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85화 (85/94)

85화. 어느 오래된 식당에서2016.10.25.

“내일 아가씨를 데리고 오겠다고?”

“네, 그 사람한테 물어봐야겠지만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일 저녁에 같이 오겠습니다.”

“어떡하지? 엄마 너무 떨려, 민준아. 나 내일 어떻게 입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냥 오전에 백화점을 다녀올까? 어떻게 하지?”

민준은 연신 손등을 상기된 뺨에 갖다 대며 열기를 식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한쪽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어머니도 설과 마찬가지로 어떤 옷을 입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뭘 먹을까도 아니고 뭘 입을지에 대해 왜 이렇게까지 고민을 하나 싶었지만, 그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꽤 괜찮았다.

민준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난 후 오늘은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반색을 하며 기뻐했고 민준의 방에 새 이불을 가져다 놓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방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본 민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서연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똑똑 노크를 했지만 서연은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핸드폰을 귀에 바짝 대고 침대에 엎드린 채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김서연?”

민준이 부르자 깜짝 놀란 서연이 몸을 움찔거렸다.

“조금 있다 다시 할게요.”

그녀는 서둘러 통화를 끝낸 후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팔짱을 끼고 새침한 얼굴로 민준을 흘겨보았다.

“노크 좀 하고 들어오지?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예의는 좀 지켜줬음 좋겠어.”

“여러 번 노크했는데 뭐 하느라고 노크 소리도 못 들어?”

“보다시피 통화하고 있었잖아.”

“너 연애해?”

이크!

서연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연애하는 게 비밀은 아니었지만, 이번의 경우는 좀 달랐다. 서연은 민준에게 그녀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세히 밝힐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애한다는 사실을 꽁꽁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한 서연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연애해. 근데 그건 왜 물어?”

“내가 아는 사람이랑?”

“어…….”

민준은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중요한 문제일 때에는 더욱 그러했다. 서연은 오빠의 그런 직설적인 성격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빠가 혹시 집 앞에서 나랑 건우 씨가 같이 있는 걸 봤을까?’

서연은 말끝을 흐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집에 들어오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들어왔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오빠가…… 아는 사람 누구?”

서연은 애매하게 되물었다.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었다. 민준이 맞추면 솔직하게 말하고 못 맞추면 잘못 봤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백건우.”

하지만 그는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당황한 서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슬쩍 민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도 서연은 민준이 화를 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쩐지 희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오빠도 그 사람 알고 있지? 워낙 오래전 일이라 나도 까먹고 있었어.”

“이번엔 얼마나 만날 건데. 3개월? 4개월?”

“새삼스럽게 오빠가 왜 그걸 궁금해 하는 거야? 내가 그 사람을 3개월 만나든 아니면 더 오래 만나든 상관없잖아.”

“너랑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헤어지고 나면 나중에 불편해질 수 있어,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만날 거면 그냥 다른 사람을 만나.”

“가볍게 만나는 게 아니라면 괜찮아?”

서연이 주먹을 꽉 쥐고 긴장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민준이 어쩌면 건우와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민준의 시선이 꽉 쥔 서연의 주먹에 잠시 머물렀다.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친 민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빠가 내일 결혼할 사람 집에 데리고 올 거야.”

“오빠랑 결혼할 사람? 오빠가 만난다는 그 언니 말이야?”

“그래. 그러니 내일 별일 없으면 일찍 들어와.”

“정말이지? 나 그 언니 너무 만나보고 싶었어! 내일 내가 좀 늦더라도 절대 가면 안 돼, 알았지?”

서연은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민준은 그녀에게 건우를 만나도 상관없다는 말을 해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 잘라 안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그래, 얼른 자. 내일 출근해야지.”

민준은 착잡한 마음으로 서연의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두 사람이 만나는 것도, 또 그렇게 만나다 헤어지는 것도 그에게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의 방으로 돌아온 민준은 침대에 걸터앉아 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 본가에 있어요?

늦은 밤이었는데도 설의 목소리는 맑고 청량했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지끈거리던 두통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응.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려고.”

-가족들이 좋아하겠어요. 당신 거기에서 자는 거 오랜만이지 않아요?

“어머니는 좋아하시는데 서연인 연애하느라고 바빠서 날 본척만척해. 아버지는 아직 안 들어오셨고.”

-서연 씨가 연애해요?

“그렇다네.”

-그런데 당신 목소리는 왜 그래요?

민준의 떨떠름한 말투에 설이 의문을 표했다. 그녀가 느끼기에 민준은 뭔가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당신이 그렇게 말하다니 너무 의외인데요? 난 당신은 그런 말 안 하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난 어떤 사람인데?”

-적어도 여동생이 만나는 남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꺼내진 않을 사람이죠.

“보통은 그런데 이번엔 경우가 달라.”

민준은 피식 웃더니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웠다.

-설마, 서연 씨가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라도 만나고 있는 거예요?

“안 되는 건 아닌데 안 만났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야. 도대체 뭐가 좋다고, 쯧.”

-나쁜 사람만 아니라면 그냥 예쁘게 봐줘요, 서연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서연이 상대가 백건우라고 해도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서연 씨가 건우 씨를 왜 만나요?

