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대와 매일 이렇게2016.10.06.
“……아침이야.”
그녀의 등 뒤에서 민준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비몽사몽 중인 설이 민준을 향해 몸을 돌리자 그는 그녀를 당겨 가슴에 안았다.
잠에서 막 깨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설은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댄 채 고른 숨소리를 내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한쪽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젯밤 자정을 넘긴 시각, 민준은 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통령이 당부했던 것처럼 너무 늦지 않게 그의 아파트로 귀가한 거였다.
다만 들어갈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나올 때는 대문으로 나왔다는 것과 민준 혼자가 아니라 설과 함께 나왔다는 거였다.
그건 그가 자신을 혼자 두고 가지 말라는 설의 부탁과 늦지 않게 귀가하라는 대통령의 말을 둘 다 수용한 결과였다.
“……밖에 눈이 많이 왔을까요?”
설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제 민준을 만나고 나서 긴장이 풀어졌는지,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물론 민준을 만나고 긴장이 풀어진 게 지금 그녀가 피곤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의 체력이 곧 국력이라는 민준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나라일 터였다.
“눈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 내가 눈사람 만들어줄까?”
“……아니, 지금은 그냥 이렇게 있을래요. 나 그동안 너무 피곤했나 봐, 아직 졸려요.”
“그동안 뭐 하느라고 그렇게 피곤했던 거야? 얘기 좀 해봐.”
“…….”
설은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 없이 두 팔로 민준을 끌어안았다.
“대답 안 해줄 거야?”
“그냥, 집에서 책 읽고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 공부는 언제 끝나는데?”
“김민준 씨, 내 공부에 관심 두지 말아요.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고 난 내 일을 하는 거니까요.”
“나는 당신 공부에 관심 두는 게 아니라 당신한테 관심 두는 거야.”
민준은 그의 이마를 설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콩 부딪쳤다.
설이 평창동으로 나왔다는 건 대통령이 암묵적으로 그녀가 하는 일을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NIS에도 설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말고 뒤에서, 보이지 않게 그녀의 안위에만 신경 쓰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들었다.
그리고 NIS는 설이 아니라 오히려 원자력연구원 황 원장에게 이중 삼중의 경호를 붙임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를 의심의 시선을 그쪽으로 유도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황 원장과 합의한 결과였다.
“나한테 신경 쓰게 하고 싶진 않은데 솔직히 당신이 있어서 안심이에요. 내가 어디서 무얼 하든 당신은 누구보다 먼저 나를 찾아올 거니까요.”
설이 나른하게 웃으며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민준에게 좋은 연인은 아니었다.
민준이 그녀를 사랑하는 한 그는 설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마음속에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설은 그녀가 영애라서가 아니라, 골치 아픈 영애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같은 일급 요원을 언제까지 개인 용도로 부려먹을 셈이야?”
“당신한텐 미안하지만 난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그럴 건데요?”
설은 혀를 쏙 앞으로 내밀었다가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물결처럼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민준의 가슴을 간질거렸다.
“강조국.”
“말해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민준이 한 박자 뜸을 들였다.
“그냥 나랑 같이 살래?”
그는 설의 머리카락을 그녀의 귀 뒤로 가만히 넘겨주며 물었다.
설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거리자 민준이 옅게 웃으며 그녀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그는 평온하게 웃고 있었지만, 설을 바라보는 눈빛은 진지했다.
“뜬금없이 나랑 같이 살자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당신이 지금부터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내가 최선을 다해 근접 경호를 하겠다는 뜻이야.”
“흐흠…… 당신 뜻이 정 그렇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설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준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놓았다.
“그게 그렇게까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해야 하는 거야?”
“솔직히 결혼하자는 말을 이렇게 듣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것도 이렇게 자다 일어난 아침에 말이에요.”
“……아.”
민준은 당황한 나머지 할 말을 잃고 멍한 눈으로 설을 바라보았다.
그는 단지 두 사람이 함께 저녁을 먹고, 또 같이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오늘처럼 설을 품에 안고 아침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이 한 말이 청혼의 말이라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미안해. 방금 건 일단 못 들은 걸로 해줘.”
그는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녀에게도 프러포즈에 대한 로망이 있을 텐데, 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치사하게 청혼을 다시 무른 거예요?”
“나한테 서운한 거 아니었어?”
“당신이 이렇게 반지도 줬는데 내가 왜 서운해요? 그렇긴 해도 내 남은 일생이 걸린 문제인데 쉽게 결정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당신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정말 나하고 앞으로 평생 살 수 있을지 말이에요.”
설은 웃으며 반지를 끼고 있는 왼손을 펴서 그 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민준이 설의 왼손을 잡아 손가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난 지금까지 내 미래가 궁금했던 적이 없었어. 그런데 지금은 10년 뒤, 20년 뒤에 내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꽤 궁금해.”
“당신이 미래에 어떻게 살고 있길 바라는데요?”
“내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당신이 내 옆에 있고 당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어.”
“나랑 똑같이 생긴 여자아이요?”
“응. 그렇지만 너무 똑똑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민준은 설을 닮은 여자아이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설을 닮은 아이는 참 예쁠 터였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했어요? 난 당신하고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결정 안 했는데?”
