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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79화 (79/94)

79화.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3)2016.10.04.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눌렀습니다.”

호신용 경보기의 성능은 훌륭했고 이웃 주민들의 신고 정신은 투철했던 덕분에, 경보음이 들린 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설의 집에 지구대 경찰들이 도착했다.

민준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한 후 그들을 돌려보냈다.

경찰들은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있는 설을 보고 민준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민준을 옹호하듯 그의 팔을 두 손으로 꽉 붙들자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마 연인들의 다툼 정도로 여겼던 모양이었다.

“강조국 씨.”

민준이 팔짱을 끼고 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설은 그가 입을 막 열려는 순간, 그보다 빠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당신이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내가 이걸 누르진 않았을 거예요.”

“내가 지금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게 아니면요?”

“당신이 왜 지금 혼자 있는 거지? 그리고, 경보음이 났는데도 왜 아무도 당신한테 달려오지 않는 거야?”

“내가 전부 휴가를 보냈으니까요. 내일이 크리스마스잖아요.”

민준이 목을 스트레칭하듯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설이 휴가를 줬다고 해도 경호관들이 한 명도 그녀 곁에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그러다 민준은 담장 밑 어둠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한 경호관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 아무리 그녀가 휴가를 줬다고 해도 그들이 설을 혼자 두고 휴가를 떠날 수는 없을 터였다. 설은 순진하게도 그들이 정말 모두 떠났을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저번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그는 움직임 감지기의 작동을 멈추고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경호관은 분명 그걸 보았을 텐데도 민준에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질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처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처 출발하지 못한 사람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민준이 고개를 돌려 설의 눈을 마주했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떤 장르의 영화를 찍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설이 당황하지 않도록 관객이 한 명 있다는 사실은 얘기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러나 설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춥네. 안에 들어가 있어.”

“당신은요?”

“잠깐 정원 좀 둘러보고 들어갈게.”

민준은 설의 어깨를 빙글 돌려 집 안으로 먼저 들여보냈다.

설은 안으로 들어가기 전 뒤를 돌아보며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그는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설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민준은 곧바로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경호관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민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밝은 곳으로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뭐합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영애 님께서 휴가를 가라고는 하셨지만, 영애 님을 혼자 두고 갈 순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보내고 저는 이곳에 남았습니다.”

“혹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민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경호관은 그를 경계하지 않았고, 민준이 보안기기에 손을 대고 담을 넘어들어왔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나를 알고 있다라…… 어떻게?”

민준이 재킷 안쪽에서 빠르게 총을 꺼내 남자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자 그는 황당한 얼굴로, 항복하듯 양손을 어깨높이로 올렸다.

“나는 널 모르는데.”

철컥.

민준이 손가락에 방아쇠를 걸자 그제야 사태를 짐작한 경호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자는 민준의 직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왜 이러십니까! 저는 단지 김민준 씨가 이곳으로 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지시? 누가.”

“제가 김민준 씨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합니까?”

민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그가 알기론 청와대 경호실에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외에 또 다른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민준이 그에게 겨누었던 총을 치우자 남자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그저 영애에게 손님이 오는가보다,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고 놀란 건 자신이었기에, 남자는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안합니다.”

민준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그의 진심을 전하기에 부족하진 않았다. 민준의 말에 남자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담 넘지 마시고 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오십시오.”

“아, 그건 내가 굴뚝을 찾다가…….”

“…….”

“앞으론 참고하도록 하죠.”

남자는 민준에게 눈인사를 한 뒤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민준은 그의 권유를 받아들여 1층 현관문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가, 차임벨을 힘주어 꾹 눌렀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빨간 미니드레스를 입은 설이 양팔로 민준의 허리를 감쌌다.

“아직도 몸이 차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밖에 있었던 거야?”

“한 서너 시간쯤 있었나 봐요.”

민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그의 얼굴과 어깨, 손을 하나하나 근심스런 얼굴로 살피기 시작했다.

“……안 다쳤죠?”

“응.”

“다행이에요.”

“…….”

“그런데 당신은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민준은 불안해하는 설을 안심시켜 주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지만, 언뜻 보인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피곤해서 그래.”

낮게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민준은 손바닥으로 양쪽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더니 설을 두 팔로 안고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많이…… 피곤해요?”

“응. 많이 피곤해. 그리고 당신도 많이 보고 싶었고.”

민준은 눈을 감고 나지막이 말했다. 설이 그의 등을 마주 감싸 안자 그제야 그녀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갑자기 민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불쑥 올라와 목구멍 끝까지 찼다. 그는 돌아왔지만, 함께 돌아오지 못한 동료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동안 아주 잘 지내고 있었어요. 잘 먹고 잘 자고, 할 일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라도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난 아주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요.”

“……그랬어?”

“응, 그랬어요.”

“기특하네.”

