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영애의 경호관-87화 (87/94)

87화. 사랑을 믿어요2016.11.01.

“근데 서연이는 아직 안 온 거야?”

“씻고 나온다고 하더니 감감무소식이네요, 내가 한 번 가볼게요.”

“제가 갔다 올게요. 어머니, 앉아 계세요.”

민준이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설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서연이 자신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게 아마 건우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민준은 설과 눈이 마주치자 걱정 말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올 때까지 다섯 개 먹고 있어.”

그는 설의 근심을 덜어주려는 듯 그녀에게 농담을 던지고 주방을 나갔다.

**

민준은 서연의 방문에 노크를 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벽 쪽을 향해 누워 있었고, 그가 들어왔는데도 뒤를 돌아보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안 자는 거 다 알아.”

“오빤 왜 나한테 얘기 안 해줬어?”

“내가 얘기했으면 백건우와 헤어지기라도 했을 거란 얘기야?”

“내가 왜 건우 씨와 헤어져?”

“그럼 넌 지금 왜 그러고 누워 있는 건데.”

민준의 말에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겨우 이런 걸로 흔들릴 거면서 백건우와 연애를 하겠다는 거였어?”

“흔들리는 거 아니야! 난 그냥 건우 씨가 만약 이걸 알게 되면.”

“알아.”

“…….”

“백건우는 이미 알고 있다고.”

서연이 멍한 얼굴로 민준을 바라보았다.

건우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고? 아니야, 알고 있었다면 건우 씨가 나한테 얘기 안 했을 리가 없어.”

“네가 이럴까 봐 얘길 못 한 거겠지. 머릿속으로 맘대로 상상하면서 괴로워할까 봐.”

“오빠도 저 언니 때문에 나한테 건우 씨랑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거잖아.”

“맞아. 하지만 저 사람 때문만은 아니야, 나한테는 네 행복도 중요하니까. 그래서 오빠는 네가 이런 걸로 괴로울 거면 백건우와는 지금 그만두는 게 맞다고 생각해.”

민준이 생각하기에 이건 두 사람이 앞으로 부딪치게 될 많은 문제 중 가장 작은 문제였다.

앞으로 더 힘들어지게 될 게 분명한데 서연의 마음이 이렇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 지속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건우 씨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옛날에 저 언니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았잖아.”

“저 사람이 날 사랑하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하지만 언니가 건우 씨를 보면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잖아! 그리고…… 건우 씨도.”

서연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오빠는 내일 죽을 수도 있어, 또 어쩌면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난 그 만약의 가능성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포기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아. 그리고 설사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건 내 선택에 대한 결과이기 때문에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야.”

“……건우 씨가 날 얼마만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민준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전 그녀를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말을 덧붙였다.

“네가 백건우와 어떻게 되든 오빠가 저 사람과 결혼을 하는 건 기정사실이야. 그러니, 앞으로 평생 봐야 할 저 사람을 네가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잘 생각해 봐.”

“…….”

민준은 다른 때라면 서연의 어리광을 받아줬겠지만, 이번엔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줄 수 없었다.

서연이 짠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나왔다.

그가 식탁으로 돌아왔을 때 설은 그의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설의 접시에 두 개의 음식만 남아 있는 걸 확인한 민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서연이는?”

“식사 끝나고 따로 보기로 했어요.”

민준은 어머니의 물음에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하며 손에 젓가락을 쥐었다.

“민준이 너는 나가기 전에 나 좀 잠깐 보고 나가.”

“네, 아버지.”

“그런데 조국 양은 나랑 초면도 아닌데 말이 너무 없네. 왜 예전에 나랑 둘이서 식사한 적도 있잖아요, 그 중국집 말입니다.”

“당신이 나도 모르게 언제 그런 적이 있었어요?”

“아…… 예전에 민준이 때문에 잠깐 만날 일이 좀 있었어.”

김 국장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그의 동의를 구하듯 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부인은 민준이 예전에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녀에게 새삼스럽게 그 이야기를 해줄 이유는 없었다.

“민준 씨 일 때문에 제가 국장님께 연락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날 같이 식사를 했어요.”

