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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의 경호관-84화 (84/94)

84화. 두 남자의 조우2016.10.20.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민준은 설과 함께 그녀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마주 앉은 설을 쳐다보았다.

그런 민준을 설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할 무렵에야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나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

“고백? 무슨 고백이요?”

“내가 사실 예전에 어떤 여자하고 결혼을 할 뻔한 적이 있었거든. 아무래도 당신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결혼을 할 뻔한 적이…… 있었다고요? 당신이요?”

“응.”

내용의 심각성과 달리 민준은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여서 설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녀가 들은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가 설 앞에서 꺼낼 얘기는 아니었다.

그녀는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에게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지금 그 얘기를 왜 하는 거예요?”

“당신이 나한테 솔직하라고 했잖아. 그래서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주는 거야.”

민준의 얼굴은 과거를 고백하는 것인데도 진지하지 않았다.

장난기 어린 그의 표정이 설을 더욱 언짢게 만들었다.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진 그녀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자 민준이 두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다 먹은 거야?”

“다 먹은 거예요.”

그녀 주위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설은 젓가락을 들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민준을 혼자 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하던 일이 남아 있어서요. 마저 먹고 일어나요.”

“설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내가 왜 당신한테 화를 내요?”

“지금 나한테 화내고 있는 것 맞잖아.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 봐, 당신이 결혼을 하겠다고 말한 남자가 내가 처음이었는지 말이야.”

설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민준은 컵을 들어 물을 마시며 능청스런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설은 혹시 몰라 머릿속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거꾸로 돌아가던 시계가 어느 시점에 가 딱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린 그녀의 모습이 설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 외할아버지와 바깥 외출을 다녀온 설은 아빠가 집으로 퇴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나 결혼해야 돼요!’

어린 설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빠에게 달려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하겠다고? 누구랑?’

‘오늘 놀이터에서 만난 오빠랑요!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아빠가 허락해 줘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얼른 허락해요!’

“…….”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리던 설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민준을 쳐다보았다.

그가 웃고 있는 걸 보니 그녀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늘 민준은 아빠와의 만남 자리에서 그녀의 옛날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설은 갑자기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민준은 그녀를 놀려줄 생각이었나 본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기분이 나빴다.

설은 정색을 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없었는데 당신은 아니군요. 하긴, 당신이 나랑 떨어져 있는 동안 다른 여자를 만날 수도 있었겠죠. 그러다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겠고요.”

“어?”

“이해해요. 그리고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민준이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 정도 힌트면 그녀가 당연히 기억을 해내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릴 줄 알았다.

‘젠장, 기억력이 그렇게 좋으면서 정작 기억해야 할 건 왜 기억을 못 하는 거야!’

“난 그럼 바빠서 이만 실례할게요.”

설은 씁쓸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민준을 보니 속이 후련했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뒤돌아선 채로 혀를 쏙 내밀었다. 아주 쌤통이었다.

“당신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민준이 설을 다급하게 붙들어 돌려 세웠다.

그는 그녀와 추억을 얘기하며 웃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버렸다.

설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좋아하기는커녕 민준 자신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괜한 오해를 받게 된 거였다.

“기억이 안 날 리가 있겠어요? 내가 그때 엄마 아빠한테 얼마나 놀림을 받았는데요.”

“그런데 왜 모른 척해? 사람 놀라게.”

“많이 놀랐어요?”

설이 주먹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대고 풋 웃었다.

그녀가 장난친 거라는 걸 알게 된 민준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이 나 때문에 마음 상한 줄 알고 놀랐잖아.”

“누가 할 소린데요? 나도 처음엔 진짠 줄 알았다고요. 그러게 아빠는 괜히 당신한테 그런 말씀을 하셔 가지고는 말이에요.”

“난 좋았어, 나는 당신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알고 싶거든.”

“아빠가 당신한테 또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것 말고 다른 말씀은 안 하셨어요?”

설은 지금까지 민준에게 아빠와 무슨 얘길 했냐고 묻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혹시 그가 아빠한테 기분 상하는 얘기라도 들었을까 봐 일부러 묻지 않은 거였는데, 두 사람이 그녀의 어린 시절 얘기까지 나눈 걸 보니 분위기가 그리 나빴던 것 같진 않았다.

“나머진 비밀이야.”

“으음. 나 기분이 다시 안 좋아지려고 해요.”

설은 새초롬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며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우리 아버지와 만나 말씀을 나누겠다고 하셨어. 중요한 건 정말 이게 다야.”

“어차피 이렇게 사실대로 말할 건데 처음부터 그냥 말해주면 안 돼요?”

그녀가 예상한 대로 속으로 센 숫자는 3을 넘지 않았다.

설이 그에게 곱게 눈을 흘기자 민준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느슨하게 감아 당겼다.

“당신 지금 나 조련하는 거야?”

“난 그런 거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거, 잘 알잖아요.”

“하긴, 강조국이 그렇게 융통성 있는 성격은 못 되지.”

“밥 다 안 먹었죠?”

