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대통령의 사위2016.10.18.
건우와 함께 밖으로 나온 서연은 일부러 인도에 눈이 쌓인 곳을 골라 걸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귀에 들리는 뽀득뽀득 소리가 좋았다.
카페를 나선 뒤 일단 좀 걷자고 제안한 건우는 거리를 걷는 동안 줄곧 서연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녀가 눈이 쌓인 곳을 골라 멀어질 때마다 두 사람의 팔은 팽팽해졌다 느슨해지길 반복했다.
서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건우를 흘끔 쳐다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물어봐요.”
“부사장님이 나한테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고 문자 보냈잖아요, 그거 무슨 뜻이었어요?”
“건우 씨가.”
“건우 씨가요.”
건우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그는 서연이 건우 자신을 아저씨도 아니고 그쪽도 아닌 부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무척 듣기 거북했다.
“내 마음대로 서연 씨를 아버지 앞으로 데려가서 미안했고, 그런데도 서연 씨가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도와줘서 고마웠다는 뜻이었어요. 아버지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효도가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혹시 한국으로 안 돌아올 생각이었어요?”
건우가 가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녀의 말대로, 그럴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서연이 그에게 호감은 갖고 있지만, 그 이상의 감정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건우가 한국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타국 공항에 발을 내딛자마자 그는 자신이 한국에 마음을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건우는 이번에는 과거처럼 도망치지 말고 복잡한 문제들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했다.
“그럴까도 생각했어요. 내가 원래 도망가는 걸 잘하거든요.”
“그럼 부사장님은 한국으로 억지로 잡혀 온 거예요?”
“건우 씨는.”
“알았어요, 건우 씨.”
건우가 다시 호칭을 정정해 주자 서연이 이마를 찡그렸다.
건우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아저씨니 그쪽이니 하면서 그녀 멋대로 잘만 불렀는데, 회사 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부사장님이라는 말이 그새 입에 달라붙었던 것이다.
서연은 건우 씨란 말이 어색하긴 했지만, 이제 그를 마음 편히 부를 수 있는 호칭이 생긴 것은 좋았다.
“억지로 잡혀 온 게 아니라 내 발로 걸어 들어왔어요. 서연 씨한테 내가 싫은 게 아니라면 나를 진지하게 만나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고요.”
“그런데 왜 나한테 먼저 연락하지 않았어요?”
“그전에 먼저 다녀올 곳이 있었거든요.”
건우가 서연에게 감추고 있는 것들은 죄다 그녀에게 미안한 것들뿐이었다.
안기영도, 민준과 설과 있었던 여러 가지 일도, 거기에 건우를 잘 알고 있는 김 국장까지 어느 것 하나 그가 마음 편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건우는 다른 사람들은 우선 제쳐 두더라도 건 기영과의 관계만큼은 바르게 정리하고 싶었다.
“혹시 옛 여자를 만나 과거를 정리하고 온 거예요?”
“여자는 아니고 옛 동료를 만나 과거를 정리하고 왔어요.”
“결국 여자라는 건데 그럼 뭐가 달라요?”
“남자와 여자로 만났던 사이는 아니지만, 그 친구한테 마음의 빚이 남아 있었거든요.”
“건우 씨한테 그런 여자가 또 있었어요?”
“……또?”
서연은 아차 싶었다.
건우와 오빠가 설이라는 언니를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였다는 걸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말을 꺼내 버린 거였다.
그녀는 얼굴이 굳어진 건우를 보며 말을 꺼낸 걸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혹시 들었어요?”
“뭘요……?”
“서연 씨 오빠와 내 얘기요.”
“…….”
건우는 대답 없는 그녀를 보며 서연이 그의 얘기를 알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건우가 한 여자를 두고 민준과 신경전을 벌였다는 사실 정도는 회사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는 그 이야기를 들은 서연의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뭘요?”
“뭐든지 다, 지금 서연 씨 마음에 걸리는 것 전부요.”