“그런 적이 있었어요?”

“네, 하지만 오래전 일이에요.”

설이 김 국장의 말을 받아 그녀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분위기로 봐서는 민준이 크게 다쳐 입원했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저랑 같이 가요, 어머니. 제가 아는 집인데 괜찮은 곳이에요.”

“그래도 돼? 하지만 넌 바쁘잖니.”

“지금은 그렇게 바쁘지 않아요.”

“너는 조국 씨랑 가, 네 엄마는 내가 데리고 갈 테니까.”

왠지 형편없는 남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 김 국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당신이 웬일이에요? 매일 바쁜 당신이 그럴 시간을 다 내고 말이에요.”

“오늘 민준이를 보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그땐 당신과 결혼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지. 그리고 또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도 했고. 그런데 바쁘게 살다 보면 종종 그때 내가 했던 다짐을 잊게 돼. 그러면 당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잠시 그러다 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하지.”

김 국장은 민준과 설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살다 보면 두 사람의 마음이 지금과 달라질 수도 있어. 하지만 그땐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 무엇을 했고 또 어떤 마음으로 이 사람 옆에 있겠다고 했는지를 생각해. 이건 아버지가 아니라 인생을 먼저 산 선배로서 하는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김 국장의 말이 끝나자 민준과 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말처럼 살다 보면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시들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때마다 힘들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서로의 곁에 있고 싶었던 그 마음을 기억하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

민준과 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 순간 서연이 방문을 열고 거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조금 어색했지만, 용기를 내 설을 바라보았다.

“……벌써 가요? 나 아직 언니랑 아무 얘기도 못 했는데요.”

“피곤해 보였는데 이제 좀 괜찮아요, 서연 씨?”

“네, 괜찮아요.”

서연은 가려고 일어선 두 사람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 말대로 앞으로 평생 언니를 봐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언니뿐 아니라 오빠하고도 사이가 멀어질 수 있었다.

그녀는 오빠와 언니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상상을 하자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얼른 세수를 하고 방문을 열고 나온 거였다.

“우리 나가서 차 마실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응, 나도 갈래!”

서연은 민준에게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잠시 후 세 사람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와인 바에 앉아 있었다.

서연이 배가 고프다고 해서 민준은 와인과 함께 파스타와 샐러드를 주문했지만 서연은 음식에 손을 거의 대지 않은 채 와인 잔만 계속해서 비우고 있었다.

“차 마시러 나왔다가 술 마시고 들어가는구나.”

“나한테는 차든 술이든 둘 다 똑같은 물이야.”

“물론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민준은 와인병을 향해 슬금슬금 손을 뻗는 설의 손목을 탁 붙잡았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은 이제 그만 마시자.”

“나 아직 한 잔밖에 안 마셨어요.”

“이건 맥주가 아니야, 더 마시면 취해.”

“당신이 있으니까 괜찮잖아요.”

“그래서 안 괜찮아.”

그가 담 넘어 다니는 것도 시시각각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는 상황이었다.

민준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설을 취하게 했다는 오해까지 받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아쉬운 표정으로 내밀었던 손을 도로 거두자 민준이 피식 웃었다.

“그럼 오빠랑 언니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거예요? 그런데 언니 이름은 왜 바꾼 거예요? 언니가 회사를 그만둔 거랑 이름 바꾼 거랑 상관이 있는 거예요?”

술이 들어가자 잠시 막혀 있던 서연의 말문이 트였다.

그녀는 설에게 묻고 싶었던 걸 하나하나 속에서 꺼내 묻기 시작했다.

“헤어졌던 게 아니라 민준 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강조국이란 이름은 원래 내 이름인데 중간에 사정이 있어서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가 원래대로 되돌린 것뿐이고요. 그리고 회사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그만둔 거였어요. 그 일이 내 적성에 맞는 일은 아니었거든요.”

“그럼 언니가 건우…… 아니, 부사장님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게 아니었어요?”

“내가 왜 건우 씨 때문에 회사를 그만둬요?”

“건우 씨요?”

설은 의아한 얼굴을 하는 서연을 보며 아차 싶었다.

