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예비 시부모님을 만나다2016.10.27.
“아버지, 지금 여기서 뭐 하세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민준은 조금 전 설의 집 2층 베란다에서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정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고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망부석처럼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며 앉아 있던 김 국장이 시선을 들어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민준을 발견하자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렸다.
“지 엄마한테 자고 간다고 해놓고 도망간 아들 기다린다.”
“도망가긴요, 잠깐 산책 갔다 오는 길이에요.”
“넌 산책을 평창동까지 갔다 오냐?”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였구나.”
“약주 드셨어요?”
민준은 아버지가 일어날 기미가 없자 그의 옆에 앉았다. 약주를 많이 드셨는지 아버지에게선 진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어. 먹었지. 종로에 사는 양반이랑 둘이서.”
“아버지 친구분 중에 종로에 사시는 분이 계셨어요?”
“원래는 거기 안 살았는데 이사 간 진 좀 됐어.”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으셨어요? 원래 이 정도까진 잘 안 드시잖아요.”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 아버지가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 그러했는데 오늘 취하신 걸 보니 무언가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나 보다, 라고 속으로 짐작하는 민준이었다.
“종로 사는 양반이 자기 딸 결혼한다고 나한테 술을 잔뜩 먹이더라고. 참나, 자기 딸 결혼한다는데 왜 나한테 술을 먹이는 건지.”
“혼사를 앞두고 기분이 좋으셨나 보네요.”
김 국장이 고개를 돌려 민준을 흘끔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민준의 입가에 큼지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툴툴거리는 체했지만 민준이 웃고 있는 게 좋았다.
“그렇게 좋냐?”
“뭐가요.”
“영애 말이다.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입이 귀에 걸리겠네.”
“귀에 걸리기는요.”
민준의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대통령께서 나한테 상견례 날짜를 잡자고 하더구나. 네 엄마한테는 아직 자세히 얘기 못 했는데 이젠 얘기를 해줘야겠지.”
“어머니께서 놀라시겠네요.”
“그 정도 가지고 놀라기까지 할 게 뭐가 있어? 너랑 서연일 키우면서 그보다 놀랄 일이 얼마나 더 많았는데. 하긴, 두 녀석 다 어지간했어야지. 한 녀석은 말 안 해서 속 썩여, 다른 녀석은 말이 많아 속 썩여.”
김 국장의 한숨 같은 한탄에 민준이 피식 웃었다. 분명 말 안 해 속 썩인 녀석은 자신일 테고 말이 많아 속 썩인 녀석은 서연일 터였다.
“시간이 참 빨리 흘렀다, 네가 벌써 결혼을 한다니 말이야. 네가 빨리 가정을 꾸리고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막상 그렇게 된다고 하니 실감이 나질 않아. 서연이까지 결혼시키고 나면 이제 네 엄마와 나, 이렇게 둘만 남겠구나.”
“제가 결혼을 하겠다는 거지 어머니, 아버지를 떠나겠다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하고 달라질 것도 없어요, 아버지.”
“그러게, 무슨 마음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재권이도 생각나고 제수씨도 생각나고…… 너한테 잘 못 해준 것만 생각나면서 자꾸 후회가 돼.”
김 국장은 왠지 허탈한 기분에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삶의 큰 목표 하나가 사라진 것처럼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그는 민준이가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는 게 바람이었는데, 막상 그 바람이 이루어지려고 하자 오히려 망설여졌다.
“아버지도 참, 가족끼리 잘해주고 못 해주는 게 어딨습니까? 저한테 굳이 더 잘해주고 싶으시면 내일이라도 절 복직시켜 주시든가요.”
민준이 그를 슬쩍 바라보며 농담을 던졌다. 아버지의 기분이 많이 다운되어 있는 것 같아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김 국장의 얼굴은 한층 더 쓸쓸해졌다.
“……서연이가 태어나던 날 재권이가 떠났어.”
“…….”
“그날, 내 친구 재권이가 떠났지.”
“……아버지.”
“나 때문이었다. 그날 내가 갔어야 했는데 재권이가 내 대신 나갔어. 나중에 징계 먹을 줄 알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활짝 웃으면서 갔어, 그 미련한 놈이. 자기를 꼭 닮은 네가 이렇게 자라는 모습도 못 보고.”