“그냥 안 물어볼래요.”
서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건우를 생각하면 민준 오빠와 그 언니 생각이 났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고, 또 같은 사람을 좋아했던 두 사람이 나중에 만나게 될 경우도 지금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건우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그가 서연을 진지하게 만나기로 결심한 이상 이 부분은 어떻게든 마무리 짓고 넘어가야 했다.
건우가 상황을 보니 서연은 지금 민준과 설의 관계를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민준이 설을 만나는 이상 어차피 네 사람은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나중에 설을 보고 놀라거나 사실과 다른 상상을 하기 전에 그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했다.
“서연 씨가 물어봐도 되는 얘기예요. 서연 씨가 나한테 그 얘길 묻지 않는 건 이미 마음속으로 혼자 결론을 냈기 때문이 아닌가요? 난 서연 씨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우 씨는 우리 오빠랑 지금도 심각한 사이예요? 혹시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서로 기분이 나쁠까요?”
서연은 잠시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물었다.
건우를 만나다 보면 언젠가 오빠에게 건우를 소개시켜야 할 텐데, 두 사람이 지금도 어색한 사이라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다.
“전혀 안 심각해요. 그리고 내가 서연 씨한테 얘긴 안 했지만 얼마 전에는 일 때문에 김민준 씨를 만나기도 했어요.”
“진짜요? 건우 씨가 우리 오빠를 만났다고요?”
“사실이에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강설 씨한테 잠깐 호감을 가졌던 적은 있었어도 우리 사이에 그 이상의 일은 없었어요. 그 사람하고는 지금도 편하게 연락하는 사이고요. 그러니 난 서연 씨가 그 일에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건우는 그녀에게, 예전에 설을 많이 사랑했었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서연을 위해서도, 설과 민준을 위해서도 그 사랑은 가벼운 풋사랑 같은 것이어야만 했다.
그는 다 지나간 옛사랑 때문에 서연이 괴로워하거나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그 언니랑 연락하고 지내는 거예요?”
“일 때문에 가끔 연락할 일이 있긴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서연 씨. 내가 그 사람을 일부러 피할 이유가 없어요.”
서연이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자 당황한 건우가 미간을 좁혔다.
“서연 씨.”
“나도 연애를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서연은 서늘해진 건우의 얼굴을 피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우의 옛이야기는 예상대로 즐거운 얘기는 아니었고, 그 얘기를 더 하느니 눈이나 꾹꾹 밟는 게 낫겠다 싶었다.
서연은 눈 쌓인 곳을 향해 움직였지만 건우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서 멀어지자 잡고 있던 손이 팽팽해졌다.
“어?”
갑자기 서연의 몸이 휘청거리며 건우 쪽으로 급하게 쏠렸다. 그가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건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가슴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서연의 귓가에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쿵쿵, 빠르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듣자 우울했던 그녀의 기분이 조금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나 조금 갑갑한 것 같은데.”
“미안해요, 서연 씨.”
건우는 서연을 두 팔로 감싸 그의 품 안에 완전히 가두었다.
조금 전 그는 서연이 그에게서 멀어지자 저도 모르게 손을 잡아당겼다. 건우는 그녀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미안할 정도는 아니고요…….”
“…….”
건우는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었다. 그녀가 복잡한 과거를 모두 알게 된다면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연이 떠날까 봐 두려웠다.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요?”
“……미안해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요.”
건우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연은 체념하고 그의 가슴에 기대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 그 얘긴 꺼내지 않을 테니까 건우 씨도 나한테 더 이상 그 얘기 말하지 말아요. 건우 씨 말처럼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또 우리 오빠한테도 결혼할 사람이 생겼거든요. 난 오빠하고 건우 씨가 만나서 어색한 사이만 아니라면 괜찮아요.”
건우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민준이 결혼 얘기까지 꺼낸 걸 보면 서연은 조만간 설을 만나게 될 터였다.
