에 그녀의 부모님만 참석하지 않아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엄마는 오빠가 아파 올 수 없었고, 아빠는 바빠서 올 수 없었다.

서연은 옛 기억을 떠올리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이제 그녀는 다 큰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은 미처 자라지 못했는지 그때 느꼈던 서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난 왔는데, 내가 이따 우리 부모님 소개시켜 줄까?”

“나한테 빈우 씨 부모님 소개를 왜 시켜줘? 괜히 오해하시게.”

그녀는 먼지를 털듯 드레스 자락을 툭툭 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행사 끝나면 뭐 할 거야?”

“그냥 집에 갈 거야.”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난 집에서 할 일이 아주 많은 사람이야.”

서연은 지금이라도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요 며칠 엄마의 표정이 어두웠는데, 거기에 그녀에 대한 근심까지 더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극 시작 10분 전입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연출을 맡은 직원이 큰소리로 외치자 서연은 의자에서 일어나 구겨진 드레스 자락을 반듯하게 폈다.

그녀는 촌스런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아무’엔 건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했어요, 서연 씨. 그리고 고마웠어요.

“......”

건우는 백 회장의 장례가 끝난 후 그녀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그가 그녀에게 보낸 메시지는 모두 과거형이었고 그 안에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아침 건우는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건우의 이번 출장은 비즈니스 때문이 아니라 사실 개인 일정 때문이라고 했다.

서연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건우가 이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보기에 건우는 Pakin에 별로 미련이 없어 보였고, 그녀를 만나는 순간마다 용기를 내야 했다는 건우는 이제 더 이상 용기를 내고 싶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5분 전입니다!”

그녀의 연극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 두 사람의 연극은 이미 끝이 나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열린 결말이라는, 아주 우울한 엔딩이었다.

**

설은 피랍되었던 인질들이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녀는 그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방송과 뉴스를 피해 다녔는데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방송을 보고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인질들이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에 제 일인 양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그들이 어떻게 구출되었는지, 구출되는 과정에서 사상자는 없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인질들이 무사하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정말 혼자 있어도 괜찮으시겠어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걱정 마세요.”

아주머니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기 전 설에게 다시 물었다.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가던 발걸음을 자꾸만 멈췄고, 설은 그럴 때마다 그녀에게 한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은 오늘 경호관들을 포함해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휴가를 줬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고 그들에게도 가족과 연인이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설은 인정에게도 휴가를 줬지만, 그녀는 설에게 집이 아닌 사무실로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급한 일이 있다는 인정의 표정이 어두워, 설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묻고 싶지 않았다.

“오늘 혹시 데이트하시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드는 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평상시와 다르게 곱게 화장을 하고 예쁜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연인과의 데이트를 앞둔 모습이었다.

설은 아주머니의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입가에 옅은 미소만 지었다.

사람들이 모두 집을 빠져나가자 커다란 저택은 곧 무거운 적막에 휩싸였다.

설은 어깨에 숄을 두르고 바깥 정원으로 나가 마당 한쪽에 놓인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고, 정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설은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던 빨간 양초에 불을 붙였다.

**

-필리핀 남부에서 무장 단체에 피랍되었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방금 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공항에는 그들을 환영하는 인파로 발 디딜…….

대통령 집무실 안, 대통령은 모니터 화면을 끈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국민을 구하기 위해 필리핀으로 갔던 요원들 중 한 명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또 다른 한 명은 현지 병원에서 극비리에 긴급수술을 받았다.

그는 김 국장으로부터 요원들 중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는 순간 곧바로 민준을 떠올렸다. 그리고 곧이어 설 생각이 났다.

‘김민준 요원은 무사합니까?’

그는 제일 먼저 김 국장에게 이 말을 물었다. 대통령은 그에게서 민준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지 않길 바랐다.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똑똑.

곧이어 집무실 문이 열렸다. 굳은 얼굴로 출입문 앞에 선 비서실장이 그에게 목례를 한 후 입을 열었다.

“도착했습니다, 각하.”

“들어오라고 하세요.”

대통령이 알았다는 듯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까운 청춘이 사라진 것에 대한 슬픔은 잠시 접어두고, 무사히 인질들을 구출해 온 요원들을 격려할 시간이었다.