김 국장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가 그날의 일을 민준에게 자세히 털어놓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민준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차마 김 국장 자신의 입으로는 꺼낼 수 없던 이야기였다.
민준이 크게 놀라지 않는 걸로 보아 그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난 네가 다녀오겠다는 말을 할 때마다 재권이가 생각나 무섭다. 만약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김 국장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 마신 술이 전부 눈물이 되었는지, 그의 눈가가 뜨끈해졌다.
그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술기운을 빌어 민준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무슨 일 없을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가 다니는 점집에서 제가 아들딸 낳고 아주 잘 산다고 했다면서요. 얼마 전에도 다녀오셨다고 하던데, 매일 똑같은 얘길 들으시면서 거긴 왜 그렇게 가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민준은 화제를 돌리며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일수록 쉽게 넘어가야 다음에 비슷한 문제에 또 부딪쳐도 쉽게 여기며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이제 옛날 일을 잊고 편해지길 바랐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네가 출장을 간다고만 하면 그길로 그 집을 찾아가는 게 아니겠냐. 그곳에 다녀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니 나도 뭐라고 안 하는 것뿐이야.”
김 국장이 양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사실 그의 부인이 문턱이 닳도록 그 점집을 드나들기 시작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서연이가 태어나기 전, 그 점쟁이가 부인에게 앞으로 태어날 딸이 아빠의 목숨을 구한다는 말을 했다.
그때는 둘이서 그 얘기를 하며 웃었지만, 두 사람은 서연이 태어난 이후 다시는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당연히 민준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저랑 서연이가 앞으로 잘 먹고 잘 산다는 얘기를 듣고 오셨대요?”
“그거 말고 네가 곧 결혼을 할 거라는 얘기를 했다던데, 일이 갑자기 이렇게 흘러가는 걸 보면 그 점쟁이가 영 돌팔이는 아닌가 보다. 그나저나 네 결혼 얘기까지 맞혔으니 네 엄마가 앞으로 얼마나 더 그 점쟁이를 신봉하겠냐?”
김 국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부인이 그런 데에 다니는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겉으로 싫은 내색은 하지 않고 부인의 말을 얌전히 경청해 주곤 했다.
부인에게도 불안한 마음을 의지할 곳이 한 군데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듣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결혼 적령기의 자식이 있는 부모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말 아닙니까? 나름 전문직인데 그 사람 너무 성의가 없네요.”
“그거 말고도 또 재미있는 말을 했던데, 뭐라더라…… 아, 너한테 자식이 태어나면 그 아이가 우리나라에 다시없을 큰 태양이 될 거라고 했다던데?”
“그런 립서비스까지 하는 걸 보니 어머니가 그 집 VIP 고객인 게 확실하네요. 자기가 몇십 년 뒤의 일을 책임질 일은 없을 테니 일단 말을 던지고 보는 거죠.”
“네 엄마가 그 말까지 듣고 나니 기분이 너무 좋아 복채를 두둑하게 주고 왔단다.”
“어머니도 참.”
민준이 피식 웃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만 들어가자는 무언의 행동이었는데, 김 국장은 아직 그에게 할 말이 남아 있는 듯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추우세요?”
“이제 들어가야지. 그 전에, 민준아.”
“네, 아버지.”
“앞으로 널 보는 눈이 많아질 거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민준이 대통령의 사위가 되면 겪게 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민준에게 미리 당부를 해두고 싶었다.
좋은 일보다 좋지 않은 일들이 더 많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편한 건 참아도 부당한 건 참지 않습니다, 아버지.”
“그건 당연한 것 아니냐?”
듣고 싶은 말을 들은 김 국장이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안 자고 있는 거야? 웬일로 오늘 좀 일찍 들어왔다 했더니, 쯧.”
민준이 김 국장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2층 서연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불 켜고 잠들었나 봐요. 제가 가볼게요, 아버지.”
“아니다, 내가 가보마. 요즘 저 녀석 좀 이상해, 너한테 무슨 말 안 해?”