“당신을 다시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왠지 그 애는 고집도 세고 말썽쟁이일 것 같아.”
“그건 안 돼. 당신 성격까지 닮길 바라는 건 아니야.”
“뭐라고요?”
설은 씩씩거리며 민준을 잠시 흘겨보다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그와의 결혼을 이따금 생각하긴 했지만, 아이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아이라는 생각을 하자 민준을 꼭 닮은 어린 남자아이가 바로 떠올랐다.
설은 어린 민준을 다시 만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그녀가 몸을 뒤집어 침대에 배를 깔고 눕더니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민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 예전에 내가 당신한테 내 꿈은 베짱이가 되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혹시 기억나요?”
“베짱이?”
“응. 내 꿈은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남자를 만나 놀고먹으며 사는 거라고 말했잖아요. 뭐야, 잊어버렸나 보다.”
“아니야, 기억해.”
설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민준이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가 설을 속이고 그녀의 목걸이를 가져간 날이었다. 그도 그날 설과 나누었던 대화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전, 안기영에게 개미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개미가 되어 추운 겨울날 베짱이와 함께 함박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싶다고 말이다.
그땐 이뤄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막연한 꿈일 뿐이었는데, 민준은 지금 그 꿈속에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 설과 함께 있으니 말이다.
“이제 내 꿈은 내가 사랑하는 개미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그 개미는 자기 일도 해야 하고 베짱이도 틈틈이 돌봐야 하니 많이 바빠야 하겠지만 그래도 난 그 개미랑 살고 싶어요.”
“내가 알고 있는 그 개미 말이야?”
“맞아요. 그러니까 난 당신이 나만의 개미가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민준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더니 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의 손을 잡자 민준은 그녀를 일으켜 그 옆에 나란히 기대앉게 했다. 민준이 손을 뻗어 설의 한쪽 뺨을 감쌌다.
“강조국 씨, 지금 나한테 청혼하는 겁니까?”
“응. 청혼하는 거예요. 받아줄 거죠?”
“난 당신과는 다르게.”
“……?”
“생각할 시간 같은 건 필요 없어.”
그에게 설과 함께 할 미래가 괜찮을까, 좋을까, 행복할까 등의 생각은 필요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고,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난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당신과 같이 있고 싶어.”
그는 마음속으로 내년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설과 함께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랐다.
민준은 그가 예전에 바랐던 꿈이 이루어졌으니 지금 바라는 꿈 또한 언젠가 그의 현실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30년 뒤에도…….”
그녀의 뺨을 감싼 그의 손바닥으로 따듯한 열기가 옮겨 왔다.
민준이 말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고르자 설은 발그레해진 뺨을 내보이며 그에게 기쁘게 웃어 보였다.
설은 며칠 사이 깨달은 게 있었다. 그녀에게 그의 사랑이 없다면 앞으로 잘 살 수 없을 거라는 걸 말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미래는 불안했고 또 앞으로의 일도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불안한 마음보다 더 컸다.
“나는 당신을 늘 지금처럼 사랑할 거야.”
민준의 말이 끝나자 설은 몸을 돌려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민준은 설의 등을 어루만지며 곧 부모님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분께 설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결혼을 하겠다는 뜻을 전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가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나, 오늘 다녀올 곳이 있어.”
민준이 설의 손을 풀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를요?”
“……친구한테 작별 인사를 해야 하거든.”
“…….”
설의 눈에 말간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젯밤 민준이 지치고 힘든 얼굴을 했던 건 분명 이 일과 관련이 있을 거였다.
어쩌면 설이 민준을 찾아 술집에 갔을 때 만난 그의 동료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떠올렸고, 그다음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설은 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는데 눈가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울지 마. 당신이 울면 내가 마음이 좋지 않아.”
민준은 그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그는 한때 동고동락했던 동료를 잃게 된 심정을 겨우 몇 번의 눈물로 표현할 순 없었다.
민준은 동료보다도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버지를 잃게 된 그의 가족들을 생각했다.
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준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평창동으로 데려다주기 싫은데. 오늘부터 그냥 당신하고 여기서 살까 봐.”
“이따가 짐 싸서 올까요?”
민준은 진지하게 반문하는 설이 사랑스럽고 또 고마워서 그녀를 두 팔로 껴안았다.
그는 어젯밤 설이 왜 자신과 함께 있으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민준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 고집을 부려 따라나선 거였다.
“저녁에 평창동으로 갈게. 같이 저녁 먹자.”
“그래요. 우리 둘이 같이 먹어요.”
오늘 밤 설은 그에게 샤브샤브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혀를 델 만큼 뜨겁지 않고 그가 따듯함을 오래오래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온도로 말이다.
**
서연은 얼굴만 밖으로 내놓고 이불을 턱밑까지 덮은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벽에 몇 번 더 일어나 밖을 살펴보았지만,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서연은 오전 내내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조금 전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기에 얼른 메시지 함을 열어보았지만, 그녀가 기다리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어머니께 오빠가 오후에 집에 잠깐 들른다고 말씀드려.’