그녀는 자신이 백건우를 자연스럽게 건우 씨라고 부르는 걸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터였다.

설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민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가 속으로 쯧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둘이 회사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래.”

그러나 민준은 쓸데없이 솔직했다. 그는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는 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걸 서연이한테 굳이 숨길 필요가 있어?”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렇지?”

민준은 이 상황을 가볍게 넘어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해요. 언니는 왜 건우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건우 씨는 되게 멋있고 다정한 사람인데요.”

“김서연.”

민준이 인상을 구기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차든 술이든 마찬가지라고 큰소리를 땅땅 치더니, 알코올이 마침내 서연의 뇌세포를 잠재운 게 틀림없었다.

오빠가 결혼할 사람한테 왜 다른 남자를 좋아하지 않냐고 묻다니, 서연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민준을 쳐다보지 않았다.

“서연 씬 그게 궁금해요?”

“네, 알고 싶어요.”

“서연 씨 말대로 건우 씨는 멋있고 또 다정한 사람이에요.”

“강조국 씨?”

민준이 이번엔 설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 역시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설은 마주 앉은 서연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건우 씨한테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서연 씨처럼 밝은 사람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린 서로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 비슷한 점 때문에 정작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나는 만약 내가 건우 씨와 만났다고 해도 결국은 헤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우리 오빠는요?”

“민준 씨요?”

“그래, 나 말이야.”

설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민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는 중이었다.

“난 이 사람을 만나면 춥지 않아서 좋아요. 같이 있으면 덜 춥고 덜 외로워서…… 난 민준 씨를 만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이 사람과 함께 있는 미래를 생각했어요.”

‘호오.’

민준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은 서연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녀가 마신 와인 덕분인 게 틀림없었다.

그는 재빨리 팔짱을 풀고 설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설이 웬일이냐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민준이 괜찮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날 만나고 나서부터는 언제가 가장 좋았어?”

그리고 설이 와인 잔을 입가에 가져가자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돌아왔을 때요.”

“……!”

“난 당신이 돌아왔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요.”

속으로 엉큼한 기대를 하고 있던 민준의 얼굴에서 장난스러운 기색이 사라졌다.

그는 애틋한 눈빛으로 설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입을 맞추고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서연이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 이제 그만 갈까?”

“벌써 간다고? 술이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는데?”

민준이 자리를 정리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서연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설이 고개만 끄덕이면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였다.

따르르르-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마시던 건 다 마시고 가야지, 무슨 소리야?”

서연은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을 집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

씩씩거리며 핸드폰 화면을 쳐다본 서연이 말을 멈췄다. 그녀는 건우에게 전화하겠다고 했던 말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연은 말없이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잠시 끊어졌던 벨소리가 잠시 후 다시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발신자가 누구인지 아예 확인도 하지 않았다.

“안 받아?”

“나중에 내가 걸면 돼.”

“주변 시끄러우니까 얼른 받아.”

서연은 낭패라는 얼굴로 몸을 옆으로 틀면서 전화를 받았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까 봐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핸드폰을 귀에 딱 붙였다.

-서연 씨.

“네.”

-서연 씨가 전화를 안 해서 내가 걸었어요. 주변이 시끄러운데 혹시 지금 밖에 있어요?

“네, 오빠랑 같이 있어요.”

-……혹시 지금 술 마시는 거예요?

“그냥 마시는 거예요. 별일이 없어도 요즘엔 이렇게 종종 마시고 있어요.”

-민준 씨랑 둘이서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요, 그냥요.”

서연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그녀는 건우에게 설이 함께 있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지금 혹시 거기에 조국 씨도 같이 있어요?

무언가를 짐작한 건우가 그녀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건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조국 씨라는 말에 놀란 서연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건 왜 물어요?”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요, 거기 어디예요?

“안 돼요! 오지 마요!”

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그녀는 이대로 건우와 설을 한자리에서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는 게 싫어요?

“그건 아닌데…….”

-……알았어요,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요.

통화를 끝낸 서연이 멍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라앉은 건우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남아 있었다.

건우 씨한테 그냥 오라고 할걸 그랬나, 그녀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백건우?”

“…….”