젊은 요원들이 하나둘씩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대통령은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띠었다. 그 안에, 민준은 없었다.

**

늦은 밤, 마침내 연극이 끝났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하며 박수를 쳤고 서연과 빈우는 무대 중앙에 서서 관객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어떤 똑똑한 꼬마가 연극 도중에 왜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지 않느냐며 손을 들고 질문을 해 잠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그때를 제외하곤 매끄럽게 진행되었으며 또 잘 마무리된 연극이었다.

무대 중앙에 서서 인사를 마친 서연은 객석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엄마?”

웃고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엄마가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서연의 기쁨은 배가되었다.

“엄마!”

서연은 드레스 자락을 붙들고 단걸음에 무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흔들며 어리광을 부렸다.

“엄마 언제 왔어? 왔으면 나한테 얘길 해야지!”

“미안, 엄마가 조금 늦었어.”

그녀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서연의 등을 토닥거렸다.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어 올까 말까 망설였는데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이 끝난 후, 무대에 선 다른 배우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객석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찾았는데 서연만이 그러지 않았다.

시선을 내린 채 가만히 서 있는 서연의 모습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참 엄마, 이 드레스 진짜 촌스럽지 않아? 근데 내 옷보다 로미오 옷이 더 촌스러워서 내가 참았어.”

“그랬어?”

“응. 그리고 엄마, 나 너무 배고파! 연극 준비하느라고 제대로 못 먹었거든? 배고파서 나 지금 완전 어지러워.”

서연은 손을 배에 갖다 댔다, 이마에 갖다 댔다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그녀는 엄마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았다.

“저런,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뭐 했어?”

“아까까진 배가 안 고팠는데 이제 배고파졌어. 우리 둘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엄마. 오늘은 이브니까 늦게까지 하는 식당들이 많을 거야. 내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그래, 엄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나와.”

그녀는 서연이 뒤돌아 달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던 서연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졌다.

서연이 늘 괜찮다고 말을 해서 당연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동안 괜찮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늘 웃고 있던 딸의 표정 뒤로 그렇게 쓸쓸한 얼굴이 감춰져 있는 걸 몰랐다.

그녀는 가방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언제나 바빴고, 늘 가족의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요즘 남편이 어떤 일 때문에 바빴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오늘 그에게, 내일까지 남아 있는 몇 시간은 가족을 위해 써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예요.”

김 국장은 그녀에게 지금 청와대로 바쁘게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별일이 없다면 나중에 집에서 보자는 말을 덧붙였다.

“별일이 있어요. 그러니 바쁘더라도 지금은 여기로 와줬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오늘, 결혼한 뒤 처음으로 그에게 부탁을 했다.

그녀의 부탁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 거라는 걸 알았지만 이번이 아니라면 앞으로도 기회가 오지 않을 거였다.

더군다나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녀는 한번쯤은 가족이 우선순위가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김 국장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요원들을 둘러보던 대통령이 의아한 얼굴로 몇 발자국 떨어져 서 있던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분명 김 국장이 요원들을 데리고 청와대로 들어온다고 들었는데 그가 보이지 않다니 이상했다.

김 국장에게 김민준 요원은 왜 보이지 않는 거냐고 물을 참이었는데, 물어볼 대상마저 없는 상태였다.

“집에 중요한 일이 생겨 도중에 부득이하게 차를 돌렸다고 합니다. 제게 각하께 대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 국장 집에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까?”

대통령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민준도, 김 국장도 보이질 않는 걸 보니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비서실장이 대답을 망설이는 걸 보며 자신의 생각이 맞을 거라 확신했다.

비서실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통령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라 가족에게 가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말입니까?”

“네. 오늘이 가족과 처음으로 보내는 이브라고…….”

“김 국장한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대통령은 김 국장에게 안 좋은 일이 없다는 사실엔 안도했지만, 그의 대담한 결정엔 헛웃음이 나왔다.

이 자리는 고생한 요원들과 김 국장을 치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오늘 같은 날은 이곳에 나타나 그의 입지를 다지는 편이 나았을 텐데 가족들에게 간 걸 보면 그는 정말 야망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통령은 차렷 자세로 선 요원들과 한 명, 한 명 악수를 하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 자리에 민준만이 혼자 참석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대통령의 호감 섞인 눈도장을 찍을 수도 있었을 텐데 불참한 것을 보면 아마 그에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을 터였다.