“제가 한 번 얘기해 볼게요.”
“그래, 서연이가 네 말은 잘 들으니까.”
김 국장이 민준의 어깨를 두드린 후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연이를 생각하자 자동으로 백건우가 떠오른 민준은 짧게 한숨을 내쉰 후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
다음 날 저녁, 건우는 퇴근을 한 서연을 직접 운전해 집에 데려다줬다.
서연은 오늘 오빠가 결혼할 언니를 데리고 온다고 했다며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녀의 가슴이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다.
“아마 이미 와 있을 거예요, 오빠가 저녁 일찍 온다고 했거든요. 내가 가서 보고 어땠는지 이따 얘기해 줄게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서연 씨하고는 별로 상관없지 않아요? 그 사람은 그냥 민준 씨가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잖아요.”
“왜 상관이 없어요? 내가 그동안 언니 있는 애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데요. 난 그 언니랑 하고 싶은 게 아주 많다고요. 내가 그 언니랑 친해지고 나면 건우 씨도 소개시켜 줄게요, 알았죠?”
건우는 착잡한 표정이었지만 기대감에 잔뜩 부푼 서연은 그의 심란한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따가 전화할 거죠?”
“당연하죠!”
“난 내일 아침에도 서연 씨를 데리러 올 거예요.”
“알아요.”
서연이 배시시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든 후 대문 앞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건우는 관자놀이에 손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
집 안으로 들어간 서연은 현관에 낯선 구두가 놓여 있는 걸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주방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갔다. 주방 안쪽에서는 오빠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서연은 엄마한테 씩씩하게 인사를 한 뒤 민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던 서연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왔어?”
“……아, 저는.”
오빠 옆에 앉아 있는 설을 본 순간 그녀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연은 당황한 나머지 잠시 허둥거리다 두 사람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미리 얘기해 주지 않은 민준이 원망스러웠다.
“……저는 일단 씻어야 할 것 같아요. 얘기 나누고 계세요.”
서연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가 민망한 얼굴로 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오빠가 결혼할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제대로 인사도 안 하고 들어간 서연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그래도 남편한테서 믿기 힘든 얘기를 들은지라 눈앞의 아가씨가 불편한데, 서연이 그녀의 입장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 애가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그러니 이해해요.”
“아니에요.”
그녀는 아까부터 설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게 영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녀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눈앞의 아가씨는 대통령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었다.
민준이 만나고 있는 아가씨를 만나면 물어볼 말이 많았는데, 그녀가 영애라는 사실을 안 순간 궁금한 게 모두 사라졌다.
“서연 씨한테 안 가 봐도 돼요?”
“이따 보면 되지, 괜찮아.”
설이 곤란한 얼굴로 민준에게 물었다.
서연은 그녀를 보고 당황했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데도 민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설의 앞 접시 위에 올렸다.
“민준이…… 아까 네가 예전에 셋이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고 했었지?”
“네, 어머니. 그런데 너무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서연이가 좀 당황했나 봐요.”
민준이 다른 음식 하나를 또 집어 설의 앞 접시 위로 옮겼다.
“괜찮아요, 내가 먹을 수 있어요.”
“우리 어머니 요리 솜씨 좋으셔, 당신 온다고 힘들게 준비하셨을 텐데 종류별로 맛은 보고 가야지.”
설의 얼굴이 빨개졌다. 민준은 그녀가 음식을 골고루 먹을 때까지 도무지 행동을 멈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평소와 같았지만, 문제는 지금 그녀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걸 민준이 조금도 자각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람 원래 잘 먹는데 오늘은 어머니 앞이라 긴장했나 봐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개만 더 먹자.”
민준은 접시 위에 그가 가져다 놓은 음식을 젓가락으로 세더니 설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어머니와 설은 둘 다 너무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당장 친해지기보다 조금만 더 편해지길 바랐다.
“그래요, 입에 잘 맞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장한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내가 조국 씨 뭘 좋아하는지 몰라 그냥 민준이가 잘 먹는 걸로 만들었어요.”
“아니에요, 맛있어요. 전 솔직히 음식을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을 줄은 몰랐어요.”