민준은 여전히 설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왼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영애 님은 작은 바람 소리만 나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요.’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인정에게서 설의 근황에 대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모르는 체했다.

민준은 오늘 대통령의 격려를 받기 위해 청와대로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돌려 이곳으로 왔다.

그에게는 대통령이 아니라 설을 보는 게 위로였고 격려였다.

“난 잘 못 지냈어.”

민준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순간들이 두렵지 않았는데 이제는 두려워졌다.

함께 돌아오지 못한 동료를 떠올리면, 어쩌면 자신도 설을 두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많이 힘들었어요?”

“응, 많이 힘들었어.”

민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괜찮다고 말을 할까싶기도 했지만, 설이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챈다면 그녀의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설은 민준의 양어깨에 손을 얹고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있었는데 이제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더 괜찮아질 테지.”

그녀는 숨김없이 말해주는 민준을 보며 감정을 감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을 위한다는 마음이 어쩌면 그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도 사실은 당신을 기다리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하지만 앞으론 더 괜찮아질 것 같아요. 이건 진심이에요.”

망설이다 덧붙인 그녀의 말에 민준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그는 애틋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았다.

“나 배고픈데,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어줄래?”

“먹다가 도중에 사라지진 않을 거죠?”

“핸드폰 꺼놓을 거야.”

“그래도 돼요?”

“그래도 돼.”

지금 대통령도 마다하고 온 사람을 누가 부를 수 있겠는가.

민준이 웃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 버튼을 막 누르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설은 실망스런 얼굴을 했다.

“누구예요?”

“모르는 번호야.”

아는 사람이었으면 무시하려 했지만, 모르는 번호이기에 그는 전화를 받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민준은 아랫입술을 내밀어 불만을 표시하는 설을 보며 피식 웃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목소리를 들어보니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 같군.

“누구십니까?”

-나, 조국 아버지일세.

“…….”

‘왜요? 지금 당장 가봐야 하는 거예요?’

설은 갑자기 얼굴이 심각해진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민준은 고개를 옆으로 젓더니 옆으로 몇 걸음 옮겨 통화를 이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 조국이 있나?

“네, 그렇습니다.”

-나보다는 내 딸을 만나러 가는 게 더 급했나 보군.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민준은 오늘 청와대에 나타나지 않은 그를 보며 대통령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전화를 건 대통령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보는 눈이 있으니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하도록 하고, 앞으로는 담 넘지 말고 대문으로 다니게.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하라는 대통령의 말에 민준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말은 민준의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였다.

“감사합니다.”

민준은 인상을 잔뜩 쓰고 자신을 바라보는 설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감았다 뜨며 미소 지었다. 그에게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인지 알면 그녀는 무척 놀랄 터였다.

“누구예요? 지금 가봐야 하는 거예요? 지금 가야 한다고 해도 조금만 더 있다 가요.”

통화를 끝낸 민준이 그녀에게 다가오자 설이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봐야 되는 건 맞는데, 크리스마스는 같이 맞이해야지.”

“지금 당장이요?”

“조금만 있다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가만히 내려앉았다.

민준은 한때, 설이 영영 자신의 손에 닿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를 그리워하며 고통스럽게 보낸 시간들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가슴은 그 괴로운 날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설은 산타가 그에게 주고 간 선물이었다.

**

“5. 4. 3. 2. 1. 땡! 메리 크리스마스, 김서연.”

서연은 조그만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밤 12시가 지났으니 마침내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그녀는 창문 너머로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케이크에 포크를 다시 한 번 찔러 넣었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였는데도 왠지 가슴 한쪽이 허전했다.

서연은 그 허전함을 채우려 끊임없이 입안으로 케이크를 밀어 넣었다.

혹시 건우가 연락을 해오지 않을까 해서 그녀는 핸드폰을 내내 곁에 두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가 다 지나도록 그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많은 용기를 내야 했다는 건우는 이제 더 이상 서연을 위해 용기를 낼 필요가 없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노크했다.

“아직까지 안 자고 뭐 해?”

그녀의 아버지였다.

김 국장은 대통령을 만난 이후 가끔 서연에 대해 생각했다.

대통령이 그에게 딸과의 거리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김 국장은 처음으로 자신과 서연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뒤 곧바로 벌어진 사건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사건이 종결되고 민준이 돌아오자 다시 서연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어차피 오늘 회사도 안 가는데요, 뭘.”

서연은 입안에 케이크를 넣고 오물거리며 대답했다.

김 국장은 들어와서 방문을 닫고 그녀 곁에 나란히 앉았다.

케이크가 가득 차 있던 접시는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빈 접시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크리스마스인데 남자친구 안 만나?”

“남자친구 없는데.”

“예전에 크리스마스 때 만났던 녀석하고는 헤어졌어?”

“걘 4년 전에 만나던 애고요.”

“…….”