대통령은 굳이 김 국장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민준이 어디로 갔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부전자전이었다.

**

서연은 엄마의 팔짱을 끼고 연수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은 후 직장 상사와 동료들에게 가족이 기다리고 있어서 먼저 가보겠다는 말을 했다.

연수원에서 밤새 음주를 즐길 각오가 되어 있었던 몇몇 직원들은 먼저 간다는 서연에게 섭섭함을 토로했지만, 엄마가 너무 엄격하셔서 어쩔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눈 온다, 엄마.”

인도를 따라 걷다 걸음을 멈춰 선 두 사람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연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자 그녀의 손바닥에 떨어진 눈송이가 체온에 사르르 녹아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서연은 아까부터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오늘 같은 날 엄마랑 있어서 섭섭하지 않아? 직원들하고 놀다 오지 그랬어, 그러면 더 재미났을 텐데.”

“엄마랑 같이 있는데 뭐가 섭섭해? 여기에 남아 있어 봤자 밤새 술이나 마실 건데, 뭘.”

“그럼 나는 그냥 돌아갈까?”

“어?”

서연은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자동차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린 김 국장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아빠가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요?”

“엄마한테 물어보니 여기에 있다기에 둘 다 데리러 왔지.”

“아빠, 안 바빠요?”

“일이 일찍 끝났어.”

김 국장은 슬쩍 부인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녀가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적은 처음이었기에, 김 국장은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가 자신에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궁금했지만 서연이 있기에 그건 나중에 묻기로 했다.

“그런데…… 서연이 넌 왜 장갑도 안 끼고 다니는 거야? 바람이 이렇게 찬데.”

김 국장이 서연의 빨간 손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서연의 손을 잡고 한쪽씩 끼워주었다.

“이건 아빠 장갑이잖아요.”

“아빠는 괜찮아. 이제 집에 가자.”

김 국장은 자동차로 돌아가 시동을 켰고, 서연은 장갑 낀 손을 두 뺨에 올리며 배시시 웃다가 얼른 자동차 뒷좌석에 올랐다. 참 포근한 겨울밤이었다.

**

테이블 위에 켜놓은 빨간 초의 촛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설이 양손으로 둥글게 초를 감싸며 바람막이를 만들자 흔들리던 촛불이 겨우 잠잠해졌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녀의 손이 따듯한 열기를 만나자 그 냉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설은 앞에 놓아두었던 호신용 경보기를 오른손 안에 가만히 그러쥐었다. 크리스마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에게선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맨살이 드러난 팔다리가 추위에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설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기에, 추위라든지 배고픔에 대한 생각들이 끼어들 작은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금방 온다고 했잖아.”

작게 울먹거리는 설의 손등 위로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또다시 툭 떨어져 내렸다.

‘누르면 진짜 와요?’

‘그럼.’

설은 경보기의 겉만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만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버튼을 눌러도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 설은 선뜻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마지막 희망처럼 손에 쥐고 있는 경보기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바람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앗아가 버릴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찬 바람이 불어와 테이블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양초의 불이 꺼졌다.

촛불이 꺼진 순간 설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설은 서럽게 흐느끼며 경보기의 버튼을 두 손으로 힘껏 눌렀다.

삐삐삐삐-

고막을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어둠이 그 소리를 크게 증폭시켰기에 설은 자신의 울음소리마저도 듣지 못했다.

“내가 그거 누르면 시끄럽다고 했잖아.”

눈물 너머로 뿌옇게 흐려진 형체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말을 했지만, 경보기 소리에 묻혀 그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설은 그게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걸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민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설은 민준을 두 팔로 감싸 안고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녀의 몸 안에 남아 있는 수분이 한꺼번에 밖으로 흘러나오는 양,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내가 울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잖아.”

설은 그에게 그동안 울지 않고 기다렸다고, 지금 흘리는 눈물은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메리크리스마스, 야옹이.”

그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귓가에 애틋하게 속삭였다.

민준은 설이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크리스마스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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