“나도 이게 농담이었으면 좋겠어.”

-……그게 정말이에요?

“응.”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놀라운 소식인 게 분명했다.

민준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설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장님께서 알게 되면 걱정하시겠네요.

“아버지? 걱정이 아니라 주먹부터 나갈 수도 있어.”

-건우 씨가 힘든 선택을 했네요.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지금 내 앞에서 백건우 걱정해 주는 거야?”

민준은 설이 많이 고민하지 않고 편하게 얘기해 준 게 고마웠지만, 부러 발끈하는 척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걸 건우 씨라고 생각 안 했을 리가 없잖아요.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시작했다는 건 그걸 다 감수하겠다는 걸 테고요. 혹시 당신이 걱정하는 것 중에 나와 백 회장의 문제도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당신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건우 씨한테 그 정도 마음의 짐은 덜어줄 수 있잖아요.

“사랑한다고 말해 줘.”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내가 백건우를 덜 미워할 수 있을 것 같아.”

-난 그런 이유로 말해주고 싶지 않으니까, 그럴 거면 그냥 건우 씨를 미워해요.

퉁명스런 그녀의 목소리에 민준이 전화기 너머로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설과 얘기를 나눌수록 고민하는 것들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가벼워진 민준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내일 바빠?”

-아니요? 왜요?

“내일 바쁘지 않으면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자. 어머니껜 말씀드렸어.”

-나 내일 인사드리러 가는 거예요? 어떡하지? 나 좀 긴장돼요, 내가 어머니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해요?

“김민준을 저한테 주시면 제가 잘 데리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하아. 결혼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네요. 오늘 밤에 잘 자긴 틀렸어요.

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민준의 어머니를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하루가 지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조국.”

-응.

“나 아까 서연이가 백건우를 만난다고 했을 때 사실 제일 먼저 당신 생각이 났어. 당신이 두 사람 때문에 불편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정작 당신이 그렇게 말을 해주니 내가 더 이상 뭐라고 할 수가 없네.”

-그럼 두 사람 일은 이제 두 사람에게 맡겨 놓는 거예요?

“적어도 아버지 옆에서 부채질하지는 않을 생각이야. 그전에 두 사람이 헤어져 주면 고맙고.”

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그녀가 버릇처럼 입에 주먹을 동그랗게 말아 대고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나저나 당신은 내일 언제 올 거예요?

“언제 데리러 갈까?”

-이왕이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응.

민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코트를 몸에 걸쳤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핸드폰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설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지금 뭐해요?

“30분 뒤.”

-응?

“2층 베란다에서 만나.”

-에?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간 민준이 걸음을 서둘렀다. 찬 공기를 맞으며 달려 나가는 그의 두 눈이 기쁘게 반짝거렸다.

**

늦은 저녁, 대통령이 김 국장을 만나자고 한 곳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은 아직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은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평소에도 손님이 잘 들지 않는 곳이었다.

식당 문 앞에는 영업이 끝났다는 팻말이 걸려 있었고, 식당 주변으로는 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서 있었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졌기에 가뜩이나 외진 거리에는 평소보다도 더 오가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두 사람은 둥그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대통령은 두 개의 잔에 각각 술을 채워 넣은 뒤 건배하듯 잔을 들어 올렸다. 김 국장이 그를 따라 잔을 들며 입술을 떼었다.

“이런 곳도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오랜만에 옵니다. 대학 다닐 때 아내랑 자주 왔던 곳인데, 내가 여기에서 아내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청혼을 하셨단 말씀입니까?”

“왜요, 너무 초라합니까? 지금은 이렇게 낡았지만, 그때만 해도 꽤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신기하다는 뜻이었습니다.”

김 국장이 곤란한 얼굴을 하자 대통령은 낮게 웃음을 흘리며 잔을 입에 댔다.

그도 이곳에 온 건 몇 년 만이었다.

그래도 그전까지는 한두 번씩 시간을 내어 오곤 했는데, 요 근래에는 그럴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가 한번 움직이면 같이 움직여야 할 직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는 대통령인 그가 문득 생각이 난다는 이유로 불쑥 들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운이 좋아 사시에 붙긴 했지만 넉넉하지 않은 집 장남이라 근사한 곳에서 청혼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장인어른께선 날 참 아껴주셨지요.”

“저를 이곳으로 불러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혹시 민준이 때문입니까?”

“맞아요, 김민준 요원과 내 딸 조국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겠다고 하더군요, 김 국장도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네,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김 국장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김 국장은 말없이 잔을 비워냈다.

민준이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건 그로선 무척 기쁜 일이었다. 김 국장은 민준이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길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랐기 때문이다.

영애가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몰랐더라면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허락했을 터였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대통령이 민준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유 때문에, 그는 그러라고 쉽게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민준이의 뜻이 그렇다고 해도 부모로서 생각이 많았습니다. 제가 나중에 민준이 친부를 만났을 때 떳떳하려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게다가 보통 사람도 아니고 상대가 영애이다 보니 생각이 더 길어졌을 뿐입니다.”