“민준이가 어렸을 때 안 먹는 게 많아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쓸데없이 가짓수만 많아졌어요. 워낙 오랫동안 습관이 들어서 그런지 잘 바뀌지가 않네요. 민준이가 집에 자주 오는 애가 아니라 올 때 잘 먹이고 싶어서 그런 거지, 늘 이렇게 만들진 않아요.”
설은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며 그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에게 자기는 맛있는 거 좋아한다고 그렇게 강조를 하더니 정말 그럴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곱게 자랐다고 말했잖아.”
민준이 설을 쳐다보며 픽 웃었다.
그는 설과 눈이 마주치자 식탁 아래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설의 손을 잡은 민준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이 차갑네, 어디가 안 좋아?”
“왜 이래요…….”
그의 행동에 당황한 설이 손을 가만히 빼내며 마주 앉은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민준이, 어머니가 눈앞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장한 나머지 설의 손발이 차가운 건 사실이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동에 등에선 이제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조국 씨,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설은 근심스런 얼굴을 한 어머니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설이 심호흡을 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펴자 민준이 식탁 아래로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민준의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설을 바라보는 민준의 눈빛에서 그녀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민준은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고 그 모습이 그녀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조국 씨,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조국 씨처럼 긴장되고 떨려요. 민준이한테 연애한다는 얘기 한 번 못 들었는데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래도 조국 씨 덕분에 민준이가 많이 웃어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조국 씨, 우리 민준이 정말 잘 부탁할게요.”
그녀는 진심 어린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민준이 지금처럼만 행복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바랄 게 없었다.
그녀의 당부에 설은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하고 있어?”
그때, 김 국장이 때마침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부인 옆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두 사람을 흘끔 쳐다보았다. 설을 다른 곳이 아닌 집 안에서 보게 된 기분이 꽤 묘했다.
“이제 와요?”
“애들 결혼 문제로 얘기 좀 나누고 오느라고 늦었어.”
김 국장과 대통령은 청와대 홍보실을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할 내용에 대해 상의를 했다.
결혼식은 영애의 신분상 청와대 영빈관에서 치르기로 했고, 민준에 대해서는 평범한 공무원이라는 정도로만 간단히 보도 자료를 내기로 했다.
“가급적 빨리 상견례를 했으면 하시던데 당신은 언제가 좋겠어? 금주 내로 날짜를 정해서 알려 달라고 하시더군.”
“꼭 그렇게 급하게 서둘러야 해요? 민준이 결혼시키려면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게 많을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 촉박할까 봐 걱정이에요.”
“말이 나온 김에 서두르자고 하시더군. 조국 양이 살고 있는 집에 누가 자꾸 보안 시스템에 손을 대고 담을 넘어 다녀서 말이지, 날도 추운데 죄 없는 직원들 괜히 고생시키지 말자고 하시더군.”
“누가요?”
“누가.”
김 국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민준을 째려보았다. 그제야 김 국장의 말뜻을 알아챈 부인이 그를 쳐다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 안 넘었습니다.”
민준이 정색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참다못해 까르르 소리 내어 웃으며 남편의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녀석아, 너 때문에 경호관들이 혹시 자기들 테스트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한다잖아!”
민준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 김 국장은 얼굴이 빨개진 설을 보며 픽 웃었다.
“당신, 옛날에 내 방 창문에 자꾸 돌 던진다고 우리 아버지한테 혼났던 거 기억 안 나요?”
“내가 언제?”
부인이 그 앞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눈을 흘겼다.
김 국장은 시치미를 뚝 떼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꾸 유리창 깬다고 우리 아버지가 당신한테 유리 값 물어내라고 했잖아요. 번 돈 유리 값으로 다 쓰지 말라고 결혼 허락해 주셨고요.”
“당신도 참, 지금 그 얘기를 여기서 왜 하는 거야?”
“적어도 민준이는 기물 파손은 안 했잖아요, 그래도 당신보단 낫다는 얘기예요.”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마침내 민준과 설이 마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설은 자신이 긴장할까 봐 테이블 밑에서 여전히 손을 잡아주고 있는 민준이 고마웠다.
그녀는 오늘 그의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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