어떻게 해야 그녀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믿어줘요, 서연 씨.”
“난 다른 사람의 마음 같은 거 믿어주고 그런 거 잘 못하지만…… 그래도 노력해 볼게요.”
서연이 그의 등을 마주 감싸며 조그맣게 말했다.
건우도 그런 얘길 꺼내는 게 마음이 편하진 않았을 텐데, 그는 자신의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 그녀의 마음이 상하는 걸 더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달라지기로 마음먹었다.
서연은 건우의 마음을 믿기로 했다.
**
민준이 상춘재에 발을 디딘 건 저번 영부인과의 만남 이후 이번이 두 번째였다.
대통령은 오늘 그를 집무실이 아니라 상춘재로 불렀고, 그는 아까부터 대통령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자넬 아직까지 복귀시키지 않고 있다니 김 국장도 대단한 사람이구만. 그럴 거면 아예 일을 시키지를 말든가, 급할 때는 이번처럼 불러들일 거면서 말이야. 안 그런가?”
“이번 일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제가 가는 게 맞았습니다. 위에서 절 부르지 않았어도 아마 제가 스스로 갔을 겁니다.”
“자넨 목숨이 여러 개인가? 김 국장도 그렇고 자네도 그렇고, 그걸 당연히 생각하다니 어떤 의미론 대단한 사람이구만. 하긴, 그래도 부모니 김 국장도 속으론 자넬 걱정했겠지. 그런 내색은 통 하지 않는 사람이긴 하지만 말일세.”
대통령은 찻잔을 내려놓은 후 민준을 흘끔 쳐다보았다.
자신과 이렇게 오랫동안 눈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통령인 그와 눈이 마주치면 보통은 시선을 내리기 마련인데 민준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맹랑한 놈이었다.
“자네 건강은 다 완치된 건가?”
대통령이 불쑥 던진 말에 민준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가, 내가 이번 인질 구출 작전에서 다치지 않았다는 걸 대통령도 알고 있을 텐데 왜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라고 생각하는 사이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자네 최근까지 병원에서 진료를 받지 않았나?”
대통령은 민준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그가 귀국 후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는 걸 알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엔 민준이 진료를 받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진료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구만.”
“…….”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대통령은 설의 얘기가 아닌 그의 개인적인 얘기를 묻고 있었고, 민준은 머릿속으로 설을 떠올리며 불편한 상황을 견디어 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설을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던 것이다.
그때 대통령이 화제를 돌렸다.
“내가 어제 뜻밖의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이번 작전에 희생된 요원의 유족들에게 거액의 돈이 익명으로 지급되었다고 하던데 돈의 출처가 자네라고 하더구만. 일개 요원이 그렇게 큰 액수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니, 사람들이 꽤 흥미롭게 생각하지 않겠나?”
“혹시 그게 문제가 됐습니까?”
“문제가 되는 건 아닐세. 다만 그 돈이 애초에 영부인의 계좌에서 나왔다는 것 때문에 내게 보고가 됐겠지. 영부인과 국정원 직원의 돈거래라니, 경우에 따라서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좋은 소재거리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 점도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민준도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기에 대통령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도 이 돈 때문에 영부인이 추후 곤란한 입장에 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그 돈을 수중에 가지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번 사건이 발생했고 그는 동료의 가족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게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알고 보니 자네, 꽤 감상적인 사람이구만.”
“요원들의 죽음을 나라에서 보상해 주지는 않습니다.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자네의 경험에서 나온 생각이었나?”
“저는 운이 좋은 경우였지만 누구나 그렇게 운이 좋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이 힐끗 민준을 쳐다본 뒤 차를 마셨다.
“혹시 나를 원망했나?”
“…….”
“내가 자네를 타국으로 전출시켰던 걸 말하는 걸세.”