“김 국장은 혈육도 아닌 동료 아들을 데리고 와 그만큼 키웠는데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 정도면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준 게 아닙니까? 난 진심으로 김 국장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친구한테 빚이 많아 그렇습니다.”

“빚이요?”

김 국장은 빠르게 술잔을 비웠다.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통령과 사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춰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앞으로 영애가 또다시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 민준은 어김없이 제일 먼저 달려갈 것이고 어쩌면 저번처럼 그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간이 또 올 수도 있었다.

민준은 사랑을 지키는 게 중요하겠지만 김 국장에겐 민준의 목숨이 더 중요했다.

“제가 그 친구 대신 이만큼 살았습니다. 그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지금 아마 이곳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겁니다.”

“20여 년 전 사고를 말하는 거라면 그건 불행한 사고였습니다. 어찌 되었든 김민준 요원은 김 국장 덕에 좋은 가정에서 잘 자라지 않았습니까? 이번 작전에 사망한 유족에게 상당한 금액을 위로금으로 건넸던데, 그건 그가 그 정도로 부족함 없이 잘 자랐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사망한 요원에게 다섯 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래서 더 그랬을 겁니다.”

“그랬습니까? 그런데 그게 왜요.”

“민준이가 혼자 된 게 꼭 그만한 나이였으니까요.”

민준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 한 건지 김 국장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마 남은 아이가 자신처럼 자랄까 봐 걱정이 되어 그랬을 거였다.

그래서 김 국장은 그에게 왜 그렇게 했냐고 묻지 않았고, 그걸로 민준의 마음이 편해졌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김민준 요원도 그렇고 김 국장도 그렇고 옛날 일은 이제 다 털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너무 과거에 얽매여 살면 지켜보는 사람도 괴롭습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가족이 잊혀지겠습니까?”

김 국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취기가 올라오는지 그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김 국장과 내가 가족이 되면 근심을 나눠 가질 수 있습니다. 걱정할 자식이 한 명 더 생기긴 하지만 반대로 둘이서 근심을 나눌 수도 있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각하께선 영애의 안전 때문에 민준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게 아니십니까? 결국, 민준이만큼 영애를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셨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아까부터 김 국장의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이 술기운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는 취한 건 아니었지만, 마음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아니라고 말은 못 하겠지만 꼭 그렇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친구가 뻣뻣한 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또 그래서 눈이 가기도 하니까요. 권력 앞에 무조건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게 뭐, 나쁘지는 않습니다.”

“영애의 고집에 결국 손을 드신 겁니까?”

대통령이 못마땅한 얼굴로 빈 잔을 김 국장 앞으로 슬쩍 내밀자, 그가 웃으며 잔에 술을 채웠다.

“아마 딸아이는 결국 내가 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난 그 애 고집을 지금까지 한 번도 꺾어보질 못했으니까요. 내가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서운하게 듣지는 말아요, 내가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나한테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서 그런 겁니다.”

“하나밖에 없는 따님을 품에서 내보내고 나면 섭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자식인데 왜 안 서운하겠습니까, 하지만 김 국장도 알다시피 조국은 어차피 지금도 내 품 안에 없는 자식 아닙니까? 그럴 바에는 혼자 있는 것보다 둘이 같이 있는 게 낫겠지요, 안심도 되고 말입니다. 김 국장도 딸이 있으니 내 심정을 잘 알겠지요.”

그는 대화를 하면서 이따금씩 김 국장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이 정도까지 얘기하는데도 김 국장이 속 시원히 대답하지 않자 대통령은 결국 언짢은 기분을 내비쳤다.

“김 국장은 어떻게 하고 싶은 겁니까? 이제 그만 속 시원히 얘기해 보세요.”

“아마 민준이도 이미 제가 그 녀석 뜻을 따라줄 거라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아주 몹쓸 녀석입니다. 한 번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니 아비한테 두 번 애원하고 싶진 않다는 거지요.”

두 사람은 술이 얼큰하게 취해갔다. 기분이 좋아진 대통령이 와이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걷어 올린 후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런데 김 국장 아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대기 상태로 놔둘 생각입니까?”

“인사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마음 쓰지 마십시오.”

“마음을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백수 사위를 볼 순 없어서 그럽니다.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 사위인데 직업은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대통령이 버럭 언성을 높이자 저만치 서 있던 수행원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올 기세였다.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논의해 보겠습니다.”

“김 국장은 너무 뻣뻣한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알고 보니 아들이 김 국장을 쏙 빼닮았습니다!”

“조금 전에 그래서 눈이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김 국장이 피식 웃자 대통령도 슬쩍 미소를 지었다.

“김 국장이 나와 사돈이 되면 싫든 좋든 여러 가지 구설수에 휘말릴 수밖에 없을 텐데, 그건 미리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것 역시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와 관련된 일들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역시 김 국장은 재미없는 사람입니다.”

두 사람의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밤이 깊어갔다. 수행원들은 대통령의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다가 곧바로 이어지는 웃음소리에 긴장을 풀어야 했다.

늦은 밤, 두 사람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낡은 식당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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