“응. 당신 때문이야.”

민준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그가 밥을 다 안 먹었는데도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설에게 섭섭함을 표한 것이다.

“그럼 밥 다 먹고 우리 산책해요, 아까 몸이 찌뿌둥하다고 했잖아.”

“할 일 있다고 했잖아.”

“그것보다 당신하고 산책하는 게 더 좋아요. 일은 나중에 할래.”

그녀의 말에 민준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설이 자신의 일에 관심을 갖고 참견하는 게 좋았다.

민준은 이제 여자친구의 말을 상사의 명령처럼 떠받들며 따르는 동료들을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연인에게 적당히 구속당하는 건 꽤 설레는 기쁨이었다.

“어머니께서 당신 보고 싶어 하시는데, 시간 괜찮으면 우리 어머니 뵈러 갈까?”

“음…… 그래요,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아요. 참, 그러고 보니 서연 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 학교는 졸업했죠?”

“서연이? 걔 지금 졸업하고 Pakin 커피사업부에서 일하고 있어.”

“지금 Pakin에서 일하고 있다고요?”

“응.”

“혹시 건우 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글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데,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진 않아.”

물론 그가 건우와 원수지간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동생에 대한 얘기를 나눌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당신은 아직도 건우 씨가 불편해요?”

“솔직하게 대답해야 되는 거지?”

“응.”

“솔직히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은 아니야. 내가 원래 낯을 좀 가리잖아.”

“…….”

설은 말없이 민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에 마음을 주었던 사람을 곁에서 보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지금 당신한테 미안해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알아.”

민준이 설의 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설이 불퉁한 표정을 짓자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웃었다.

“그런데 나 어머니한테 인사드리러 갈 때 어떻게 입고 갈까요?”

“빨간 원피스만 아니면 다 괜찮아. 예쁘긴 한데 그건 나랑 있을 때만 입자.”

“그럼…… 당신 친부모님은 언제 뵈러 가요?”

그녀의 물음에 환하게 웃던 민준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져 입가에 잔잔하게 남았다.

그도 설을 데리고 친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머니 먼저 뵙고 그다음에 가자.”

“다들 날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좋아하실 거야, 이렇게 예쁜 사람 데려왔다고.”

부드럽게 웃는 민준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와 닿았다. 설과 함께 있기에 그는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프지 않았다.

**

늦은 밤, 설의 집에서 나온 민준은 본가를 향해 차를 몰았다. 그는 어머니께 설을 집으로 데려오겠다는 말을 전할 생각이었다.

민준은 설레는 마음에 가슴이 부풀어 올라, 이따금씩 밖으로 큰 숨을 뱉어내야만 했다.

힐끗 쳐다본 거울에 미소 짓는 자신의 얼굴이 보이자 민준이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민준은 누가 그를 관찰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타인에게 들뜬 모습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서서히 자동차 속도를 줄이던 민준은 갑자기 차를 세웠다.

집 앞까지는 아직 거리가 조금 더 남아 있었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민준의 집 앞에 남녀 한 쌍이 서 있었던 것이다.

“…….”

그는 의아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뒷모습이 어쩐지 무척 눈에 익었다.

그는 시동을 끄고 차 안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옆모습을 확인한 민준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나 더 있다 들어가도 돼요. 지금 들어가면 너무 일찍 왔다고 엄마가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고요.”

서연은 구두 앞코로 바닥을 툭툭 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건우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는 서연을 자꾸 집에 들여보내려 하고 있었다.

“늦게 들어가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난 서연 씨 부모님한테 미움 받고 싶지 않아요.”

“요즘 맨날 늦게 들어온다고 뭐라고 하시긴 하지만 괜찮아요. 게다가 오늘은 새벽도 아닌데요, 뭘.”

“그럼 지금까지 매일 그렇게 늦게 들어갔던 거예요?”

“아니, 내가 매일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건우는 잠깐 망설이다 서연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뺨이 추위로 빨갛게 변한 게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이것 봐요, 얼굴이 이렇게 차가운데.”

“나 하나도 안 추워요.”

건우가 근심스럽게 이마를 찡그렸다.

그 역시 서연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건우는 몇 살이라도 나이가 많은 자신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부모님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특히 김 국장에겐 더욱 그래야 했다. 그는 건우의 과거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추워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들어가요.”

“치. 내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데 정말 너무해!”

“대신 내일 아침 일찍 서연 씨 데리러 올 거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요.”

“내일 아침에 날 데리러 온다고요?”

“그래요. 같이 출근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는 건우가 왜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하는지 그 이유를 모를 터였다. 그는 가능하다면 서연이 그 이유를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조금 있다가 내가 전화할까요?”

“서연 씨 피곤하지 않겠어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그리고 나 원래 늦게 자서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이만 들어가요, 서연 씨.”

건우가 서연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몸을 반대로 돌렸다. 서연은 아쉬움이 남는 듯 몇 번 뒤를 돌아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손을 흔들고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건우는 그녀가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후 2층 창문에 불이 켜지는 걸 확인한 그가 아쉬운 표정으로 뒤돌아섰을 때였다.