김 국장은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집 앞에서 딸과 함께 있던 녀석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인지는 미처 몰랐다.

“그런데 오빠는 왜 집에 안 와요?”

서연은 그에게서 오빠가 출장을 갔다 오늘 귀국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빠의 근황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하나도 없는 아빠였다.

“민준인 여자 만나러 갔어.”

“오빠한테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아빠는 솔직히 그 사람이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데, 있긴 있어.”

“오빠 여자친구를 봤어요? 아빠는 매일 바쁘다면서, 용케 시간이 있었네.”

서연은 무심하게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건우를 몇 번 만나는 동안 가족들 중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서연이 얘기를 안 한 탓도 있었지만, 그녀가 평소와 달리 늦게 귀가해도 엄마 아빠는 그녀가 집에 왜 늦게 들어오는지 서연에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빠도 우연히 알게 된 거야. 그리고 너는 남자친구도 없잖아.”

김 국장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변명하듯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있었어요. 그것도 바로 며칠 전까지.”

“…….”

“그 남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에는 남자친구가 맞았던 것 같아요.”

“남자친구였을 수도 있고 아니었을 수도 있다니, 무슨 말이 그래?”

“그 남자 마음은 내가 모르잖아요. 잘해준다고 해서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서연이 하는 말의 뉘앙스가 미묘했기에 김 국장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어쩐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그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좋아하니까 잘해준 거겠지.”

“나는 케이크를 좋아해. 하지만 케이크가 없다고 못 살진 않잖아. 아빠도 나를 좋아하지만 내가 없다고 못 살진 않을 것처럼 말이야.”

“서연아.”

“내가 지금 아빠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서연은 커튼을 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커튼 자락을 손에 쥐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연은 조금 더 먼 곳으로 시선을 던져봤지만, 인적이 끊긴 거리는 한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내가 옆에 없어도 서운하진 않잖아요.”

그녀는 거리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서연은 오늘 연수원에서 건우를 기다렸다. 그가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녀의 연극을 보러 오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상을 치른 그에게 아직 그럴 여유가 없다고는 해도 건우가 그녀를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최소한 서연에게 연락은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의 가족처럼, 건우 역시 서연이 옆에 있지 않아도 삶이 흔들리지는 않는 거였다.

“오빠가 없으면 서운해 하시겠지만요.”

“…….”

서연은 결국 이 말까지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아빠의 얼굴이 급격히 싸늘해졌지만 농담이었다고 얼버무리며 다시 주워 담고 싶진 않았다. 그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오빠가 아팠을 때 아빠가 보였던 반응은 서연 자신이 아팠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아빠는 유독 오빠의 상처에 민감해 했고, 그건 두 사람이 어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김 국장은 서연의 말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서연에게 좀 소홀했던 것 같아 관심을 더 기울여야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던 참이었다. 딸이 이렇게까지 거리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김 국장이 더 놀랐던 건, 서연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서운해 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당연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간신히 진정한 김 국장은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난 사실 아빠가 오늘 나를 보러 올 줄은 몰랐어요. 엄마가 오는 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거든요. 만약 오빠가 오늘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엄마랑 아빠는 아까 나한테 오지 않았을 거예요.”

서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민준이 오늘 무사히 귀국하지 못했더라면 그는 물론 부인 역시 서연에게 가지 않았을 거였다.

그러나 그게 사실의 전부는 아니었고, 서연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는 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서연에게 그런 깊은 얘기까지 할 순 없었다.

“엄마도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알아? 그리고, 아빠는 네가 사달라는 거 다 사주고 해달라는 것도 다 해줬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김 국장은 농담처럼 가벼운 말로 이 상황을 넘어가고 싶었다.

“맞아요, 다 해줬어요. 아빤 사고 싶은 걸 알아서 사라고 나한테 카드를 줬고, 난 그걸로 내가 갖고 싶은 걸 샀으니까요.”

‘그래도 내가 제일 기뻤던 건 바로 아빠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준 일이란 걸, 아빠는 모르겠지.’

“그럼 도대체 문제가 뭐야?”

“문제는 없어요. 난 지금도 괜찮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니까요.”

“그럼 됐네. 별일 없으면 엄마랑 내일 쇼핑 갈래?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 아빠가 카드 줄 테니까.”

“됐어요. 나도 돈 있어요.”

“네가 무슨 돈이 있어? 회사 들어간 지 몇 개월도 안 된 녀석이.”

그녀는 김 국장의 말에 피식 웃었다.

“왜 웃어?”

“나 회사 들어간 지 1년 넘었어요, 아빠.”

“…….”

“나 이제 잘 테니, 나가면서 불 좀 꺼주고 나가요.”

서연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 올린 후 눈을 감았다. 김 국장은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잘 자라.”

김 국장이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가자 서연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커튼을 열고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하얀 눈이 쌓여갔고,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 어디에도 사람의 발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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