발신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동안 통 연락이 없다 불쑥 나타난 오빠, 민준이었다.
옛날 같으면 오빠한테 선물 사 왔는지부터 제일 먼저 물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서연은 알았다고 짤막하게 답을 보낸 후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건우를 만나야만 하는 이유를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백 회장이 그녀에게 오빠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이냐는 거였고, 둘째는 백 회장 때문이 아니라면 왜 그가 서연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용기가 필요했냐는 거였다.
이 두 가지는 건우만이 그녀에게 답해줄 수 있는 얘기였다.
서연이 그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이것들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엄마가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서연의 침대에 걸터앉아 서연을 내려다보았다.
“계속 이렇게 누워만 있을 거야? 특별히 할 일 없으면 엄마랑 바람이나 쏘이러 나갈까?”
“지금 나 명상하고 있는 거야.”
“눈 뜨고 천장 보면서?”
“응.”
“…….”
엄마가 서연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서연은 지난밤 아빠가 엄마에게 뭔가 얘기를 했을 거라 짐작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다행히 이 어색한 공기를 바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참, 오빠한테 연락 왔어. 이따가 집에 들른대.”
“민준이가 집에 들른다고 했어?”
“응. 엄마랑 아빠한테 할 말이 있나 봐.”
“그렇구나. 그런데 엄마는 그것보다 우리 딸이 지금 왜 천장만 보고 누워 있는지가 더 궁금한데?”
오빠 얘기로 대충 넘어가려고 했지만 실패한 서연은 양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집어넣으며 엄마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동안 몇 번 만난 남자가 있었어.”
“그랬어?”
“아빠한테는 말하지 마. 그 사람이랑은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서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그녀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알았어. 말 안 할게. 그런데 그 사람하고는 헤어진 거야?”
“……그건 나도 몰라.”
“응?”
“그냥 연락이 없어.”
“그럼 네가 연락을 해보면 되잖아. 그 사람한테 무슨 사정이 있을지도 몰라.”
“…….”
서연은 엄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건우가 연락하길 기다리기만 했지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넌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왜 먼저 연락을 해보지 않는 거야?”
“그 사람이 싫다고 하면…… 이제 그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되니까.”
“그 사람도 혹시 너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녀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항상 밝고 씩씩해서 혼자 둬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서연이 이렇게 겁이 많고 용기가 없는 아이로 자란 건 엄마인 그녀가 그렇게 키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좋아한다면 어제 나를 찾아왔을 거야.”
“그건 아니야, 서연아. 엄마랑 아빠는 어제 너한테 가지 못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건 절대 널 덜 사랑해서가 아니야. 엄마 아빠는 네가 너무 소중해서, 우리가 네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
“엄마…….”
‘그 사람한테 너무 고맙고 미안해서.’
그녀는 마지막 말을 안으로 삼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서연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걸 지켜보면서, 민준의 친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들은 민준의 친부가 어린 민준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민준이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그녀의 곁으로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이 서연을 사랑하는 마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민준을 키우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아무튼 네가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본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혼자 추측하면서 이렇게 누워만 있지 말고 네가 먼저 연락을 해봐. 엄마는 네가 용기를 냈으면 좋겠어.”
“…….”
“그리고 이거 받아.”
그녀는 서연에게 신용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받아. 아빠가 너한테 전해주라고 했어.”
“나 이거 필요 없다니까.”
“아빠는 이게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야. 그러니까 필요 없어도 이걸로 커피라도 사 먹어.”
“……괜찮다니까 그러네.”
서연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카드를 받았다.
그녀는 엄마의 말처럼 사람마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엄마는 이만 음식 준비하러 나가야겠다. 엄마 장 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
“지금 장을 보러 가겠다고?”
“민준이 온다면서, 저번에 보니까 얼굴이 까칠한 게 엄마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 녀석, 그러니까 집에서 밥 먹고 다니면 얼마나 좋아.”
서연은 미간을 좁히며 민준을 생각하는 엄마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런 엄마에게 조금도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 장 보러 안 갈래. 어차피 맛있는 건 다 오빠 줄 거잖아. 아야! 아 왜!”
그녀가 서연의 등짝을 찰싹 때리자 서연이 씩씩거리며 엄마를 흘겨보았다.
“너나 민준이나 둘 다 부모 마음을 어쩜 그렇게 몰라주는지 섭섭해서 그런다, 왜!”
“내가 뭘.”
“너 때문에 아빠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 두 녀석 다 얼른 결혼시키고 네 아빠랑 둘이 살든가 해야지, 둘이 어쩜 그렇게 돌아가며 걱정을 시키는지.”
“오빠는 지금 만나는 언니 있다던데?”
“민준이가?”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서연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 아빠는 이미 그 언니 만나 봤대. 오빠랑 지금 같은 회사 다니는 언니인가 봐.”
오빠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기쁜 소식이었다. 서연은 사랑에 빠진 오빠의 행복한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같은 회사라고?”
그녀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민준이 만난다는 아가씨가 그와 같은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늘 민준이 오면 만나는 여자에 대해 물어보고 집으로 한 번 데려오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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