민준이 물었지만 서연은 대답 없이 잔을 들어 와인을 마셨다. 자꾸 마셔도 갈증이 나서 그녀는 빈 잔에 다시 와인을 채웠다.

그때 민준의 핸드폰으로 문자메시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는 문자를 확인한 후 서연을 힐끔 쳐다보았다.

서연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와인 잔을 손에 쥔 채 멍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왜요?”

민준과 눈이 마주친 설이 무슨 일이냐는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가 술기운에 눈을 깜빡거리는 게 귀여워, 민준은 메시지에 답을 보내려다 잠시 행동을 멈췄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사랑해요.”

“얼마만큼?”

“당신만큼.”

민준이 흘끔 서연을 쳐다보더니 재빨리 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긴 했지만 무슨 짓이냐고 그를 혼내지는 않았다.

“와인 더 마셔도 돼.”

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타닥타닥 두드려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낸 후 그대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

“사랑한다고 말해 줘.”

“사랑해요.”

“얼마만큼?”

“당신만큼.”

민준은 아까부터 설과 함께 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설은 질문이 반복되는 줄도 모르고 아까부터 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민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광경을 계속 지켜봐야 하는 서연에겐 참 고역이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그녀의 강철 같은 주량이 죄라면 죄였다.

“오빠, 그만 집에 가자니까?”

서연이 다시 한 번 발을 구르며 민준을 재촉했다.

그는 집에 가자는 그녀의 말을 아까부터 계속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올 때 다 됐으니까.”

“누가 또 와?”

“초대하진 않았는데 굳이 이 자리에 참석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누가?”

민준이 시선을 조금 위로 들어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건우가 숨을 몰아쉬며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사람.”

그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고개를 돌린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건우가 점점 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연은 혹시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끔뻑거렸지만 여전히 건우가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가 술에 취한 게 아니었다.

“응? 건우 씨다.”

“그래, 건우 씨야. 정답.”

민준이 기특하다는 듯 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조금 전 건우가 위치를 알려달라는 말에 민준은 그에게 식당 위치를 알려주었다.

기다리는 게 지루할 것 같았는데 설과 말놀이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서연 씨.”

테이블 가까이 온 건우가 의자를 당겨 서연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건우 씨가 여긴 웬 일이에요?”

“두 사람 앞에서 이렇게 쓸쓸하게 있을까 봐서요. 서연 씨 걱정돼서 왔어요.”

“우리…… 나갈까요?”

서연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건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왔는데 왜 벌써 나가요, 내가 서연 씨 보려고 얼마나 달려왔는데요.”

건우의 말에 그녀는 볼에 바람을 넣으며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진 쓸쓸했는데 건우가 오자 왠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서연은 그가 민준과 설 앞에서 그녀를 걱정하고 애정을 표현해 주는 게 좋았다.

“건우 씨가 서연 씨 손 잡았어요.”

두 사람을 자세히 관찰하던 설이 민준에게 이르듯 다 들리는 귓속말을 했다.

“둘이 연애한대.”

“진짜요?”

“근데 둘이 헤어질지도 모르니 우린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자.”

“두 사람 지금 뭐하는 겁니까?”

“아까부터 오빠가 저렇게 계속 날 놀렸어요. 나한테는 술 많이 먹으라고 하고 언니한테는 조금만 먹으라고 하고요.”

서연이 건우에게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그녀의 편인 건우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나쁜 오빠네요, 내가 혼내줄까요?”

“어떻게요?”

“서연 씨가 원하는 대로요.”

건우는 서연 앞에 놓여 있는 잔을 자신 앞으로 끌어오더니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어떻게 해요? 건우 씨가 당신 혼내준대요.”

“괜찮아, 내가 힘이 더 세.”

또다시 다 들리는 귓속말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건우가 웃었다.

민준과 눈이 마주친 건우는 고맙다는 뜻으로 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 오빠 힘 되게 세요. 치.”

“괜찮아요, 대신 내가 더 부자예요.”

민준도 건우도 사실은 아직 어색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건우 씨가 부자라고 자랑했어요.”

“자기가 술값 내겠다는 소리야.”

두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그 사람의 얘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감사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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