“원망한 적 없습니다. 그때 상부의 명령이 없었더라도 제 결정은 같았을 겁니다. 그러니 그 일에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맙군. 물론 내 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대통령은 민준을 타국으로 보냈던 일을 두고 그에게 언성을 높였던 설이 생각나 인상을 찌푸렸다.
정작 당사자는 괜찮다는데 설은 그때 그에게 처음으로 반항을 했고, 그건 지금도 그에게 꽤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조국이 자네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던데, 김 국장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알고 계십니다.”
“김 국장이 뭐라고 하던가.”
“……별말씀 안 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결혼을 하고 싶다는 민준의 말에 그의 아버지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여자 쪽 집안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두 사람을 허락해 주자고 말했지만, 그건 어머니가 설이 하는 일을 잘 모르고 있기에 하신 말씀이었을 터였다.
김 국장은 그에게 좀 더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김 국장이 흔쾌히 찬성할 리가 없겠지, 안 그런가?”
“…….”
민준은 그렇다고도, 또 아니라고도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나와 김 국장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면 자넨 어떡할 텐가.”
“허락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반대한다면?”
“그 사람이 제게 봄이 오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람의 얘기를 들어줄 생각입니다.”
대통령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딴에는 큰맘 먹고 민준을 부른 거였는데, 민준은 그에게 허락을 구하기는커녕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을 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딸의 결혼이라는 중대사이니, 아무리 그의 부인이 민준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가 안 된다고 하면 강행할 수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는 민준이 괘씸했다.
“이럴 때는 허락해 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죄송합니다.”
설이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자네가 만약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 거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난 조국의 엄마와는 다르게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을 허락할 순 없네. 그런데도 내가 자네를 보자고 한 건 자네라면 내 딸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무엇보다 내 딸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네.”
대통령이 민준을 조국의 남자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한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부인은 설과 조국이 운명인 것 같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그런 낭만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통령이 아닌 아버지라는 입장에서, 온전히 믿고 설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선 민준밖에 없었다.
“내가 자네한테 바라는 건 그것 하나뿐일세.”
대통령이 민준에게 바란 건 그것 하나뿐이었는데, 사실은 그걸 빼고도 그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알면 알수록 민준이 꽤 괜찮은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그 속마음까지 내보이진 않았다.
하나뿐인 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녀석에게 그런 기쁨까지 주고 싶진 않았던 것이었다.
“더 바라셔도 됩니다.”
“내가 그것 말고 자네한테 더 바랄 게 있겠는가?”
“염려하시는 것 외에 다른 걱정은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끄응.
그는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제는 김 국장과 두 사람에 관한 얘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단호한 얼굴로 조국의 경호를 거절하던 김 국장을 떠올리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김 국장 역시 그와 같은 이유로 조국을 탐탁지 않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내 김 국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네. 오늘은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대통령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민준은 그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대통령이 고개를 돌려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바쁘지 않으면 나랑 같이 좀 걷겠나?”
“바쁘지 않습니다.”
“잘됐네. 그럼 따라 나오게.”
두 사람은 상춘재 마당을 나와 청와대 본관을 향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여러 명의 수행원들이 천천히 걷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는 조국이 결혼하겠다고 말한 두 번째 남자일세.”
대통령이 슬쩍 민준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민준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 걸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가 좀 더 당황해 주길 바랐지만 아쉬운 대로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조국이 여섯 살 땐가 일곱 살 땐가, 하루는 장인어른을 따라 어딜 다녀오더니 집에 오자마자 다짜고짜 결혼을 해야겠다고 하더군. 어떤 오빠가 놀이터에서 자길 구해줬으니 자긴 그 오빠랑 결혼을 해야 된다고 말이야.”
가만히 대통령의 말을 경청하던 민준이 얼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대통령은 아마 그 이야기 속 남자아이가 민준이란 건 모르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때 그 결혼을 반대했네. 자네 정말, 나한테 고맙지 않은가?”
민준은 고개를 돌려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대통령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더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네, 감사합니다.”
옆에서 웃음을 머금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대통령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