“직장 상사가 이렇게 직원의 집까지 직접 바래다주기도 합니까? 친절이 너무 과합니다.”

민준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주차해 둔 자동차 옆에 서서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민준을 보고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침착한 표정을 되찾았다. 건우가 서연을 만나기로 한 이상 민준과의 관계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직장 상사로서 서연 씨를 바래다준 게 아닙니다.”

“직장 상사가 아니라면 내 동생이 백건우 씨와 왜 같이 있습니까?”

“민준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압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안다면 앞으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겠군요.”

민준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건우와 동생 서연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기영과 강설, 그리고 백 회장과의 악연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그는 건우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건우가 오랫동안 설을 사랑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서연을 향한 그의 마음을 믿을 수 없었고, 설을 사랑하면서도 도망쳤던 그가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민준은 무엇보다도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서연이 받을 충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준 씨,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서연 씨를 만나는 게 아닙니다.”

“백건우 씨의 마음이 어떤지는 관심 없습니다. 하지만 서연인 나한테 하나밖에 없는 동생입니다. 난 동생 마음이 다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민준 씨, 나는.”

“서연이가 백건우 씨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습니까?”

“…….”

민준은 건우의 말허리를 자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라 대답을 하려던 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민준은 건우가 서연에게 할 수 없는 얘기들에 대해 묻고 있었다.

“백건우 씨도 충분히 고민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고민에 대한 결론이 유감스럽습니다.”

“난 진심입니다, 민준 씨.”

“그 진심이 내가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보단 크지 않을 것 같군요.”

민준이 건우를 스쳐 지나가 대문 앞에 섰다. 건우와 서연 중 상처를 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었고, 서연이 받게 될 상처는 그의 진심과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민준은 건우를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 마음의 크기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이 잠깐 호감으로 만난다고 해도 호기심 뒤에 남을 후유증은 상당할 터였다.

“서연 씨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민준이 초인종에 막 손을 올리는 순간 건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초인종을 누르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 건우를 쳐다보았다.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돌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서연 씨가 나를 밀어내지 않는 한 서연 씨 옆에 있을 생각입니다.”

“백건우 씨, 나한테 당신이 서연일 만나는 걸 허락하거나 안 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 의견을 묻는 거라면, 난 당신이 서연이에게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준은 자신이 한 말이 건우에게 얼마나 잔인한 말일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는 건우가 서연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2년 전 일을 말하는 거라면…… 서연 씨는 이미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요? 어떤 우리를 말하는 겁니까?”

“민준 씨과 나, 그리고 강조국 씨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서연이가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까?”

“……아직 그 사실까진 알지 못합니다.”

민준은 침묵 속에 초인종을 눌렀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옛말에 틀린 게 하나 없었다. 백건우의 일이야 그가 알 바 아니었지만 상대가 서연이라는 게 문제였다.

민준은 서연의 얘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연이와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나도 두 사람 문제에 끼어들고 싶진 않지만 이건 서연이 문제이기도 하니 제가 참견을 좀 하겠습니다.”

“민준 씨, 나도 서연 씨를 많이 걱정합니다.”

무거운 철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민준은 안으로 발을 내딛기 전에 마지막으로 건우를 돌아보았다.

“백건우 씨는 이제부터 서연이가 아니라 본인 걱정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아버지께서 아시게 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내 입으로 말씀드리진 않아도 두 사람이 계속 만나는 한 언제고 아시게 될 텐데 말입니다.”

“국장님은 당연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건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그가 서연을 만나기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김 국장이었다. 그는 건우의 모든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건우가 설을 마음에 뒀었고 안기영과는 치정 문제로 얽혔다는 걸 알고 있는 김 국장이 그를 서연의 짝으로 인정하긴 힘들 터였다.

거기에, 설의 납치 사건에 관여한 건우의 부친 때문에 민준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도 당연히 잊지 않고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띠리리리-

건우의 코트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흘러나왔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그가 흘끔 민준을 쳐다보더니 전화를 받으며 뒤돌아서 자신의 자동차로 향했다.

“안 잤어요? 지금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에요.”

자동차 운전석에 올라 문을 닫은 건우는 핸즈프리 통화로 전환하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지금 민준에게 들킨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부딪쳐야 할 일이라면 빨리 부딪치는 게 나았다. 막상 민준을 만나자 건우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

건우의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민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놈의 기억력.”

세상에 여자는 강설밖에 없는 것처럼 설을 바라보던 건우의 눈빛과 기영에게 들었던 이야기까지,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민준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쉽게 상처받고, 작은 흔들림에도 달팽이처럼 껍질 안으로 숨어버리는 서연이가 이런 험난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야옹이는 뭐라고 하려나.”

그에겐 지금 솔로몬이 아니라 ‘설로몬’이 절실히 필요했다.

http://novel.naver.com/webnovel/list.nhn?novelId=505101&page=1 [carbo]영애의 경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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